좋은 사람들이 만들어준 좋은 기회, 내가 갖게 되었다.
어느 날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파트장님께서나를 부르셨다.
L군, 네가 담당하는 아이템 있지?
그거 제작하는 Vendor가 프랑스에 있어.
(어? 이거 약간 느낌이..!!!)“네, 맞습니다.”
곧 발주 나가야하는데 처음 계약한 업체야.
신경써야되니 검사팀 K부장님하고,
조달팀 E 대리랑 같이 한 번 다녀와.
설계팀도 요구 사항있는지 확인해보고.
다른 부서 대리님과 까마득한 부장님을 모시고.
생애 첫 업무 출장, 그것도 프랑스*라니!
사실, 프랑스와 스위스의 경계 도시로서,
상업시설과 회사들이 많은 스위스의 도시다!
우리 부서에서 추천을 주셨는지, 조달 부서에서 추천을 하셨는지 알수 없지만 그저 기뻤다. 우리 부서 선배님이 가실 수도 있는데, 내가 가게 됐다는 사실- 부담감보다 기대감이 앞섰다. 어린 아이처럼. 한번도 가본 적 없던 유럽 대륙에 회사 덕에 발을 딛는구나하는!
멀리볼 것 없이, 타 계열사 구매 담당이시던 우리 아빠도 대리 과장시절 독일, 일본, 미국을 엄청나게 오가셨던 기억이. 아빠는 정말 출장을 많이 다녀오셨다. 지금도 비행기를 타는 걸 싫어하시는데, 아마 출장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닐까 싶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하루하루가 얼마나 불안했을까 하는 공감이 든다. 출국하는 비행기에서부터 쟁취해야하는 아젠다를 두고 얼마나 고민했으며, 현장에서는 계속 업체와 씨름하며 스트레스, 숙소에서는 이대로 빈 손으로 돌아갈 걱정에 잠이나 왔겠는가. 귀국하면서는 출장 보고서를 준비하고, 만에 하나 원하던 만큼의 소득이 없으면 출근하자마자 상사에게 깨질 생각이 들고, 잘하면 또 다음엔 더 잘해야하는 그런 부담감.
늦은 밤 사무실 근처 식당에서, 다 식은 치킨과 피자를 먹으며 서류 작성을 했다는 이야기들이 결코 웃긴 이야기가 아님을 그때야 이해했다.
인사팀 교육 담당일때 삼성 인력개발원 출신 교수님을 모시고 강의를 했는데, 당시 임원 시절 삼성 임원들에게 요구되는 매 해 성과는 “직전 해의 200% 달성”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괴물들은 그것을 달성하기에 임원으로써 재계약을 갱신해나간 것이다. 200%!
아들이 장성하여, 아빠처럼 삼성의 명함을 들고 해외 출장을 나간다는 생각을 하니 뭔가 뭉클하기까지 했다.
어릴때 귀국하는 아빠를 모시러 공항에 엄마랑 나가면, 아빠는 정장을 입고 특유의 007가방(당시 유행하던 서류가방)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우리 가족에게 성큼 성큼 걸어왔다. 피 말리는 시간이 지나고(심지어 당시엔 늘 상사와 함께 했다!), 재회하는 가족을 만났을 때의 안도감이 어땠을까.
곧 나는 생애 첫 맞이하는 출장 준비를 시작했다. 해당 아이템 관련 최신 이슈 등 챙겨야 할 자료들을 정리했고, 다행히 설계팀 담당 대리님은 거긴 잘하고 있어서 특별한 코멘트가 없다고 하셨다.
이제 이번 출장의 메인인 조달 파트.
조달 파트장이신 차장님*께 해당 기계 관련 서류와 현황 정리를 한 자료를 들고 찾아갔다.
차장님은 아직은 인사팀 출신으로서 아직은 현업 부서 업무가 어려운 내게, 늘 후한 평가와 격려를 해주셔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분이셨다.
특유의 위트가 있으셔서,
주간 회의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이런 말씀도 하셨다.
L군, 혹시 G사(음악 스트리밍) 광고봤어?
난 그 남자 주인공 볼때마다 L군 생각나대.
하면서 허허 웃으시는데,
긴장감 넘치는 회의에서 털털하고 잔잔하게 후배에게 웃음을 주는 저 여유를 닮자고 결심했다.
여러모로 호감있고, 내게도 잘 대해주신 분.
간단한 출장 관련 브리핑을 해주시고는, 차장님이 허리를 쭉 피시며 나에게 웃으며 한 마디 하셨다.
“L군아, 가서 어차피 부장님 대리님 잘 모시면 된다. 너는 아직 사원이고 히스토리가 부족하니,
두 분이 하신 내용 기록 잘하고. 어찌됐든 너의 카운터파트너인 그 Vendor 담당자 잘 얼굴 도장 찍어둬.”
“네, 알겠습니다. 걱정마세요.”
그리고 혹시나 너 여력이 되면
두분 여유 시간 좀 잘 챙겨줘.
나는 아무것도 모를거고
‘L군이 출장가서 쉴새 없이 일하고
두 선배 챙기느라 고생했다’ 라고
얘기할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가는 내내,
해당 도시의 관광 스팟과 쉴만한 공간을 검색했다.
‘혹시나’ 짬이 날 경우를 대비해야하니까.
글 쓰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회사 아저씨의 모습’을 팍팍 보여주시던 차장님의 웃음이 떠오른다. 나도 요즘 그렇게 후배들에게 웃어주고 있던가?
그리고 같이 출장을 가게될 대리님과도 간단히 회의를 진행했다. 그저 의욕 하나만 앞서던 나를 보며, “내가 우주선을 만들 기세”라고 좋게 평가해주신 그런 대리님.
회의를 모두 마치고, 막내답게 대리님과 부장님 두분을 포함한 우리의 항공권과 숙소 예약을 모두 마쳤다.
회사 건물 내에 위탁 여행사가 있어,
이런 부분은 쉽고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출장 당일, 삼성역 도심공항터미널에서 스위스행 티켓을 들고 리무진 버스를 탔다.
구두 한켤레, 셔츠 두벌, 타이와 자켓을 챙겨서.
(그리고 이 이후 지금까지, 내 모든 출장에는 타이와 구두, 자켓이 늘 함께 한다. 나만의 출장공식이 이때 만들어졌다.)
고맙습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시다니요.
언제가 될지 모를 다음 출장에서 더 잘하기 위해,
단단히 마음을 먹고 비행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