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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되고 알았다. 외로움에 대한 준비는 불필요했단걸

그러니 이제 편안하게 삶을 받아들이자. 소년에서 어른이 됐듯

by 알렉스키드
"형, 여기 있을줄 알았어."


봄 햇살을 맞으며 무릎 위에 얹어둔 채 읽고 있던 책 위로,

어스름한 그림자가 기분 좋게 드리웠다.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드니 부서지는 햇살 사이로

나보다 환하게 웃는 젊은 사내가, 내게서 두 걸음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대학동기 Y군.

서글서글한 미소를 띄면서, 언제나 나를 동경하는 "서울" 형으로 대하는 착한 녀석.

본인을 매일 촌 사람이라고 낮추면서, 나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좋은 의미를 부여하고,

동경의 존재를 바라보듯이 바라봐주던 아끼던 동생-


공강 시간에 햇살이 잘 드는 캠퍼스 어느 테라스 벤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있는 나를 찾아와서는

오늘도 뭔가 'L형은 확실히 도시 사람이야'라는 표정으로 밝게 인사한다.


그가(그리고 다른 학우들이) 바라보는, 동경하는 내 모습은 이런 것들이었다.

담배도 안피고, 술도 안 마시고, 당구도 치지 않는

냄새날까 봐 마늘이나 파를 안 먹는

SNS에는 늘 감성적인 글과 종교적인 문구들이 한 가득한

공강 시간에 친구들과 우르르 당구장이나 PC방에 가기보다

혼자 커피를 마시거나 도서관에서 '어려워보이는 책'을 골라서 고집스레 읽는

옷 마저도 다른 친구들처럼 유행을 따르지 않고 적당히 핏한 치노 팬츠에 셔츠, 가디건을 어깨에 두르는 '패션 주관이 뚜렷한' 사람.

그런 신기한, 서울에서나 볼 법한 사람'으로 나를 바라봐주는 사람들의 태도가 나는 좋았다.


혼자 마시는 커피를 신기해하던 Y군. "형, 정말 멋져! 되게 어른스러운 느낌이야. 다른 형들하고는 달라" 나는 그말이 싫지 않았다. 왠만해선 들을 수 없는 굉장한 칭찬 같았달까.

그들의 관심을 굉장히 좋아하면서도, 내심 두려움이 있었다. 결국 완전한 내 모습이 아닌, 어느정도 감춰지고 정제된, 거리감이 있어 신비한 내 ‘신기루’같은 모습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하는 두려움.


나이가 더 들수록 사람들은 더욱 솔직함을 감추고 서로에게 허용이 되는 만큼만 본인을 노출하고 연출한다는데, 이제부터 미리 외로움을 대비해야겠다는 불안감이 조금씩 스며 들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들이 나에 대해 느끼는 흥미로운 부분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혼자 있다'는 생경한 모습일 거라고.


사실 난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좋지,

떨어져서 혼자 있는 것에 크게 흥미를 느끼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책은 좋아하고, 말이 많아지면 언쟁이 생기기도하는 것이 싫어서,

가끔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그 '잠깐의 혼자 있는' 내 모습에 대해

그렇게 칭찬을 해주니(칭찬인지 그냥 호기심인지), 은근히 그들의 기대에 맞춰

혼자 있는 내 모습을 자주 연출했던 것 같다.


그래도 괜찮았다.

언제나 핸드폰을 열면, 중고교 동창들, 대학교 동기와 동아리 친구들,

교회 대학부 선후배들과 다양한 사회 생활을 통해 만난 친구들이 많았으니까.

오늘 이 그룹에서 거리를 두면, 다른 저 그룹들과 내일 거리를 가까이 하면 되니까.

이렇게 외로움을 선택해도 계속 나를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고개를 들면 솨-하고 흔들리는 봄날의 벚꽃을 혼자 바라보고만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때는 몰랐다. '같이 즐길 줄'아는 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30대의 어느 더운 여름 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12시 조금 넘은 시간,

쏟아지는 스트레스로 인해 잔뜩 미간을 찌뿌린 채 커피를 사러 회사 건물을 나가고 있었다.


힘들고 답답하다는 그런 메시지를 썼다가도 '남들 눈치'로 지우고,

길가에 핀 민들레꽃이 이쁘다는 '현재의 내 심경과 아예 상관없는 글'을 쓰고 말았는데

갑자기 울리는 페이스북의 댓글 하나,

L군, 점심 시간에 혼자 저 멀리 걸어가는 거 봤다.
저 녀석 또 사색하러 가네 하고 놔뒀다. 힘내라.


30대가 되니, 정말 20대 때 염려하던 것처럼 사람들은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을만큼만 다가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더이상 나도 누군가에게서 인위적으로 떨어져 시간을 보내는 불필요한 외로움을 선택할 필요와 노력은 없었다. 다만 이제는 '사람이 불편해진' 내가 있었다.

30대 회사원이 된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털어놓기엔 내 이야기는 길고, 감정이 가득 담겨 있어 불편할 것이다.
누구도 내 깊은 대화를 들어줄, '한가한' 사람은 사무실에 없을 것이라고.
두려웠다. 회사안에서 누군가와 말을 하고 있는 그 순간이.
어차피 내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것 같은데, 나만 혼자 노력하는 것 같아서.


사람들은 이제 20대의 그 모습들이 없었다.

혼자 있는 나와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아마 그들도 '혼자 있는 어른의 공간'을 지켜주려고 했던 것 같다.

이상하다. 나는 대학생 때의 나와 같은데.
여전히 혼자 햇살을 받으며 길을 걷고, 음악도 듣고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있는데.
나는 사실 이렇게 있어도 당신들이 다가와주면 좋겠는데. 20대때처럼.


어느샌가 30대 회사원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 나이 30대. 조금 외롭긴하지만, 그래도 나는 꾿꾿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누군가와 나눌 시간과 여유를 혼자 가득 채우는 시간을 늘려갔다.

금요일에 퇴근하고 혼자 조용한 와인바에서 셔츠에 타이를 메고 와인을 마시기도 하고,

20대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위해 혼자 해운대로 훌쩍 떠나 호텔을 잡았다.

이제는 알던 사람들과의 교류가 줄고, 직장인 모임에 나가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었다.

나의 책을 읽고 사진을 찍고 SNS에 감성적인 글을 올리는 것에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을 보였고,

몰려 놀기 좋아하는'보통의 30대 남자들과 조금 다른' 모습은 여전한 '흥미' 포인트가 되었다.

제법 여사친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절취선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었다. 누군가 해준말처럼 ‘결혼하면 끝날 인연이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리고 늘 생각했다.

지금의 외로움은, 곧 다가올 40대의 고독과는 비교가 안될 것이라고. 20대, 30대가 조금 남들과 달라 아쉬웠지만 그래도 난 외로움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40대 이후부터는 거뜬할거라고.

햇살은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외로움을 찾고 즐기고 있었고, 여전히 사람들의 중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모습으로, 적당히 외로웠다.


시간이 흘러, 이제 나는 마흔이 되었다.

삼십대 중반에 결혼을 하며 가장 먼저 한 선택은 ‘퇴근 후와 주말에 만나는 관계’를 대폭 정리한 것이다. 내 가족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었기에, 견뎌낼 수 있는 아쉬움이었다. 그리고 아이가 둘 태어났고, 다행히 관계 정리라는 선택은 가정적인 환경 조성에 큰 보탬이 되어줬다.

사실상 외로움을 택한 수많은 선택 중 이만큼 큰 가치를 가져다 준 결정은 없었던 것 같다. 쌓아온 관계와 만남이 흘러내리는 아쉬움도 컸지만, 그것을 양보하며 얻는 가족과의 유대감은 무엇보다 컸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린 기분, 외로움에 대한.


40대의 난, 외로울 겨를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 부지런히 옷입고 달려가 버스와 전철을 탄다.

한참 글을 쓰거나, 어제 못 다 읽은 책을 읽거나, 빠른 퇴근을 위해 미리 메일을 읽어두거나

그렇게 달려가 사무실에 도착해서 일하고, 분초를 아껴 미션들을 클리어한 뒤

퇴근해서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책 읽고, 재운 뒤 아내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잠에 든다.

요즘은 너무 피곤해서 둘다 잠들기가 부지기수다

피곤한 몸을 뉘이고는 또 부지런히 일어나 하루종일 회사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하루를 산다.


친구들과는 아주 가끔 분기/반기 단위로 한번씩 모이고,

이제 다들 애 아빠라서 일찍 모여 9시 전에 파하는 '바람직한' 무언의 약속이 생겼다.

새벽까지 술마시고 다음 차는 내가 낸다던 30대의
용기있는 친구들이 가정에 쩔쩔매는게 어찌나 귀여운지!


어느날 퇴근하며 만원 전철의 창문 너머로 한강을 바라보다가, 터널로 진입하자 환한 햇살이 사라지고 창문에 파리한 내 얼굴이 비친다.

갑자기 떠오르는 하나의 생각.


내가 30대에 바라보던
40대들도 이런 감정이었을까?


10년 전의 내가 바라보던 40대의 그들은 그랬다.


회사에 올인하고, 매일 야근이나 회식을 하고, 절대 충성하는 그런 삶. 후배에게도 같은 삶을 강요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친구들을 만나도 너무 오랜만이라 딱히 할 말이 없는 일 중심의 삶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20년 전 그들이 학창 시절 부르던 노래뿐인 새로운 채움이 없는 삶

갑자기 찾아온 회사의 배신, 퇴직을 당하고 그간 쌓아온 인연들의 연락처가 무의미해지는

그렇게 돌아간 집에선, 오래간 서먹해온 가족들과 온전히 하루를 보내야하는 불편함

의례 '주말에 뭐했냐'는 물음을 던지고, 후배들은 그들에게 정형화된 대답을 건내고, 그들의 주말을 묻고 답을 받는 월요일 점심시간 같은 삶

어린 시절 ‘글로벌 매너’ 시간에 배운, 손에 힘을 들이지 않고 악수를 주고받는 그 느낌.
인간미는 없는 그런 적당한 삶의 모습들. 사막의 모래처럼 드라이하기 그지 없는.


젊어보이려고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나는 "요즘의 MZ세대" 성향 중 '개인중심' 성향에 너무 잘 맞는 사람이다. 몇 번 적응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늦게나마 시대를 잘 탔다


이대로

내가 두려워하던 고독한 40대의 세계가 펼쳐진다고 생각했지만, "한가지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을 채우는 절반, ‘신세대’들이 삶에 들어왔고


외로움을 준비한 삶을 살아온 내게,
그들의 트렌드가 제법 잘 맞았다!


"MZ"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그들의 '적당한 거리유지'가 나는 굉장히 편하다.

"선배님 저 따로 밥먹을게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예전 나의 선배들처럼 "그래도 혼자 먹지마. 같이 먹어."라는 말을 해주지 않아야

호히려 좋아하는 그런 후배들(사실 그 편이 나도 부담없다!)


요즘도 여전히, 혼자 점심을 먹을 기회가 생긴다.

혼자 먹는 건 여전히 좋아하고, 특히 이젠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한다는

'진짜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생산성'이 필요한 시간이라서, 더욱 즐겁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얻은 기분!


혼자 스벅에서 커피를 마시며 잡지를 읽던 30대 초반의 그런 즐거움. 이제는 없다.

다만 홀로 뭔가를 한다는 즐거움이 컸던 30대라면,

이제는 내가 스스로 필요해서 뭔가를 가득 채우는 혼자만의 시간이 귀함을 느낀다.


40대의 외로움은 내가 두려워하던 외로움이 아니라,

진짜 나를 채우는 오롯이 소중한, 나 혼자 누리는 1시간이 된다는 점에서

외로움은 외로움이 아닌, 나를 위한 선물이 되어준다.


쾡한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내 얼굴은, 웃음기와 생기가 느껴졌다! 사회 초년생 시절 차장님들에게서 발견했던 그런 파리함이 아닌, 혼자만의 시간을 기대하는 그런 어른.


40대의 내겐 이제,

마음껏 외로울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더이상 친구들이 밤에 불러서 뛰어나갈 일도 없고

회사에서도 내게 함께 먹자고 내 선택권을 침해할 사람도 없다.

그때보다 스타일도 좋아졌고, 좋은 와인과 위스키의 맛도 제법 깨우쳤다.

결혼 반지도 있어 '외롭게 덩그러니 남겨진 사람이 아니다'는 무언의 발언도 할 수 있다.

20대 때처럼 인위적으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충분히 가족 외의 모두에게서 외롭다.

부동산, 재테크, 음악, 글쓰기 등 "든든한 나만의 취향과 색깔"이 있다.

혼자 뭘해도 불쌍해보이지 않게 '적당히' 옷도 잘 챙겨입고, 당당하다!


20대 때부터, 언젠가 다가올 그 외로움을 대비했다.

마음으로도, 행동으로도, 그리고 습관으로도.


그리고 이제 40대가 되어 내가 겪는 삶에 '외로움'이 얼마나 있던가?


공허함은 있을지언정 외로움은 없다.

공허한 이유는, 그렇게 오랫동안 미리 준비해둔 외로움에 대한 대책들이

결국은 남들에게 녹아들 준비가 안된 나 자신의 미숙함에 대한 대비책이었다는 공허함.

혼자만의 생산성을 키울 기회를, 너무 '남들의 눈'에 줘버렸다는 아쉬움.


오히려 40대가 되어 편안히 나 자신을 받아들이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아재 개그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져서, 저 먼 인턴 직원과도 전에 없이 친해졌다.

어차피 나도 20대때부터 어른들의 유머에 웃는 습관을 들였는데, 독설보단 개그가 낫다는 생각도 들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불필요하게 그들의 진로나 연애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더 웃긴거 아닌가? 차라리 1분이라도 한번 크게 웃고 넘어가자.


젊은 친구들 저녁에 귀한 시간 뺐어가며 법인카드로 생색내며 술 마시는 것보다,
내 돈 몇 천원으로 커피빈 커피라도 사주면서 딱 5분 share하는게 훨씬 근사해보인다.

후배가 묻지도 않은 서류의 옳고 그름을 논하기 보다, "선배님. 제가 집을 알아보는데요."라고 나만이 줄 수 있는 질문을 물을 때,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회사 선배를 넘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선배'가 된 그런 기분?
그래서 내가 더욱 공부하고,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서 가득 채우는 것이다.


40대의 외로움은 축복이다.
하루에 외로울 수 있는 시간을 가득 누리고,
누구도 줄 수 없는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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