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로 떠나는 가족여행 #6
블루 라군 Blue Lagoon은 레이캬비크에서 남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케플라비크 국제공항 인근에 있는 온천으로, 많은 사람들이 아이슬란드에 도착하자마자 방문하거나 떠나기 직전에 들르는 관광지이다. 블루 라군이라고 하면 40년 전에 브룩 쉴즈가 주연했던 동명의 영화를 떠올리는 아저씨들도 있겠지만, 아무런 관계가 없다.
블루 라군은 천연 온천이 아니라 인공 온천인데, 이는 지열 발전이라는 아이슬란드의 특이한 난방방식에서 기인한다. 이 나라의 지열 발전소는 땅 속 2~3km 아래서 끓어오르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섭씨 270 ~ 300도에 이르는 뜨거운 증기를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거나, 이를 식혀 뜨거운 온수를 주택의 라디에이터에 공급해서 난방을 한다고 한다.
레이캬네스 반도(Reykjanes Peninsula) 용암 지대에 위치한 스바르트셍기 Svartsengi 지열 발전소는 원래 난방수를 공급하기 위하여 1970년대에 지어졌는데, 뽑아 올린 뜨거운 지하수에는 다량의 미네랄이 포함된 바닷물이 섞여 있어 건물의 난방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미네랄이 난방용 배관에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따라서, 뽑아 올린 섭씨 200도에 달하는 지하수로는 민물을 데워서 인근 지역의 난방에 활용했고, 사용하고 난 지하수는 발전소 옆의 용암지대에 방류했다.(지열 발전소를 둘러싸고 있는 용암 지대는 1226년의 화산 폭발로 이루어진 넓은 용암 지대라 한다.)
이 용암 지대에 방류된 사용 후 지하수가 용암석 층의 구멍과 틈 사이로 스며들었는데, 배출한 물이 식을 때 함유된 실리카 성분이 분리되어 진흙 층을 생성하였다. 따라서, 물이 암석층에 잘 스며들지 않고 주변에 점차 고이기 시작하면서 청록색 에메랄드의 호수가 만들어졌다. 그게 현재 블루 라군 주변을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호수의 정체이다.
땅 속은 용암에 온통 끓는 물이고 땅 위는 빙판이 덮고 있는 나라, 아이슬란드는 불과 얼음의 땅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1981년, 아이슬란드의 한 젊은 피부 건선 환자가 치료를 위해서 처음으로 블루 라군에서 온천욕을 시도하였는데, 그전까지는 이 곳의 물이 인체에 해가 있는지 없는지 몰랐다고 한다. 이 용감한 젊은이가 피부병에 효과를 보자, 1986년에 발전소 옆에 공공 목욕 시설을 지어 블루 라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원래 자리는 발전소 옆이었는데 1999년 이후 현재의 위치로 옮겨 계속 확장하고 있다고 한다.
화산섬답게 원래 아이슬란드는 천연 온천이 많았는데, 도심에서 가까운 이 곳에 인공 온천이 생기자 인기가 치솟았고 지속적인 개발로 지금 블루 라군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기서는 용암 지대 사이를 산책하면서 청록색 우윳빛 호수의 신비로움을 감상해 볼 수 있다.
블루 라군의 온천수가 왜 좋은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실리카 외에도 유황, 칼슘, 마그네슘 및 각종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으며, 이 물에서만 사는 특정 해조류가 햇빛을 받으면 초록색으로 꽃이 핀다고도 한다.(햇빛을 받으면 온천수가 유난히 초록색이 되긴 한다.)
여행 4일째, 아이슬란드에서 온천(아이들에게 온천 = 수영장)에 가자고 했더니 아이들이 가장 좋아했다. 특히, 물을 보면 사족을 못쓰는 아들은 여행 첫날부터 이 날만 오매불망 기다렸더랬다.
블루 라군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온라인으로 예약해야 한다. 하루에 들어갈 수 있는 입장객 숫자가 정해져 있고 예약 시 입장 시간까지 지정하도록 되어 있다. 입구 카운터에서 시간 확인을 하므로 사전에 내가 원하는 시간이 있는지 잘 확인해야 한다. 또한, 3개로 나뉘어 있는 입장권의 등급에 따라 포함되는 서비스가 다르니 가격 대비 원하는 입장권을 알아두면 좋다.
여름 성수기에 가게 된 우리는 약 한 달 전에 예약을 했는데 오전 시간이 모두 만석이라 이른 오후 시간을 선택했으며, 가운(렌트)과 슬리퍼(구매), 풀사이드 바의 음료 한 잔 그리고 스파 내 레스토랑 저녁식사 등이 포함된 프리미엄 등급의 패키지로 예약을 했다. 13세 아이까지는 무료라서 둘째는 깍두기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경기도 용인의 캐리비언 베이에 갈 때면 우리는 늘 오픈할 때 입장해서 문을 닫을 때 나왔다. 아이들의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 주고, 물놀이에 대한 몰입을 깨지 않으려고 아이들이 ‘집에 가자’라고 하기 전에는 중간에 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후에 입장하면 즐길 시간이 너무 시간이 짧지 않을까?’라고 고민했었는데 블루 라군에서는 기우였다는 것을 나중에 깨닫게 된다.
오후 입장이라 여유가 있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간단한 먹거리를 사기 위해 레이캬비크 시내로 나섰다. 여행기 1편에 이야기했듯, 레이캬비크는 시골의 읍내 느낌인데 반해 물가는 살인적으로 비싸서 런던보다 30%가량 비싸다.
브런치 레스토랑이 없지는 않았으나, 이날 내 눈에 띈 곳은 중국식 탕면 집이었다. 아시아에서 머나먼 레이캬비크에 중국 국숫집이라니,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남아풍의 강한 향신료에 반감이 있는 가족들이 미미하게 저항했으나, 개인별로 향신료 양 조절이 가능할 거라며 우겨서 데리고 들어갔다.
가게는 매우 작았고 주문도 푸드코트 형태로 줄 서서 해야 했으나, 우육탕면은 생각보다 국물이 진하고 맛이 좋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대만의 우육탕면이 생각나는 맛이었다. 반신반의하던 아내도 오래간만에 인정해 주는 분위기였고, 아이들도 조용히 먹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식당에서 우리 아이들이 조용하다는 것은 맛있다는 뜻이다.)
아침 겸 점심 후 시내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구입한 우리는 시간에 맞춰 블루 라군으로 향했다. 공항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국도로 빠져서 가게 되는데, 몇 대의 관광버스들이 우리와 같이 블루 라군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좌우에 용암석을 쌓아둔 진입로를 따라 약 1-200미터가량을 걸어 들어가니 리셉션 건물이 나타났다. 노천 온천이지만 주위는 천연 용암석으로 쌓아두었고 주차장부터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온천 안은 매우 조용하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다.
리셉션에 도착해서 시간에 맞추어 줄을 섰더니 직원들이 입장권을 확인한 후에 전자 팔찌를 채워주었다. 우리는 프리미엄 패키지를 구매해서 가운과 타월, 슬리퍼도 여기서 모두 받았다.
탈의실로 이동해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노천 온천으로 나오면 되는데, 나오기 전에 반드시 깨끗하게 샤워를 해야 한다. 블루 라군의 물은 락스 소독을 하지 않기 때문에, 방문객의 샤워는 필수이다. 온천수는 지열 발전소에서 계속 공급받는데, 48시간이면 온천 내의 물이 모두 바뀐다고 하니 위생 걱정은 접어도 좋다.
전자 팔찌는 락커의 열쇠이기도 하고 온천 내에서 음료 등을 사 먹을 때 쓰는데, 메커니즘이 호텔의 금고와 비슷하다. 락커 문을 닫고 근처 인식기에 팔찌를 대면 자동으로 번호를 인식하면서 잠갔다가 나중에 팔찌를 다시 대면 해당 번호가 표시되면서 열린다. 내 번호를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편리했다.
블루 라군 노천 온천으로 들어서면 처음 보는 청록색 우윳빛의 뽀얀 온천물의 아름다움에 먼저 놀라고, 물속에 들어가는 순간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물에서 짠맛이 나서 두 번 놀란다. 온천물은 매우 미끈미끈해서 다양한 미네랄과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실리카 성분 때문인지, 노천탕에 반쯤 잠겨있는 용암석은 물에 닿는 부분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이 곳은 모두 천연 용암석과 목재 등으로 온천을 지었다고 한다. 물속에서 둥둥 떠다니다가 옆을 보니, 노천탕 옆에 붙어있는 바에서 가벼운 알코올이나 주스 등 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샴페인을, 아이들은 주스를 한잔씩 들고 기분을 냈다. 샴페인 잔은 플라스틱으로 되어 있어서 안전했다. 혈액 순환이 잘되는 따뜻한 물속에서 샴페인을 한잔 한 아내는 갑자기 취기가 올라서 풀 밖 벤치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블루 라군의 온천탕은 바닷물이 섞여있기 때문에 물속에 오래 있으면 몸에서 삼투압 현상이 일어난다. 즉, 몸의 수분이 좀 더 빠르게 빠져나가므로, 물을 마셔 몸에 수분을 계속 보충해 주는 것이 좋다. 민물 수영장이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물 밖으로 나오지 않을 아이들도 짠맛 때문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자꾸 물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얼굴 피부 관리를 해보자며 실리카 진흙팩도 했는데, 어차피 온천물에 실리카 성분이 녹아 있어, 얼굴에 하얗게 팩을 하고 있다가 나중에 그냥 온천물에 들어가 씻으면 된다.
따뜻한 물속에 몸을 담그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니, 온천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하늘과 구름이 참 포근하게 다가왔다. 비가 쏟아졌더라면 더 재미있는 경험이었을 듯하다. 어릴 적 시골 산골의 개울에서 수영할 때 물속에 앉아 비를 맞았던 기억이 떠오르며 온천 앞의 초록 민둥산에 그 시골 동네 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노천탕 옆에는 블루 라군에서 운영하는 Lava 레스토랑이라고 있다. 저녁식사가 포함되어 있는 패키지라 입장할 때 레스토랑에 저녁 7시로 예약을 해 두었다. 레스토랑은 온천에서 바로 들어갈 수 있어서 물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7시까지 놀다가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할 줄 알았는데, 6시쯤이 되자 아이들도 슬슬 나가고 싶어 했다.
정리하고 나와도 저녁식사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 블루 라군 주변의 산책로에 나가보기로 했다. 리셉션 건물 옆으로 나가면 Outside Blue Lagoon이라고 불리는 에메랄드빛 호숫가 산책로가 있다.
온천 자체도 아름답지만, 용암석 지대에 지열 발전소에서 방류한 지하수가 고여있는 이 곳이야말로 외계 행성의 느낌을 주는 곳이다. 용암석 사이로 뚫어둔 오솔길을 따라 사진을 찍으며 신비로운 색깔의 호수 주위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블루 라군에 입장하지 않아도 발전소 주변의 산책로를 따라 돌아볼 수 있어 가볼 만하다.
산책 후 예약해 둔 블루 라군 내의 Lava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이 레스토랑은 용암석의 절벽을 한쪽 벽으로 사용하도록 건축한 레스토랑으로, 크기가 큰 통유리로 창문을 내어 블루 라군을 훤히 바라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패키지로 예약한 것인지, 종업원들도 단체 음식을 서빙하듯이 예약 사항을 확인한 후 신속하게 음식을 내 왔다. 음식이 깔끔하고 맛도 괜찮았지만, 단체 급식 같은 분위기가 고급스러움을 다소 깎아먹는 단점이 있었다.
저녁을 먹은 후 아이들에게 다시 온천에 들어가겠느냐고 물었는데, 둘째는 살짝 고민하는 듯했으나 결국 모두 고개를 저었다. 수영장의 왕자에게도 해수탕은 무리였나 보다.
낮이 긴 한 여름에 블루 라군은 자정까지 오픈을 한다. 입장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한번 들어오면 퇴실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저녁에 들어오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이 곳 방문객의 일반적인 체류 시간은 서너 시간이라고 한다. 처음 들었을 때는 좀 짧다고 생각했는데, 이 곳이 해수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겨울밤에 블루 라군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다면 더욱 환상적일 것 같고, 장거리 비행기를 타고 아이슬란드를 떠날 사람은 비행기 시간 대여섯 시간 전에 여기서 온천을 즐긴 후 탑승하면 비행기의 불편함도 쉽게 이겨낼 것만 같다.
레이캬비크 숙소로 돌아온 지 1시간도 안되어 모든 가족들이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물에서는 체력 소모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