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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Sep 22. 2019

여행을 끝내며 남기는 아이슬란드에 대한 단상(斷想)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로 떠나는 가족여행 #7

옛날의 영광 레이캬비크의 항구 Old Harbor에서

북해 한가운데 절해고도(絕海孤島) 아이슬란드는 600년 간 덴마크의 지배를 받다가 2차 세계대전 말기에야 독립했는데, 척박한 섬나라여서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별다른 산업이 없이 경제의 90%가량을 어업이 책임졌던 나라였다.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의 재료인 대구 때문에 아이슬란드 근해까지 어선들을 올려 보내는 영국과 끊임없는 어업권 싸움을 했었는데,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치렀던 전쟁 아닌 전쟁(대구 전쟁, Cod War)에서 승리한 아이슬란드는 배타적 경제수역(EEZ)을 200해리까지 늘렸다.


이 사건은 냉전 시대의 아이러니인데, 북해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에 대한 복잡한 이해관계로 미국 등 강대국들이 슬쩍 아이슬란드 편을 들어줬기 때문에 '대국'인 영국이 체면치레도 못하고 슬그머니 물러났던 것.

당시 잃을 게 없었던 아이슬란드는 나토(NATO, 북대서양 조약기구) 탈퇴까지 거론하며 대단한 '깡다구'를 보여줬고, 3번에 걸친 영국과의 분쟁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게 된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농담 삼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 중 하나가 '우리는 유일하게 영국 해군의 침략을 물리친 나라'라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나저나,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손바닥 만한 바다를 가진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니 막대한 해양 자원을 가진 이 섬나라가 일면 부럽기도 하다.

북해 한가운데의 화산섬 아이슬란드. 오랫동안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영토였다.

21세기 들어 아이슬란드는 전 세계 금융의 허브로 각광을 받아 발전하기도 했으나, 2008년 미국발 서브 프라임 모기지와 리만 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 이후로 정권의 불안정이 지속되고, 은행들을 파산시키면서 국가적인 구조조정을 밀어붙인 끝에 2010년 대 중반부터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알루미늄 제련이나 데이터센터 같은 IT 산업, 관광업도 중요하지만 어업은 여전히 아이슬란드의 핵심 산업이다.


아이슬란드를 떠나기 몇 시간 전, 우리는 여행 첫날 제대로 보지 못한 할그림스키르캬 교회(세상 끝의 한적한 어촌,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를 거쳐 레이캬비크 북쪽의 옛 항구(Old Harbor)를 찾았다. 옛 항구는 한 때 아이슬란드의 중심 부두이자 어항이었으나, 지금은 보트 투어 등 관광지로 바뀐 곳이다. 현재 동쪽의 신항만이 예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항구에는 'Whale Watching' 간판을 건 업체들이 꽤 있었다. 시간이 허락했다면 보트를 타고 고래를 보러 가거나, 유명한 퍼핀 Puffin(야생 새) 구경 투어라도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해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항구를 걷다 보니, 고래 구경을 다녀오는 사람들이 보트에서 내리고 있을 뿐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것이 활기찬 어항의 모습은 아니었다.

레이캬비크의 올드 하버 방파제에서
고래 투어를 마친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의 항구들은 특유의 생선 비린내가 많이 나는데, 이 곳은 비린내도 없고 배가 정박해 있는 바닷물도 투명하고 깨끗하다. 선명한 파란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바닷물에 반사되어 항구가 더없이 아름다웠다.

예전에는 북적북적하게 사람들이 생선을 실어 날랐을 탠데, 지금은 한적한 항구를 배경 삼아 가족사진을 찍고 산책하며 아이슬란드 여행의 마지막 몇 시간을 여유롭게 보냈다.

이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

각종 요트와 고래 구경 투어 배들이 정박해 있는 올드 하버

여행자로서 본 아이슬란드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라 내 눈에 비친 아이슬란드의 모습과 인상을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먼저, 공기와 물이 너무 깨끗하다. 공항을 나서면서부터 깨끗한 공기가 폐를 정화시켜 주는 것 같고, 배가 정박해 있는 항구도 물속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맑다. 가공하거나 수입한 생수는 비싼데, 원래 여기서는 수돗물뿐 아니라 트래킹을 가면 개울물도 그냥 마시는 거란다. 생수는 외국 관광객들이나 사 먹는 것이고, 식당에서도 탭 워터(수돗물) 달라고 하면 생수보다 깨끗한 물을 주는 것이 스위스와 다를 바 없다. 석회질 탓에 물을 그냥 마시기 어려운 대륙의 많은 나라들에 비하면 축복을 받았다.


두 번째, 화산 폭발로 생성된 지 2천만 년 밖에 되지 않은 이 '신생' 섬나라는 국토가 모두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고 빙하와 화산, 지진이 현재 진행형이어서 어디를 가나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도심만 벗어나도 다른 행성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운전을 하다 보면 수없이 만나는 것이 '성산 일출봉'이다. 빙하, 화산 속 탐험, 고래 투어, 다이빙, 오로라 등 한두 번만 와서는 할 수 없는 게 너무 많다. 여름에는 내륙에도 하이킹 길과 도로가 열리지만 다른 시즌에는 해안 쪽 외에 가보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자연이 잘 보존되고 있다.

싱벨리르 호수의 전경

세 번째, 아이슬란드는 지열, 수력 등 청정에너지를 최대로 활용하는 나라이다. 실제로 지열과 수력 발전만으로도 전력이 남아서 알루미늄 제련 공장 설립을 승인하고 ‘남는’ 전력을 공급한다고 한다. 지열의 근원인 용암과 수력의 근원인 빙하는 거의 무한정의 자원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대체 에너지, 청정에너지라 하며 이제야 탈석유를 고민하는데, 이 나라는 이미 처음부터 석유 의존도가 매우 낮았다. 세계적인 온천 블루 라군이 지열 발전소의 부산물이라는 것만 해도 재미있지 않은가.

블루 라군 옆의 스바르트셍기 지열 발전소

네 번째, 아이슬란드에는 사람이 없다. 수도의 번화가도 읍내 수준이고, 여름 관광객도 생각보다 적은데, 어두운 겨울이면 오죽할까 싶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복지 수준이 세계 최고임에도 자살률이 높다는 통계는 날씨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시내 길거리에서도 소수의 관광객을 빼고는 사람 구경을 하기기 쉽지 않고, 레이캬비크 밖으로 나가면 사람을 보기가 더 어렵다. 남한과 비슷한 크기의 국토에 인구가 30만 명에 불과하고, 그마저 상당수가 수도에 살고 있으니 도심 밖에서 사람을 보면 반가울 정도이다.


다섯 번째, 여기서 살려면 생활의 불편함을 많이 감수해야 할 것 같다. 인구도 적고 산업기반이 약해서일까, 대형 마트가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 반까지만 오픈하는 정도인데 이건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심심해서 일하는 수준이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이다.

사실,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인권과 복지를 중시하여 불편함을 서로 나누는 사회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 예를 들면, 런던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지하철, 버스는 물론 기차도 쉰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는 아예 클래스가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름 성수기에 술을 파는 리큐어 스토어가 오후 6시에 문을 닫아 버린다는 것은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어서, 저녁에 맥주 한 캔을 사기도 버거웠다.

대낮이나 다름없는 오전 11시에도 굳게 닫혀있는 대형 마트의 문

여섯 번째, 물가가 가히 살인적이다. 비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런던과 비교해 약 30% 이상 비싼 물가에 혀를 내두른다. 좀 괜찮다는 식당에서 음식 하나 시키면 한 접시에 그냥 5만 원이고, 작은 마트에서 샌드위치와 물을 사면 2만 원가량 들어간다. 그나마 영국 물가 수준으로 빌린 아파트에 머무를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일곱 번째, 아이슬란드만의 '맛있는' 음식을 찾기가 어렵다. 척박하고 가난했던 곳이라 예부터 해산물이나 양을 겨울에 오래 보존하기 위하여 훈연하거나 절이고 말리거나 삭힌 음식이 많다. 그중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음식' 중의 하나인 스비드(Svið)라 불리는 양머리 고기인데, 이것은 말 그대로 양의 머리를 부조처럼 세로로 갈라 통째로 조리해서 뇌만 빼고 다 먹는 것.

여행을 갈 때마다 현지의 음식을 찾아 먹고는 하는데, 아이슬란드만큼은 로컬 음식을 찾아 먹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만, 작은 도시이긴 해도 레이캬비크에는 각국의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이 제법 들어와 있기는 하다.

양머리 고기 스비드. (사진 출처 : Guide to Iceland)


여덟 번째, 섬 안에서 야생 동물은 거의 보지 못했다. 황무지를 운전할 때도 호주나 미국, 캐나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로드킬 하나 없고, 야생동물 주의 표지판도 없는데, 고립된 신생 활화산 섬이라 내륙에 야생 동물이 거의 없다고 한다. 양과 같은 가축이 들어와 땅을 파헤치면서 토양이 침식되는 것이 환경 문제일 정도이다.


아홉 번째, 자연 유산이나 관광지가 모두 무료이다. 관광이 중요한 산업 중 하나인데 상당히 의외였다. 입장료가 아닌 방문자 자체를 늘려 소비를 유도하는 방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높은 물가 수준을 고려한다면 이거야말로 아이슬란드가 여행지로서 가지는 장점 중 하나일 것이다. 다만, 한편으로 관광지에서 요금을 받는 인건비가 더 비싸서 그런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열 번째, 대중교통이 없다시피 한 아이슬란드에서 차를 렌트하려면 4륜 구동 오프 로더를 빌리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아이슬란드는 전국을 원으로 한 바퀴 도는 1330km에 달하는 링로드가 거의 유일한 '고속국도'이다. 비포장 도로도 많아서 작은 승용차로는 못 가는 곳이 많다. 대형 휠의 오프로더를 타는 현지인들을 꽤 보았다. 일본 도요타 또는 미국산 픽업트럭이 많다.

이 정도는 되어야 아이슬란드에서 타고 다닐만할 것 같다.

열한 번째, 고유한 아이슬란드 어가 있는데, 영어를 못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든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는데, 이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한편, 아이슬란드어는 영어 알파벳과 발음이 완전히 달라서 정말 어려웠는데, 화산 폭발이 일어났던 빙하 Eyjafjallajökull의 실제 발음을 알아내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른다. 한글로 표기 가능한 수준의 정확한 발음은 '에이야 프야틀라 외퀴틀'이었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데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친절하고 관광객에도 우호적이다. 다만, 사람을 보기가 조금 힘들다.  


열두 번째, 날씨가 매일 수백 번씩 변한다. 하루에 일 년 사계절을 모두 경험해 볼 수 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 구름이 수시로 변하고, 여름이라고 해도 최소 가을 재킷과 몇 겹의 옷을 준비해야 한다. 폭우가 쏟아지다가도 해가 화창하게 나오고, 금방 먹구름이 끼다가 맑아진다. 날씨는 정말 변화무쌍해서 예측이 거의 무의미하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변하는 날씨. 남서부 해안 도로를 가던 중.

열세 번째, 전산 시스템은 생각보다 편리한 게 많다. 신용카드는 거의 다 통해서 불편함을 못 느꼈는데, 10여 년 전 세계적인 금융 허브이자 지금의 IT 강국답다. 웬만한 식당이나 가게에서 신용카드를 아예 받지 않는 독일은 차치하고라도, 금융의 나라 영국이 후진국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블루 라군에서 경험한 최신식 온천 라커도 인상적이었다. 현금이 거의 필요 없을 정도로 관광 시스템은 훌륭했고, 기념품 가게는 관광객들이 공항에서 세금을 환급받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 두고 있다. 혹시 몰라 약간의 현금을 준비하긴 했는데 기념품이 되어 버렸다. 어업 강국답게 모든 동전에 물고기나 해양생물이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동전을 모아 봤더니 온통 해산물이 새겨져 있었다.


열네 번째, 주유 시스템은 주유소마다 달라서, 어디는 Pre-paid 카드를 사서 주유기에 넣어야 하고 어디는 카운터에서 내가 넣을 만큼 이야기를 해야 주유 호스를 열어주기도 한다. 주유소를 들어갈 때마다 많이 물어보고 배워야 했다.


열다섯 번째, 집들은 창이 작고 단순한 디자인이 많은데, 지붕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하는 것은 기본이고 두터운 벽에 다중 창 등 난방 효율이 극대화된 것 같았다. 길거리는 원색이나 그라피티, 벽화 등 장식이 참 많았는데, 지루하고 심심한 겨울이 긴 도시에 자극과 변화를 주려는 노력 같아 왠지 약간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레이캬비크만 해도 벽화가 정말 많다.

백야로 밝은 한 밤의 레이캬비크

열여섯 번째, 자연에서 트래킹이나 바이킹(자전거 여행)을 하는 사람이 많다. 운전을 하다 보면 자전거에 모든 짐을 매달고 길가를 달리는 사람들이나 히치 하이킹하는 배낭족들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여름이 되면 빙하와 화산지대 하이킹을 위하여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는데 다니다 보면 실감이 난다.

 

며칠 다녔다고 아이슬란드를 알 수는 없었겠지만 나의 첫인상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이하고 아름다우며 신비로운 곳’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이들도 지금까지 다닌 유럽의 나라들 중에 가장 좋았다고 평가를 해 주었다.

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는 꼭 한 번쯤은 가봐야 할 곳이며, 시간을 여유 있게 잡고 느릿느릿 다녀보면 좋을 것 같다. 링 로드를 따라 섬을 한 바퀴 일주해 본다거나 며칠이고 아이슬란드의 계곡과 산, 폭포 지대를 하이킹해 보는 것도 기대가 된다.

 

아직 둘러보고 싶은 곳이 훨씬 더 많기에, 다음에는 빙하지대를 캠핑하며 하이킹을 해 보겠다는 버킷 리스트를 적어 보면서 7편에 걸친 짧은 아이슬란드 여행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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