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음의 나라, 아이슬란드로 떠나는 가족여행 #1
익히 알려진 화산섬 아이슬란드. 나라 전체가 대서양 중앙 해령 위에 있고 유라시아판과 아메리카 판이 만나는 지점이어서 두 지각판이 벌어지며 땅이 매년 커지고 있다.(매년 1센티미터 커진다고) 실제로 싱벨리어 국립공원에 가보면 생생한 '지각변동'의 현장을 볼 수 있다. 세계에서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와 가장 비슷하지만, 인구는 달랑 30만 명이고 그나마 1/3이 수도 레이캬비크 Raykyavik에 모여서 산다. 차를 몰고 레이캬비크를 나와서 5분만 달려도 사람 그림자는 보기 어렵고, 다른 행성에서나 봄직한 화산암 황무지가 펼쳐진다. 세상의 끝이고, 외계 행성의 느낌이다.
실제로 HBO의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장벽 너머의 장면이 대부분 아이슬란드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며, 스타워즈나 인터스텔라와 같은 공상과학 또는 판타지 영화의 단골 촬영지이기도 하다. 쓸모없는 황무지, 무인도였기에 서기 870년 이전에는 사람이 살지도 않았다고 하는데, 이런 곳에 국가를 일으킨 바이킹의 후예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왕과 영주가 지배하던 유럽의 중세시대에도 이미 이곳에는 자유민들의 의회가 있었다. (이것도 왕좌의 게임에서 모티브를 따지 않았을까? 내 생각이다.)
한국에서는 통상 암스테르담이나 파리 또는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가야 하고 웬만만 각오가 아니면 가기 어려운 곳인데, 런던에서는 비행기로 3시간 거리라서 여름에 며칠 다녀오기로 했었다. 지인들이 오로라를 보러 가느냐고 물었는데, 북유럽은 여름에 백야 현상으로 자정이 되어도 깜깜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햇빛은 좋고 선선한 기온 덕분에 여름철 피서지로 가볼만한 곳이다.
런던도 날씨 변화가 큰데, 아이슬란드에 비하면 번데기 주름잡기다. 여기서는 하루에 사계절을 다 경험해볼 수도 있고 하루 열 번도 넘게 맑다가 비 오다 춥다가 덥다 할 때도 있다. 늘 날씨에 대비해야 한다.
아이슬란드 항공 Icelandair은 이 나라의 국적기인데, 사실 국내선 위주로 편성되어 있고 국제선은 기껏해야 유럽과 북미 정도에만 취항하고 있다.(북미나 유럽이나 거리가 비슷하다.)
런던발 레이캬비크행 비행 편이 오후 1시여서, 오전에 여유 있게 준비해서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데, 아무리 작은 항공사라 해도 명색이 국적기인데 3시간 비행에서 기내식으로 나누어준 것이 종이 박스에 담긴 맛없는 참치 샐러드여서 좀 당황스러웠다.
참고로, 아이슬란드는 정식 EU 가입국은 아니지만 솅겐 조약에는 가입되어 있기 때문에, EU 대륙에서 출발하는 승객들은 국내선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반면, 영국은 EU 국가지만 솅겐 조약에는 가입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영국과 아이슬란드 간에는 일반적인 국제선이다.(영국은 브랙시트 후 EU와는 남남이 된다.)
이륙한 지 얼마지 않아 레이캬비크의 케플라비크 국제공항 Keflavíkurflugvöllur에 도착했는데, 공항 밖에서 본 풍경이 매우 생경했다. 드넓은 평지에 우리나라 지방공항 사이즈의 작은 공항이 덜렁 있었고, 하늘은 처음 보는 선명한 파란색인데 그 위에 먹구름이 뭉쳤다 퍼졌다 반복하고 있었다. 왠지 다른 세상에 온 듯 신비로운 분위기다. 짐을 찾고 공항의 대기실로 나왔더니, 렌터카 업체 직원이 푯말을 들고 서 있다.
나는 렌터카는 비싼 글로벌 브랜드보다 저렴한 유럽 브랜드를 주로 사용하는데, 이번에 사용한 업체는 예전에 북잉글랜드 여행을 위해 빌릴 때 최악의 서비스로 된통 당한 경험이 있어서 좀 걱정이 되었다. 글로벌 업체는 중형 버스가 와서 손님들을 태웠지만, 우리는 옛날 봉고차 같은 미니밴을 타야 했고, 업체 직원은 말이 많았다. 차를 픽업하러 가는 내내 떠들었는데, 브라질에서 여행 왔다가 아이슬란드가 너무 좋아서 반년째 눌러앉아 있단다. 실제로 아이슬란드에는 여름 석 달 동안 세계 각지에서 아르바이트하러 온 청년들이나 배낭여행자가 많다. 젊을 때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삶, 나는 아직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헷갈리는데 그의 자유분방함이 살짝 부러웠다.
아이슬란드는 대중교통이 엄청 취약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렌터카를 해야 하는데, 웬만하면 4륜 구동을 빌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가성비가 우선이었던 나는 소형 승용차를 빌렸는데, 빙하 지대는 가고 싶어도 엄두를 내지 못했고, 한 번은 비포장길에 들어섰다가 5분 만에 기겁을 하고 돌아 나왔었다.
공항에서 레이캬비크로 달리는 길은 시원했다. 교통체증 따위는 없었고, 길 양 옆으로 펼쳐지는 황무지와 변화무쌍한 날씨에 그제야 살아있는 화산섬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내까지는 30분이면 도착한다. 여기저기 검색하고 비교해서 숙소를 잡아뒀었는데, 알고 보니 여기가 '꽃보다 청춘'의 아이슬란드 편에서 출연자들이 묵었던 숙소였다.
'혹시 예전에 한국의 한 방송사에서 여기 와서 촬영하지 않았나요?'
'오. 네, 기억이 납니다. 젊은 친구들과 카메라맨들이 왔었어요.'
숙소 겉모습과 내부가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해서 로비의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기억하고 있었다.
짐을 풀고 저녁 무렵에 산책 삼아 레이캬비크 시내 거리로 나왔다. 명색이 한 나라 수도의 중심지이지만 우리나라 시골 읍내 정도의 분위기였는데, 도시를 통틀어 10만 명 남짓 산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한 바퀴 둘러보니, 장난감 집 같기도 한 낮은 사각형 집들이 줄지어 있는 언덕길 위에 거대한 석탑이 하나 삐죽 올라와 있었다.
성인이 양손을 펼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두 손을 모아 쥐고 있는 것 같기도 한 거대한 석탑,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할그림스키르캬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로 루터교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를 중심으로 북유럽에 크게 퍼졌고, 아이슬란드의 국교 역시 루터교이다. 스키르캬(skirkya)는 아이슬란드어로 교회라고 하니, 이 발음 어려운 단어의 뜻은 할그리머의 교회라는 뜻. 실제로 17세기 아이슬란드의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할그리머 페투르손 Hallgrímur Pétursson을 기리기 위하여 명명되었다고 한다.
74.5m의 이 교회 건물은 아이슬란드 해변의 주상절리에서 형상화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섬 남쪽 검은 해변에 가보면 거대한 주상절리 절벽을 볼 수 있다. 교회는 내외부에 화려한 예술 양식을 뽐내는 중남부 유럽의 가톨릭 교회와 확연히 다른 아이슬란드의 상징처럼 보였다. 가까이 가보면 웅장한 건물이 한눈에 담아지지 않는다. 처음에는 회색빛으로 멋없게 올린 탑이라 생각했는데, 볼수록 강인한 아이슬란드인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저녁 때는 교회가 문을 닫아 겉에서만 둘러보았고, 교회 안은 화창하게 갠 여행 마지막 날에 들어가 보았다. 내부는 수수하지만 웅장했는데, 예배당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이었다. 실제로 이날 오후에 연주회라도 있는지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음악 소리가 실내 분위기를 압도했다.
광화문 광장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내려다 보고 있듯, 할그람스키르캬 앞에는 늠름해 보이는 바이킹의 동상이 서 있는데,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약 500년이나 앞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는 아이슬란드 출신 바이킹 탐험가 레이프 에릭슨 Leif Ericsson의 동상이다. 마치 할그람스키르캬를 끌고 가는 듯 당당한 자태의 이 동상의 뒷면에 이렇게 쓰여 있다.
LEIF ERICSSON 레이프 에릭슨
SON OF ICELAND 아이슬란드의 아들
DISCOVER OF VINLAND 빈란드의 발견자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O THE PEOPLE OF ICELAND ON THE ONE THOUSANDTH ANNIVERSARY OF ALTHING AD1930
알씽의 1천 주년을 맞아 미합중국이 아이슬란드 국민에게, AD 1930년
빈란드는 지금의 캐나다 동부의 뉴펀들랜드라고 한다. 알씽 Alþingi(영어로 Althing)이란 아이슬란드 의회를 의미하니 약 1천 년 전부터 아이슬란드에는 의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싱벨리어 국립공원에 가면 그 알씽이 있었던 의회 자리가 있는데, 그들의 자유의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아이슬란드는 복지와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유명한데, 의회를 통해 토론하고 합의해 온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바이킹은 도끼 들고 문명을 약탈하던 야만인으로만 생각했는데 이들의 의회 역사에 많이 놀랐다. 레이프 에릭슨은 그린란드를 탐험한 후에 동료들을 이끌고 더 서쪽으로 항해를 한 끝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한다.
할그림스키르캬의 탑에 오르면 레이캬비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고 하는데, 우리 가족은 도통 전망대에 관심이 없다. 리스본이나 파리, 쾰른 같은 대도시에서도 시큰둥한데 이 시골 어촌에서 올라갈 리가 없고, 이미 시간도 늦어서 저녁 장소를 물색할 겸 해변 쪽 시내 방향으로 걸었다. 한적한 길거리의 집들은 아기자기한 색으로 칠해있거나 그라피티들도 많았다. 겨울이 길고 지루한 곳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바꿔보고자 하는 노력일까?
아이슬란드는 물가가 매우 비싸다. 비싸기로 유명한 런던에 비해서도 30%가량은 높은 것 같다. 지인들이 왜 물까지 싸서 아이슬란드로 가는지 다녀보면서 실감했다.(물 한 병과 작은 샌드위치를 먹으려면 2만 원은 써야 한다.) 변변한 제조업이 없어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니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의 묘미는 식도락인 바, 고르고 골라서 시내 길가 한편에 있는 이태리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좀 많다며 잠시 대기해 달라고 우리를 안내한 곳이 위층의 훌륭한 엔틱 응접실이었는데, 기다리는 시간도 아늑하고 즐거웠다.
음식 역시 우리 입맛에 맞아 까다로운 아이들이 만족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파스타나 피자를 맛있게 요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유럽에 살다 보면 알게 된다.) 계산할 때는 눈을 질끈 감고 사인했다.
저녁을 먹고 시간은 밤이 되었지만 거리는 밤이 아니었다. 시내(아니 읍내)를 한 바퀴 더 돌아보고 밤 11시가 되어 갈 때쯤 숙소로 돌아오는데, 석양이 다 넘어가지 않았고, 자정이 되어도 창 밖은 어둠이 완전히 내리지 않았다. 영국도 북쪽이지만 이 곳이 북극권에 가까이 있음을 실감했다.
내일은 아이슬란드의 하이라이트, 골든 서클(Golden Circle)을 간다. 아이들이 몇 년간 다녔던 유럽여행에서 최고로 꼽았던 날이 내일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