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하지 마세요.

원문: <기술 공화국 선언>

by 비즈쿠키

안녕하세요 알렉스입니다.


Palantir 창업자 Alex Karp의 <The Technological Republic> 저서에 실린 글 중 일부를 번역해 보았습니다.


"비순응적인 태도에 대해 세상은 불쾌감이라는 채찍을 가한다"는 문구가 와닿네요.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image.png?type=w773 출처: Celebrity Net Worth <알렉스 카프>



아, 그리고 뉴스레터를 만들었습니다.


실리콘밸리 대가들의 에세이와 인터뷰를 번역한 글을 매주 수요일 저녁에 받아보실 수 있어요 :)


한 가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쓸모 있는" 글만을 보내드린다는 것이에요.


어떤 경우에도 읽는 분들의 "시간을 빼앗는" 글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드릴게요.


아래 링크에서 이메일만 입력하시면 바로 신청됩니다 :)


5초 만에 신청하기



<순응하지 마세요>

오늘날 조직들은 이러한 마찰을 피하는 데 너무나 급급합니다. 우리는 기업 생활에서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문화를 지나치게 중시해 왔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결국 조직을 창의적인 성과가 아닌, 그 반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기업과 정부 기관 내에서 갈등의 작은 불씨라도 서둘러 잠재우려는 것은 잘못된 접근입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별다른 노력 없는 '쉬운 삶'이 보장된다는 잘못된 기대를 심어주며,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는 이들에게만 보상이 돌아가게 만듭니다. 코미디언 존 멀레이니의 말처럼, “타인의 호감을 받고자 하는 건 일종의 감옥"입니다.


평균으로 회귀하려는 압박, 즉 예전에 하던 대로 하려는 무언의 압력, 꼭 필요할 때 오히려 위험을 제거하려는 경영 방식, 그리고 대립을 피하려는 유혹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끝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하지만 학교와 직장이 학생과 직원들의 주관적인 감정에 지나치게 보조를 맞추려 하면서, 오히려 일부 사람들이 느끼는 불만과 피해 의식은 더욱 커졌습니다.


지난 십여 년간 진보 진영이 열성적으로 내세워 온 트리거 워닝을 비롯한 순응적 조치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피해 의식을 조장함으로써 결국 엄청난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와일 코넬 의과대학 임상 정신의학과 교수인 리처드 앨런 프리드먼은 2016년경부터 학생들이 수업 중 들은 내용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 등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실제 피해가 될 만한 수준에 비해 과장된 것 같았다”며, "낯설고 불편한 것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학생들의 보고가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피해 의식 산업이며, 한 세대가 세상의 온전한 일원이 되는 데 필수적인 강인함과 균형 잡힌 시각을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견고하고 차별화된 무언가를 구축하려는 희망이 있다면, 일정한 심리적 탄력성과 더불어 타인의 시선에 대한 초연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술가든 창업가든 종종 "미친 사람들"입니다. 잭 케루악이 《길 위에서》에 썼듯이, "살고 싶어 미치고, 말하고 싶어 미치고, 구원받고 싶어 미치고, 동시에 모든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물론 문제는, 가장 매력적이고 진정한 비주류, 즉 예술가나 관습을 깨는 사람들은 악명 높을 만큼 함께 일하기 어려운 동료가 된다는 점입니다.


기술 스타트업이나 예술 운동처럼 창의성을 요하는 작업을 할 때, 인간 욕망의 백지 상태는 근본적인 난제를 던져줍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무엇이 바람직한지에 대한 기준을 서로에게서 찾으려 하고, 그 결과 타인의 의도는 종종 숙고 없이 그대로 흡수되어 우리 안에 뿌리내립니다. 프랑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René Girard)는 똑같은 바나나 여러 개 중에서 한 마리가 특정 바나나를 선택하자 다른 원숭이들 사이에 다툼과 경쟁이 발생하는 현상을 관찰했습니다. 지라르는 1983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다툼이 벌어진 바나나는 특별할 게 전혀 없었습니다. 첫 번째 원숭이가 그걸 선택했다는 사실 외에는 말이죠. 이 사소한 선택이 모방적 욕망(mimetic desire)의 연쇄 반응을 일으켜, 그 바나나 하나가 다른 모든 것보다 더 탐나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세상을 배우는 방식은 모방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 모방은 창의성에 독이 됩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러한 창조적 유아기의 단계를 평생 벗어나지 못합니다. 실리콘 밸리에서 '혁신'이라고 불리는 것의 상당수는 사실 그보다 한참 못 미치는 수준입니다. 이는 과거에 성공했거나 적어도 성공했다고 여겨졌던 것을 반복하려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모방이 때때로 성과를 낼 수도 있지만, 대개는 독창성이 떨어지는 퇴보적인 결과로 이어집니다. 최고의 투자자와 창업가들은 이 차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과거 성공을 불완전하게 따라 하려는 충동에 적극적으로 저항했기 때문에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반항적 행위는—백지에 시를 쓰든, 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든, 화면에 코드를 짜든—본질적으로 기존의 것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새로운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연한 각오를 의미합니다. 창조 행위에 내재된 과감한 태도, 즉 인류가 지금까지 만들어낸 모든 것들이 이 순간에 반드시 필요하거나 구축되어야 할 것은 아니라는 확신은 모든 창업가와 예술가 안에 존재합니다.


스타트업이든 기존의 강자를 위협하려는 조직이든, 현대 상업을 지배하는 무분별한 순응—즉, 집단의 비난을 감수하기를 꺼리는 태도—는 파국적일 수 있습니다. 1941년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종교적 독단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한 그의 불후의 명작 《자립(Self Reliance)》에서, 제도적 압력에 굴복하는 개인의 나약함을 강력히 질타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비순응적인 태도에 대해 세상은 불쾌감이라는 채찍을 가한다”고 상기시킵니다. 에머슨은 단순히 주변 사람들에게 순응하는 것뿐만 아니라, 특정 주제에 대한 자신의 과거 견해에 얽매이는 것 역시 그만큼 한계를 짓고 발목을 잡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글이 인터넷에 영원히 기록되고—대중이 과거 발언의 모순을 찾아내어 공적인 영역에 뛰어든 이들에게 집요하게 달려드는 현상—은 우리를 과거의 자신이라는 족쇄에 더욱 가두는 위험을 낳습니다. 그러나 에머슨이 던진 질문은 옳습니다. “왜 당신은 과거 이 자리, 저 자리에서 말했던 것과 모순될까 봐 기억이라는 시체를 끌고 다니는가? . . . 요셉이 겉옷을 버려두고 도망쳤듯이, 당신의 이론을 버리고 달아나라.”


우리는 진전이 보이지 않는 실패한 프로젝트를 수일 만에 포기하고,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팀을 해체함으로써 여러 번 도망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물론 때로는 더 소심하여, 특정 인물이나 투자에 대한 이전의 결정을 되돌리는 데 지나치게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특히 투자자들은, 피봇, 실수에 대해 관용적이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결코 중요한 일은 직선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탐욕스러울 만큼 현실적인 실용주의가 필요하며, 증거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증거에 맞춰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델을 기꺼이 수정하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참고자료

https://www.founderstribune.org/p/the-disapproval-of-the-crowd-by-alex-karp

작가의 이전글스타트업 투자의 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