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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성 Dec 06. 2019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보통의 엘리트 선수로서의 삶의 기록.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남자 대표팀이 쇼트트랙 1000m 에서 금메달을 따던 해, 어머니께서는 평소 몸이 허약해 사계절 감기를 달고 살았던 나를 건강케 만들고자 서울에 있는 한 아이스링크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셨다. 아이스링크장에 처음 들어섰던 그 날, 코를 찌르는 차가운 공기와 정신없이 얼음 위를 활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제 갓 8살이 되었던 어린아이에게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세계로 여행을 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이스링크장의 강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신 후 나에게 보급용 스케이트화를 이십센티미터 정도의 내 작은 발에 끼워 넣으셨다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당연히 얼음 중앙에서 핑그르르 돌고 있는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게 될 줄 알았다. 어쩌면 김연아의 선배가 되었을 수도!).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화려한 피겨스케이터들 주변을 감싸며 활주 하는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이라는 운동을 배우러 간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다지 그것이 속상하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얼음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이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 쇼트트랙 선수로써의 인생의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당시는 국민학교), 일주일에 3~4회 일일 강습으로 배웠던 스케이트를 소위 말해 ‘선수반’ 등록을 하면서부터 진짜 전문적인 선수 (엘리트 선수)가 되었다. 보통 주변 선생님의 권유 (꼬드김)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재능이 있어요.” 혹은 “참 열심히 하는 아이예요.” 와 같은 아주 허접한 멘트를 시작으로 우리 부모님은 앞으로 20년 넘도록 아들놈 사교육에 기하급수적인 자원 (돈, 시간 그리고 마음)을 소비할 것이라고는 가늠하지 못했을 것 같다. 지금 나는 그때의 선생님들 연령보다 더 나이가 있으니 감히 예상컨대, 별 근거 없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이가 재능이 없어서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혹은 “다른 운동을 하는 걸 추천드려요.” 같은 말은 곧 “어머님 저는 돈을 벌고 싶지 않고 제 아이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와 같은 말이다. 여하튼 이렇게 시작된 나의 쇼트트랙 선수생활은 새벽부터 밤까지 하루 평균 8시간을 쏟아부으며 약 23년간 지속되었다 (만 시간의 법칙? 웃기지도 않는다). 기억으로는 처음에 나는 스케이트 선수로써 재능을 타고났다거나 체력적으로 또래 아이들보다 우월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애초에 몸이 허약한 체질이었기에) 하지만 환경적으로 내가 처음 운동을 시작한 지역이 서울이고 그중에 목동 아이스링크 (당시 쇼트트랙 선수 배출의 요람과도 같은 지역)에서 훈련을 했다는 것이 나름 어드밴티지로 작용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정도가 돼서야 내 실력은 조금씩 전국 수준에서 티가 나기 시작했고, 6학년 때는 전국 종목별 선수권 대회에서 초등학생 중에 전체 1위까지 하였다. 5학년 때까지 만년 2등으로  귀가 뜯기고 내 엉덩이를 시퍼렇게 만든 주범이었던 라이벌을 제치는 순간이었다 (그 선수의 아버지께서는 그날 관중석에서 성악 발성 샤우팅을 보여주시고 다음 해부턴 링크장에서 볼 수 없었다). 이 바람에 초등학교 졸업하면 스케이트를 그만둘 것이라는 가족의 약속이 무효가 되었지만, 나는 내심 내가 스케이트를 계속 탈 수 있다는 사실에 마냥 기뻤던 것 같다.


다음 해, 빙상부가 있는 중학교에 진학하고 아이스링크장과 학교를 오가기 편하게끔 온 가족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진짜 진짜 본격적인 선수). 중학생이 되니 훈련량도 더 많아지고 함께 시합하는 선수들의 레벨이 달랐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선수로써 잘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재미를 느꼈던 기간이 유일하게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 같다. 보통 엘리트 운동선수들은 이 시기부터 (혹은 더 일찍) 훈련시간과 양이 많아지기 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고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훈련하는 데에 쏟게 된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공부를 시키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덕분에? 나는 하루 8시간 정도의 훈련과 학교 수업 그리고 개인과외까지 열렬히 지도하신 결과, 중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여타 일반학생들과 똑같이 교육을 받았다. 난 어린 나이었기에 이러한 스케줄이 소화 가능했지만 나 보더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주무시는 (게다가 운전까지) 이 대환장 파티를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홍길동처럼 해내셨을지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그렇게 물심양면 나를 지원하는 가족들의 노력과 늘어가는 훈련을 해내는 나의 노력이 합쳐져서 중학교 3학년 때는 한 시즌 동안 전국대회에서 금메달을 한 번도 놓치지 않으며 꽤 성공적인 성적을 만들어 냈으니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당시에는 고등학생이 쇼트트랙 선수 중 하이 커리어) 국가대표 선발이라는 꿈과 올림픽 출전은 이제 내 이야기가 될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처음으로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7월 이전생은 중3도 출전 가능), 나는 이때 고1로써는 이례적으로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팀 분위기나 선 후배 관계가 군대 분위기 까진 아니더라도 선생님말씀에 대한 무조건 적인 수용이 일반적 이었다. 이 덕분에 나는 선배에게 양보 아닌 양보를 하는 일을 한다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마음이 약해서 그만. 심지어 난 그 선배가 싫었다!). 후배의 양보가 미덕인 시대적 분위기와 나의 나약한 멘털로는 도저히 선생님의 말씀과 선배의 눈빛을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선생님과 선배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 성격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결국 국가대표 근처까지만 가보고 유망주로써 그 시합을 끝냈다. 하지만 이제는 진짜 잘해야겠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고2 가 되면서 되면서 슬럼프가 시작되었다. 모순적이게도 이때부터는 나도 우리 가족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접고 올인을 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물리적인 시간과 정신적인 부분까지 하나를 위해 에너지를 쏟았는데 마음같이 늘지 않는 실력 때문에 항상 우울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운동을 열심히 하고 안하고의 수준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것은 이미 디폴트였기 때문에 연습 때는 드럽게 안되던 스케이팅이 시합 때는 항상 순위권에는 들만큼  운도 좋았고 더군다나 스스로 훈련을 많이 했다는 정신승리 덕분인지 시합 자신감이 유지가 됐던 것 같다.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고 2 시즌의 성적이 가장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동계체전에서의 성적이 대학 진학의 직접적인 교두보 역할을 한다. 운이 좋게도 고2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따고 고3 마지막 대회에서 2관왕을 하면서 선수로써 엄청 성공적 (국가대표)이진 않지만 나름 실패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을 진학하고 괜찮은 컨디션과 주변의 기대를 조금 받으며 대학 선수로써의 커리어가 시작됐는데 나름 그 시절이 내 전체 선수 시절 중에 가장 하이 커리어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감도 높았고 노력한 만큼 결과도 정비례하였기에 스스로 만족감과 주변의 서포트도 가장 높았던 시기였다. 그렇게 점차 좋은 성적을 내면서 국제 대회에 출전하며 국제 대회에서 커리어도 쌓을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인 국제 대회 커리어의 시작일 줄 알았는데 마지막이었다니!) 여하튼 그 끗발이 그 시즌 내내 작동해서 그해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리나라 전체 5위를 하면서 나름 선수로써의 하이 커리어를 쌓았다. 이젠 진짜 진짜 내 차례?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 시즌을 맞이하였지만 내 변명 일진 몰라도 코치진 변화와 훈련 스타일 변화로 인해서 내 성적과 멘털은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기억으로는 그때 코치 선생님은 참 화가 많았는데 그게 우리 선수들이 훈련을 하는데 있어 흥미를 잃게 만드는 주된 요인 이었다. 우리들은 라커룸에 앉아 그 코치가 무슨요일에 화를 낼것인가 대한 잡담만 늘어놓으니 뭐 훈련의 능률이 오를리가 있나. 이유없는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하여간 참 피곤하다. 그렇게 기숙사 생활을 하며 나 자신을 선수로써 방치한 덕에 대학 4년 때부터 실업 1년 차까지 선수생활 중 가장 로우 커리어를 쌓게? 된다. 이때가 첫 번째로 경력 전환을 생각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운동 말고는 해 본 것이 없고, 전반적으로 자신감이 떨어져 있던 상태라 공부를 한다고 해도 명확한 아웃컴이 보이지 않았다(그냥 공부하기 싫었다). 몸은 여전히 성실하고 습관적으로 열심히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게을렀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게으르지 않았다면, 운동 말고 내가 하고 싶거나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해서 최소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는 있었을 거다. 그냥 ‘난 스케이트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고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같은 엉터리 다짐으로 또 몇 년을 지냈던 것 같다.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다시 경쟁하는 운동선수로서 의미를 찾고 정신을 차림으로써 이젠 진짜 잘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이때부터는 운동이 재밌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름 포기하지 않고 버티던 중 운이 좋게도, 27 살이 되던 해, 평창올림픽 정책의 일환으로 동계스포츠에서 없어졌던 상무 (국군대표선수)가 부활했고, 이듬해 선발이 되어 선수 커리어를 서른 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운동 안 그만둔 거 후회 안 하는 시기이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이렇게 군생활을 하면서 두 번째로 은퇴 후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지만, 잘 먹고 잘 싸고, 잘 잤던 내 루틴 덕분에 훈련을 개떡같이 했음에도 내 몸은 아주 과학적으로 날이 갈수록 좋아졌고, 이는 군 제대 후에도 선수로서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였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잤던 군대 루틴은 나중에 과학적으로 한번 설명해 보겠다). 그렇게 21개월 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실업팀에 입단했고 향 후 약 2년간 국내에서 가장 나이 많은 선수로 커리어를 이어 나갔다. 이때부터 은퇴 후의 삶을 진짜 x 100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서른한 살이 되어서야!). 끝으로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던 선수로서 마지막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우연히 관중석에 계신 어머니를 봤을 때 지난 23년간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JOLA SAD). 이 마음의 빚은 아마 내가 평생 갚아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게 선수로서 마지막 시합을 마친 후, 나는 아주 물 흐르듯이 경력을 전환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기분이 진짜 묘했다 그냥 한 달 정도만 쉬면 될 것 같았는데! 그때는 그냥 영어가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외국에 나가야 했다. 어학연수는 같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에 리스크가 크다는 생각을 했고 석사 유학이 좀 더 폼이 났기에 석사를 하기로 했다. 현실적으로도 학위를 따는 것이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어학연수와 영국 석사는 처음에 내가 생각했던 차이보다 그 해내야 될 기준 자체가 달랐다 (JONNA 멘붕의 연속). 생각해보면 내가 가진 모든 자원과 능력은 때로는 타자에 의해 때로는 멋모르고 시작한 다양한 시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유학을 가야겠다는 결심은 어머니의 교육철학에 영향을 받았고, 한국에서 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석사를 하게 되었던 것은 ZOTTO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무턱대고 모든 일을 멋모르고 시작하기에는 다소 위험하고 신중히 고려해야 하는 부분도 있지만, 내가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하는 것이다 (지금 아무것도  하고 있음). 지난 2년의 영어공부와 석사 공부를 요약하면 ‘2년간의 벼락치기 어울릴  같다. 지랄 총량의 법칙으로써 학창 시절 못한 공부에 대한 보충수업이라고 생각하면 2년이면 거저다 거저.  중요한  아무리 내가 모르는 것이고 두려운 것이라 해도 시간을 투자하면 해낼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는 것이다. 아주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내 이야기는 아주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던 엘리트 선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보통의 운동선수가 겪는 이야기에 가까울 수 있다 (물론 나정도도 통계적으로 우리나라 전체 엘리트 선수의 커리어로 본다면 상위 5% 안에는 들고도 여유롭지만). 그러니 좀 지금 자신이 없는 선수들 혹은 1등이 아닌 선수들도, 지금 그 종목을 엘리트 수준으로 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길 바란다. 실력과 폼은 주가 변동 같이 오르락내리락한다. 하지만 내가 봤던 좋은 선수들 즉 강한 멘털을 가진 선수들은 자신감에 대한 기본값이 좀 남 다르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자신감의 문제이더라. 근거 없이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이상한 믿음에서 변화가 있다. 자신감은 곧 내가 가진 자원 (자아효능감, 조절, 자기 믿음)과도 관련이 있는데, 가진 자원이 많다고 느낄수록 상황을 도전할만한 것으로 인지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할 자원이 적다고 스스로 믿으면 상황을 위협 상황으로 인지하고 이는 실제로 신체적으로도 부정적인 반응 (심박수 불균형, 코르티솔 증가)을 보인다는 연구도 있다. 따라서 심리상태와 생리적 변화는 상관관계가 있다고 과학적으로도 이미 증명이 되었으며, 단순히 하나의 사건에 의해 내 기분이 좋거나 나쁜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그 사건을 인식하느냐가 제일 중요한 문제이다.


두 번 세 번 강조해도 모자라지만 공부는 해야 할 것 같다. 나처럼 은퇴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생활을 하면서 말이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당장 입시경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운동 이후에 삶에서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고 싶은지에 대해 스스로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았나. 개인의 지식의 반경을 넓힐수록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며, 나와는 다른 그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다른 세계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다. 꼭 석 박사를 하는 것이 공부는 아닌 세상이다. 다만 운동 말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자연스럽게 은퇴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난 뭘 좋아하고, 무엇을 불편해하는가? 와 같은 단순한 물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무엇보다 그 물음에 솔직해야 한다. 스포츠 과학의 발전과 시대적 흐름으로 인해 물리적으로 선수 커리어의 볼륨의 커졌다고 해도 운동선수에게 있어 은퇴는 불가피하다. 최소한의 다음 삶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보면 공부는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닌 거다. 그냥 하는 거다. 무엇보다 본인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며, 하루라도 빠르면 좋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도움만 줄 뿐, 내가 어떤 삶을 살 건지에 대한 선택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궁극적으로 사회적 차원에서의 지원보다 개인차원에서의 변화가 제일 안전하고 빠르고 효과적이다. 처음은 그냥 호기심 정도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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