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서 의미로의 전환. 그리고 윤리적 소회.
2017년 어느 날. 와이프 앞에서 유학을 가고 싶다는 말을 했던 그날이 생각난다. 당시 나는 직업 운동선수로써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지내고 있었다. 대한민국 엘리트 선수라면 해결해야 할 군대 문제도 걸려있지 않은 상태에서 남 부러운 정도는 아니었을 지라도, 적어도 직업 운동선수로써의 삶을 향후 몇 년간은 이어나갈 수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과 좋은 시간들을 부족함 없이 보내며 말이다. 하지만 남들보다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이어간다는 것 말고는 더 이상 선수로서의 비전은 남아있지 않았다. 기대감이 없는 선수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나는 선수가 아닌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공부를 시작한 4년 전만 해도 대단한 결실을 맺으리라는 기대감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학원이라는 곳은 학계에서 전문적으로 커리어를 쌓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이기에 그 안에서 또한 최고를 꿈꿨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지사 아닌가.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느끼게 된 것이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보다 내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 얼마만큼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0이면 제아무리 큰 수를 곱하여도 늘 0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내가 1이 되려는 과정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을 채워야 함을 간과했던 것이다. 조급했고 무지했다.
그렇다면 직업으로 공부를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것일까? 세상에는 돈이 목적이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대단한 부자를 꿈꾼다면 학교에 남아서 학자가 되는 것은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렇기에 공부는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지속할 수 없다. 연구를 하는 이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스스로 부여한 의미가 선명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학자로서의 소명의식이 없고 돈 벌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라면 다른 길을 알아봐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공부를 계속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학이라는 울타리는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단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면서 알게 되는 지식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확실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존재의식 같은 것이다. 그리고 윤리적 가치에 대해 고찰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즉 옳고 그름의 가치가 주변이나 상황의 의해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세운 원칙을 통해 세상의 일을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장소가 대학인 것이다. 어쩌면 윤리적 고찰이 스스로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4년 전의 나라는 사람의 모습 그대로 세상을 살았다면 늘 주변에 휘둘리고 실망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남들의 잘잘못을 못 본채 하는 사이, 나 자신의 잘못조차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공부하는 삶을 선택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다만 앞으로도 이 불확실성과의 싸움을 내가 견뎌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처음 공부를 결심했던 그 마음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기특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공부는 나로 하여금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에 대한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었고, 책 읽는 습관을 만들어 줬고, 높은 차원의 도덕적 기준을 바라보고 추구하도록 이끌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남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들을 늘어놓는 것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가치는 여기에 있다고 본다. '나'라는 존재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과 뱉는 말들로 만들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공부를 결심하고 4년이 지난 지금, 공부하겠다고 다짐한 일은 이미 내 평생의 소중한 자산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