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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성 Feb 20. 2022

올림픽, 이대로 괜찮을까?

성적보다는 즐기는 것이 먼저라는 거짓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22 베이징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지난 도쿄 하계올림픽과는 달리 금번 동계올림픽은 관중의 제한만 있었을 뿐,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올림픽의 창시자 쿠베르탱은 올림픽 경기의 진정한 의미는 승리가 아니라 참여라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신이 과연 현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운동선수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까? 대답부터 하자면 NO 다. 초창기에 아마추어리즘을 중시했던 (올림픽 경기 초기에는 상업적으로 돈을 버는 프로선수들은 참가할 수 없었다) 올림픽 정신은 이미 냉전시대에 접어들면서 국가 간 국력을 과시하는 승부의 세계로 변모한 지 오래이며, 9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의 NBA 등 프로선수들이 참가하면서부터 올림픽은 상업적/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시대의 선수들에게 있어 올림픽이라는 무대는 참여의 가치를 넘어서 선수로써 자신의 위상을 증명하고, 우리가 속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안전하고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한 시금석일 것이다. 참여의 가치만을 중시하기에는 시대적 가치가 다르다.


그래서 성적 이야기는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성적이 전부는 아니라지만 지난 도쿄올림픽에서 우리 대한민국 선수단의 성적은 1976년 이후 최하위 순위로 마무리하였고, 이번 동계올림픽 또한 역대 최소 금메달이라는 기록으로 현재 대한민국 동계스포츠의 현주소를 보여주었다. 선수는 후회 없이 경기를 치렀고, 최선을 다했다면 그걸로 됐다. 하지만 단순히 참여의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닌, 최고에 도전하고 실패했을 때 비로소 그 도전에서 참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세계의 벽에 부딪혀 성적을 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종목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불가능한 상태를 언제까지 불가능한 상태로 둘 것인가? 대한민국 스포츠의 현재를 다시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금번 올림픽을 돌이켜보면, 여전히 대한민국은 쇼트트랙 강국임을 입증했다. 많아야 금메달 2개를 예상했지만 그것은 한국 쇼트트랙의 기량이 뒤처짐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실력이 상향평준화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개최국의 이해할 수 없는 편파판정에도 불구하고 쇼트트랙은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했으며, 여전히 최강국이다. 스피드 스케이팅 또한 금메달은 없었지만, 500m, 1500m 그리고 메스 스타트 종목에서 골고루 메달을 획득했다. 지난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빙속 삼총사를 필두로 세운 대기록을 넘어서진 못했지만, 여전히 유럽 선수들이 지배하고 있는 스피드 스케이팅 무대에서 지난 평창 올림픽에 버금가는 성적을 내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아 마땅하다.


동계종목에서 여전히 전통적으로 잘하고 있던 빙상은 국내에서 아직 인프라가 탄탄한 편이고 세대교체도 비교적 잘 이루어지기 때문에 매번 올림픽마다 준수한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빙상 종목인 피겨는 김연아선수 이후 그 바통을 완전히 이어받을 다음 세대의 라이징 스타가 없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특히 설상 종목 및 썰매 종목은 인프라 부족 및 지원 부족 등 구조적인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이와 같은 외부적 여건이 받쳐주지 않는 종목들은 가끔 슈퍼 히어로 같은 재능을 가진 선수들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에 맞는 적절한 지원도 없을 것이기에 해당 종목 선수들이 경력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역대 최하위 성적이라는 이유를 선수의 노력 부족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특히 외부적 자원이 현저히 부족하고 필요한 종목들, 스키, 봅슬레이, 스켈레톤, 크로스컨트리, 스키점프, 스노우보딩, 등등. 현재 대한민국의 설상 및 썰매 종목 선수들을 위한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단순히 그들의 노고를 그린 영화를 만들고 그들의 도전 자체를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세계 최초라던지 불모지에서의 투지 같은 그럴듯한 말들로 꾸며 반짝 인지도를 높여주는 노력 말고 좀 더 근본적인 함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목표를 갖는 것은 언제나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중요하다


성적 지상주의를 우선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왜 쇼트트랙 경기에서 편파판정을 이겨내고 이루어낸 금메달에 열광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단순히 중국에 대한 반감 때문에? 너무 일차원적이고 정치적 접근이다. 개최국의 편파적 행태는 단순히 승리의 의미를 배가 했을 뿐, 우리가 열광한 그 심정의 전부는 아닐 거라 믿는다. 차라리 인간은 생존을 위해 높은 곳을 향해 오르는 쪽으로 진화했으며, 역경을 이겨내고 끝내 목적을 이루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믿겠다. 나 또한 이번에 펼쳐진 몇몇 쇼트트랙 경기와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들의 승리를 보며, 다시 선수로 돌아갈 순 없지만 다시한번 개인적인 목표를 확고히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희미하게 가지고 있던 희망들이 선명한 목표가 되었다. 목표갖는 것은 언제나 목표를 이루는 것보다 중요하다.


다만 고무적인 것은, 더 이상 패배한 선수에게 손가락질을 하거나, 죄인취급하는 시대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못해도 죄송할 필요 하나 없고, 안그래도 된다. 기죽지 마라. 하지만 "못해도 괜찮다" 는 말이 "잘할 필요 없다" 는 말로 통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따라서 늘 최고일 필요가 없다는 정확하지 않은 조언들이나, 참여가 최고의 선인 것 마냥 선택적으로 올림픽 가치를 무분별하게 적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내가 최고가 안될 지언정 최고의 존재는 항상 필요하다.


그러므로 성적보다 도전이 더 중요하다는 말은 우리가 선수들에게 해야할 말이라기 보다는 선수들이 경쟁의 압박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염두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선수들이 매스미디어의 콘텐츠로서 지나치게 소비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잘 해야할 필요가 없다면 무엇을 위해 도전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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