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드 마니아] 구름이 우리에게 말을 걸다
· 촬영 장소: 포르투갈 알가브 Portugal Algarve, "벌레 들어온다"는 아내의 구박을 받으며 창문 너머로
· 촬영 일자: 2022년의 마지막 날, 12월 31일
· 촬영 장비: 아들이 14로 업그레이드하며 보내 준 iPhone 12로
· 구름 영상 제목: '새해의 다짐', New Year's Resolution
지난 12월의 마지막 주는 분주했었다. 새해가 되면 어떤 삶의 태도로, 어떤 것들을 매일매일 실천하며 살아갈 것인가 계획하는 일로 내심 바빴다. 해마다 세웠던 원대한 계획들이 허망하게 결과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새해를 맞이하면서 신년 계획이나 새해의 다짐 정도를 작성하지 않으면 너무 계획이 없이 나태하게 새해를 맞이하는 것 같아서 연례행사나 꼭 챙겨야 하는 신년 맞이 제례 의식처럼 제법 심각한 얼굴로 이리저리 생각의 가지를 치곤 했다. 올해도 오래된 의식을 거행했다. 계획은 멋졌고, 마음은 단호했다.
하지만, 새해 첫날부터 엉망이 되었다. 도시화와 산업화의 편리와 효율에 길들여진 노쇠한 몸을 갑자기 자연친화적인 노동에 투입한 결과였다. 갑작스러운 괭이질에 허리가 아작이 난 것이었다. 그래서, 새해 계획표에 따라서 씩씩하게 활기차게 일어나야 할 새해 첫날에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엉금엉금 기어서 일어났다. 새해 첫날을 하루종일 찜질한답시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아기 포대기 마냥 허리에 감고는 좀비 영화에서 유연성을 상실한 좀비처럼 느린 화면으로 어그적 그리며 다녔다. 건강하게 활기차게 성실하게 살아갈 것을 선언한 새해의 연두교서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동네 친구 호세가 자신의 농장 모퉁이에 땅을 할애해 주었다. 농사를 한 번도 지어본 경험이 없이 지난 10월에 시험 삼아 포기가 큰 한국 배추와는 달리 '자세히 보면 겨우 배추인' 유럽식 배추와 작고 딱딱한 유럽식 하얀 무와 붉은 무를 몇 포기 심었다. 파종 이후에 오랫동안 방치한 게으른 농부 덕분으로 동네 달팽이들이 반쯤 회식을 하고 남겨 둔 나머지 반을 거두어들였다. 푸른 잎사귀만 보면 무조건 양념부터 버무리고 보는 한국사람답게, 대충 김치 양념에 버무려서 배추김치도 아니고 열무김치도 아닌 정체불명의 김치류가 만들어졌다.
책상머리에서 신년 계획으로 분주한 연말에 호세가 말했다.
"지금이 그 때다.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된다."
지금이 그때인 것은, 우기에 접어들어 수시로 비가 내리는 포르투갈의 겨울에 비가 오지 않아 땅이 적당히 건조하고 곧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할 것이라니 지금이 그 때라는 뜻이다.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된다는 것은, 5개월 이상 성장해야 하는 마늘의 특성상 더 이상 늦으면 알가브의 뜨거운 기온에 생육에 이상이 올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계획도 없이 12월 31일 이른 아침부터 호세의 농장으로 출동을 했다.
어느 날 호세가 식품 저장 창고를 자랑하며 내게 물었다.
"혹시 마늘을 먹느냐?"
마늘에 진심인 한국 사람에게는 상당히 도발적인 질문이었다.
"세계에서 마늘을 제일 많이 먹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여."
올림픽 메달이나 딴 것처럼 세계 1위 운운하며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신이 난 호세가 말을 이었다.
"이것은 포르투갈 토종 마늘이다.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마늘 종자다. 우리 집안에서 대를 이어 파종하고 수확을 해 온 종자다."
그리고, 무농약 자연 친화적인 농법을 지지하는 호세는 슈퍼마켓에 나와있는 크고 번지르한 채소와 과일들의 비밀에 대한 짧은 설교를 덧붙였다. 호세 덕분에 자연친화적인 농업, 퍼마컬처(Permaculture)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구호와 슬로건부터 만들고 계획하고 준비한 뒤에야 움직이는 책상머리 이론가인 나와는 달리, 호세는 몸부터 움직여서 시작하고 중간중간에 수정하고 보완하는 실천형 인물이다. 사실, 나는 몸을 쓰는 일에 느리고, 호세는 길게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한다.
호세에게는 자연친화적인 영농이니 퍼마컬처라고 부르는 구호와 슬로건은 없어도 30년 이상의 경험에서 나온 농사 철학이 있다. '사람의 몸에 좋은 농산물'과 '땅을 이해하고 땅의 힘을 믿는 방식'. 거창한 철학이나 이론으로 포장하지는 못하지만, 평생 살아온 자신의 경험대로 생각대로 농사를 하는데 내가 보니 자연친화적이고 퍼마컬처의 방식이다.
"올 해는 여기부터 여기까지 이 만큼만 심어봐라."
오렌지와 레몬 나무 아래의 긴 공터를 가리키며 마늘 종자를 주며 호세가 말했다.
첫째로 마늘을 한쪽씩 포기 나누기를 하였다. 한국의 6쪽 마늘에 비해서 씨알이 작고 크기가 다양하다. 맛과 향은 훨씬 강하다.
예전에 뒷 가든이 넓은 주택에 살면서, 길게 이어진 가든의 끝에 잔디를 걷어내고, 나무로 틀을 짜서 상추와 쑥갓과 같은 한국 채소를 재미 삼아 조금 길러 본 경험이 유일한 영농 경험이다. 그래서, 농사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머리도 모르고, 육체노동의 강도도 알지 못했다. 지켜보니, 괭이질의 동작을 최소한으로 하고, 선채로, 파진 골에 무성의하게 툭툭 마늘을 던져 놓는 호세의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 번의 괭이질도 진심을 다해서 내리치고, 골도 세상에서 제일 예쁜 모양으로 만들고, 마늘도 한 톨 한 톨 소중하게 고르고 집어서, 자로 잰듯한 간격으로, 허리를 숙이고, 다리를 쪼그려 예쁘게 내려놓았다.
"농사는 정성이다."
쓸데없이 힘을 많이 주고, 불필요한 동작이 많고, 쓸데없는데 신경을 쓰는 것이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일 것이다. 몸에 무리가 되는 불필요한 동작들로 부상이 발생하고, 효율도 떨어지고 효과도 없는 군더더기를 찾아내어 고치는 것이 숙련이고 프로가 되는 길임을 다시 깨닫게 되었다.
농사 프로인 호세의 무심한 괭이질과 무성의한 듯 보이는 파종법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추어인 나는 '불필요하게' 정성을 다한다고 쓸데없이 온 힘을 다해서 내려친 괭이질과, 정성을 다한다고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허리와 무릎을 지나치게 접고 굽힌 결과로 '아이고아이고'병을 얻게 된 것이다.
아이고아이고병 때문에 활기찬 새해를 맞이하지는 못하였지만, 나의 삶에서 '쓸데없이 힘을 주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불필요한 행동들은 없는지, 쓸데없이 신경 쓰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수 있는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 뜨거운 물주머니를 허리에 두르고 다니며 앉고 일어설 때마다 '아이고아이고'를 연발하고 있지만. 그래도, 올 해는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마늘 쫑으로 만든 장아찌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할 수 있을지 기대해 본다.
[이전에 쓴 구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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