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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재 Jul 06. 2024

알가르브, 알가르베, 알가브, Algarve, 포르투갈

홍길동에게 호부호형을 허하노라

홍길동


신분적 한계로 당시 사회에서 차별을 받았던 홍길동의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이 있다.

"나는 어찌하여 일신이 적막하고 부형(父兄)이 있으되 호부호형(呼父呼兄)을 못하니, 심장이 터질 것 같구나. 어찌 통한한 일이 아니리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고 '대감'으로 불러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이다.


홍길동과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물 없이 고구마를 3개쯤 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있다. 살고 있는 포르투갈 'Algarve' 지역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할 때다. 


외래어 표기법


한국어의 외래어 표기법에 인명, 지명의 표기 원칙이 제시되어 있다.


제4장: 인명, 지명 표기의 원칙

제1항 외국의 인명, 지명의 표기는 제1장, 제2장, 제3장의 규정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제2항 제3장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언어권의 인명, 지명은 원지음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Ankara 앙카라, Gandhi 간디
제3항 원지음이 아닌 제3 국의 발음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은 관용을 따른다. 
         Hague 헤이그(← 덴 하흐), Caesar 시저(← 카이사르)
제4항 고유 명사의 번역명이 통용되는 경우 관용을 따른다. 
         Pacific Ocean 태평양(← 퍼시픽해), Black Sea 흑해(← 블랙해)


'제3장: 표기 세칙'에 '제19절 포르투갈어의 표기'가 포함되어 있다. 외래어 표기법 중에 포르투갈어를 표기하는 방법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포르투갈어 표기법


국립국어원이 정한 외래어 표기법 중 포르투갈어 표기법은 2005년 문화관광부 고시 제2005-32호로 공표되었다.
한국의 포르투갈어 표기법은 리스본 방언 발음을 기초로 하고 있는 듯하다.


워러, 워터, 워어


한국에서, 제법 미국식 발음깨나 하는 듯이 'water'에 버터를 잔뜩 발라서 '워러'라고 발음을 했다. 영국에 도착하니 water는 그냥 '워-터'였다. 어느 지방에 가니 't'를 이상하게 꺾어서 삼키고는 '워어' 비슷한 발음을 했다. 발음에 큰 변형이 있을 것 같지 않은 순진해 보이는 't'마저도 이 지경이었다.


물랑 루즈, 물랭 루주


파리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카바레의 이름이며, 같은 이름의 영화도 있고, 같은 이름의 뮤지컬도 있다. '빨간 풍차'라는 뜻의 프랑스어 Moulin Rouge는 영어식으로 변형된 '물랑 루즈'가 가장 흔한 한국어 표시 방식이다.


간혹 '물랭 루주'라고 프랑스어에 근접한 발음으로 기록하는 경우도 발견할 수 있다. 입술에 바르는 '루즈'가 '붉은색'을 나타내는 프랑스어 '루주'에서 왔다는 둥 프랑스어 지식을 양껏 뽐내며 '물랭 루주'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물랑 루즈라고 하거나 물랭 루주라고 발음하고 표기하는 것과 상관없이 넘지 못할 프랑스어의 높은 산이 있으니 Rouge의 'R'이다. 한국어 표기법으로는 간단히 'ㄹ'로 치환되는 그 'R'이다.


R


고등학교 3년간 제2외국어로 불어를 배웠고, 불어에 대한 애정으로 전공을 선택할 때 불어과로 갈까 살짝 고민했고, 불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군복무 중에 방송통신대학교 불어과에 등록해서 2년을 다녔다.


제대로 불어 발음을 한 번 해 보겠다고 프랑스어로 된 본문을 소리 내어 읽기도 했다. 난공불락의 'R'을 발음하기 위해서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서 혀를 이리저리 꼬아가며, 바람을 이리저리 흘려보내가며,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를 만들어가며 애써 보았지만, 나의 R을 들은 프랑스 원어민들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가로젓고 웃을 뿐이었다. 어쩌라고.


교양과 취미 수준으로 딱 거기까지. 그래서 나도 편하게 '물랑 루즈'파다.


또 다른 R


포르투갈어 수업 시간에 복잡한 여러 언어의 R 발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포르투갈어 R이 프랑스어 R과 유사하지 않냐는 의견이 있었다. 같이 공부하던 프랑스어 원어민 수강생이 자신 있게 포르투갈어 R 발음을 했을 때 포르투갈어 강사는 "비슷하기는 한데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프랑스 학생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옛날에 내가 프랑스어 R을 흉내 내면서 지었던 난감한 표정 그대로.


결국 불어 R을 흉내 내지 못했던 나는 당연히 포르투갈어 R도 발음하지 못한다. 때로는 듣지도 못하고 구별해 내지도 못해서 무슨 단어인지 못 알아들을 때도 많다. 무슨 말인지 답답해하면서 애써 알아낸 단어 중에는 R로 시작되어서 내 귀에는 R 소리가 들리지도 않아서 전혀 엉뚱한 단어로 인지한 경우가 많았다.


Ronaldo


로날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한국어 표시이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어느 콜롬비아 야구 선수의 이름을 보면 '로날도'로 표기되어 있다.


포르투갈로 살짝 넘어와서, 노쇼로 한국에서 밉상을 넘어 공공의 적이 된 포르투갈 축구 선수의 이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Cristiano Ronaldo. 한국어로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로 표기하고 있다. '로날도'가 '호날두'가 되었다.


남미에서 유일한 포르투갈어 사용국가인 브라질로 나라를 옮겨보자. 두 번의 월드컵을 브라질에게 안겨 준 유명한 축구 선수 이름은 'Ronaldo'이다.



한국어 표기는 '호나우두'이다. '로날도'가 '호날두'가 되고 급기야 '호나우두'가 되었다.


포르투갈어 R, ㄹ이 아닌 ㅎ?


호날두와 호나우두에 공통적으로 적용된 표시가 'R'이 'ㅎ'이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어 R은 한국어 ㅎ으로 변환할 수 있다고 짐작하면 곤란하다. 정확히는 'ㅎ' 소리와는 다르다. 표시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한글이 ㅎ일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내 귀에는 소리가 안 들릴 때도 많다. 요청해서 또박또박 발음을 해 달라고 하면 분명히 음가가 있다. 프랑스어 Rouge가 '루주'도 아니고 '후주'도 아닌 그 어디쯤인가에 있는 발음이듯이, 포르투갈어 R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어디쯤인가에 있는 발음이다. 아이고 골치야.


고유의 발음을 반영


"외래어 표기법에 그 표기 기준이 밝혀져 있지 않은 언어권의 인명, 지명도 각기 그 언어 고유의 발음을 반영하여 적어야 한다는 원칙(제4장 1절 제2항)"이 있다. 그 나라에서 발음되는 대로 가능한 반영한다는 뜻이다. 그런 관점에서 Ronaldo가 로날도가 되고 호날두가 되고 호나우두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포르투갈어는 외래어 표기법에 포르투갈어 표기 세칙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Algarve


'포르투갈어 자모와 한글 대조표'에 따르면,


a: , 보기:Almeida 알메이다, Egas 에가스

l: (모음 앞), ㄹㄹ, (자음 앞, 어말) ㄹ, 우, 보기: Lisboa 리스보아, Manuel 마누엘, Melo 멜루, Salvador 사우바도르(브)

g: (모음 앞), ㅈ, (자음 앞, 어말)그, 보기:Saramago 사라마구, Jorge 조르즈, Portalegre 포르탈레그르, Guerra 게하

a: , 보기:Almeida 알메이다, Egas 에가스

r: (모음 앞) , ㅎ, (자음 앞, 어말) , 보기:Freire 프레이르, Rodrigues 호드리게스, Cardoso 카르도주

v: (모음 앞), (자음 앞, 어말)ㅡ, 보기:Vicente 비센트, Oliveira 올리베이라

e: 에, 이, , 보기:Elvas 엘바스, escudo 이스쿠두, Mangualde 망구알드


한글 대조표의 규칙에 따르면, 'Algarve'의 한국어 지명 표시는 '알가르브'이다.


알가르브!


간혹 '알가르베'라는 지나친 표시도 있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맞추어 대부분 '알가르브'로 표시하고 있다.


알가르브?


포르투갈어 자모와 한글 대조표 규정에 따라서 Algarve를 '알가르브'로 표기한다는 규칙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내가 홍길동과 같은 심정이 된 것은, 현지에서는 아무도 '알가르브'로 발음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Algarve라는 지명을 한글로 표기할 때마다 혼란스럽고 갈등이 생긴다는 점이다. 현지에서는 알가르브로 부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데 표기 규칙에 맞게 알가르브로 표기해야 할지, 아니면 현지에서 사용하는 발음으로 표기해야 할지 늘 갈등하게 된다는 점이다.


'서울'이 영어로 표시하면 'Seoul'이어서 어떤 나라에서 정한 대조표 규정에 따라서 그 나라에서는 '세오울'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하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한국에 와서 외국인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힘을 주며 '세오울은 어디로 가나요?'라고 묻는 상황을 보는 듯한 불편한 안타까움이 있다.


실제로는 어떻게 발음되나


Algarve는 복잡한 다른 지역의 이름보다 부르기가 쉬운 지명이다. 한국어 표시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지점은 가운데 있는 우리의 문제아 'r'이다. 한국어에서는 r이 자음 앞에 위치할 때는 '르'로 발음한다는 규칙 때문에  

아 '알가르브'의 형식으로 표시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 발음은 호날두(Ronaldo)의 R처럼 무성음 'ㅎ'으로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물론, '알가흐브'의 형식으로 발음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알가-브' 형식처럼 '가'를 조금 더 길게 발음해 주면 되겠다. 마치 R이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알가브'로 발음해도 괜찮다.


알가브


Algarve를 '알가르브' 대신에 '알가브'로 발음한다면, '세오울'보다는 '서울'에 더 가까울 것이다.


포르티망


우리나라의 전남과 경남을 잇는 남쪽 지역에 해당되는 지역이 알가브 지방이다. 동서로 길게 이어진 알가브의 가운데쯤 위치해 있는 도시가 알가브 지역 서쪽의 중심 도시인 Portimão이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표시된 도시의 이름은 '포르티망'이다. 역시 현지에서는 이렇게 발음하지 않는다.



포티망, 또는 포티마오


'가운데 있는 'r'을 잊어버리자'라는 규칙을 적용하면, '포르티망' 보다는 '포티망'이 더 현지 발음과 유사하다. 끝에 있는 '-mão' 때문에 난감할 수 있는데 '-망~' 또는 편하게 '-마~오' 형식으로 발음해 주면 된다. 그냥 편하게 '포티마~오'로 발음해도 된다.


공항을 뜻하는 영어 airport를 영국식 발음으로 한국어로 표시하면 '에어트'가 아니고 '에어-포-트'가 적절한 것과 동일하다고 기억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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