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를 읽고
내 아이를 기르기 전, 아이들을 가르치기만 할 때가 있었다. 약 7년 정도 되는 시간 동안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보고 점수화시키던 시절이었다. 한 학년에 여섯 개의 학급이 시험만 끝나면 연구실에 함께 모여 채점을 했다. 채점이 끝나면 각 학급에서 성적을 입력하고 통계 내어 부장 선생님반에 취합한다. 이 시간이 가장 떨리고 조마조마한 시간. 그날 밤의 기쁨 주인지, 고통의 소주 한 잔인지가 나누어지는 시간. 그러고 나서 부장님 반에 가면 여섯 개의 학급 등수가 주르륵 나온다. 어느 해 우리 반은 늘 꼴찌여서 내 자존감이 무너지고 내가 무엇을 잘못 가르쳤는지 계속 되뇌는 고통의 시간을 겪기도 했다. 아니면 어느 해 우리 반은 1, 2등을 늘 기본으로 해서 입꼬리가 승천하고 어깨뽕이 가득 차 내려올 생각을 하지 못하던 해도 있었다. 한참 욕심이 많을 때 나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해야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모두 인생을 좀 더 수월하게 살 수 있길 바랐다.
내가 좋아하는 색깔은 노란색이다. 그 밝고 환한 행복의 빛깔을 난 사랑 한다. 그러다 색깔 하나가 더해졌다. 바로 초록이다. 코로나19라는 긴 터널의 시작 무렵부터 초록이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인터넷 서점 여기저기 베스트셀러를 둘러보며 초록 초록한 표지를 가진 책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도 예쁘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그냥 그렇게 흘리다 스카프 매는 법을 유튜브에서 검색하며 또 작가님을 뵈었다. 그러다 이번엔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만났다. 그렇다면 읽어야지.
그 후 2014년, 나는 첫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을 하였다. 아들이었다. 조심성이 많은 아이였다. 처음으로 티비장을 잡고 일어섰다가도 엉덩이가 부서질까 살포시 앉는 아이였다. 돌이 넘어도 걸으려고 하지 않아 조바심이 나는 애미는 손을 잡고 추운 겨울에도 햇볕만 좋으면 아파트 놀이터를 빙빙 돌았었다. 좋게 말해서 조심성이 많은 것이고, 화가 나고 속이 터질 때는 겁쟁이, 겁보, 쫄보였다. 1학년이어도 자기 방에서 놀다가도 불현듯 엄마를 찾는 아이. 아빠가 집에 함께 있어도 엄마가 혹시나 혼자 나갈까 봐 겁내는 아이. 엄마가 약속이 있어 백만 년 만에 나가면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 학교에서 집이 5분 거리임에도 "엄마가 데리러 왔으면 좋겠어."라며 당당하게 요구하는 아이다. 손 끝이 야무지지 않고 소근육 발달이 덜 되어 아직 젓가락질을 못하는 아이. 로봇과학을 좋아한다면서도 로봇 조립할 때 다른 아이의 도움을 좋아하는 아이.
하필 주변에 동갑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많아 내색은 못해도 마음은 짰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줄줄 읽고 수학 연산을 어디까지 하던데. 다른 아이들은 운동 신경이 좋아서 벌써 두 발 자전거를 잘 타던데. 다른 아이들은 줄넘기를 잘하던데. 다른 아이들은 알아서 먼 거리도 혼자 집에 잘 가던데. 아이를 키우는 여덟 해동안 아이를 정말 많이 사랑했지만 정말 많이 비교도 했다. 내 아이가 좀 더 잘해서 인생을 수월하게 살았으면. 학교 생활을 편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 70이라면 30은 아이를 대리로 한 나의 똥존심이지 않았을까.
물론 저 위에 있는 아이의 단점은 다른 곳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했다. 늘 엄마 곁에 붙어있기에 손을 놓칠 염려가 없었고 조심성이 많은 아이여서 덜 다치고 덜 속상했다. 자신이 못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누구에게든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할 줄도 안다. 하지만 불쑥불쑥 찾아오는 뒤처짐에 관한 걱정은 내 눈을 가렸다.
밀라논나, 장명숙 작가님의 책을 읽으며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어떤 태도가 나를 결정할지 한 챕터마다 몇 번씩 들여다보며 생각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엄친아에 관하여'에서
- 내 자식을 내 친구 자식과 비교하기 전에
나부터 내 친구와 비교해보자!
사실 비교할 가치가 없다. 그는 그고 나는 나니까. -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밀라논나 이야기/ 장명숙 지음/ 김영사 발췌)
이 구절이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쳤다. 그는 그고 나는 나니까. 내 아이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이인데. 마음이 따뜻하고 순수한 아이를 느려서 걱정, 순수해서 걱정... 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며 걱정 걱정을 했던가! 소금장수와 우산장수의 어머니처럼 어리석게 걱정만 하고 살 것인가! 사실 아이는 이미 학교생활을 수월하게 하고 있다. 여자 친구, 남자 친구 가리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다. 늘 학교 가는 게 즐겁고 담임선생님이 최고라고 말한다. 나만 수월하지 않았던 거다.
얼마 전 높은 미끄럼틀이 설치되어 있는 놀이터에 다녀왔다. 작은 아이는 벌써 미끄럼틀을 여러 번 타고 내려왔다. 아들은 세 개의 사다리에서 2번째 사다리를 올라가지 못했다. "할 수 있어. 안전하니까, 올라가 봐!"라고 수없이 외치며 아들이 담력이 세지길, 이 정도쯤은 다른 아이들처럼 거뜬히 올라갔다가 즐겁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길 바랐다. 아들은 몇 번을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다시 조금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나의 내려오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잽싸게 내려오는 아이. 그러다 한참이 지나고 조금 낮은 미끄럼틀에서 시간이 지나감을 아쉬워하며 행복하게 놀았다. 아이가 행복하고 즐거우면 되는데. 아이가 좀 더 재미있는 미끄럼틀을 탔으면 하는 마음이 아니라 저 정도는 거뜬히 탔으면 하는 또 나의 똥존심이였을까.
이 욕심 많은 엄마는 욕심을 버리는 연습부터 해야 할까 보다. 나는 언제나 아이가 행복하길 바라는데.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가 안 되는 엄마인가 보다.
좀 더 비워야겠다.
내 아이만 오롯이 바라봐야겠다.
나는 언제나 내 아이가 지금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