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시리즈 (1)
어떤 시간들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말이 된다.
인생의 중반을 넘기고 보니, 비로소 뒤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나' 라는 인생은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그 모든 시간이 결국 '나' 라는 존재로 빚어져 가는 과정이었음을. 그때의 나는 무엇을 향해 그렇게 애썼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살았으며, 무엇을 잃을까 봐 그토록 간졀했을까.
지금 나는 그 질문들 앞에 서서, 지나온 삶을 말로 불러내고, 흩어진 나를 다시 한 번 '나'로 모아보려 한다.
그녀의 초기 환경은 지독한 방임이었다. 방임 속에서 자란 아이가 익힌 유일한 생존법은 스스로를 지우는 것이었다. 욕구도, 고통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도록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그것이 그녀가 아프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어기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친구들이 대학이라는 활기찬 세계로 흩어질 때, 그녀는 작은아버지의 주선으로 어느 화장품 회사의 연구실 보조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도구를 만졌는지에 대한 기억은 안개처럼 희미하다. 감각이 죽어 있던 그녀에게 그 공간은 아무런 색채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는 한 장면은 바로 1층 식당에서 2층 연구실로 이어지는 그 계단이다.
점심시간, 1층 식당은 공장 직원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와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그들은 살아 있었고,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각자의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연구실 직원들과 함께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녀는 다시 그 계단을 올라야 했다.
차갑고 딱딱한 회색빛 돌계단. 한 칸, 한 칸 그 계단을 밟고 올라갈수록 아래층의 생생한 소음은 멀어졌다.
2층으로 향하는 그 길은 마치 산 자의 세계를 떠나 다시 정지된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았다. 그녀는 힘들다는 감각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공허 속에 있었다. 왜 힘 이드는지, 무엇이 자신을 이토록 무겁게 짓누르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침잠을 깨뜨린 것은 점심시간, 먼지 낀 연구실 창밖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타구음이었다.
“팡! 팡!”
공장의 남자 직원들이 밥을 먹고, 조를 나누어 배구를 하고 있었다. 그 소리는 그녀의 잠든 심장을 직접 가격하는 듯했다. 정지된 채 미동도 않던 온몸의 세포들이 그 진동에 미세하게 반응하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홀린 듯 1층으로 내려가 코트 가장자리에 섰다.
유난히 공을 잘 내리꽂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가 뛰어올라 허공을 가를 때마다 억눌려 있던 그녀의 생명력이 요동쳤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그가 가진 압도적인 '힘'에 대한 매료였다. 깊은 공허 속에 갇혀 있던 자신을, 단숨에 낚아채 줄 수 있는 구원자. 단순히 숨을 쉬는 '생존'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 있게' 해줄 것 같은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 순간부터 그녀의 열병은 시작되었다. 죽지 않기 위해 선택한, 그녀만의 처절한 생명 신호였다.
연구실의 소독 냄새를 뒤로하고, 친구들과 미팅을 나가는 시간은 그녀에게 단순한 유흥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상과의 '연결'이었다. 친구들 중 자신만 홀로 취직을 했다는 사실은, 세상으로부터 끊어져 나간 것 같은 소외감을 주었다. 그들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 그녀는 대학생이라는 가면을 섰다.
“응미과에 다니고 있어요.” 고등 시절 미술에 소질을 보였던 그녀에게는 그 거짓말은 이상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미팅 자리에서 내뱉는 거짓말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들켜서 수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그녀 안에 잠들어 있던 세포들을 거칠게 깨웠다. 너무 무서워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그 두근거림만이 그녀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자극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삶에 대한 '맛'을 보는 시간이었다. 흰 가운에 박제된 모습이 아니라, 낭만과 자유가 허락된 여대생의 삶. 그녀는 간절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화사한 웃음 뒤로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만큼이나,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혐오가 비례해서 커졌다. 자신을 잃어버린 연구실과 스스로를 속여야 하는 미팅 자리 사이에서, 진짜 그녀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해 연말, 참을 수 없는 갈망에 휩싸인 그녀는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는 배구공을 튀기던 그 남자의 자취방이었다.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자신을 향한 '도발'에 가까웠다. 그녀는 자신을 온전히 던져버리고 싶었다. 스스로를 망가뜨려서라도, 아니 완전히 버려서라도 이 지독한 무기력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역설적이게도 죽을 만큼 자신을 버려야만 비로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높은 돌담 위에 자리한 작고 초라한 방. 그 문 앞에서 그녀는 멈춰 섰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시큼하고 눅눅한 생활의 냄새와 싸구려 화장품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문을 두드리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찰나의 순간, 그녀의 사고가 앞을 가로막았다. 이 문을 여는 순간, 배구공을 튀기던 영웅은 사라지고 또 다른 남루한 현실에 갇히게 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한순간의 열병으로 덮어버리기엔 그 냄새는 너무나 비릿했고, 그녀의 이성은 차가웠다.
그녀는 가로등 옆 담벼락 밑에서 한참 동안 그의 방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그녀는 속절없이 울었다. 무엇이 그토록 서러운지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은 뺨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생애 가장 뜨거웠던 일탈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이자, 생존을 위해 '살아있음의 욕구'를 스스로 꺾어버린 자가 느끼는 지독한 상실감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그녀는 다시 자신의 감정과 절연한 채, 무채색의 세상으로 돌아가 성실한 기계처럼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녀의 첫 번째 열병은 그렇게 택시 안에서 차갑게 식어갔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포기하고, 어른이라는 무거운 이름표를 단 채 세상 속으로 숨어드는 서글픈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