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이야기 시리즈(2)
결혼은 그녀에게 보상이어야 했다. 19살의 그 차가운 돌계단과 소독 냄새나는 연구실, 그리고 자취방 앞에서 흘렸던 눈물을 모두 덮어줄 신의 응답이어야 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목동의 아파트라는 조건은 그녀를 비루한 현실에서 건져내 줄 튼튼한 닻처럼 보였다. 이제야 비로소 정박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결혼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저녁, 두 사람은 제법 분위기 있는 음식점에서 마주 앉았다. 목동 아파트에서의 삶을 꿈꾸며 계획을 읊조리는 그녀를 남편은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즐거워야 할 대화 속에서 그는 자꾸만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망설였다.
“우리... 목동 아파트는 안 될 것 같아.”
상황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대출과 세입자, 돈을 더 모아야 한다는 이야기들. 순간 그녀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그가 속인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기분 나쁜 찜찜함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 불길한 신호를 애써 외면했다. 열아홉의 그 겨울, 자취방 문 앞에서 돌아섰던 그때의 용기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이미 수많은 지인에게 알린 결혼이었고, 무엇보다 스스로 만들어낸 ‘안전한 항구’라는 환상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안의 불편한 진실을 꾹꾹 눌러 담으며 자신을 설득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눈을 스스로 가린 채 신기루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결혼 후 마주한 현실은 예상보다 훨씬 참담했다. 남편의 소유라 믿었던 목동 아파트는 손에 닿지 않는 별이었고, 시댁은 2층 주택의 안방에 월세로 얹혀사는 처지였다.
쏟아지는 허상들 앞에서 배신감보다 먼저 찾아온 것은 지독한 자책이었다.
‘내가 선택했어. 내 어리석음 때문이야. 다 내 탓이야.’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찜찜한 예감을 무시하고 이 길을 선택한 것이 바로 그녀 자신이었기에,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모든 짐을 홀로 짊어졌다. 당장이라도 끝내고 싶었지만, 그때 첫아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작은 생명의 움직임은 도망치려던 그녀의 발목을 붙잡는 무거운 족쇄인 동시에, 이 지옥 같은 현실을 버티게 하는 유일한 당위성이 되었다.
남편이 좋은 직장을 내려놓고 사업을 하겠다고 조심스럽게 말 했을 때, 친정 쪽에서 돈을 끌어다 사업자금을 댄 것도, 결국 그 때문이었다.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만큼은, 자신이 겪은 결핍과 방임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갈아 넣어 가짜 구원을 진짜 현실로 바꾸기 위한 긴 불안의 터널 속으로 들어섰다.
내 선택을 ‘진짜’로 만들어야 했다. 그 절박함은 그녀를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쉼 없이 채찍질하는 동력이 되었다. 친정에서 끌어온 남편의 사업자금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릴 것 같은 불안, 망하면 어쩌나 하는 초조함이 매일 밤 그녀의 잠자리를 무겁게 했다. 만연한 불안이 그녀의 모든 삶의 기저에 깔려있는 시간이었다.
남편의 사업은 다행히 자리를 잡아가는 듯 보였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만 살 수 있었다. 손에 쥐어지는 현찰이 돌기 시작했고 생활에도 여유가 생겼다. 시댁 식구들을 건사하는 짐마저 기꺼이 짊어졌다. 마땅히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몫이라 여기기로했다.
하지만 생활의 여유가 생길수록 그녀 안의 불안은 기이하게 몸집을 불렸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으나, 그녀는 매일 밤 형체 없는 불안에 휘둘리며 잠들어야 했다. 9년 전 그 레스토랑에서 느꼈던 찜찜함은 한 번도 그녀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 불안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신을 달래기 위해 더 악착같이 가정을 지켜 내야만 했다.
그해 겨울, 내면에 쌓인 지독한 공포에 대한 보상처럼 그녀는 옷 한 벌을 샀다. 선명하고 우아한 빛깔의 보라색 무스탕이었다. 동생에게 거금을 주고 샀다며 자랑을 늘어놓을 때, 그녀는 잠시나마 불안을 잊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남편이 출근한 얼마 후, 낯선 경찰이 집으로 찾아왔다.
"교통사고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경찰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이 얼마나 다쳤나요? 죽었나요?“
질문하는 그녀는, 보라색 무스탕과 발에 팽팽하게 걸리는 쫄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휘감아 우아한 일본식 머리꽂이를 꽂고 있었다.
그 질문의 답이 자신의 남편이 될 줄은, 그리고 이 화려한 옷차림이 상복(喪服)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구원자인 줄 알고 붙잡았던 남자는 그렇게 허망한 소식 하나로 그녀 곁을 떠났다. 그녀의 환상은 그렇게 보라색 무스탕의 소매 끝에서 차갑게 부서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