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반 에이크 / 로히어르 판 데르 바이던
르네상스는 흔히 피렌체를 중심으로 꽃피운 고전 부흥의 시대라 여겨지지만, 유럽 전역에서 그 흐름은 각기 다른 색채로 전개되었다. 북유럽, 특히 오늘날의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지역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르네상스가 태동했다. 이탈리아가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조각·건축·철학 유산을 재발굴하며 인문주의에 몰입했다면, 북유럽은 정교한 관찰력과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한 회화 중심의 르네상스를 열어젖혔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처럼 예술을 사회 권력과 결합한 후원자는 북쪽에도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은 정치와 예술, 종교와 사회를 하나로 엮은 인물이었다.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군주인 필리프 선량공의 재상이자 궁정 기획자, 그리고 북유럽 르네상스의 문화 설계자였다.
그가 짜놓은 문화 전략 속에서 얀 반 에이크와 로히어르 판 데르 바이던은 단순한 화가가 아닌 국가적 시선의 구현자가 되었다. 이 장은 예술의 뒷면에서 진짜 ‘큐레이터’ 역할을 한 관료, 롤랭의 생애와 안목, 그리고 그가 그려낸 예술적 풍경을 따라간다.
15세기 초, 유럽의 정치 지도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 라인강과 루아르강 사이에 자리 잡은 부르고뉴 공국(Duchy of Burgundy)은 지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중심에 있었다. 이 공국은 오늘날의 프랑스 동부(부르고뉴),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까지 걸쳐 있었고, 강력한 상업 도시들과 교역로를 품은 ‘유럽의 심장부’였다. 제후의 작위는 프랑스 국왕의 봉신으로 유지되었지만, 사실상 독립된 권력을 행사했고 한때는 파리보다도 더 화려한 궁정을 자랑했다.
이 부르고뉴를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 바로 필리프 선량공(Philip the Good, 재위 1419–1467)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실질적인 정무를 도맡으며 제국의 행정과 문화의 기초를 설계한 인물이 바로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이다.
니콜라 롤랭은 1376년 프랑스 동부의 소도시 오통(Autun)에서 태어났다. 귀족도, 왕족도 아닌 지방의 작은 가문 출신이었으나,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을 수학하며 공직 사회에 입문했다. 당시 유럽에서 법률가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닌, 국가 경영의 핵심 설계자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적 경로를 가진 존재였다. 그는 처음에는 디종에서, 이후 부르고뉴 궁정에서 행정관으로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그의 출세의 결정적 전환점은 1422년, 필리프 선량공에 의해 부르고뉴 공국의 대법관(Chancelier)으로 임명된 사건이다. 대법관은 오늘날의 총리 혹은 비서실장 격으로, 법제와 문서, 외교와 재정 모두를 총괄하는 막강한 직위였다. 롤랭은 정치적으로는 충실한 관료였고, 전략적으로는 뛰어난 설계자였다. 필리프가 꿈꾼 ‘대 부르고뉴 제국’의 야심을 행정 언어로 번역하고, 외교 전략으로 실행한 이가 바로 그였다.
그러나 롤랭은 단순한 권력 중개자가 아니었다. 그가 돋보이는 지점은 제도와 문화, 신앙과 행정의 교차로에서 균형 감각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속한 체제가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문화적 서사, 예술적 기호, 종교적 정당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법률가로서의 이성과 행정가로서의 현실감각, 그리고 신앙인으로서의 구원에 대한 감수성이 복합적으로 작동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예술과 신앙을 단지 장식이나 사치가 아닌, ‘국가 설득의 도구’로 바라보았다. 그는 궁정의 미술 프로젝트, 필사본 제작, 교회와 수도원의 후원 등에서 전례 없는 규모의 개입을 감행했다. 얀 반 에이크, 로히어르 판 데르 바이던 등 동시대 최고의 화가들과의 인연은 단순한 그림 주문을 넘어, ‘정치적 상징의 시각화 작업’에 가까웠다.
그의 영향력은 문화 영역뿐 아니라 국제 정치에서도 확연했다. 그는 프랑스 왕실과의 외교, 영국과의 교섭, 잔 다르크 재판에의 관여, 신성로마제국과의 균형 외교 등 굵직한 사건들마다 중심에서 실질적 결정을 내린 인물이었다. 때로는 국왕보다도 더 자주 회의에 참석했고, 문서에는 그의 서명이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롤랭은 결코 그림자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상’했다. 자신을 성모 앞에서 기도하는 존재로 그린 《Virgin and Chancellor Rolin》, 프랑스 본느 자선병원에 걸린 《최후의 심판》 속 심판받는 인간 군상은 단지 신앙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권력을 가진 인간으로서, 죽음과 구원 앞에서 스스로 어떤 존재로 남고자 했는지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는 예술의 기획자이자, 권위의 건축가였고, 궁정 미술의 진정한 설계자였다. 얀 반 에이크의 빛, 로히어르 판 데르 바이던의 눈물, 그리고 부르고뉴 궁정의 아름다움 뒤에는 늘 ‘니콜라 롤랭’이라는 이름 없는 설계자의 손길이 있었다.
15세기 북유럽 회화의 탄생에는 한 화가의 이름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 그는 단지 기술적으로 정밀한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회화라는 매체를 통한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연 시각 혁신자였으며, 북유럽 르네상스라는 독자적 미술 전통을 여는 결정적 인물이었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상징 묘사를 넘어, 현실 세계의 관찰과 내면의 질서를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예술임을 증명한 시도였다. 그리고 그 여정의 한가운데에는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이라는 정치적 후원자, 문화 설계자가 있었다. 이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얀 반 에이크는 플랑드르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형 후베르트와 함께 겐트 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초기 활동에 대한 기록은 적지만, 1422년에는 이미 헤이그에서 홀란트 백작 요한 3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유럽 궁정에 알려지게 된 것은 1425년, 부르고뉴 공국의 필리프 선량공의 궁정화가 겸 외교 사절단원으로 임명되면서부터였다.
이 인사 발탁의 배후에는 당시 필리프의 최측근이자 실권자였던 니콜라 롤랭의 추천과 중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정과 외교를 총괄하던 롤랭은 단지 회화 기술이 뛰어난 화가를 찾았던 것이 아니라, 궁정의 위엄과 권위를 시각화할 수 있는 회화 언어의 발명자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반 에이크는 그 기대에 완벽히 부합했다.
롤랭은 필리프에게 반 에이크의 외교적 감각과 예술적 재능을 모두 보고하며, 그를 단순한 그림 제작자가 아닌 ‘권력의 시각적 해석자’로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반 에이크는 외교 임무를 겸하며 이탈리아, 포르투갈, 프랑스를 오가며 국제적 감각과 예술 교양을 넓힐 기회를 얻었다. 이것은 동시대 화가로서는 거의 유일한 경험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인《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해석의 전쟁터’다. 그림 속 부부는 정중한 자세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으나, 이 단순한 동작 뒤에는 신 앞에서 맺는 계약의 의미, 부부의 성 역할, 상속과 권위의 문제가 교차한다.
방 안 곳곳에 배치된 사물들, 불이 켜진 샹들리에, 벽에 걸린 거울, 개, 과일, 융단과 나무 마루 등은 각각 성스러움, 충절, 풍요, 위생, 신분 등을 상징한다. 특히 거울은 작은 원형 테두리에 10개의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이 세속적 공간을 일종의 영적 무대로 전환시킨다.
무엇보다도 ‘Johannes de Eyck fuit hic 1434(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라는 서명은 그가 단순히 그리는 자가 아니라 화면의 목격자이자 서술자, 나아가 화가로서의 자아를 공공에 드러내는 첫 근대적 인물임을 선언한다. 이 한 작품으로 반 에이크는 화가라는 직업에 새로운 위상을 부여했고, 북유럽 회화의 사회적 잠재력을 증명해냈다.
여기에는 롤랭의 간접적 조력도 숨어 있다. 부르고뉴 궁정은 플랑드르 지역의 상업 계층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으며, 롤랭은 이탈리아 상인 네트워크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아르놀피니와 같은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 계급이 부르고뉴 궁정에 후원을 요청하거나 화가를 추천받는 일은 흔했고, 반 에이크는 그 신뢰 사슬의 정점에 있었다.
반 에이크와 롤랭의 직접적 협업이 가장 강렬하게 드러나는 작품은《성모 마리아와 롤랭 장관》이다. 롤랭은 이 그림을 단순한 신앙의 표현으로 주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존재를 예술 속에 구축하기 위한 전략적 의뢰로 접근했다. 롤랭은 반 에이크의 시선이 정치 권력과 신적 상징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반 에이크는 그 기대를 뛰어넘었다.
롤랭은 성모와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지만, 자세는 지나치게 당당하고 고개는 거의 수평으로 마주한다. 그의 의복은 붉은 벨벳과 모피로 장식된 고위 관료의 정장이고, 배경 도시 풍경은 단지 아름다움을 위한 설정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지평을 암시하는 자아의 확장이다.
성모는 상징적으로 중앙에 배치되지만, 두 인물은 거의 대등한 구도로 맞서 있으며, 이 구도의 평형은 신 앞에서조차 인간이 자기 자리를 인식하고 드러내고자 하는 르네상스적 욕망을 상징한다. 천사가 들고 있는 왕관은 성모에게 바치는 헌사이지만, 동시에 그 장면은 롤랭의 시선과 동일 선상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는 그가 ‘성스러운 순간에 동참한 자’이자 ‘자기 구원의 현장에 관여하는 정치적 존재’로 연출되었다는 의미다.
이 작품은 화가와 후원자의 협업이 어떻게 회화를 정치적 언어로 발전시킬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모델이며, 성화의 전통적 위계를 교란하는 새로운 자의식의 산물이다. 반 에이크는 롤랭의 요청을 수동적으로 수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의 연출을 시각적으로 치밀하게 설계한 공동 저자였다.
이 그림이 완성된 이후, 반 에이크는 더 이상 한 사람의 궁정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왕실의 화가’이자, ‘권력의 초상’을 그리는 유럽 최고의 시각 해석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롤랭은 그 이미지 구축의 조력자이자, 예술을 권위의 언어로 활용하는 정치적 전략가였다.
한 편, 반 에이크의 예술 세계가 가장 정교하게 구현된 작품은 형 후베르트와 함께 완성한《겐트 제단화》이다. 이는 필리프 선량공 체제 아래 진행된 대규모 프로젝트였으며, 국가와 종교, 예술이 결합한 상징적 작품이었다.
《겐트 제단화》는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종합 예술이라 할 수 있다. 12개의 패널로 구성된 이 거대한 제단화는 형 후베르트 반 에이크가 구상하고, 얀 반 에이크가 완성했다. 성경의 구속 서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회화의 시학, 신학, 도상학, 기술이 총동원된 시각적 교향곡이다.
닫힌 상태의 외부 패널은 구약의 예언자와 수태고지를 받은 성모, 세례 요한, 도서관 속 독서하는 예언자들이 그려져 있으며, 인물들의 자세와 조형은 정적이다. 그러나 문이 열리면 중앙 패널에서는 찬란한 ‘어린 양의 숭배(Adoration of the Mystic Lamb)’ 장면이 펼쳐진다. 신비한 성스러움 속에서 수많은 인물이 집결하고, 구속과 구원의 희생이 구현된다.
이 장면은 단지 교리적 설명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회화 안에서 인간과 신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다. 각 인물의 얼굴은 개별적으로 묘사되었고, 자연 묘사와 의상, 보석, 식물 하나하나에 반 에이크 특유의 관찰력이 깃들어 있다. 빛은 그림 전체를 통일하며, 신의 존재가 빛이라는 형상으로 체감될 수 있도록 유화 기법이 극대화되었다.
겐트 제단화는 이후 수세기 동안 유럽 제단화 회화의 모델이 되었으며, 현대의 시각문화에서도 여전히 상징적 기준점으로 인용된다. 반 에이크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한 종교화를 넘어 회화의 시공간적 총체성을 실현한 예술가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수태고지》는 얀 반 에이크의 보다 내면적인 면모, 즉 정적이면서도 영적인 감응을 자아내는 회화의 세계를 응축한 걸작이다. 고딕 양식의 교회 내부로 보이는 공간에 대천사 가브리엘과 성모 마리아가 마주 서 있다.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있으며, 그녀의 손은 책 위에 놓여 있다. 이는 단순히 경건한 장면이 아니라, 신의 말씀이 문자에서 신체로 옮겨가는 순간을 포착한 구도이다.
반 에이크는 고딕 아치, 스테인드글라스, 마룻돌의 반사광 등 수많은 시각 요소를 활용하여 공간의 깊이를 극대화했다. 특히 성모의 옷자락에 스며든 빛과 천사의 날개에 반사된 광채는 신비와 과학이 만나는 순간을 회화로 형상화한 결과다. 가브리엘의 말 “Ave gratia plena(은총이 가득한 이여)”는 화면 위에 금색 글자로 새겨져 있고, 이 문장은 시각적 장식이면서 동시에 ‘말씀의 육화’를 시각화한 장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빛의 회화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채, 마룻돌의 윤기, 천사의 날개에 비친 음영, 성모의 옷자락에 스며든 광채 등은 모두 실제 광원에 근거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회화적 빛’이다. 반 에이크는 빛이라는 개념을 신의 존재로 치환하며, 이 시각적 요소를 통해 하늘의 개입이 감각될 수 있는 경험을 창조한다.
그 고요한 장면은 신학적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매우 정치적이다. 그것은 부르고뉴 공국이 세속적 통치와 영적 질서를 결합하기 위해 어떻게 이미지를 조직했는가를 보여주는 장치이자, 당시 지배자들이 어떤 형태의 종교성을 요구하고, 또 대중이 무엇을 믿기를 바랐는지를 드러내는 회화적 문서로 해석되기도 한다.
《수태고지》는 반 에이크가 단지 회화 기술자나 장인이 아닌, 신학과 권력, 언어와 이미지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유하는 화가’였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은 롤랭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더욱 깊이 형성되었다. 정치와 신앙이 맞닿는 시대, 그 교차점에서 반 에이크는 회화의 침묵 속에 권력의 언어를 아로새겼다.
이 작품은 작은 패널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한 국가의 영적 구조와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재구성되었는가를 압축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 회화가 신비한 이유다.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거장, 로히어르 판 데르 바이던(Rogier van der Weyden, 1400–1464)은 얀 반 에이크와 함께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린 화가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리는 대상도, 후원자와의 관계도, 작품이 놓인 장소도 크게 달랐다.
얀 반 에이크가 부르고뉴 공국의 궁정 내부에서 활동하며 화려한 유화 기술과 세속 권력의 상징성을 시각화했다면, 로히어르는 도시 공동체와 종교적 기관, 특히 공공의 공간을 무대로 정서적 감응과 윤리적 교훈을 전하는 회화를 실현해냈다.
그는 감정 표현의 대가로, 인물의 표정·몸짓·구성에서 관람자가 직접 고통과 공감, 연민을 느끼게 하는 강한 서사적 힘을 회화에 담았다. 반 에이크가 눈으로 세계를 해석했다면, 로히어르는 가슴으로 신의 고통을 그려냈다.
로히어르는 반 에이크보다 한 세대 아래이지만, 사후에는 그의 작품이 유럽 전역으로 널리 복제되고 모방될 정도로 당대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화가로 부상했다. 반 에이크가 남긴 화려한 유화 기법과 공간 구성 능력은 로히어르에게도 영향을 주었지만, 그는 이를 바탕으로 보다 극적이고 정서적인 표현을 발전시켰다. 특히 그는 기존의 제단화 전통을 내러티브와 감정의 구조물로 바꾸는 혁신을 이루었다.
두 화가는 공식적으로 교류한 기록은 없지만, 서로의 명성과 작품을 의식하며 경쟁하고 또 발전시킨 관계였다. 반 에이크의 작업실이 폐쇄적인 궁정 중심이었다면, 로히어르는 도시 공동체, 수도회, 자선기관 등과의 폭넓은 교류를 통해 사회적·종교적 기능을 지닌 회화를 제작했다. 그는 브뤼셀 시의 공식 화가로 활동하면서, 도시가 후원하는 다수의 작품을 남겼고, 시민 계층과 중산층의 후원을 받아 종교적 감정과 사회 윤리를 전달하는 시각 언어를 발명해냈다.
이러한 로히어르의 회화 세계가 부르고뉴 공국의 정치 전략과 만난 지점이 바로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이었다. 필리프 선량공의 재상으로, 단순한 정치 행정가를 넘어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명확한 전략을 세운 문화 기획자였던 롤랭은 회화가 단지 미적 대상이 아니라 공공의 도덕을 시각화하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병자, 가난한 자, 죄인의 구원을 직접 설계하는 공간으로 Hôtel-Dieu de Beaune 자선병원(1443 설립)을 기획했고, 이 공간에 놓일 성화로 로히어르에게 《최후의 심판》 제단화를 의뢰한다. 병상의 환자들이 제단화를 올려다보는 구조로 설치된 이 그림은, 예술이 회개와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시각적 고해성사’가 되어야 한다는 롤랭의 기획 의도를 충실히 구현했다.
이 제단화는 15개 패널로 구성된 폴립틱 구조로, 닫혀 있을 때는 비교적 절제된 외형을 보이나, 펼쳐졌을 때는 극적인 심판의 순간이 전면에 드러난다. 중심에는 심판관 예수가 붉은 옷을 입고 등장하고, 그 아래에는 대천사 미카엘이 영혼의 무게를 재고 있다. 왼편에는 구원받은 자들의 경건한 얼굴이, 오른편에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죄인의 뒤틀린 몸과 고통스런 표정이 묘사된다.
로히어르는 이 장면을 극적 연출과 정서적 리얼리즘으로 설계하여 회화가 단지 상징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을 두드리는 심리적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병상에 누운 이들이 이 장면을 매일 올려다봤다는 사실은 이 회화가 신학이 아니라 체험으로 작동했다는 점을 방증한다.
이 프로젝트는 롤랭과 로히어르 사이의 직접적인 협업 사례이며, 이 회화의 스케일과 정서적 설계는 당시 북유럽 회화 중에서도 유례없는 강렬함을 자랑한다. 로히어르가 사적인 후원이 아닌 공공적 의뢰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을 남긴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십자가에서 내려짐》은 로히어르를 ‘눈물의 화가’로 만든 대표작이다.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된 이 그림은 인물의 감정과 신체의 움직임을 통해 비극의 순간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든다. 특히 예수의 시신과 성모 마리아의 쓰러진 모습이 거의 같은 자세로 구성된 이중 구조는, 성모의 고통이 단순한 관람이 아닌 직접적 ‘공감’으로 전이되도록 하는 시각 장치다.
이 작품은 단순한 성서 장면의 재현이 아닌, 북유럽 회화가 인간 감정과 신앙의 교차점을 본격적으로 시각화한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루뱅의 성 요셉 목공조합*을 위해 제작된 제단화로, 수공업 조합이 후원한 점은 특히 중요하다. 이는 당시 중세 말 도시 공동체가 성인 숭배와 예배를 통해 정체성과 윤리 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는 순간, 성모 마리아가 완전히 동일한 자세로 실신해 쓰러지는 장면은 로히어르의 회화가 단지 사건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으로 하여금 그 감정을 ‘공유’하게끔 만드는 구조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는 후에 등장할 연극적 회화 구성과 바로크적 감정 연출의 기원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의의는 도상(iconography)의 정교한 조율에 있다. 성모의 옷 색은 예수의 피를 암시하는 붉은 계열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극도로 정열적인 동작을 취하며 화면의 정서를 고조시킨다. 요한과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등은 각기 다른 감정을 담은 자세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구도는 완벽한 역삼각형의 구조 안에서 균형을 이룬다.
배경은 암회색 벽으로 비워져 있어 인물과 감정만이 전면에 드러나며, 구도의 밀도와 감정의 응축이 한 화면 안에 모두 집약된다. 이는 르네상스 이전의 종교화에서는 보기 힘든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는 심리적 리얼리즘의 전형이 되었다.
이 후 수많은 제단화, 수도원 회화, 모사본이 이 작품을 원본으로 삼아 반복되었으며, ‘마리아의 쓰러짐’이라는 감정 장면은 북유럽 성화의 정형화된 표현으로 자리잡는다. 이후 루벤스나 델라 투르, 바로크 화가들이 ‘연극적 감정’의 어휘를 확장할 때 이 구도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15세기 초·중반은 흑사병 이후 사회적 불안, 종교적 엄숙주의의 확산, 도시 중산층의 성장이 뒤엉킨 시기였다.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 불확실한 삶을 해석하고자 했으며, 예술은 그 신앙의 정서적 통로가 되어야 했다. 《십자가에서 내려짐》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응답한 작품이었다. 관람자는 이 그림 앞에서 단지 ‘믿음’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함께 느끼고 눈물 짓고, 마리아와 함께 쓰러지는 자신을 상상해야 했다.
*성 요셉 목공조합(Confraternity of the Archers of Saint Joseph) : 5세기 플랑드르 지역에서 활동한 도시 직업 길드(Guild)의 일종으로, 특히 브뤼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서는 사회적 위계와 신앙, 공동체 정신을 결합한 중요한 조직이었다.
로히어르의 또 다른 대표작, 《미라플로레스 제단화》는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장면을 각각 하나의 패널에 담은 삼면화다. 흥미로운 점은 각 장면이 비슷한 구조와 색조, 건축적 배경을 공유하면서도, 감정의 농도가 점차 깊어지는 내러티브 구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장면 나열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신앙의 밀도를 시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회화적 장치다.
탄생 장면에서는 경건한 기쁨이 흐르고, 피에타 장면에서는 깊은 슬픔이, 부활 장면에서는 놀라움과 경외의 감정이 표현된다. 이 감정의 흐름은 관람자에게 시간에 따라 성숙해지는 신앙의 감정 곡선을 따라가도록 유도한다.
중요한 점은 세 장면 모두에서 마리아가 중심 주체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지 신의 구속 서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 한 어머니, 한 신앙인이 겪는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공감과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구조로 설계되었다. 로히어르는 이를 통해 관람자가 도상화된 신앙의 감정 교육을 시각적으로 경험하도록 안내한다.
《미라플로레스 제단화》는 1440년대 후반, 스페인 카스티야 왕국의 미라플로레스(Miraflores) 카르투시오 수도원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현재는 베를린 회화관(Gemäldegalerie)에 소장되어 있다. 이 제단화는 수도사들이 개인적인 묵상과 기도를 위해 사용한 것으로, 집단 예배가 아닌 ‘내면의 신앙 실천’을 위한 회화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15세기 중반 유럽은 정치적 군소화와 종교적 혼란, 경제적 양극화 속에서 도시와 수도원 중심의 신앙 실천이 강화되던 시기였다. 특히 부르고뉴 지역과 카스티야 왕국은 개인적 경건 운동(devotio moderna)의 영향을 받아, 고요하고 통제된 신앙 실천, 내면 성찰, 감정의 통제 등을 중시하는 흐름이 두드러졌다.
궁정, 병원, 대형 성당이 아닌 수도원 내부 개인 예배실을 위한 회화라는 점에서, 중세 말기 회화의 소형화, 개인화, 감정화 경향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회화가 ‘가르치는 도구’에서 ‘함께 감정하고 침묵하는 친구’로 바뀌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은 장면 간 이동 없이 하나의 고정된 구조 안에서 시간의 흐름과 내면의 변화를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관람자는 성경을 읽지 않고도, 단지 이 세 장면을 바라보며 예수의 삶과 마리아의 고통, 구속의 신비를 따라갈 수 있게 된다.
니콜라 롤랭은 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붓을 들지 않았고, 캔버스에 색을 올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15세기 북유럽 르네상스 회화의 풍경을 기획하고, 그 세계관을 설계한 문화의 건축가였다. 그가 남긴 유산은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조각이 아니라, 시선과 감정, 구도와 상징으로 이뤄진 시각 언어의 지도였다.
그 지도 위에서 얀 반 에이크는 정밀한 광학적 시선으로 세속과 신성의 경계를 재조정했고, 로히어르 판 데르 바이던은 감정과 윤리를 감각의 구조로 재구성했다. 한 사람은 회화를 빛의 과학으로, 다른 한 사람은 고통의 문법으로 확장시켰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의 배후에는 예술이 무엇을 말해야 하며 누구를 향해 있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인지한 한 명의 후원자, 니콜라 롤랭이 있었다.
그는 화가들의 이름 뒤에 숨어 있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화폭 속에 새겨 넣고, 구원의 서사에 스스로를 등장시켰다.《Virgin and Chancellor Rolin》에서 성모 마리아 앞에 무릎 꿇은 그 모습은 겸손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시선은 언제나 스스로를 향해 있었다. 예술은 그에게 신앙의 표현이자, 정치의 언어, 그리고 개인 서사의 구조였다.
그러나 예술의 중심은 항상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부르고뉴 궁정을 휘감던 엄숙한 정적은, 이제 이탈리아 밀라노의 궁정에서 다른 형태의 움직임으로 전환된다. 다음 장에서는 또 다른 후원자, 루도비코 스포르차를 만난다. 그는 정치가이자 군인이었고, 시대를 꿰뚫는 예술의 안목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안목은 한 젊은 천재를 밀라노로 이끌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북쪽에서는 문화 행정가가 르네상스를 설계했다면, 남쪽에서는 예술가와 후원자가 함께 신화를 창조한다. 다음 장, “루도비코와 다빈치의 밀라노 연대기”에서는 그 새로운 르네상스의 전환점을 따라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