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
15세기 말,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불꽃이 타오르던 시기였다. 피렌체에서는 메디치 가문이 예술과 인문주의의 중심지로 도시를 키워가고 있었고, 로마는 교황청의 막대한 권위 아래 거대한 성당들과 조각상들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사이, 북부 도시 밀라노는 군사적 요충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 급부상하고 있었고, 그곳에 한 명의 권력자가 있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닌, 예술을 정치의 무기로 삼고자 한 교묘한 후원자였다.
그리고 한 명의 예술가가 그의 궁정에 들어온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미 피렌체에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자신의 역량을 온전히 펼칠 무대를 찾고 있던 이 젊은 화가는 밀라노에서 예술가, 공학자, 사상가로서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축하게 된다. 이 장은 두 인물의 교차로에서 피어난 예술과 권력의 관계를 따라가는 연대기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피렌체 공화국의 작은 마을 빈치 Vinci 에서 태어났다.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피에로와 농민 계층 출신의 어머니 카테리나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정규 라틴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릴 적부터 관찰력과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책보다는 자연을 벗 삼아 자란 그는 물, 식물, 동물, 사람의 움직임에 대해 끊임없는 호기심을 품었고, 이는 평생에 걸친 그의 예술과 과학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1466년경, 열네 살의 다 빈치는 피렌체의 유명한 예술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간다. 이 공방은 회화, 조각, 금속 세공, 기계 설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을 수행하는 르네상스의 종합 예술 교육장이었다. 다 빈치는 이곳에서 그림의 기초뿐 아니라, 기계 구조, 해부학, 원근법 등의 기술을 익히며 전인적인 예술가로서 성장했다.
그가 베로키오와 함께한 대표작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세례(Battesimo di Cristo)》이다. 이 그림의 왼쪽 천사는 다 빈치가 그렸다고 전해지며, 그의 섬세한 붓질은 스승의 양식과 차별화되었다. 이 작품 이후 베로키오가 붓을 놓았다는 일화는 그만큼 다 빈치의 재능이 탁월했음을 보여준다.
독립 화가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수태고지(Annunciazione)》를 통해 첫 번째 단독 작품을 남긴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장면을 담은 이 작품은 완벽한 원근법, 정밀한 식물 묘사, 빛의 분산 효과 등에서 젊은 다 빈치의 실험정신이 엿보인다. 화면 구성은 아직 비대칭적이고, 해부학적으로 어색한 부분도 있으나, 이미 기존 회화와는 다른 새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다.
1481년에는 스쿠오라 산 도나토 수도원에서 의뢰한 《동방박사의 경배(Adorazione dei Magi)》에 착수한다. 이 작품은 미완성이지만, 복잡하게 얽힌 수십 명의 인물 배치, 원형 구도의 화면 구성, 중앙을 향해 몰입하는 시선 처리 등에서 그의 독창적 회화 언어가 드러난다. 말 위의 병사, 궁정의 지식인, 성모와 아기를 둘러싼 예언자들의 손짓이 격렬하게 교차되며, 단순한 종교화를 넘어 인간 감정의 극적 표현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 빈치는 이 시기에 그림뿐 아니라 과학적 탐구에도 몰두했다. 그는 동물과 식물의 움직임을 스케치하며 역학을 이해하려 했고, 인체 해부를 통해 인간의 구조를 수치화하고자 했다. 그는 피렌체 시의 수문 시스템, 날개가 달린 비행기계, 다리 설계안 등을 구상했고, 노트에 이를 끊임없이 기록했다. 그러나 피렌체는 아직 그의 실험을 실현시킬 만큼의 자율성과 자본, 정치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도시였다.
물론 피렌체는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다. 메디치 가문은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브루넬레스키, 미켈로초 등 수많은 예술가와 건축가를 후원했고, 인문주의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도시 전체에 지적인 기운이 넘쳤다. 그러나 피렌체의 후원 체계는 전통적인 회화와 종교 미술에 집중되어 있었고,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역할 역시 정형화되어 있었다. 다 빈치가 탐구하고자 한 해부학, 공학, 기계 설계, 축제와 무대 장치 같은 분야는 당시 피렌체에서 '부차적'이고 실용적 가치가 낮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무엇보다 그의 다방면적 재능을 하나의 통합된 프로젝트로 실현할 만한 자금력 있는 후원자가 부족했다.
반면 밀라노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도시의 정치적 권위와 위신을 높이기 위해 예술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려 했고, 종교화뿐 아니라 대형 기념 조형물, 군사 기술, 도시 축제 연출까지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역할이 확장되어 있었다. 그는 예술가를 단지 화가로 대우하지 않고, 공학자, 전략가, 발명가로 대우했다. 이러한 환경은 다 빈치에게 더없는 기회였다. 밀라노는 단지 도시가 아니라, 그의 복합적 재능이 입체적으로 펼쳐질 수 있는 무대였다.
다 빈는 점차 피렌체의 한계를 느꼈고, 자신의 다방면적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새로운 무대를 찾아야 했다. 이 무렵, 밀라노 공국의 실질적 통치자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예술과 과학을 정치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소문은 다 빈치에게 큰 기회를 예고했다. 1482년, 다 빈치는 루도비코에게 자청하여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이 다리를 설계하고, 요새를 짓고, 수차를 설치하며, 군사 장비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임을 강조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는 “동시에 나는 조각가이며 화가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이 편지는 그가 스스로를 단순한 화가가 아닌,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정체화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루도비코에게 약속했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리는 거대한 청동 기마상을 만들 수 있다고. 그것은 단순한 조각상이 아니라, 예술과 공학, 정치 선전이 융합된 거대한 조형물이 될 것이었다. 다 빈치는 이제 피렌체를 떠나, 예술과 과학, 건축과 기술이 결합된 새로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밀라노로 향하게 된다. 이 결정은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17년 동안 밀라노에서의 시기가 그의 가장 창조적인 전성기로 이어진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1452년 밀라노 공국의 명문 스포르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원래 밀라노 공작위를 계승할 인물이 아니었으나, 형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암살되고 조카 잔 갈레아초가 어린 나이에 공작위에 오르면서 정국은 불안정해졌다. 이 틈을 타 루도비코는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고 정치를 장악해 갔다. 조카를 명목상 군주로 내세운 그는 실질적인 통치자로서 궁정과 도시의 권력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렇게 밀라노의 실권자가 된 루도비코는 빠르게 도시를 르네상스 예술과 학문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려는 야심을 드러낸다.
루도비코는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주변 강대국인 프랑스, 베네치아, 신성로마제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펼치며 공국의 독립성과 영향력을 유지했고,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행정력과 정보망을 통해 도시를 장악했다. 하지만 단순한 권력 장악이 아닌, 문화와 예술을 통한 통치의 정당화와 권위의 상징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루도비코는 동시대의 많은 군주들과 구별되었다.
그는 밀라노를 북이탈리아의 새로운 문화 수도로 만들고자 했다. 피렌체가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예술과 인문주의의 요람으로 부상하고 있을 때, 루도비코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시를 단장해나갔다. 그는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를 기용해 밀라노의 대표적 성당 중 하나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의 개축을 지시했으며, 그곳은 훗날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그려질 장소가 된다. 또한 브라만테는 루도비코의 궁정 건축 프로젝트에도 관여하며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밀라노에 확산시켰다.
또한 루도비코는 궁정 내부의 예술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음악가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를 초빙해 궁정 음악을 개편하고, 밀라노 시민들이 참여하는 축제와 연회를 기획하여 도시 전역을 하나의 문화 무대로 탈바꿈시켰다. 이처럼 예술은 궁정 안에 머물지 않고 도시 전체로 확산되었으며, 이는 루도비코가 예술을 정권의 외교이자 대중과의 소통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루도비코가 밀라노에서 이처럼 문화에 적극적이었던 데에는 실리적인 이유도 있었다. 당시 밀라노는 상업과 군사로 성장한 도시였으나, 피렌체나 로마처럼 고유의 예술 전통이 뿌리 깊지 않았다. 루도비코는 밀라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눈에 띄는 대형 기념 조형물, 웅장한 성당 건축, 예술이 결합된 시민 행사 등을 추진했고, 이는 도시 이미지의 격상뿐 아니라 내부 통치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요컨대 밀라노는 도시 자체가 예술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권력의 얼굴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루도비코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아니라, 정치·기술·예술을 아우를 수 있는 인물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다 빈치야말로 그에 부합하는 존재였다. 회화는 물론이고, 축제와 기계 설계, 요새 구조, 조형 기획까지 가능한 전방위적 인재였던 다 빈치는, 루도비코가 상상한 새로운 도시 문화의 구현자였다. 다 빈치는 단지 예술가가 아니라, 통치 전략을 시각화할 수 있는 '기획자'였고, 루도비코는 이를 간파했다.
결과적으로, 다 빈치가 밀라노로 향하기 전부터 루도비코는 이미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문화가 곧 정치였고, 예술가가 곧 도시 전략의 핵심이던 시절,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시대를 꿰뚫는 직관으로 천재를 불러들일 준비가 되어 있던 인물이었다.
1482년 밀라노로 이주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궁정에서 약 17년 동안 머물며 예술가, 공학자, 과학자, 디자이너로서 다방면의 활동을 펼쳤다. 이 시기는 다 빈치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로 평가되며, 단지 그림을 그리는 수준을 넘어 예술과 과학, 기술이 융합된 새로운 인간상을 구현한 시기였다.
그의 대표작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종교적 장면을 넘어서, 인간의 심리와 감정, 순간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포착한 기념비적 작품이다.
예수의 “너희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는 말에 제자들이 보이는 반응은 각기 다르게 묘사되며, 각 인물의 동작과 표정은 극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유다는 어둠 속에 묻히듯 표현되며, 배신자의 상징으로서 회화적 중심에 위치한다. 화면 구성은 수학적 원근법과 중심 구도로 설계되어 있으며, 예수의 머리를 창 쪽의 창문을 통해 후광처럼 강조한 장치는 시각적 상징성과 건축적 구상을 결합한 다 빈치의 탁월함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프레스코 기법이 아닌, 석고 위에 템페라와 기름을 혼합해 실험적인 기법으로 시도했는데, 이는 후에 보존 문제를 야기했지만 당시로선 혁신적인 시도였다. 그는 석고가 마르기 전에 채색을 마쳐야 하는 기존의 제약을 넘어서, 오랜 시간 동안 세밀한 묘사를 가능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이 작품은 르네상스 회화에서 감정 표현의 정점으로 평가받는다.
또 하나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루도비코의 부친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리기 위한 《스포르차 기마상(Leonardo's Horse, 미완성)》이다. 다 빈치는 말의 해부학을 정밀하게 연구하고,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청동 기마상을 설계했다. 그는 다양한 자세와 근육의 움직임을 수십 장의 드로잉으로 실험하였고, 말의 두 다리를 공중에 띄운 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구조적 해법까지 고민했다.
점토 모형은 7미터에 달하는 위용을 자랑했으며, 루도비코가 외국 사절을 데려와 이를 자랑할 정도로 도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청동이 대포 제작에 전용되며 주조되지 못했고, 점토 모형은 파괴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예술, 공학, 조형 기술이 융합된 르네상스적 야망의 결정체로 평가되며, 후대에 그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미국과 이탈리아에서 재현되었다.
다 빈치는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다양한 공학적 실험도 병행했다. 밀라노 시기의 노트에는 수차, 하천 제어 장치, 요새 설계, 자동 기계 장치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실제로 밀라노 내 수문과 운하 정비 사업에도 참여하였고, 도시 축제나 궁정 연회에서 사용될 자동 인형, 무대 장치 등을 설계해 궁정의 시각적 연출을 주도했다.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정치적 위용과 문명화된 도시 이미지의 구현이었다. 그의 무대 장치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계 천사나 회전하는 태양 장치 등 시각적 환상을 극대화하는 도구였으며, 시민들에게 밀라노 궁정의 세련된 통치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또한 이 시기 다 빈치는 인체 해부 연구를 본격화했다. 병원이나 시신 해부의 기회를 얻은 그는 관절, 근육, 신경계, 심장, 눈의 구조 등을 해부도와 설명문으로 남겼고, 이 노트들은 르네상스 해부학의 선구적 기록으로 남는다. 그는 미술가의 손으로 해부학적 진실을 시각화할 수 있었고, 이는 과학과 예술이 하나로 융합된 르네상스적 사고의 대표적 사례였다.
밀라노에서 다 빈치가 남긴 회화 작품들 중에서도 그의 섬세한 시선과 예술 철학이 돋보이는 세 작품이 있다. 가장 먼저 《브누아의 성모(The Benois Madonna)》는 다 빈치의 성모자화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인간적인 감정을 담아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장면은 신성한 장면임에도 지극히 일상적인 친밀감으로 표현되어 있다. 빛과 그림자의 섬세한 조화, 유려한 곡선의 흐름, 그리고 인물 간의 시선 교환은 다 빈치가 종교화 안에서도 인간미와 정서를 포착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회화 속에서 신성과 인간성의 경계를 허무는 르네상스 미술의 전형이자, 다 빈치의 감성적 해석이 가장 잘 드러난 사례 중 하나다.
이어지는 《음악가의 초상(Portrait of a Musician)》은 다 빈치가 밀라노에서 남긴 유일한 남성 초상화로, 생생한 표정과 명확한 조명 효과가 특징적이다.
초상 속 인물은 악보를 손에 들고 있어, 당대 밀라노 궁정에서 음악이 지닌 중요성과 궁정 예술인의 지위를 암시한다. 특히 이 작품은 인물의 감정보다는 집중력 있는 지성과 내면의 에너지를 포착하고자 한 시도로, 다 빈치의 초상화 기법이 단순한 외형 묘사를 넘어, 내면의 본질을 시각화하려는 실험의 일환이었음을 보여준다. 성모자와의 따뜻한 교감을 그려낸 이전 작품과는 결이 다르지만, 인간 정신의 깊이를 탐구하려는 일관된 시선이 드러난다.
그리고 《라 벨 페로니에르(La Belle Ferronnière)》은 정면을 응시하는 여성의 단정하고 의연한 인상이 돋보이며, 배경을 제거하고 어둠 속에 떠오르듯 인물을 부각시키는 명암 처리에서 다 빈치 특유의 '스푸마토*(sfumato)' 기법이 잘 드러난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하지만 힘이 있으며, 머리에 쓴 붉은 끈 장식은 품위와 신비를 동시에 암시한다. 모델이 루도비코의 연인이었던 루크레치아 크리벨리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이 작품은 단순한 미의 재현이 아니라, 여성의 지성과 자존감을 상징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로도 해석된다. 이전 두 작품이 신성성과 예술인의 내면을 탐구했다면, 이 초상은 외유내강의 인격적 긴장을 구현하고 있다.
밀라노는 다 빈치에게 단지 일터가 아니라, 실험의 무대이자 예술의 실현장이었다. 루도비코는 그에게 단기적인 과업이 아닌,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프로젝트를 맡길 수 있는 후원자였고, 다 빈치는 그 기대를 창조성으로 돌려주었다. 그러나 이 전성기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1499년,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침공하고 루도비코가 실각하면서 다 빈치의 밀라노 시기도 종결된다. 그는 다시 유랑을 시작하지만, 밀라노에서의 시간은 그의 정체성과 예술 세계에 영원한 흔적을 남긴다.
*스푸마토 : 르네상스 시대의 정통 회화 기법 중 하나로, 색상 간의 전환을 부드럽게 하여 인간의 눈이 초점을 맞추는 영역 너머나 초점이 맞지 않는 면을 모방하는 회화 기법
1499년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점령하고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실각한 뒤, 다 빈치는 그토록 오랫동안 예술과 과학을 실험하던 도시를 떠나야 했다. 이후 그는 만토바,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등지로 옮겨 다니며 새로운 후원자와 작업 환경을 모색했다. 하지만 루도비코만큼 그에게 넓은 창작의 자유와 신뢰를 준 후원자는 드물었기에, 이후의 삶은 고요한 실험과 더불어 점진적인 고립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다 빈치는 여전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503년경 피렌체에서 제작을 시작한 《모나리자(Mona Lisa)》는 그의 회화 인생의 정점으로 꼽힌다.
모델은 상인 프란체스코 델 조콘도의 아내 리사 게라르디니 Lisa Gherardini 로 추정되며, 완성까지 수년이 걸렸다. 작품 속 인물의 미묘한 미소, 흐릿한 경계선으로 구성된 얼굴과 풍경의 조화, 그리고 다 빈치 특유의 스푸마토 기법은 ‘이상적 초상화’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다. 《모나리자》는 단순한 개인의 초상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자연, 신비와 현실이 얽힌 하나의 철학적 풍경이 되었다.
같은 시기 피렌체 시의회의 의뢰로 시작했던 벽화 《앙기아리 전투(The Battle of Anghiari, 미완성)》 역시 그의 후기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는 밀라노의 《최후의 만찬》과는 정반대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군마와 병사들이 얽힌 치열한 접전을 중심으로 격렬한 동세와 분출하는 감정을 담아내려 했다. 하지만 실험적인 왁스 기법의 실패와 미켈란젤로와의 경쟁, 정치적 문제로 인해 완성되지 못했고, 현재는 루벤스의 모사본과 다 빈치의 드로잉을 통해서만 그 흔적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로마로 거처를 옮긴 다 빈치는 교황 레오 10세의 궁정에서 활동했지만,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후배 거장들의 활약이 눈부신 이곳에서 그는 비교적 소외된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해부학, 수리학, 수공 기계 설계 등 다양한 연구를 지속했고, 특히 지질학과 수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색하는 통합적 관점을 견지했다.
1516년,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건너간 다 빈치는 클루 루세 성(Clos Lucé)에 정착했다. 프랑수아 1세는 그를 '제1화가, 제1기술자, 제1건축가'로 임명하며 극진히 예우했고, 이는 말년의 다 빈치에게 마지막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이 시기 그는 《성 요한 세례자(St. John the Baptist)》를 비롯해 몇몇 말기 작품을 남겼으며, 정교한 드로잉과 노트를 통해 후대의 과학자와 예술가들에게 거대한 유산을 전했다.
《성 요한 세례자》는 어둠 속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요한의 인물을 통해, 인간 내면의 영적 가능성과 신비를 강조한 작품이다. 유려한 명암 처리와 몽환적인 미소는 《모나리자》와 이어지는 감각을 보여주며, 신앙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다 빈치의 후기 사유가 투영되어 있다.
1519년, 클루 루세에서 세상을 떠난 다 빈치는 예술과 과학, 철학을 아우른 전인적 르네상스인의 상징으로 남았다. 밀라노에서 시작된 그의 실험정신은 프랑스에서 조용히 숨을 거둘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는 생을 다할 때까지 '그리는 자이자 관찰하는 자, 설계하는 자이자 의심하는 자'로 존재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예술과 과학, 인문과 자연을 아우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로 기억되는 데에는 단지 그의 재능과 호기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루도비코 스포르차와의 만남이다. 밀라노에서의 17년은 다 빈치가 그리는 자에서 설계하는 자로, 관찰하는 자에서 세상을 통합적으로 사유하는 자로 거듭나게 만든 시기였다.
루도비코는 단지 예술을 후원한 인물이 아니라, 다 빈치가 가진 가능성을 시대와 도시라는 무대 위에 실현시켜준 전략적 조력자였다. 《최후의 만찬》, 《스포르차 기마상》, 궁정의 연회와 도시 축제에 이르기까지, 다 빈치의 전방위적 활동은 루도비코가 마련한 공간과 기회를 통해 실현되었고, 이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기반이 되었다.
물론 다 빈치는 밀라노 이후에도 《모나리자》, 《성 요한 세례자》 같은 불멸의 작품들을 남겼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라는 칭호가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루도비코와 함께했던 밀라노 시절, 예술을 넘어 인간의 지성과 감성을 종합한 르네상스적 이상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다 빈치의 영광 뒤에는 언제나 그를 믿고 자유롭게 실험하도록 했던 한 권력자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조용한 신뢰와 통찰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날 레오나르도라는 이름 앞에 '천재'라는 단어를 주저 없이 붙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또 한 명의 르네상스 거장을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예술가의 자유를 억누르면서, 또 한 편으로는 전례 없는 과업을 부여 해 그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낸 또 다른 권력자와의 이야기다. 다음 장에서는 미켈란젤로와 교황 율리오 2세, 그리고 시스티나 천장 아래에서 벌어진 그들의 갈등과 창조의 기록을 따라가본다. 그곳에는 한 예술가의 육체와 정신을 짓눌렀던 권력, 그리고 그에 맞서 거대한 천장을 채운 천재의 붓끝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