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Michelangelo, 1475-1564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한 시대의 절정을 넘어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미 전 유럽에 그 명성을 떨치며 인간과 자연, 기계와 해부학, 과학과 예술을 통합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형 인간으로서 시대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실험적이고 사변적인 접근은 당대 피렌체와 로마의 예술 후원자들에게 점차 현실적인 예술성과 정치성을 겸비한 인물을 요구하게 만들었다. 그 중심에 새로운 천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을 예술가라기보다는 자연의 관찰자이자 발명가로 여겼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예술 그 자체를 인간 존재의 본질과 결부지으며,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매개로 삼았다. 이는 곧 그의 예술이 내면의 고통, 인간 육체의 장엄함,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표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 배경이었다.
르네상스는 이제 이상과 조화의 시대에서, 갈등과 초월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에 미켈란젤로는 권력의 중심인 로마로 불려가게 된다. 그리고 그를 부른 이는 누구보다 강렬한 야망을 지닌 교황 율리오 2세였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1475년 토스카나 지방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피렌체에서 보내졌고, 일찍이 예술에 뛰어난 감각을 보였다. 아버지는 아들이 예술가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3세가 되던 해, 그는 당대 유명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화실에 들어가 회화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곧 회화보다 조각에 더 큰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렌초 데 메디치가 후원하는 조각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메디치 조각원은 고대 조각을 자유롭게 연구하고 복제할 수 있는 피렌체 최고의 교육장이었으며,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조각의 미학에 눈을 뜨게 된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자신의 저택으로 초대해 함께 거주하게 했고, 고대 철학과 인문주의 교육을 접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했다. 이 시기는 미켈란젤로에게 예술가로서 자각과 교양을 동시에 심어준 시기였다.
그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바쿠스(Bacchus)》는 고대 신 바쿠스를 묘사한 조각으로, 고전주의적 형식 속에 도취와 유희, 불안정함이라는 양면성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술에 취한 듯 중심을 잃은 자세와 요염한 표정은 미켈란젤로가 단순히 이상적 육체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육체와 감정, 쾌락과 파괴의 경계를 탐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곧이어 제작된 《피에타(Pietà)》는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널리 알린 걸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마리아를 젊고 고요한 얼굴로 묘사하여 전통적 묘사와는 다른 인상적인 감정의 균형을 이끌어냈다. 예수의 몸은 생명 없는 육체임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아름답게 이상화되어 있으며, 죽음이 아닌 평온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조각의 세부는 정교하고 치밀하며 전체적으로 조형미와 신학적 상징이 완벽하게 통합되어 있다.
《다비드(David)》는 그를 조각가로서 불멸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거대한 조각에서 다비드를 승리의 순간이 아니라, 결전을 앞둔 긴장감 넘치는 찰나로 묘사하였다. 신체는 완벽하게 균형 잡혀 있으며, 눈빛은 날카롭고 입술은 다문 채 결의를 담고 있다. 이 조각은 고대 조각의 영향 아래 탄생했으나, 그 표현의 심리적 깊이는 르네상스 조각을 새롭게 정의내린 순간이었다. 이 작품은 피렌체 시민들에게는 도시의 자유를 상징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졌다.
이 시기의 미켈란젤로는 놀라운 속도로 명성을 쌓았지만, 그의 성격은 고독하고 고집스러웠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의 경쟁 구도는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자의식을 더욱 자극했다. 두 사람은 1504년 피렌체 시의회에서 공공 건축물인 팔라초 베키오 내부 벽화 제작을 위해 동시에 초청받았고, 각자 [앙기아리 전투]와 [카시나 전투]라는 주제로 시안을 제시했다. 비록 두 벽화 모두 완성되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당시 피렌체가 이 두 천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였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의 해부학적 관찰과 회화적 섬세함을 경계하며, 자신은 더욱 신체적 역동성과 조각적 강렬함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다. 그 긴장감은 경쟁을 넘어서 예술관의 차이를 보여주는 철학적 충돌이기도 했다. 그는 다른 예술가들과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고, 평생 조수 없이 작업을 이어나간 고독한 완벽주의자였다.
한 일화로, 《피에타》가 너무 완벽해서 다른 이의 작품으로 오해받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밤중에 성당으로 가 자신의 이름을 조각에 새겨 넣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그가 얼마나 예술에 자신의 정체성을 투영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이자, 자존감과 불안이 혼재한 성품을 드러낸다.
그는 예술을 신의 뜻을 인간의 손으로 실현하는 수단이라 여겼다. 고대 조각에서 영감을 받되, 신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 존재의 고통을 담아내려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에는 항상 강렬한 에너지와 내면의 긴장이 함께 흐른다. 그는 돌 속에 이미 존재하는 형상을 해방시킨다는 믿음을 지녔으며, 이를 위해 자신의 육체를 돌처럼 단련하기도 했다. 평생 검소하게 살았고, 물질적 풍요보다는 예술적 이상을 좇았다.
이러한 고독한 천재를 주목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로마의 새 교황 율리오 2세였다. 미켈란젤로는 곧 그의 초청을 받게 되며, 로마에서 새로운 예술적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1503년 10월, 로마 교황청은 혼란의 중심에 있었다. 알렉산데르 6세의 부패한 치세와 보르자 가문의 권력 농단은 교황권에 대한 신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이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훗날 율리오 2세로 불리게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교회 내에서 오래전부터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활약해온 추기경이었고, 군사적 지도자로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율리오 2세는 단순한 성직자가 아니었다. 그는 국가의 영토를 확장하고, 교황령의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데 강한 집념을 품은 전략가였다. 그의 이름 ‘율리오(Julius)’는 고대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 가져온 것이었고, 이는 자신이 로마 제국의 권위를 계승하겠다는 강력한 상징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교황 재위가 단순히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종교적 직책이 아닌, 정치적·문화적 제국 건설의 초석이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 시대, 단순한 권력만으로는 대중과 귀족들을 설득하기 어려웠다. 이탈리아 반도는 프랑스, 스페인, 신성로마제국 등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고 있었고, 도시국가들은 경쟁적으로 문화 사업에 투자하며 자신들의 위신을 과시하고 있었다. 피렌체는 이미 메디치 가문을 통해 예술을 외교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밀라노도 루도비코 스포르차와 다 빈치의 협업을 통해 도시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구축하고 있었다.
율리오 2세는 이러한 흐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예술을 통한 교황권의 재건이었다. 그는 문화 예술이야말로 권력에 윤곽을 부여하고 교황의 영적 권위를 시각화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 판단했다. 다시 말해,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술을 통해 ‘형상화’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 진입하는 이 시기, 시각적 설득은 말과 문서보다 훨씬 강한 정치적 언어였다.
그의 예술 프로젝트는 대대적이었다. 먼저 착수한 것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이었다. 그는 성당의 설계를 고대 로마 양식으로 완전히 새롭게 구성하도록 지시했으며, 당대 최고의 건축가이자 친구였던 도나토 브라만테에게 설계를 맡겼다. 브라만테는 교황의 권위를 상징하는 거대한 돔을 중심으로 한 라틴 십자가형 건축을 계획했고, 이는 곧 “교황이 새로운 로마를 창조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교황령 전역에 각인시켰다.
하지만 대성당 하나로는 부족했다. 율리오 2세는 궁전 내에 새로운 벽화를 의뢰했고, 그 일은 당시 불과 스물다섯이던 라파엘로 산치에게 돌아갔다. 라파엘로는 정교한 원근법과 균형 잡힌 구성을 통해 인간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시각화했고, 그의 대표작인〈아테네 학당 (The School of Athens)〉은 고대와 기독교의 통합이라는 교황의 이상을 완벽하게 구현했다. 라파엘로는 교황에게 있어 '이상적인 세계'의 표현자였다.
그러나 율리오 2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영원히 기억될 존재’로 만들기 위해, 죽은 이후를 대비한 거대한 무덤 조성 계획을 세웠다. 이 무덤은 단순한 묘소가 아니었다. 고대 로마 황제들의 영광을 계승한 상징적 건축물이자, 교황 자신의 신성을 시각화한 기념비적 조형물이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 과업을 수행할 유일한 인물로 지목된 이가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였다.
왜 미켈란젤로였을까? 그 이유는 단지 그의 조각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근육질의 인간 육체를 통해 힘과 정신을 동시에 표현할 줄 아는 예술가였다. 그는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전주의자를 넘어서, 인간과 신, 육체와 권위의 상징을 결합시킬 수 있는 드문 능력을 가진 조형가였다. 교황의 무덤은 단순한 묘석이나 기념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권위 그 자체를 육화한 신전 같은 것이어야 했고,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가는 미켈란젤로뿐이었다.
더불어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출신으로, 교황권에 비판적이던 도시에서 성장한 반골 기질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자신의 의지로 굴복시키고, 바티칸의 프로젝트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교황권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미켈란젤로는 단순한 후원 대상이 아니라, 권력의 시연 도구였던 셈이다.
1505년,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미켈란젤로는 그의 무덤을 위해 대리석을 직접 고르기 위해 카라라로 향했으며, 장장 수개월에 걸쳐 수십 개의 석재를 조달했다. 무덤은 40개 이상의 인물상이 들어가는 대규모 구조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교황청 내부의 정치적 사정과 비용 문제, 브라만테의 견제로 인해 수차례 연기되고, 결국 축소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미켈란젤로와 교황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 시작된다. 미켈란젤로는 이 상황을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직접 교황을 만나지도 않은 채 피렌체로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율리오 2세는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이번에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라는 명령이었다.
이제 예술과 권력의 싸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조각가에게 회화를 명령한 교황, 그리고 그에 맞서 창조적 고통을 감내하며 새로운 예술의 세계를 연 화가. 그 대결의 현장이 바로 시스티나 천장이다.
1508년,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맡게 된다. 회화를 싫어했던 그는 처음부터 이 임무에 극심한 저항감을 느꼈다. 그는 조각가였고, 대리석과 망치에 익숙했으며, 프레스코 작업의 기술도 경험도 부족했다. 교황 율리오 2세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회화를 맡기려는지 의문이 컸고, 그 배경에는 브라만테의 견제가 작용했다는 풍문이 돌았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을 주도하던 건축가로, 미켈란젤로를 의도적으로 교황에게 추천했다고 전해진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회화를 싫어하고 경험도 부족한 미켈란젤로가 실패할 경우, 그의 명성은 스스로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라파엘로가 막 로마에 도착해 브라만테의 보호 아래 빠르게 교황의 총애를 얻던 때이기도 했다.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대형 설계 도면을 요구했으며, 그의 작업 진척에 잦은 간섭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 기술을 익히기 위해 독학했고, 여러 보조 화가들을 불러들였으나 대부분은 그가 해고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만큼의 기준을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그는 거의 전 과정을 혼자 수행한다. 하루 열두 시간 이상, 목과 어깨를 젖힌 채 천장 위에서 그림을 그렸고, 페인트와 석회가 눈과 폐를 자극했다. 그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지금 지옥 속에 있다.
식사도, 수면도, 기도도 없다.
내 육체는 꺾이고, 정신은 바닥났다.
교황과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됐다. 교황은 성격이 급했고, 성과를 빨리 보고 싶어 했다. 미켈란젤로는 느렸고, 완벽을 추구했다. 공사 중 여러 차례 교황은 그를 찾아와 작업이 늦는다고 질책했다. 어떤 날은 교황이 미켈란젤로의 작업실 문을 강제로 부수고 들어와, 결과물을 직접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일화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런 교황에게 답하지 않고 며칠간 모습을 감추기도 했다.
또 다른 갈등의 핵심은 ‘금전’이었다. 교황은 종종 작업비 지급을 미뤘고, 미켈란젤로는 이에 대해 격분했다. 그는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제발 돈을 줄 거면 주고, 그만두게 할 거면 그리 하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율리오 2세는 되레 “네가 없으면 천장은 완성되지 않는다”고 답하며 다시 달랬다. 둘 사이의 관계는 줄다리기였다. 사랑과 증오, 존경과 분노가 뒤섞인 관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격렬한 갈등과 고립이 미켈란젤로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교황의 압박 아래 그는 단순한 주문을 넘어, 자신만의 서사와 신학, 인문주의적 통찰을 작품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그는 시스티나 천장을 단순한 신앙의 공간이 아닌, 인간의 존엄과 타락, 구원의 가능성을 조명하는 거대한 '시각적 성경'으로 탈바꿈시켰다.
천장화는 총 9개의 중심 패널로 구성되며, 창세기의 이야기, 혼돈에서 질서로, 창조에서 타락으로, 심판에서 구속으로 이어지는 인간 존재의 서사를 시각적으로 펼쳐 보인다.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은〈천지창조(The Creation of Adam)〉이다.
신이 오른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아담을 가리키고, 아담은 왼손을 느슨하게 들어올려 신의 손길을 받으려 한다. 그 둘 사이, 닿을 듯 말 듯한 간격은 생명의 순간을 향한 긴장과 기대를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신은 천상의 존재이되 인간과 닮은 형상으로 등장하며, 그 주위엔 생명을 품은 여성(미래의 이브로 해석됨)과 천사들이 있다. 아담은 이상화된 육체로 표현되었지만,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한 상태로 묘사된다. 이 장면은 미켈란젤로 특유의 해부학적 숙련과 형이상학적 질문이 만나는 지점이다.
또 다른 중요한 장면은 〈원죄와 낙원 추방(The Fall of Man and the Expulsion from Paradise)〉이다. 왼쪽에는 뱀이 나무에 몸을 휘감고 인간에게 선악과를 건네고 있고, 오른쪽에는 천사가 불검으로 아담과 이브를 쫓아낸다. 두 장면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연속적으로 배치된 구성은 인간의 유혹과 죄, 추방이라는 신학적 서사를 드라마처럼 전개한다. 이브는 유혹 앞에서 주저하지 않고, 아담은 그 결과로 고개를 숙인 채 낙원을 떠난다.
그 외에도 〈노아의 방주(The Flood)〉는 인간의 타락 이후 심판받는 장면을 묘사하며, 고통에 찬 표정과 무너지는 육체들의 연쇄는 신의 진노뿐 아니라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한다.
이 중심 패널을 둘러싼 공간에는 예언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구약과 고대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징적 존재로서, 미켈란젤로는 이들을 근육질의 비범한 존재로 형상화했다. 남녀를 불문하고 그들은 모두 정신적 계시와 육체적 긴장을 동시에 지닌 인물들로, 기독교적 계시와 고대의 지혜가 나란히 배치된다. 이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된 구성이다.
1509년 첫 패널이 공개되었을 때, 교황은 매우 만족했고, 다시금 작업비를 지불했다. 그러나 다음 장면을 그리는 동안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1510년 무렵, 심한 허리통증과 시력 저하로 인해 작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나는 죽어가고 있다"는 문장을 반복해서 편지에 썼다.
결국 1512년 10월 31일, 시스티나 천장이 공개되었다. 300명 이상의 인물이 역동적으로 배치된 이 거대한 작품은 곧바로 격찬을 받았다. 교황은 무릎을 꿇고 천장을 바라보며 “신의 손이 함께했도다”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당시의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공개 직후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외부와의 접촉을 피했다. 갈등의 시간이 그만큼 그를 지치게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이 고통과 압박, 권력과의 충돌이 아니었다면, 시스티나 천장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이라는 벽에 부딪히며,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했고, 조각가라는 정체성을 넘어선 ‘전인 예술가’로 완성되었다.
151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천장이라는 전례 없는 과업을 맡긴 인물이며, 동시에 고통과 억압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곧 미켈란젤로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절대적인 권력 아래에서 강요된 창조는 끝났고, 그 뒤로 펼쳐진 시간은 외견상 더 자유로웠지만, 역설적으로 더 깊은 고독과 싸워야 하는 시간이었다.
율리오 2세 이후에도 미켈란젤로는 줄곧 교황청과 메디치 가문, 피렌체 공화국에서 다양한 주문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이전과는 달라졌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조각가로만 규정하지 않았고, 그림과 건축, 시와 철학에 이르기까지 표현의 폭을 넓혀갔다. 그 중심에는 ‘명령을 받는 예술’이 아닌, 자기 신념에서 비롯된 예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변화는 조각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에서 수행한 메디치 가문의 무덤 조성 작업에서, 그는 〈밤과 낮(Night and Day)〉, 〈새벽과 황혼(Dawn and Dusk)〉같은 형이상학적 상징이 깃든 인물상을 선보인다. 각각은 삶의 시간, 인간 존재의 순환을 나타내며, 전통적인 영웅상과는 전혀 다른 조용한 힘을 발산한다.
그의 재능은 건축에서도 발휘된다. 1546년,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총건축가로 임명한다. 당시 70세를 넘긴 그는 이미 회화와 조각에서 전설적 존재였지만, 건축에 있어서도 자신의 미학을 일관되게 반영했다. 그는 브라만테가 구상한 돔 구조를 재정비했고, 보다 단순하고 강인한 구도를 설계했다. 대성당의 중심 돔은 “신의 거처를 인간의 눈으로 올려다볼 수 있는 구조”라는 미켈란젤로의 철학을 시각화한 것이었다. 이 시기의 미켈란젤로는 ‘장엄함’보다 ‘엄숙함’을 선택했다. 장식적 요소는 철저히 배제되었고, 구조적 무게감은 그의 말년에 품은 신앙과 죽음에 대한 인식이 반영된 것이었다.
미켈란젤로 말년의 작품 중 가장 내밀한 고백은 단연코〈론다니니 피에타(Rondanini Pietà)〉이다. 이 작품은 처음 구상했던 것과 매우 달라졌고, 미켈란젤로가 사망할 때까지 수정되었다. 그는 죽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이 조각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마침내 손을 떼었을 때, 예수의 다리는 아직도 대리석에 갇혀 있었다.
이 피에타에는 초기 작품〈바티칸의 피에타〉에서 보이던 육체의 생생함이나 조형적 완결성이 없다. 대신 성모는 자식을 껴안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무너지는 듯한 자세로 표현되었고, 예수의 육신은 거의 비물질적인 유령처럼 묘사된다. 이 조각은 하나의 형태라기보다, 삶과 죽음이 맞닿은 순간의 침묵을 담고 있다. 그가 89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이 조각은 완성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오히려 미켈란젤로 예술의 궁극적 도달점이라고 평가한다. 완결된 형태를 추구하던 젊은 시절과 달리, 그는 마지막 순간엔 형태를 해체하며 신 앞에 선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평생에서 가장 힘겨웠던 순간을 율리오 2세와 함께 보냈다. 강압적인 명령, 끝없는 갈등, 끊임없는 요구.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모든 충돌이 그의 예술을 단련시켰다.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전례 없는 과업을 부여했고, 위험과 고통이 가득한 길로 그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그 무거운 명령이야말로 미켈란젤로가 단지 훌륭한 조각가를 넘어, 회화와 건축, 종교적 형이상학까지 껴안는 르네상스의 궁극적 예술가로 성장하게 만든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예술의 자유”를 주지는 않았지만, “예술의 가능성”을 열어준 인물이었다. 그 가능성은 시스티나 천장의 천사들 속에서, 모세의 눈빛 속에서, 죽어가는 성자의 피부 속에서, 그리고 미완의 피에타 속에서 빛났다. 예술은 갈등 속에서 태어났고, 그 갈등의 이름이 바로 율리오 2세였다.
그러나 르네상스는 한 인물만으로 쓰이지 않는다. 미켈란젤로가 예술의 본질을 권력과 고통의 언어로 끌어올렸다면, 라파엘로는 부드러운 균형과 조화, 그리고 사람을 향한 신뢰로 그 정신을 완성시켰다. 그의 예술은 충돌이 아닌 조율의 미학이었다. 라파엘로는 스승들의 언어를 흡수하면서도, 결코 그들에 압도되지 않았다.
그는 피렌체의 고전주의와 로마의 장엄함, 북유럽의 세밀함을 모두 한 몸에 품고,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화가’로 불렸다. 그리고 그 화려한 재능 뒤에는 묵묵히 기반을 다져준 한 사람이 있었다.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치. 화려한 후원자가 아니라, 예술의 초석을 놓아준 가장 오래된 조력자였다. 다음 장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천장을 올린 바로 그 시기에 다른 방식으로 예술의 정점을 향해 올라가던 라파엘로와 그의 아버지 이야기를 다뤄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