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산치오 Raffaello Sanzio 1483-1520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전례 없는 예술적 황금기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시대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던 그 시기, 제3의 이름이 조용히 빛나기 시작했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그는 격정과 천재성의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과 외면이 조화를 이루는 회화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했다.
그의 그림은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균형과 품위, 정제된 이상미를 통해 관람자의 감정을 조율했다. 이 조용한 천재는 우르비노에서 태어나, 페루자와 피렌체를 거쳐 로마에 입성한다. 그리고 그 여정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에는 한 사람의 건축가가 있었다. 라파엘로의 로마 진입을 실질적으로 도운 인물, 브라만테였다.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는 1483년 4월 6일,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 우르비노에서 태어났다. 이 도시는 단지 작은 공국의 수도가 아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우르비노는 학자, 예술가, 건축가, 철학자들이 머물던 교양의 수도였으며,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작이 조성한 궁정 문화는 유럽 전역에서 손꼽힐 만큼 세련되고 학문적이었다. 라파엘로는 이 궁정에서 궁정 화가로 활동하던 조반니 산치오(Giovanni Sanzio)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반니는 화가이면서 동시에 시인이었다. 그는 라파엘로에게 붓을 쥐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예술이 단지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를 사유하는 하나의 언어라는 점을 가르쳤다. 그의 작업실은 석고상, 라틴어 필사본, 성서 도상, 고대 건축 도판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라파엘로는 그 안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미와 조화, 이상과 해석에 대한 감각을 체득했다.
1494년, 조반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열한 살이던 라파엘로는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에게는 아버지사 쌓아 놓은 단단한 예술적 기반과 네트워크가 남아 있었다. 이후 그는 페루자에서 활동하던 화가 페루지노(Pietro Perugino)의 공방에 들어가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 페루지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린 경력이 있는 화가로, 온화하고 대칭적인 구성, 부드러운 색감, 이상화된 인물 묘사로 유명했다. 라파엘로는 그에게서 고전주의 회화의 형식미와 정적 아름다움을 배웠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단순히 스승을 모방하지 않았다. 그는 스승의 양식을 빠르게 흡수하고, 자신만의 감각을 덧입혀 더 부드럽고 심리적으로 연결된 장면들을 구성해 나갔다. 그리고 그는 17세 무렵, 이미 독립 화가로서의 계약을 체결하게 된다.
그가 독립 작가로 남긴 첫 번째 제단화는 《바론치 제단화》(Baronci Altarpiece, 1501)였다. 이 작품은 지금은 대부분 파손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기록에 따르면 성모와 천사, 성인들이 화면 중심에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고, 인물 간의 감정선이 이미 성숙하게 연결되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라파엘로는 스승과 직접적으로 비교되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의 결혼》(The Marriage of the Virgin, 1504,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이다.
이 작품은 페루지노가 그린 같은 주제의 작품에 응답하듯 구성되었지만, 중앙의 원형당을 활용한 정확한 원근법, 인물들의 역동성, 건축과 인체의 조화를 통한 화면 깊이의 형성 등에서 압도적인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 이후, 라파엘로는 더 이상 제자가 아닌, 스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페루지노는 이후 라파엘로에 대해 공식적인 언급을 삼가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조용한 경쟁 구도로 바뀌었다.
1504년 이후, 라파엘로는 예술의 수도 피렌체로 옮겨간다. 이곳에서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접하며 큰 자극을 받는다. 다 빈치로부터는 인물 간의 심리적 거리 조절과 명암법, 미켈란젤로로부터는 해부학적 인체 표현과 역동적인 구성을 배운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이들 중 누구의 화풍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는 극단을 피하고, 고요한 조화를 추구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하는 자기만의 언어를 발전시킨다.
피렌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는 《벨베데레의 성모》(Madonna of the Belvedere, 1506, 미술사박물관, 빈)이다. 푸른 들판 위에 앉은 성모와 아기 예수, 세례 요한은 삼각형 구도로 배열되어 있으며, 밝은 색채와 부드러운 선, 인물 간의 감정 흐름이 조화를 이룬다. 배경의 자연 풍경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르네상스적 이상을 상징한다.
같은 시기 그려진 《대공의 성모》(Madonna del Granduca, 1505, 팔라티나 미술관, 피렌체)는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는 성모의 밝은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이는 분명 다 빈치의 어두운 배경 회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라파엘로는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성모상을 만들어냈다. 마리아의 얼굴은 고요하고 사랑스러우며, 시선은 관람자에게 부드럽게 응답한다.
또 다른 제단화인 《안시데이의 성모》(Ansidei Madonna, 1505, 내셔널 갤러리, 런던)는 고전적 구도 속에서도 인물 간의 심리적 거리를 섬세하게 조절한 수작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형식과 감정, 구상과 서정을 동시에 조화시키는 화가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20대의 어린 나이에 라파엘로는 이미 예술적 교양, 조형의 감각, 인간에 대한 섬세한 통찰을 모두 갖춘 독립 화가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로마, 즉 바티칸이라는 권력과 예술의 중심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단지 실력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의 세계를 진정으로 펼칠 무대, 그 문을 열어줄 인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문지기의 이름이 바로 브라만테였다.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는 라파엘로와는 전혀 다른 길에서 출발한 예술가였다. 그는 화가가 아닌 건축가로,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지방에서 태어나 밀라노와 로마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이상을 실현한 인물이었다. 라파엘로가 사람과 감정, 화면과 조화를 다루는 화가였다면, 브라만테는 석재와 공간, 비례와 구도 속에서 시간을 설계한 건축가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이상을 향하고 있었고, 그 접점은 곧 로마 바티칸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브라만테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1470년대, 그는 밀라노로 이동하여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 공작 치하의 궁정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 밀라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활동하던 도시였으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분야에서 당대의 첨단을 실험하고 있었다. 브라만테는 이 시기에 화가로도 활동했지만, 곧 건축에 더 큰 관심을 갖고 고대 로마 건축의 재현에 몰두하게 된다.
그가 설계한 초기 건축물 중 하나로는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프레소 산 사티로 교회(Santa Maria presso San Satiro, 1478~86)가 있다. 이 건물은 좁은 대지 조건에도 불구하고, 가짜 원근 투시 기법을 사용해 깊은 후진(後陣)을 만들어낸 착시 건축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건축에서 그림에서 사용하는 선 원근법을 건축에 적용하며, 시각적 감각이 뛰어난 설계자로 주목받게 된다.
이 시기 브라만테는 이미 알베르티의 고전주의 건축 원리와 브루넬레스키의 공간 개념을 깊이 이해한 르네상스 건축가로 평가받기 시작한다. 그의 작업은 대칭, 비례, 고전적 질서에 기반하면서도 시각적 극적 효과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499년, 밀라노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당하면서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실각하자 브라만테는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이동한다. 당시 로마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통치 말기였고, 예술적으로는 전환의 초입에 있었다. 브라만테는 이곳에서 고대 로마 유적을 면밀히 조사하고 측정하며, 고대 건축 양식을 현대적으로 부활시키기 위한 기획을 본격화한다.
이 시기 그의 대표작이자 로마 건축사에서 전환점을 이루는 작품이 《템피에토》(Tempietto, 1502,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로마)다. 성 베드로가 십자가형에 처해진 자리에 세운 이 작은 원형당은 고대 로마의 마르스 울토르 신전(Mars Ultor)을 모델로 삼았다. 16개의 도리아식 원기둥, 완벽한 원형 평면, 반구형 돔으로 구성된 이 건축물은 고전 건축의 비례와 질서를 르네상스적 종교성에 완벽히 통합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템피에토는 단지 소규모 기념비가 아니었다. 그것은 브라만테의 건축 철학이 완성된 상징물이자, 그를 로마에서 단번에 주목받는 인물로 끌어올린 전환점이었다. 이 건축으로 인해 그는 고대 로마의 정수를 계승하고, 그것을 16세기 교황권의 이미지로 재창조할 수 있는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즉위하면서 로마 예술계는 대대적인 전환기를 맞는다. 율리오 2세는 예술을 권위의 상징이자 정치의 수단으로 삼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끌어모으는 데 집중한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는 모세상을 포함한 교황 무덤 조각을, 브라만테에게는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이라는 르네상스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를 맡긴다.
1506년부터 브라만테는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총괄 설계를 시작한다. 그는 고딕 양식의 십자형 구조 대신, 고대 로마의 원형 구조에 기반한 중앙집중식 평면 구도를 구상한다. 이 구도는 완벽한 대칭, 수학적 비례, 명확한 공간 체계를 지향하는 이상적 건축의 구현이었다. 브라만테의 원래 계획은 거대한 돔을 중심으로 십자형 팔각 구조를 배치하는 형식이었으며, 이는 훗날 미켈란젤로의 완성안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비록 생전에 그는 이 건축의 완공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도면과 설계 구상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대성당 건축의 지침으로 활용된다. 라파엘로, 안토니오 다 상갈로, 미켈란젤로, 마데르노 등이 차례로 이어받아 작업을 완성해나갔으며, 결과적으로 브라만테는 '바티칸의 건축 언어를 설계한 사람'으로 남는다.
건축에 국한되지 않고 브라만테는 로마 예술 행정과 교황청의 시각 전략을 실질적으로 조율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고대 로마 유적의 실측과 재해석을 통해 도시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했고, 교황 율리오 2세가 구상한 ‘신성한 로마 재건’의 건축적 상징들을 현실화하는 설계자이자 조율자 역할을 맡았다.
당시 바티칸 내부의 예술가 네트워크는 단순히 미술적 평가만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예술은 교황의 권위를 대변하는 정치적 언어였고, 브라만테는 이 구조에서 가장 전략적으로 움직이는 예술가였다. 그는 자신이 참여한 건축, 장식, 조각 프로젝트에 어떤 작가를 참여시킬지 결정했고, 심지어 교황의 미술 정책에 직접 관여하거나 방향을 제시하는 자문가로 기능했다.
이러한 위치 덕분에 그는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라 바티칸의 ‘문화 장관’과도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교황 율리오 2세는 브라만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고, 브라만테 역시 교황의 이상과 권위를 고대 로마의 질서와 비례로 시각화하는 데 헌신했다.
브라만테의 막강한 위상에는 늘 경쟁과 갈등이 따랐다. 특히 가장 극적인 긴장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 출발했으며, 인간 신체의 역동성과 감정의 격정을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예술에서 형식보다 감정, 질서보다 영혼의 힘을 중시했다.
이에 반해 브라만테는 고전의 비례와 건축적 정합성, 르네상스적 이상을 따르는 질서의 예술가였다. 그가 미켈란젤로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은 단순한 성격 차이가 아니었다. 브라만테에게 있어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너무 격정적이고 불안정하며, 교황의 위엄을 드러내기엔 지나치게 인간적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갈등은 1505년 시작된 율리오 2세의 무덤 프로젝트에서 비롯되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에 몰두했으나, 교황청의 정치적 사정과 브라만테의 반대가 겹치며 예산이 삭감되고 작업이 중단된다. 이 와중에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가 회화에 경험이 없다는 점을 들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작업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교황에게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교황은 오히려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을 맡겼고, 이는 또 다른 예술적 혁명의 시작이 된다. 브라만테는 결과적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를 직접 목격하며 자신의 판단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천장화는 위대했지만, 브라만테가 구상한 르네상스의 고전 질서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브라만테는 당시 예술을 통해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구현하는 능력에서 가장 앞서 있었던 인물이었다.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가 예술 내부의 혁신가였다면, 브라만테는 시대의 질서를 설계하고, 그 위에 적합한 예술가를 배치하는 큐레이터적 기획자였다. 그는 예술이 개인의 자율성을 넘어서 공적 권위와 공간 질서 안에 들어서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미켈란젤로를 배제하려 했고, 라파엘로를 받아들였다.
이것이야말로 라파엘로에게 바티칸이라는 무대가 열리게 된 보이지 않는 조율의 정점이었다. 브라만테는 라파엘로가 바티칸에 걸맞은 예술가라고 보았고, 그가 교황 율리오 2세의 시대적 이미지를 완성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라파엘로가 고전의 비례, 인간의 품위, 질서와 감성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화가라고 믿었다.
이처럼 브라만테는 예술의 창작자이자, 무대를 짜는 설계자이자, 후속 예술가들의 문을 여는 문지기였다. 그는 고전의 빛으로 시대를 감쌌고, 그 위에 라파엘로라는 새로운 예술의 얼굴을 세워주었다.
1508년, 로마. 젊은 화가 라파엘로는 브라만테의 강력한 추천으로 바티칸 궁에 입성했다. 그들의 인연은 단순한 예술적 공감에 그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우르비노 출신(당시, 브라만테의 출생지인 롬바르디아는 우르비노 공국의 영향권에 있었음)이라는 지리적 공통점뿐 아니라, 사촌지간이었다는 전승이 전해진다.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치와 브라만테는 직간접적으로 우르비노 궁정 문화권에 속해 있었고, 이 연고는 단순한 혈연 이상의 신뢰와 정서적 유대를 형성했다.
브라만테는 라파엘로의 예술성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본 인물이자, 그의 성품과 교양, 고전적 이상을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설득할 수 있었던 사회적 권위를 가진 후견인이었다. 그리고 라파엘로는 이 추천의 무게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실하고도 품격 있는 예술로 보답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교황 율리오 2세는 예술을 통해 교황권의 위엄과 지적 정당성을 세우고자 했으며, 이는 단지 장식을 넘어선 이미지 정치의 핵심 사업이었다. 라파엘로가 맡게 된 첫 임무는 바티칸 궁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의 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라파엘로는 20대 중반의 젊은 화가였다. 바티칸을 장식하라는 임무는 경험 많은 거장들에게도 버거운 일이었지만, 그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기존의 벽화 일부를 과감히 지우고 자신의 손으로 시대의 이상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라파엘로가 서명의 방 네 벽면에 그린 벽화는 철학, 시학, 신학, 법학을 각각의 주제로 삼았다. 이는 곧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신과 인간, 고전과 기독교를 어떻게 통합하고자 했는지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기념비적 작품군이다. 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아테네 학당》(The School of Athens, 1511, 바티칸 미술관)이다.
이 작품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고대 철학자들이 토론하는 장면을 그렸으며, 회화 안에 아치, 돔, 원근법, 인간의 시선이 일관되게 배열되어 있다. 라파엘로는 이 장면을 통해 단지 고전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고전적 사유의 공간이 현대적 시선으로 재조립되는 순간을 그려냈다. 인물 하나하나에는 철학적 사유의 깊이와 삶의 다양성이 녹아 있으며, 건축 공간의 질서는 브라만테의 영향 아래 탄탄하게 설계되었다.
이후 그는 ‘엘리오도루스의 방’, ‘불의의 방’, ‘콘스탄티누스의 방’을 차례로 맡으며 바티칸 궁 전체를 책임지는 공식 화가가 되었다. 각 방의 주제는 교황권의 신성함, 정의의 수호, 교회의 기적과 같은 정치적·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고, 라파엘로는 회화로 교황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율리오 2세와 뒤이은 레오 10세는 라파엘로를 특별히 총애했다. 율리오 2세는 그에게 철학과 신학을 맡기며 교황의 권위를 시각화할 수 있는 손이라고 불렀고, 레오 10세는 예술과 학문에 더 깊은 관심을 보이며 그를 바티칸의 문화 전권 책임자로 대우했다.
특히 레오 10세는 라파엘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감독직을 맡기며, 건축가 브라만테 사후 그 자리를 잇게 했다. 이는 단지 화가로서의 능력을 넘어, 공공 프로젝트, 도시 공간, 예술 행정까지 총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라파엘로는 또한 당시 유력 귀족이자 금융가였던 아고스티노 키지(Agostino Chigi)의 별궁 ‘빌라 파르네시나’ 벽화를 그리며, 귀족 예술의 취향과 시대 감각에도 능숙하게 반응하는 예술가로 자리매김한다.
라파엘로가 바티칸에서 명성을 얻던 시기,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1508–1512)를 작업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 있었지만,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예술에 접근했고, 이는 자연스레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조각가로서의 정체성이 강했고, 회화를 조각보다 열등한 예술로 여겼다. 반면 라파엘로는 회화를 통해 철학과 신학, 시학 등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데 능했으며, 교황과 지식인들의 총애를 받았다. 그가 맡은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의 벽화 프로젝트는 이러한 교황의 신뢰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문제는 브라만테가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에 미켈란젤로를 추천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그 대신 라파엘로를 적극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회화를 억지로 떠맡게 되었고, 브라만테는 실패를 유도한 인물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런 브라만테와 가까운 라파엘로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바사리는 [미술가 열전]에서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교황의 눈에 들기 위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처신한다고 여겼고,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가 예술을 너무나 감정적으로 밀어붙인다고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그럼에도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인정했고, 그의 천장화를 직접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흔적은 《아테네 학당》 속 한 인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작품의 전면 왼편, 돌에 팔을 괴고 앉아 고독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헤라클레이토스의 모습은, 명백하게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모델로 한 묘사다. 이 인물은 다른 철학자들과 떨어져 있으며, 온 몸으로 고독한 사유의 깊이를 표현하고 있다. 라파엘로는 이 인물을 작품의 후반에 추가했는데, 이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에 영향을 받은 뒤 그의 존재를 새롭게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그림은 말 대신 회화로 표현한 경의와 긴장, 거리와 존중의 복합 감정이었다. 그는 미켈란젤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았지만, 작품 안에서 그를 응시하게 했다. 이것이야말로 라파엘로다운 방식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말로 맞서고, 라파엘로는 그림으로 응답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를 시기하면서도 인정했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에게서 표현의 강렬함을,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에게서 질서와 고전적 품위를 배웠다. 두 사람의 예술은 닮지 않았지만, 서로를 통해 르네상스 미술의 스펙트럼은 극적으로 확장되었다.
라파엘로는 외향적으로는 화려하고 온화한 인상이었지만, 내면에는 치열한 이상주의와 책임감이 공존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귀족들과 교황 앞에서도 지나치게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예술을 ‘권력의 언어’로만 다루기보다, 인간을 위한 언어로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 관람자와 인물 사이에 심리적 거리감이 없고, 그 안에는 항상 교감의 공간이 열려 있다.
그는 동시에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작업장 운영자’로서의 책임감도 가지고 있었고, 바티칸뿐 아니라 로마 전역의 장식, 건축, 도시계획에도 관여했다. 특히 그는 고대 로마의 유적을 조사하고 도면으로 재현하는 고고학 프로젝트에 열정을 보였으며, 로마를 재구성하는 시각적 지도 작업까지 시도했다.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보기 드문 회화, 건축, 고고학, 인문주의가 통합된 총체적 예술가였다.
하지만 그의 삶은 짧았다. 1520년, 라파엘로는 37세의 나이로 병사한다. 그의 죽음은 로마 예술계에 큰 충격을 안겼고, 바티칸은 특별 장례를 거행했다. 그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작업하던 《그리스도의 변용》(The Transfiguration, 1520, 바티칸 미술관)을 머리맡에 놓은 채 묻혔다. 그 그림은 그가 마지막까지 품었던 이상, 영혼과 신성, 인간의 고통과 희망의 통합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라파엘로는 완성된 그림보다 완성된 인간상을 남긴 화가였다. 그는 예술가로서의 격조, 시민으로서의 교양, 인간으로서의 성실함을 고루 갖췄으며, 동시에 권력과 예술, 교양과 감정의 경계선을 미묘하게 넘나드는 인물이었다.
그가 짧은 생애 동안 이룬 업적은, 단지 수많은 성모상이나 바티칸의 벽화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떻게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을 위로하고, 사유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응답에 있었다. 라파엘로는 그림을 그렸지만, 동시에 시대의 질서를 그렸고, 인간의 가능성을 그렸다.
그의 시작은 브라만테의 추천에서 비롯되었지만, 그의 도약은 자신의 품성과 사유, 그리고 아름다움을 믿는 고집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그는 바티칸의 벽에, 예술사의 중심에,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기억에 영원히 남는 얼굴이 되었다.
라파엘로가 짧은 생을 마감한 1520년, 그는 불과 서른일곱이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은 단지 수적 다작이나 기술적 완성도를 넘어선, 하나의 시대정신의 결정체였다. 다빈치가 열고 미켈란젤로가 흔들었던 전성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을, 라파엘로는 정리하고 완성하며 닫는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은 극적이지 않지만 위대했고, 감정은 절제되어 있으나 풍부했다. 《갈라티아의 승리》(The Triumph of Galatea, 1514, 빌라 파르네시나)에서는 신화의 생동감을 우아하게 풀어냈고, 《성체의 논쟁》(Disputa del Sacramento, 1509–1510, 바티칸 미술관)에서는 신학과 형이상학의 조화를 눈부시게 성취했다. 그에게 르네상스란 고전의 재현이 아닌 이상과 질서를 조화롭게 통합하는 인간 중심의 예술 체계였다.
그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 하나는, 예술을 학문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라파엘로는 젊은 시절부터 도제들을 훈련시키며 체계적이고 일관된 회화 양식을 정립했는데, 이는 곧 아카데믹 예술의 기반이 되었다. 그의 양식은 이탈리아 전역은 물론 프랑스와 스페인, 독일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특히 17세기 프랑스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 설립에 결정적 기준을 제공했다. 엄격한 구도, 이상화된 인체, 서정적 감정 표현은 라파엘로의 이름 아래 정통성과 이상으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이 ‘질서 있는 예술’은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예술가들에게 도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8세기의 신고전주의는 라파엘로를 모범으로 삼았지만, 19세기의 낭만주의자들은 그 절제를 벗어나려 했고, 20세기의 모더니스트들은 그 조화를 깨뜨리고자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모든 반란은 라파엘로의 정통성 아래에서 자라난 열매들이었다. 그는 하나의 도달점이자, 반작용의 기점이었다.
라파엘로는 죽기 전, 고고학자이자 설계자로서 로마 고대 건축물의 복원 작업에 매진했다. 그는 시스티나 천장의 파격을 모방하지 않았고, 다빈치의 철학적 시선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가 그린 것은 인간과 신의 이상적인 거리, 조화로운 사회 질서, 예술가의 책임이었다. 그런 점에서 라파엘로는 르네상스를 마무리한 마지막 고전주의자였고, 동시에 예술을 제도화한 최초의 근대적 작가였다.
그의 죽음 이후, 회화는 다시 개성을 향해 흔들렸고, 예술가들은 새로운 스승을 찾아 유럽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 중 독일의 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라파엘로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고전주의를 배웠으나, 북유럽의 눈으로 해석했고, 그 곁에는 언제나 한 명의 친구, 빌리발트 피르크하이머가 있었다. 다음 장에서는, 예술가와 인문학자가 나눈 위대한 우정, 그리고 그 우정이 낳은 르네상스의 또 다른 지도를 따라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