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 작가 시점] 알브레히트 뒤러

스스로 브랜드가 되어 버린 르네상스의 화가 이야기

by 그림좋문가 김책장
우리가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걸작들, 그 작품의 작가들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1인칭 작가 시점]은 예술사 속 위대한 작가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만나보는 새로운 시리즈입니다.

화가들이 살았던 시대상과 그들 개개인의 예술적 개성을 반영해, 마치 그들이 직접 말하는 듯 생생하게 인터뷰를 구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술가의 내면, 창작의 고뇌, 작품 뒤에 숨은 비밀을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특별한 경험, 미술관의 침묵을 깨우는 이 즐거운 여정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 가죽장갑을 낀 자화상 / 1498 /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작가님, 우선 간단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려요.

안녕하십니까. 알브레히트 뒤러라 합니다. 1471년, 뉘른베르크의 공방과 성서 속 풍경 사이에서 태어나, 금속과 선, 그리고 생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자 애써온 사람이지요. 예술은 제게 단지 손의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 내면의 구조를 해부하고, 자연의 이치를 그림이라는 언어로 번역하는 행위입니다.

저는 신의 피조물에서 수학을 읽고, 나뭇잎의 윤곽에서 존재의 본질을 관찰해 왔습니다. 저는 르네상스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림은 제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었고, 동시에 세상과 대화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지금 이 인터뷰가 제게 허락된 또 하나의 창이라면, 기꺼이 제 삶의 자취와 사유를 나누고자 합니다.



작가님은 언제 어떻게 아티스트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예술가로서 삶을 결심하게 된 인생의 변곡점이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금세공인이셨던 아버지의 작업대를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정밀한 손놀림, 금속 위에 새겨진 아름다운 문양들, 도안 위에 펼쳐지는 상상력, 그 모든 것이 어린 시절의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그려낸다’는 행위가 얼마나 경건한 일인지를 그때 처음 배웠지요.

본격적인 전환점은 열다섯 살, 미카엘 볼게무트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갔을 때입니다. 그곳에서 목판화와 도해, 성서 삽화 제작을 익히며 예술이 단순한 장식이 아닌 지식의 도구임을 깨달았습니다. 상상력과 기술, 그리고 정신의 탐구가 하나의 그림 안에 녹아들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뜬 것이지요.


알브레히트 뒤러 / 미하엘 볼게무트의 초상화 / 1516


하지만 제가 ‘예술가로서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정한 진정한 변곡점은, 1494년 이탈리아로의 첫 여행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레오나르도와 벨리니의 작품들을 접하고, 인간 해부학과 원근법, 고전 철학과 미의 질서에 감전되듯 매료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예술은 단지 직업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탐색하는 학문이자 시대의 사유라는 것을요. 그 여정에서 돌아온 뒤, 저는 더 이상 ‘금세공인의 아들’이 아닌, ‘생각하는 손’을 가진 예술가로서 제 운명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작가님이 살던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여행을 가는 일이 흔했나요? 어떤 이유와 계기로 이탈리아 여행을 하게 되었나요?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여행은 제 삶에 있어 신이 제게 내리신 시험이자 은총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에서 이탈리아로의 여행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행은 긴 여정과 위험을 동반했지요. 국경마다 세금과 검문이 있었고, 언어와 풍습도 달랐으며, 때로는 역병이나 도적 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라면 반드시 남쪽을 보라는 말이 공방 사이에선 속삭여지고 있었지요.


저는 1494년, 23세의 젊은 나이에 첫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습니다. 계기는 혼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그네스 프레이와 혼례를 올린 직후였지요. 하지만 저는 새로운 인생의 문을 열기보다, 제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대로 뉘른베르크에 머무른다면, 나는 기술자는 될 수 있어도, 진정한 예술가는 되지 못하리라.


그래서 저는 결혼 직후 곧바로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베네치아와 만토바, 파도바, 밀라노까지. 그 여정에서 저는 고전 조각의 비례와 인체 해부학, 색채와 공간의 질서를 목격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자신을 단순한 장인이 아닌, 철학자와 수학자, 시인으로 여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게 이탈리아는 단지 지리적 여행이 아니라 정신의 재탄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이후 제 판화와 회화, 해부학 연구, 그리고 자화상에 이르기까지 저를 지탱하는 기반이 되어주었지요.



이탈리아 여행에서 작가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작가는 누구였을까요?

예, 이탈리아에서 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이는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다 빈치의 작품들이 지닌 기하학적 엄밀함과 자연에 대한 세심한 관찰력은 제게 있어 한 폭의 그림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지요.


그의 스케치와 해부학적 연구는 단순히 외양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오한 구조와 신비로운 균형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제 화폭에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서, 인간의 내면과 우주의 질서를 녹여내고자 하는 열망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지요.


물론 이탈리아의 다른 뛰어난 예술가들과 고전 유산 또한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나, 다 빈치의 작업에는 특히 제 영혼이 감동받았습니다. 그의 작업은 저에게 예술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과 신, 그리고 자연 사이의 불가사의한 언어임을 깨닫게 해주었으니, 그것이 바로 제게 가장 큰 전환점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이후 작가님은 어떠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나요?

여행에서 돌아온 뒤, 저는 단순한 ‘화가’가 아니라, 사유하는 예술가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배운 원근법, 해부학, 인문주의적 세계관을 독일적 전통과 융합시키는 것이 제 과제였지요.


귀국 직후 저는 자화상부터 그렸습니다. 1498년에 완성한 [가죽 장갑을 낀 자화상]과 1500년의 [그리스도를 닮은 자화상]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후자의 작품에서는 마치 구세주처럼 정면을 응시하는 저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이는 단순한 자만의 표현이 아닙니다. 예술가가 신의 형상을 모방하는 창조자이며, 그 정신적 위상을 갖추어야 한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또한 판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묵시록의 네 기사]는 고딕적인 상상력에 르네상스적 구도를 결합한 시도로, 제 이름을 유럽 전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요. 목판화를 통해 성서 이야기뿐 아니라 세속적인 세계에 대한 시각적 사유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멜랑꼴리아 I], [서재의 성 제로니모]와 같은 판화를 통해 인간의 고귀함과 내면적 투쟁을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죽음과 악마의 유혹 속에서도 흔들리 없이 나아가는 용기, 창조의 한계에서 번민하는 예술가의 사유와 불안, 신을 향한 경건함과 고요한 지적 탐구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 멜랑꼴리아 / 서재의 성 제로니모 (출처 : Wikipedia)


결국 저는 회화, 판화, 이론서까지 아우르며 ‘예술가’라는 존재의 지위를 확장하고자 했습니다. 독일어로 예술 이론서를 집필하고, 수학과 기하학을 그림과 연결 지으려 한 것도 그런 뜻에서였지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그리스도를 닮은 자화상]에는 A.D 라고 하는 작가님만의 오리지널 이니셜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또한 그리스도와의 관계성을 활용하고자 했던 의도적 작업이었을까요?

예리한 통찰이십니다. 말씀하신 그 “A.D.” 제 이름 Albrecht Dürer의 이니셜이자, Anno Domini, 즉 ‘주님의 해’라는 라틴어 표현과도 겹치는 이 서명은 단순한 이름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누구이며, 또한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한 상징적 선언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자화상]은 제 자화상 중에서도 가장 신중하게 구성된 작품입니다. 정면을 응시하는 구도, 어두운 배경에서 떠오르는 상반신, 손끝의 미세한 제스처까지—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전통적 초상 양식을 본뜬 의도적인 장치였지요.

알브레히트 뒤러 / 그리스도를 닮은 자화상 / 1500 /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 미술관


그리고 그 안에 새겨진 “A.D. 1500”은, 제 존재를 시간과 신의 질서 안에 위치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저는 단지 그림을 그리는 손이 아니라, 신의 모방자(imago Dei)로서 이 세상의 조화를 읽고 기록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제 서명은 ‘나, 뒤러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기술자의 서명이 아니라, “나는 이 시대에 신의 뜻과 질서를 새기고자 존재한다”는 철학적 고백이었습니다.


물론, 세속적인 목적도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 당시는 예술가가 여전히 장인으로 인식되던 시대였지요. 저는 그 인식을 넘어, 예술가가 지성과 창의, 사유를 갖춘 독립적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제 모든 작품에는 제 이름을 기호로 새겼습니다. 서명은 곧 정체성이자 선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제 A.D.는 단순한 이니셜을 넘어, 저라는 예술가의 시대적 위치와 정신적 선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님 이후 많은 화가들이 본인의 그림에 서명을 넣기 시작했는데요, 작가님은 언제부터 A.D. 모노그램*을 사용하신 건가요?

저는 1495년, 뉘른베르크에 제 작업실을 열고 독립한 직후부터 이 A.D. 모노그램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판화 작업에서는 거의 모든 작품에 이 서명이 등장하지요. 목판화와 동판화는 대량 복제와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에 저작자 표시는 더욱 절실했습니다.


제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묵시록의 네 기사]부터 A.D. 서명이 명확히 등장하며, 이것이 작품 자체의 권위를 보증하는 일종의 인증 마크로 기능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예술가들은 그림에 서명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작가 이름이 없이 유통되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작품에 일관된 로고를 새김으로써, ‘이것은 내가 만든 세계다'라는 선언을 한 셈이지요.


알브레히트 뒤러 / 묵시록의 네 기사 / 1498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제가 정립한 이 모노그램 사용은 훗날 저작권 소송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탈리아의 한 출판인이 제 판화를 무단으로 베껴서 판매한 사건이 있었고, 저는 베네치아 법정에 이를 제소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베끼는 행위 자체는 금지되지 않았지만, 저의 A.D. 모노그램을 도용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받아냈습니다. 이 판결은 유럽 미술사에서 저작권 개념의 시초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제가 서명을 고집했던 이유는 단순한 자존심이 아니라, 예술가가 정신적 창조자이자 독립된 인격체임을 사회가 인정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은 이후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인’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졌지요.


*모노그램 : 두 개 이상의 글자를 합쳐 한 글자 모양으로 도안화한 조합된 글자


판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판화를 통해 대량 생산된 작품들을 어떤 방식으로 유럽 전역에 유통시켰고, 이렇게 본인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알리려고 노력한 배경이 궁금해요.

회화는 한 점이 전부이지만, 판화는 수백 장이 되지요. 저는 이 점에 주목했습니다. 단 하나의 걸작보다, 생각을 수백 명에게 전파할 수 있는 매체, 그것이 판화의 힘이었습니다.


제가 택한 첫 전략은 완성도 높은 예술성과 철저한 기획력을 겸비한 판화 연작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묵시록의 네 기사]와 같은 작품은 기존 종교적 이미지와는 차별화된 구도와 해석, 공포와 숭고가 교차하는 감각적 구성으로 강렬한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본 적 없는 그림’을 찾고 있었고, 저는 그 갈망을 읽었습니다.


둘째로, 저는 판화 유통망과 서적 시장을 정밀하게 이용했습니다. 당시 독일과 네덜란드 지역에는 활판 인쇄의 발달로 판화와 삽화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었고, 저는 상인들과 연계해 박람회, 서점, 교회 근처의 노점 등지에서 작품을 유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직접 여행을 통한 네트워킹에도 힘썼습니다. 베네치아, 바젤, 스트라스부르, 앤트워프 등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돌며 인문학자, 인쇄업자, 후원자들과 교류했습니다. 여행지마다 판화 작품을 보여주고 판매하거나, 이론서를 소개하며 저의 ‘예술 철학’을 함께 전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단순한 이미지 공급자가 아니라, ‘생각을 가진 예술가’로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노력은 결국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었습니다. “예술가는 자기 이름으로 세계를 설득해야 한다.” 중세에는 공방의 이름이 중요했지만, 저는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개인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는 시대를 열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판화를 선택하고, 서명을 하고, 유럽 전역을 돌며 제 이름을 퍼뜨린 이유입니다.



정말 놀라운 접근이네요. 그런데, 당시에는 작가님처럼 본인의 작품을 직접 유통하는 등 사업적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는 드물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러한 작가님의 활동을 다른 작가나 고위 인사들은 다소 불편하게 받아들이고 비난하는 이도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그 질문은 제 마음 깊은 곳, 제가 가장 외롭고 날카롭게 고민했던 부분을 건드립니다. 당시 저는 칭찬과 경탄만큼이나, 질시와 오해를 견뎌야 했습니다. 특히 제가 판화로 명성과 수익을 거두고, 자기 이름을 내건 예술가로 부상했을 때, 세상은 그 현상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당시의 예술계는 여전히 길드 중심의 장인 체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작가는 교회나 귀족의 의뢰를 받아 그림을 제작하는 ‘봉사자’였지요. 그런데 제가, 자신이 원하는 주제로 작품을 만들고, 직접 인쇄와 유통을 관리하며, 게다가 그 작품 하나하나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것, 이 모든 것이 보기에 따라선 매우 오만하거나, 상업적으로 보였을 겁니다.


특히 일부 보수적인 화가나 사제들은, [멜랑꼴리아 I]처럼, 제가 신비로운 종교 주제를 과감한 해석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돈을 받고 대량으로 유통한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드러냈습니다. 저를 속세에 물든 장사꾼이라 부르거나, 예술의 신성을 훼손한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지요.


알브레히트 뒤러 / 멜랑꼴리아 I / 1514 / 뉴옥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예술을 시장에 종속시키려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예술이야말로 세상과 소통해야 하며, 성스러운 진리를 전하는 또 하나의 언어라고 믿었습니다. 제 판화는 값싸게 유통되었지만, 그 안에 담긴 사유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제 삶을 통해 하나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예술가도 지성과 경영 감각, 세계와 대화하는 목소리를 지닐 수 있다.” 저는 그 길이 고독하고 험난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군가는 먼저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편한 시선 앞에서도 제 로고를 지웠던 적이 없고, 유럽 전역을 걸어 다니며 제 이름을 알렸던 것이지요. 예술가의 이름은 단지 서명일 뿐만 아니라, 역사 앞에 남기는 증언입니다. 저는 그 증언을, 부끄럽지 않게 남기고 싶었습니다.



작가님는 판화 말고도, 동물과 곤충, 식물 등의 자연물을 대상으로 한 세밀화도 많이 남기셨습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작가님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나요?

그 질문은 제 예술의 가장 조용하고도 숭고한 차원을 건드리는군요. 맞습니다. 저는 화려한 종교화나 거대한 역사화뿐만 아니라, 작고 연약한 생명들, 이를테면 한 마리의 토끼, 말라가는 풀잎, 딱정벌레 한 마리조차도 깊이 바라보고 그렸습니다. 이들은 제게 단순한 ‘연습용 소재’가 아니라, 신의 창조 질서와 생명의 경외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남긴 대표적인 세밀화, 이를테면 [야생 토끼], [청색날개 딱정벌레], [풀의 한 조각]같은 작품들을 보면, 그 안에는 거대한 신전도, 성경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매일 밟고 지나치는 자연의 작은 조각들이 있을 뿐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 어린 야생 토끼 Young Hare / 1502 / 비엔나 알베르티나 박물관


그런데 바로 그 안에서 저는 신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그 조밀한 털결, 비늘의 광택, 이파리의 잔맥 속에는 인간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정교한 설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르네상스의 이상, 즉 *“자연은 신의 책이며, 관찰은 기도의 다른 형태다”*라는 믿음과 완전히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밀화를 그릴 때 단지 관찰자가 아닌, 기록자이자 해석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종종 수 시간씩 한 자리에 앉아, 변화하는 빛과 결을 관찰하며 자연과 조용히 대화했지요. 저는 붓끝으로 “나는 이것을 보았노라”는 고백을 남겼고, 그것이 바로 세밀화였습니다.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점은, 이러한 작품들은 인체 비례나 해부학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자연의 구조를 통해 인간의 신체 또한 하나의 우주라는 확신을 가졌고, 동물의 움직임과 식물의 생장에서 조화로운 비례와 반복의 원리를 배웠습니다. 예술은 결국,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고 그 질서를 감각과 지성으로 번역하는 작업이니까요.


많은 이들이 제가 전쟁이나 신화를 그리지 않고 토끼를 그렸다고 비웃었지만, 저는 오히려 말하고 싶었습니다. “한 마리의 토끼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신의 창조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작가님은 [인체 비례론]과 같은 미술과 관련한 이론서를 직접 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시도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아는데, 직접 책을 쓰신 이유가 궁금해요.

맞습니다. 제가 직접 이론서를 집필한 예술가라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예술은 감각이 아니라, 사유의 기술이며, 지식의 체계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확신. 저는 그 믿음을 글로 남기고자 했습니다.


제가 처음 집필한 이론서는 [측량학 입문]입니다. 이 책은 기하학, 원근법, 그림의 구성 원리, 도형의 측량 등을 설명한 책으로, 말하자면 화가를 위한 수학책이었습니다. 저는 이를 통해 “그림은 단지 손의 솜씨가 아니라, 머리의 계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 측량학 입문 Unterweisung der Messung / 1525 /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당시 독일 화가들은 대개 직관에 의존했지요. 그러나 저는 이탈리아에서 레오나르도와 알베르티의 영향을 받아, 예술도 하나의 학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특히 원근법과 비례에 관한 지식은 단지 그림을 더 정밀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질서 있게 바라보는 눈을 기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쓴 책이 바로 [인체 비례론]입니다. 이는 인간의 몸을 수학적 관점에서 분석한 첫 독일어 예술 이론서이자, 제가 생의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던 과제이기도 합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 인체 비례론 / 1528 / 스위스 무리 의학 역사책 박물관 MUSEUM FÜR MEDIZINHISTORISCHE BÜCHER MURI


저는 수백 명의 남성과 여성, 심지어 아이들의 신체를 관찰하고 측정하며, 그 안에서 ‘아름다움의 수학적 구조’를 찾아내려 했습니다. 왜냐고요?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그 몸속에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질서를 해독하는 자, 즉 예술가이자 연구자, 두 역할을 함께 수행하고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저는 이 모든 책을 독일어로 썼습니다. 그 전까지 예술 이론은 대부분 라틴어로 쓰여, 학자나 성직자들만 이해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저는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누구나 읽고 배울 수 있도록 모국어로 글을 썼습니다. 그것은 저의 예술 민주주의이자, 후대 화가들에게 건네는 지적 유산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론서 또한 작가님의 브랜딩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은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던 이 브랜드의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 던 것 같은데요, 브랜딩이 그토록 작가님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제가 살아 있던 시기에는 ‘브랜드’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저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정신적 무기인지 누구보다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원했던 것은 단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가진 이름", 즉 작가로서의 독립된 위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는 특정 교회, 귀족, 도시의 이름 아래에서 일했습니다. 그 이름이 있어야 작품도 팔리고 명성도 얻을 수 있었지요. 화가는 ‘의뢰 받은 자’였고, 개인의 정체성은 미약하거나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르네상스의 정신, 즉,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고, 책임질 수 있는 존재다"라는 개념을 예술가의 삶에 적용하고자 했습니다. 예술가는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지성과 창조성의 주체, 즉 독자적인 서명과 목소리를 지닌 존재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이름을 로고처럼 새겼고, 그림뿐 아니라 이론서와 편지, 자화상, 심지어 여행기에도 "A.D."라는 이름을 새기며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 로고는 단지 식별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나 알브레히트 뒤러가 이 세계를 어떻게 보았고,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담은 서명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A.D.를 보면 단지 화풍이 아니라, 지식과 고전, 경건함과 실험정신, 신과 인간 사이에서 고민한 한 사람의 정신을 떠올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제가 판화를 통해 대중과 직접 연결되는 방식을 택한 이상, 사람들에게 제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려야 했습니다. 귀족 후원자 없이, 권위 있는 교회 없이, 오직 내 이름 하나로 유럽을 움직이기 위해 브랜드는 나의 방패이자 검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예술가라는 존재가, 타인의 이름 아래에서가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이 시대와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입니다.



오늘 이 곳을 방문한 관람자들이 작가님의 작품 중 딱 1개만 볼 수 있다면, 무엇을 보라고 추천하고 싶은가요?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로군요. 제 삶의 단면이자 신념의 조각들이 수많은 그림과 판화 속에 흩어져 있기에, 단 세 작품을 고른다는 것은 마치 제 인생에서 단 한 장면만을 남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지만 관람자가 제 예술의 중심인 관찰, 사유, 그리고 인간을 꿰뚫어볼 수 있도록 꼭 한 작품을 추천드리자면, 1513년에 제작한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 /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Knight, Death and the Devil / 1513 / 부르클린 뮤지엄



이 작품은 1513년, 제가 인생의 중년에 접어들 무렵, 내면의 어둠과 싸우며 완성한 이른바 “세 개의 마스터 판화(Meisterstiche)" 중 하나입니다. 다른 두 점은 [성 제로니모](St. Jerome in his Study)와 [멜랑콜리아 I](Melencolia I)입니다. 셋 중에서도 이 작품은 행동하는 인간, 즉 실천의 이상형을 그린 판화였습니다.


화면 속 중심에는 말 탄 기사가 묵묵히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는 갑옷을 입고, 창을 쥔 채 산길을 통과합니다. 그의 곁에는 두 존재가 따라붙습니다. 오른편에서 해골을 든 죽음이 그를 쳐다보며 따라가고, 뒤편에선 짐승 같은 얼굴의 악마가 그를 유혹하거나 조롱하듯 뒤쫓습니다. 그러나 기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정면을 응시하며 길을 걷고, 그의 말조차도 흐트러짐 없이 발을 내딛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늘 죽음과 악마를 동반하지만, 올바른 믿음을 지닌 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 판화를 통해 기독교적 기사도의 이상, 즉 “신념, 용기, 인내”를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루터파의 신학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이 느껴진다고도 했지요.


그러나 저에게 그것은 개신교나 가톨릭을 넘어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내면의 윤리적 자세”였습니다. 당시 저는 개인적으로도 매우 고독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종교 개혁의 불길이 번지고 있었고, 인간 존재의 의미와 신의 질서에 대한 의문이 깊어졌지요. 그런 때일수록 저는 그림이 길을 보여주는 등불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이 판화의 기사는, 바로 그 등불 속에서 묵묵히 걷는 저 자신의 또 다른 자화상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려보려고 하는데요, 앞선 대화에서 작가님은 후세의 화가들에게 좋은 유산을 물려주고 싶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작가님의 삶과 작품에 영감을 받아 본인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을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더 나은 예술가가 되기 위한 조언을 해 주신다면 어떤 말씀을 전하고 싶으신가요?

이 얼마나 영광스럽고도 숙연한 마지막 질문인지요. 제가 살아 있는 동안 지녔던 가장 깊은 열망은, 단지 내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견한 진실의 조각들을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누군가가 지금도 붓을 들고, 판을 새기며, 마음속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는 예술가라면 이 마지막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첫째, 보라. 끝까지, 조용히, 깊이. 아름다움은 드러난 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것입니다. 나뭇잎의 결, 인간 눈동자의 수분, 주름 사이의 그림자, 이 작고 연약한 존재들 안에서 신의 언어가 속삭입니다. 예술가는 세상을 통과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읽는 자여야 합니다.


둘째,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나는 왜 그리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멈추지 마십시오. 유행과 찬사는 빠르게 지나가고, 시장은 예술을 소비하지만, 자신의 신념과 철학을 잃지 않는 자만이 긴 시간 속에서 살아남습니다. 저는 그 질문 끝에 예술은 인간 정신의 건축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지요.


셋째, 손과 머리, 그리고 마음을 함께 훈련하라. 붓을 잘 드는 것만으로는 예술가가 아닙니다. 글을 쓰고, 읽고, 사색하고, 자연을 연구하고, 타인의 사유를 경청하십시오. 저는 손으로 판화를 새기면서도, 밤마다 기하학과 철학서를 읽었습니다. 예술은 지식의 결을 따라갈 때 더 높은 진실에 닿습니다.


넷째, 이름을 아끼되, 그 이름에 책임을 가지라. 제가 A.D.라는 서명을 남긴 것은 자랑이 아니라 책임이었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당신의 진실이 되게 하십시오. 작품 한 점 한 점이 ‘당신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때, 예술가는 하나의 목소리가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독을 사랑하십시오. 가장 깊은 통찰과 가장 정직한 창조는 고요한 외로움 속에서 태어납니다.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정제의 시간이며, 예술가의 침묵 속 기도입니다.




이 글은 알브레히트 뒤러의 삶과 예술 세계를 바탕으로, 챗GPT와의 대화를 통해 재구성한 인터뷰 형식의 창작 콘텐츠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되, 상상력을 더해 당시 예술가의 시선을 현재의 언어로 풀어내고자 했습니다.


챗GPT가 제공하는 정보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 외부의 다양한 자료와 교차검증하며 최대한 Fact 기반으로 작성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주시면 확인 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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