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화려한 곳에서 가장 인간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 이야기
우리가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걸작들, 그 작품의 작가들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온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1인칭 작가 시점]은 예술사 속 위대한 작가들을 인터뷰 형식으로 만나보는 새로운 시리즈입니다.
화가들이 살았던 시대상과 그들 개개인의 예술적 개성을 반영해, 마치 그들이 직접 말하는 듯 생생하게 인터뷰를 구성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술가의 내면, 창작의 고뇌, 작품 뒤에 숨은 비밀을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특별한 경험, 미술관의 침묵을 깨우는 이 즐거운 여정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 우선 간단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Diego Rodríguez de Silva y Velázquez)입니다. 1599년 스페인의 세비야에서 태어나, 마드리드 왕실의 궁정화가로 살아간 화가입니다. 저는 현실을 관찰하고, 그것을 가장 정직하고 심오하게 화폭에 담으려 애썼습니다. 많은 이들이 저를 필립 4세 국왕의 초상화가로 기억하지만, 제 그림의 진정한 주제는 ‘보이는 것 너머의 진실’입니다.
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녀들(Las Meninas)》은 단지 공주의 초상이 아니라,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의 경계, 그리고 회화란 무엇인가를 묻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나는 붓으로 진실을 말하고자 했고, 그림 속에 나 자신을 걸어 넣음으로써 화가라는 존재의 위치를 다시 질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림이 권력과 신분을 섬기던 시대에, 나는 붓으로 사람을 바라보고, 현실을 재현하며, 결국 인간의 본질에 다가가려 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예술이고, 나의 삶이었습니다.
소개 감사합니다, 작가님. 첫번째 질문을 드려볼께요. 마드리드로 가시기 전 세비야에서 작가님의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 곳에서의 삶과 시간이 작가님의 예술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세비야는 나의 눈을 틔워준 곳이자, 나의 붓이 처음으로 생명력을 얻은 도시입니다. 나는 1599년, 이 활기찬 상업과 종교의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세비야는 스페인 제국의 부와 세계가 만나는 항구도시였고, 이국적인 사람들, 물건들, 이야기들이 넘쳐났지요. 그런 다양함은 어린 나의 시선을 끊임없이 자극했습니다.
나의 예술적 기초는 프란시스코 파체코의 작업실에서 다져졌습니다. 그는 엄격한 이상을 추구하던 인물이었고, 나의 장인이기도 하지요. 파체코에게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론과 기독교적 주제의 무게를 배웠지만, 나는 거기서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나는 일상의 사물을, 평범한 사람들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며 훈련했습니다. 특히 세비야의 시장과 주방, 평민들의 표정과 손끝의 감정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 시절 그린 《세비야의 물장수(The Waterseller of Seville, 1622)》와 같은 작품들은 나의 초기 화풍을 대표하지요. 그 그림 속 인물들은 비범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얼굴에 담긴 진지함, 고요한 품위를 사랑했습니다. 세비야에서 나는 ‘존엄성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을 배웠고, 그 생각은 평생 내 그림의 중심을 이뤘습니다.
그리하여 마드리드로 향할 때, 나는 단지 수도로 가는 젊은 화가가 아니라, 현실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눈과, 인간에 대한 깊은 존중을 지닌 사람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렇군요, 말씀 중에 언급하신 작가님의 장인, 프란시스코 파체코는 어떤 분이셨고 작가님과의 관계는 어떠했나요? 그리고 그 분의 따님과는 어떻게 결혼을 하시게 된 건지 몹시 궁금합니다.
프란시스코 파체코는 내 인생의 첫 스승이자, 나의 장인이 된 분입니다. 그는 세비야에서 꽤 이름 있는 이론가이자 화가로, 당대의 회화에서 도덕적·종교적 규범을 무엇보다 중시했습니다. 특히 ‘신성한 주제는 신성하게 그려져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지요. 그의 작업실은 단순한 그림 교습소가 아니라, 예술과 철학, 신학이 함께 논의되는 배움의 공간이었습니다.
그의 지도 아래 나는 단순히 기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회화가 지녀야 할 지적 기반과 종교적 윤리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젊은 나로서는 그의 엄격한 기준과 규율이 때론 숨 막히기도 했습니다. 나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사실주의에 빠져 있었고, 그는 더 숭고한 형상을 추구했으니까요. 하지만 서로 다른 시선 속에서도 우리는 존중을 바탕으로 한 깊은 사제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그의 딸 후아나와의 결혼은,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습니다. 나는 파체코의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후아나는 언제나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우리는 급진적인 열정보다는 신뢰와 존중 위에 관계를 쌓아갔고, 1618년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후아나는 나의 예술 여정에 있어 늘 조용한 버팀목이 되어주었지요. 우리가 낳은 두 딸 중 하나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났지만, 다른 딸은 오랫동안 우리의 곁을 지켰습니다.
결국 파체코와의 인연은 나의 예술적 기초뿐 아니라, 인생의 뿌리를 형성해준 토양이었습니다. 나의 그림 속에 흐르는 정직함과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어쩌면 그와의 사제 시절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아나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스승이신 파체코 씨가 반대를 하지는 않았을까요?
아니요, 전혀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우리의 결합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물론 세비야 사회에서는 스승의 딸과의 결혼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파체코는 내가 단순한 제자를 넘어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인물이라고 판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후아나를 존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눈치채셨지요.
당시 저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고, 아직 이름난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의 재능을 믿어주었고, 무엇보다도 성실함과 인간됨을 높이 사주셨습니다. 파체코는 내게 “자네는 그림뿐 아니라,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눈이 후아나를 향했다는 사실이 그분에게는 안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결혼은 우리 가족뿐 아니라, 그 시대 예술가들 사이에서도 일종의 연대이자 신뢰의 증표였습니다. 스승의 딸과의 혼인은 내가 이 집안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했고, 동시에 파체코가 나에게 얼마나 큰 믿음을 갖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지요.
그분의 딸과 가정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내 예술 여정에도 조용하지만 깊은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작업실 너머에 있는 작은 안식처, 즉 가족이라는 세계에서 다시 나 자신을 다잡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 파체코의 인정보다 따뜻한 환영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군요. 열정 가득한 도시 세비야에서 스승님의 따님과 결혼하신 스토리가 매우 낭만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작가님의 세비야에서의 작품들을 보면 낭만보다는 오히려 일상적인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작가님이 캔버스에 담고자 했던 예술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 말씀, 아주 정확하십니다. 제 젊은 시절의 그림들은 낭만보다는 진실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눈앞의 세계를 이상화하거나 꾸미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담고자 했습니다. 그 시절, 내게 예술이란 감상을 위한 대상이 아니라 관찰과 진실을 향한 시선이었습니다.
세비야는 화려한 도시였지만, 그 이면에는 가난, 노동, 고독, 그리고 믿음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삶의 층위를 캔버스에 올리고 싶었습니다. 《계란을 요리하는 여인(Old Woman Frying Eggs, 1618)》이나 《물장수(The Waterseller of Seville, 1620)》 같은 작품들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단지 음식이나 물을 다루는 장면이 아니라, 그 행위 속의 침묵, 손끝의 주름, 눈동자의 고요한 움직임을 포착하고자 했습니다.
나는 빛을 어떻게 다루느냐보다, 빛이 인간을 어떻게 비추는가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세비야에서 나는 이탈리아 회화처럼 영웅적인 구도나 신화적 인물을 따르기보다, 하찮아 보일지 몰라도 누군가의 하루를 구성하는 장면들을 그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당대 유럽에서도 드물게 노동과 빈곤의 품위를 묘사한 화가였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는 이러한 사실적 묘사를 통해 관람자가 그림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아, 저건 그냥 하인일 뿐이야"라고 넘기기 전에,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구나"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었지요. 저는 그림이 인간을 올려다보는 일, 그리고 인간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드는 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것이 바로 젊은 시절의 저를 움직인 예술의 힘이었습니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진실을, 이상이 아니라 인간을. 그리고 그런 신념은 훗날 궁정화가가 된 이후에도 저의 그림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으로 남았습니다.
말씀하신 화풍, 그러니까 일상적인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보데곤 장르가 당시 스페인에서는 유행이었나요?
아주 흥미로운 질문을 주셨습니다. 제가 젊은 시절 그렸던 그림들, 특히 일상의 정물과 평민의 삶을 담은 작품들을 흔히 ‘보데곤(Bodegón)’이라 부릅니다. 이 용어는 ‘선술집’ 혹은 ‘음식을 파는 가게’를 뜻하는 스페인어 bodega에서 유래한 것으로, 처음에는 음식과 관련된 정물화를 가리켰지요. 그러나 곧 인물과 정물이 결합된 장르로 확장되었고, 제가 주로 다룬 것도 바로 이 정물과 인물의 결합이었습니다.
17세기 초 스페인, 특히 세비야에서는 이 보데곤이 갑작스레 유행을 탄 장르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스페인 미술계의 중심은 여전히 종교화와 초상화였고, 회화는 신을 찬미하거나 권력을 상징하는 데 쓰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보데곤은 다소 주변부의 장르였고, 일부는 그것을 하찮거나 저급한 회화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하찮은’ 세계 속에서 진실의 깊이를 보았습니다. 깨진 항아리, 삶은 계란, 노파의 굽은 손, 침묵 속 물장수의 눈빛—이 모든 것이 저에게는 인간의 존재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상징이었지요. 저는 그 세계를 그냥 스쳐 지나치지 않고, 오히려 확대하고 응시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화풍은 플랑드르의 정물화, 그리고 카라바조의 빛과 어둠의 대비에서 영향을 받은 면도 있습니다. 특히 카라바조의 ‘테네브리즘*(tenebrism)’ 기법은 저의 젊은 시절 작품들에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인물의 형태가 암흑 속에서 떠오르듯 드러나는 그 극적인 대비는, 제가 사람들의 침묵 속 존엄성을 표현하는 데에 큰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보데곤은 당시 주류는 아니었지만, 저는 그것이야말로 스페인 사회의 또 다른 얼굴, 가장 인간적인 얼굴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념은 나의 마드리드 시절, 심지어 왕과 귀족을 그릴 때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테네브리즘 : 이탈리아어 tenebroso('어둡고 우울하고 신비로운') 에서 유래 한 테네브리즘은 때때로 극적인 조명 이라고도 불리며 , 특히 뚜렷한 명암 대비를 사용하는 회화 스타일로,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가 있고 어둠이 이미지의 지배적인 특징이 됩니다. 이 기법은 스포트라이트 효과를 통해 이미지에 드라마틱함을 더하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바로크 회화에서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서민들의 일상을 그린 보데곤 장르가 이후 왕과 귀족의 그림에 영향을 미쳤다는 부분이 매우 흥미로운데요, 그럼 이제 궁정화가로서의 작가님의 예술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언제 어떠한 계기로 마드리드로 가셔서 궁정화가가 되신 걸까요?
제가 마드리드로 향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예술가로서 더 넓은 무대에서 자신의 시선을 시험해보고자 했던 갈망이었습니다. 세비야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지만, 저는 거기에 안주할 수 없었습니다. 더 깊이 있는 인간 탐구, 더 큰 사회의 구조 속에서 그림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시험하고 싶었지요.
1622년, 저는 마드리드로 처음 올라갔습니다. 그때는 직접적인 기회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궁정 내부의 분위기와 수도의 예술적 흐름을 몸으로 체감한 중요한 방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623년,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당시 왕의 공식 궁정화가였던 후안 데 플란데스가 세상을 떠나면서 공석이 생겼고, 내 장인이자 스승인 파체코와 마드리드에 있는 인맥들의 적극적인 추천 덕분에 저는 국왕 펠리페 4세 앞에서 초상화를 그릴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는 젊은 화가로서, 그러나 세비야에서 수련한 시선과 정신으로 국왕을 마주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국왕은 내 그림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단 한 번의 초상화로 저는 왕실 전속화가로 임명되었지요. 당시 제 나이 24세였습니다. 젊은 화가로선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제 삶은 바뀌었습니다. 왕의 신임은 단순한 칭찬을 넘어, 그의 인생 대부분을 나에게 맡기겠다는 신호였고, 실제로 저는 30년 넘게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국왕의 초상뿐만 아니라 왕비, 왕자들, 그리고 궁정의 난쟁이, 광대, 하인들까지도 제 화폭에 담기게 되었지요.
하지만 저는 궁정화가가 되었다고 해서 세비야에서 품은 예술적 철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보데곤에서 쌓은 현실 감각과 인간을 바라보는 눈은, 왕과 귀족이라는 권위적 존재를 그릴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단순히 외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처한 사회적 위치, 내면의 흔들림, 존재의 무게를 담아내려 했지요.
그래서 제가 그린 왕의 초상은 단지 권위를 드러내는 이미지가 아니라, 때론 고독하고 때론 우울하며, 한 인간으로서의 국왕을 보여주고자 했던 시도였습니다. 그것이 제가 궁정화가로서도 예술가로서의 자유와 깊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라 생각합니다.
겨우 24세의 나이로, 그것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 왕의 신임을 얻고 궁정화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데, 궁정화가로 임명되시고 나서 두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 오셨고, 그 여행들이 작가님의 예술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스페인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고 있던 시기에 굳이 힘들게 이탈리아를 다녀 오신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궁금합니다.
정말 좋은 질문을 해주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저에게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미 국왕의 총애를 받는 궁정화가인데, 왜 굳이 이탈리아까지 가려 하십니까?” 하지만 저에게 있어 예술은 한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시선의 확장이었습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해도, 저 자신이 멈춰 있다면 제 그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이탈리아에 간 것은 1629년, 마드리드에서 궁정화가로서 몇 해를 보낸 후였습니다. 왕의 특별한 허락과 후원을 받아 떠났지요. 사실 이탈리아는 제게 ‘전설의 무대’ 같은 곳이었습니다. 라파엘로, 티치아노, 미켈란젤로, 카라바조. 그들의 그림은 세비야 시절부터 책과 복제품으로 접해왔지만, 실물로 마주하는 것만큼 강렬한 교훈은 없었습니다.
베네치아에서는 색채의 풍부함과 화려한 조형미, 로마에서는 고전적 균형감과 조각 같은 인체묘사, 그리고 나폴리에서는 카라바조의 어둠과 빛, 생의 비극성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티치아노의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그의 색과 구성은 나에게 색을 다루는 방법뿐 아니라, 인물의 존재감을 화폭 안에 어떻게 녹여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지요.
그리고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은 1649년, 이미 왕실의 수석 화가이자 궁정 내 중책을 맡은 상태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번엔 단순한 미술 공부가 아니라, 스페인 왕실을 위한 미술 컬렉션 구매, 그리고 황태자의 혼인 준비를 위한 외교적 역할까지 맡은 중요한 사절의 자격이었습니다.
그 여정 중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를 로마에서 직접 그리는 기회도 있었는데, 그 그림은 오늘날에도 저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힙니다. 《교황 인노첸시오 10세(Pope Innocent X, 1650)》는 교황 자신도 “Troppo vero! 너무도 진실하군!”이라며 당황해했을 만큼, 권위를 넘어서 한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보려 한 시도였습니다.
결국 이탈리아는 제게 단지 기술적 영향 이상의 것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예술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어떤 깊이까지 인간을 그릴 수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었지요. 저는 스페인의 빛으로 이탈리아의 유산을 다시 소화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내 예술은 더 깊고, 더 넓어졌습니다. 궁정화가라는 지위에 안주하지 않고, 예술가로서 계속 성장하고자 했던 그 마음이, 오늘날까지도 저를 살아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스페인의 빛으로 이탈리아의 유산을 다시 소화하고 싶었다는 그 말씀이 굉장히 멋지네요. 이번에는 작가님의 대표작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작가님의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시녀들 Las Meninas] 인데요, 이 작품은 작가님에게 어떤 작품인지 소개 부탁드려요.
《시녀들(Las Meninas, 1656)》은 제 인생의 결실이자, 회화라는 예술 형식에 대한 가장 깊은 고찰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을 단순한 궁정의 일상 장면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저는 그 안에 시선, 권력, 현실과 허상의 경계, 그리고 예술가 자신의 위치를 동시에 담으려 했습니다.
화면을 보면 중심에는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가 있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시녀들, 난쟁이들, 개, 하녀, 그리고 뒤편 문 안에서 멈춰 선 호세 니에토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전면 좌측에는—바로 저 자신, 즉 화가 벨라스케스가 화폭을 들고 서 있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의 진짜 주인공은 정작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캔버스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그리고 공주의 시선, 시녀들의 시선이 모두 어디론가를 향해 있지요. 우리는 정면, 화면 바깥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 바깥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화면 후방 벽에 걸린 거울을 통해 그 정체를 암시받습니다—그 안에는 국왕 펠리페 4세와 왕비가 비쳐 있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실제로 방 안에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그림 속에 그려진 것일까요? 혹은 보는 당신, 관람자 자체가 바로 그 자리—즉 왕과 왕비의 위치에 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중적이고 반사적인 시선의 구조, 그것이 이 그림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작품에서 단순한 묘사를 넘어서 예술가의 존재와 역할을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그림 속에서 화가인 나는 왕과 왕비의 존재를 포착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왕의 권력 아래 존재하는 하인이자 궁정의 종속된 자이기도 합니다. 그 모순적인 위치에서 나는 화가의 존엄을 말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그림을 그린 해로부터 몇 해 전, 국왕에게 산티아고 기사단 훈장을 간청해 왔고, 그림 속 화가의 흉복에는 그 훈장이 그려져 있습니다. 다만 실제로 그 훈장을 받은 건 이 작품이 완성된 3년 뒤, 죽기 1년 전의 일이었지요. 그럼에도 저는 그림 속에 그것을 미리 그려넣었습니다. 그건 단순한 허영이 아닙니다. 저는 말하고 싶었어요. "예술가는 단지 붓을 든 기술자가 아니라, 진실을 담는 눈이며, 역사를 기록하는 손이며, 왕과 마주한 자다"라고요.
《시녀들》은 궁정의 장면인 동시에, 철학적 성찰이며, 회화라는 매체에 대한 메타적 선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화가로서의 저 자신과, 인간으로서의 저의 고독한 질문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작품은 단지 ‘대표작’이 아니라, 삶과 예술의 정점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그림입니다.
그리을 통해 예술가의 존재와 역할을 주장하고자 했다는 말씀이 매우 인상 깊습니다. 후세의 평론가들은 화가가 단순한 장인이 아닌 ‘지적 존재’로 인정받는 시대를 연 사람이 작가님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예술가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작가님은 어떠한 견해를 갖고 있으셨나요?
그 말씀은 제 평생의 신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저는 처음 붓을 들었을 때부터, 화가는 손을 움직이는 장인이기 이전에, 눈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마음으로 진실을 탐색하는 지적 존재라고 믿었습니다. 예술은 단순한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라, 철학이 깃든 시선, 사유가 녹아든 기록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제가 살던 17세기 스페인에서는 여전히 화가를 ‘기술자’ 혹은 ‘장인’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법적으로도 화가는 귀족 계층에 속하지 못했고, 궁정의 하인들과 같은 지위에 놓이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한 사회적 시선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 그림을 통해, 화가란 누구인가, 그는 어떤 존재로서 역사에 관여하는가를 계속해서 질문하고, 주장하려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선언이 바로 앞에서 이야기 한 《시녀들》입니다. 저는 그 안에서 나 자신을 그림 속에 등장시키고, 단지 무대 뒤에서 왕과 귀족을 섬기는 존재가 아니라, 무대를 기획하고 바라보며, 역사의 한복판에서 기록하는 사람으로 화가를 위치시켰습니다. 궁정 속에서 왕이 인정한 단 한 사람의 시선, 그것이 바로 화가의 눈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한 초상화 이상을 추구했습니다. 왕을 그릴 때에도 그의 외모가 아니라 통치자의 고독과 인간적인 깊이, 권력 뒤의 침묵을 담으려 했습니다. 광대와 난쟁이, 하인의 초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분이 아닌 존재의 존엄을 그리는 것, 그것이 제가 화가로서 지니고자 했던 책임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고대 조각과 르네상스 예술을 접하며, 저는 예술가가 단지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세계관을 가진 창조자임을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을 마드리드의 궁정에서도 잃지 않으려 했고, 그림을 통해 그것을 설득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제가 바랐던 것은 단순히 ‘높은 자리’가 아니라, 예술가가 사회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재정의였습니다. 죽기 직전 산티아고 기사단의 일원이 되어 귀족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도, 저 개인의 영예라기보다는 예술이라는 행위의 명예를 회복하는 상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는 세상의 뒷자리에 앉아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때로는 가장 앞에서, 때로는 가장 깊은 곳에서, 진실을 직시하는 눈이자 시대를 기록하는 손입니다. 저는 그런 화가로, 그리고 그런 인간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시녀들 다음으로 후세 사람들이 작가님을 기억할 때 어떠한 작품을 떠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나요?
《시녀들(Las Meninas)》이 저의 예술적 선언이라면, 그 다음으로 후세 사람들이 떠올려주었으면 하는 작품은 바로 《브레다의 항복(La rendición de Breda, 1635)》입니다. 저는 이 그림이야말로 역사화의 본질, 그리고 인간의 품위와 존엄에 대한 제 신념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은 1625년, 네덜란드 브레다 요새가 스페인 군에 항복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역사화입니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여러 전선을 펼치고 있었고, 이 승리는 군사적 상징성이 컸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그림을 단지 승리의 기념으로 그리지는 않았습니다. 정복자가 패배자를 짓밟는 장면 대신, 승자가 패자에게 손을 내미는 순간, 그 인간적인 장면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스페인 장군 스피놀라가 열쇠를 건네는 네덜란드 지휘관을 위엄 있게 받아들이는 모습, 그 손끝의 제스처는 위압이 아니라 존중입니다. 저는 전쟁의 영광보다 그 속에서도 인간이 지켜야 할 존엄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 장면은 단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윤리적 시선이기도 하지요.
그림의 구성 또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군사들은 창과 깃발을 들고 있지만, 중심은 전투가 아닌 화해의 순간입니다. 그것이 제가 꿈꾸는 예술의 역할입니다. 폭력보다는 존중, 승리보다는 품격을 전하는 것.
이 작품은 국왕 펠리페 4세의 명으로 ‘승리의 전당(Salón de Reinos)’을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지만, 저는 그것을 스페인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그림이 아니라, 스페인이 지닌 관용과 기품의 초상으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며 단지 전쟁의 결과가 아니라, 그 순간에 담긴 인간의 선택과 자세를 함께 읽어내준다면, 저는 더없이 기쁠 것입니다. 예술은 역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사를 어떻게 말하느냐가, 예술가의 깊이를 결정짓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림을 통해 인간의 품위와 존엄에 대한 본인의 신념을 표현한다는 말이 가슴에 크게 와 닿았습니다. 작가님은 그러한 본인의 신념을 끊임없이 표현하고 실천에 옮기셨는데요, 조수이자 노예였던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 또한 그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파레하의 초상을 그리고, 그를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후안 데 파레하는 저의 조수였고,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저의 예술과 인간관을 시험하게 만든 존재였습니다. 그는 아프리카계 혈통을 지닌 노예였고, 제가 마드리드에서 그림 작업을 하던 초기부터 함께 일했습니다. 그는 나무를 다듬고, 물감을 갈고, 캔버스를 준비하며 나의 그림 뒤편에서 묵묵히 시간을 쌓아간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일찍이 그가 단지 육체노동을 하는 조수가 아니라, 관찰하는 눈과 감각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림을 준비하는 손끝에서, 가끔 눈에 머문 풍경을 그려보려는 시선에서, 그의 내면에도 예술가의 불꽃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650년, 제가 로마에 머물며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초상화를 그리기 직전, 저는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Juan de Pareja, 1650)》초상을 먼저 그렸습니다. 그것은 연습작이면서도, 단순한 연습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를 한 사람의 인물, 독립된 존재, 존엄을 지닌 인간으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림 속 그는 정면을 응시하고, 짙은 갈색 피부와 우아한 레이스 칼라, 그리고 자존감 어린 눈빛으로 서 있습니다. 노예가 아닌 존재 그 자체로의 파레하를 나는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 초상은 로마에서 전시되었고, 많은 이들이 놀라워했습니다. “노예를 이렇게나 기품 있게, 주인처럼 그릴 수 있다니.” 그렇습니다. 저는 바로 그 반응을 원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신분이 아니라 눈빛과 마음에 있다는 것을, 그 화폭으로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저는 공식 문서를 통해 파레하를 자유인으로 해방시켰습니다. 단지 내 조수가 아닌, 나와 같은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후 실제로 화가가 되어 몇 점의 작품을 남겼지요. 그의 예술적 재능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제게 깊은 의미였습니다.
저는 예술이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그 거울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서야 한다고 믿습니다. 《후안 데 파레하의 초상》은 그 믿음을 실천한 그림입니다. 그것은 단지 인물화가 아니라, 제가 가진 신념의 초상, 그리고 인간에 대한 헌사였습니다.
후세의 화가들이 작가님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어쩌면 작가님의 그림 실력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존중의 마음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한 편, 작가님은 궁정화가셨기 때문에 화폭 속에 많은 권력자들을 그리셨는데요, 권력자들의 인간적인 면을 포착하는데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작가님이 본 권력이란 어떤 모습이었나요?
권력이란, 외양만 보면 찬란하고 거대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 곁에서 수십 년을 지켜본 권력은, 그 찬란함 뒤에 고독, 무게, 불안, 그리고 인간적 흔들림을 품고 있었습니다.
펠리페 4세 폐하를 예로 들자면, 그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였고,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가진 절대자처럼 보였지만, 저는 그 안에 있는 깊은 고독을 언제나 느꼈습니다. 그가 왕좌에 앉아 있을 때보다, 혼자 그림 앞에 서 있을 때의 표정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지요.
그래서 저는 그를 그릴 때, 위엄보다 인간적인 침묵과 내면의 무게를 담고자 했습니다. 《펠리페 4세의 초상》에서는 그리 화려한 장식도, 과장된 연출도 없습니다. 다만 그의 눈빛과 입매, 어깨의 기운 속에서 통치자의 고뇌와 인간으로서의 쉼 없는 고독이 배어나오기를 바랐습니다.
권력자는 수많은 시선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시선 대부분은 ‘보여지기 위한 이미지’를 기대하지요. 저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들이 감추고 싶어 하거나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어떤 본질—그것을 바라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왕이나 귀족뿐 아니라, 광대, 난쟁이, 하인의 초상도 똑같은 방식으로 그렸습니다. 그들의 표정 하나, 주름 한 줄에도 똑같은 무게를 담았지요.
제가 본 권력이란, 인간을 거대하게 보이게 하는 동시에, 인간을 가장 외롭게 만들기도 하는 구조였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흔히 가면을 쓰지만, 저는 그 가면 뒤의 얼굴을 그리려 했습니다. 이런 시선은 어쩌면 제가 젊은 시절 세비야의 서민들을 그리며 익힌 습관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분이 아니라 존재의 깊이를 보는 눈.
그리고 저는 그 눈으로, 왕도, 하인도, 나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예술가의 역할은 칭송이나 복제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꿰뚫는 시선이라 믿습니다. 권력을 찬양하는 대신, 그 이면의 인간을 조명하는 일, 그것이 제가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후세의 화가들이 저에게서 붓의 기교보다 먼저, 사람을 바라보는 정직한 마음과 존중의 자세를 배워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드려 보려고 하는데요, 후세에 작가님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마주할 관람객들이 작가님의 작품을 어떠한 마음으로 봐 주었으면 하는지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저의 그림 앞에 선 당신에게, 저는 화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잠시 멈추어,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바라봐 주십시오.”
제 작품에는 왕도 있고, 하인도 있고, 소녀도 있고, 광대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어떤 이들은 맨발에 먼지를 묻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저는 그들의 존재를, 말 없는 존엄과 고요한 감정들까지 화폭에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러니 누가 등장하든, 그 사람의 표정과 손짓, 시선과 빛을 통해 당신과 다르지 않은 어떤 삶의 결이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 그림 속에 저도 어딘가에 있습니다. 때로는 화폭 뒤에서, 때로는 그림 안에서, 때로는 단 한 점의 그림자처럼. 그건 단지 ‘나’를 남기기 위함이 아니라, 예술가란 존재가 관찰자이자 기록자이며, 한 시대를 살아가는 증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후세의 여러분께 제가 바라는 것은 거창한 해석이나 찬사가 아닙니다. 단지, 한 점의 그림이 당신 마음속에 조용히 말을 걸었을 때, 그 목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여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록 수백 년이 흘렀을지라도, ‘당신도 나와 같구나’라는 공감이 스쳤다면, 그걸로 저는 충분합니다.
그림은 언어보다 오래 살아남습니다. 그 속에 담긴 인간을 향한 애정, 진실을 향한 시선도 함께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조용히 바라며 붓을 놓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제 그림 앞에 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삶과 예술 세계를 바탕으로, 챗GPT와의 대화를 통해 재구성한 인터뷰 형식의 창작 콘텐츠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되, 상상력을 더해 당시 예술가의 시선을 현재의 언어로 풀어내고자 했습니다.
챗GPT가 제공하는 정보의 불완전성을 보완하기 위해, 외부의 다양한 자료와 교차검증하며 최대한 Fact 기반으로 작성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주시면 확인 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