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거울이 된 화가들, 만테냐와 벨리니

만테냐(1431~1506) / 벨리니(1430~1516)

르네상스의 도래는 단지 고대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을 중심에 두고 세계를 다시 바라보려는 열망이었고, 예술은 그 열망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섬세하게 포착해냈다.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 특히 파도바와 베네치아는 이러한 새로운 예술 정신이 피어나던 토양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두 화가가 있었다.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1506)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 한 사람은 고대 조각의 단단한 윤곽을 캔버스 위에 새겼고, 다른 한 사람은 빛의 떨림과 인간 감정의 미묘한 결을 포착했다. 이들은 단지 동시대를 살았던 예술가가 아니었다. 서로의 가족이었고, 경쟁자였으며, 무엇보다 서로의 거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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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만테냐 (출처 : Picryl) / 조반니 벨리니 (출처 : Wikipedia)




1.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시작되었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4세기 피렌체의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는 중세 회화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는 금빛 배경과 평면적인 인물 묘사로 대표되던 비잔틴 전통에서 벗어나, 사람의 표정과 몸짓, 공간의 깊이를 그림 속에 담아냈다. 그의 성프란체스코 성당 프레스코화는 감정이 있는 인물, 상호작용이 있는 서사, 무게감이 있는 공간을 구현했다. 이는 르네상스 회화의 서막이었다.


이후 15세기 초, 마사초는 지오토의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더욱 과학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재현했다. [성삼위일체]나 [아담과 이브의 추방]같은 작품에서 마사초는 원근법, 명암법, 해부학 지식을 활용해 인간과 세계를 '논리적 질서' 안에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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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이브의 추방, 1425, 피렌체 브란카치 예배당 / 성삼위일체, 1427,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르네상스는 단순한 미술 양식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 중심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 세계관으로의 전환이었다. 그 전환의 중심에는 피렌체가 있었다.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는 코시모 데 메디치와 같은 유력 가문을 중심으로 예술과 학문을 후원하며 새로운 세계관의 실험장이 되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문헌이 다시 번역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새로운 인간 이해를 위한 재료가 되었다.


브루넬레스키는 고대 건축의 원리를 부활시키며 새로운 형태의 건축 공간을 창조했고, 도나텔로는 인간 신체를 자연스럽게 재현한 조각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냈다. 이처럼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지적, 예술적 혁명의 발신지였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단지 피렌체 안에서만 국한되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국지적 운동으로 머물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어떻게 이탈리아 전역으로, 특히 북부 도시로 확산되었는가이다. 그 열쇠는 여행, 네트워크, 주문, 경쟁이라는 키워드에 있었다.


먼저, 학자와 예술가들의 이동이 활발했다.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서 고대 건축을 연구했듯, 많은 예술가들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며 새로운 사상을 나누었다. 예컨대 마사초의 원근법은 파도바에서 활동한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고, 파도바는 곧 북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img1.daumcdn.jpg 지오토 디 본도네의 대표작인 있는 파도바 스크로베니 예배당 (출처 : Padova Musei Civici)


그리고, 도시국가 간 경쟁이 있었다. 밀라노, 페라라, 만투아, 파도바,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은 각기 다른 정치 체제와 문화적 성향을 지녔지만, 공통적으로 예술을 ‘권력의 상징’으로 여겼다. 이는 자연스럽게 각 도시에서 예술에 대한 수요를 확대시켰다. 귀족과 교회는 앞다투어 새로운 양식의 프레스코, 제단화, 조각을 주문했고,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나 그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북부로 초청되었다.


인쇄술과 고문헌의 재발견도 르네상스의 북진에 큰 역할을 했다. 인문주의자들이 피렌체를 중심으로 라틴어, 그리스어 고전을 번역하고 주석을 달며 새로운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냈고, 이는 파도바와 볼로냐 같은 대학 도시로 퍼져나갔다. 특히 파도바 대학은 의학, 철학, 예술이 융합되는 학문적 중심지로서,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사고방식과 과학적 감각을 제공했다.


hp_biblio_preview.jpg 1222년에 설립된 중세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 파도바 대학교 (출처 : Unipd)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북부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피렌체의 ‘인간 중심적 시각’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도시문화에 맞게 재해석했다. 예컨대 파도바의 만테냐는 피렌체 회화의 선명한 원근법을 받아들였지만, 고대 조각과 극적인 서사성을 결합해 더욱 건조하고 강렬한 회화를 창조했다. 반면 베네치아의 벨리니는 초기에는 만테냐와 유사한 도식적 구성과 인체 표현을 따랐으나, 곧 베네치아 특유의 빛과 색채 감각을 바탕으로 감정적이고 서정적인 화풍을 확립해 나갔다.


결국 르네상스는 하나의 중심에서 일방적으로 흘러간 운동이 아니었다. 피렌체에서 시작된 사상과 형식은 도시 간 교류와 예술가들의 개인적 실험을 거치며 각 도시의 문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꽃을 피웠다. 만테냐와 벨리니는 바로 그러한 ‘다양한 르네상스’의 두 갈래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2. 돌처럼 단단한 시선, 만테냐의 조형 세계


르네상스가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는 시대였다면 안드레아 만테냐는 그 해석을 누구보다 단단하고 논리적인 방식으로 수행한 예술가였다. 그는 화폭을 하나의 무대로 보았고 그림을 마치 건축처럼 설계했다. 감정의 흐름보다 시선의 구조에 주목했고 부드러운 색채보다 석조 조각 같은 명확한 선과 구도를 택했다. 그의 세계는 빛보다는 돌의 무게를, 서정보다는 형식의 질서를 중시했다.


1431년, 베네치아 근교 이조라 디 카르투로(Isola di Carturo)에서 태어난 만테냐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열 살 무렵 파도바의 화가이자 고대 예술 애호가였던 프란체스코 스콰르초네의 작업장에 들어가 수련하면서 그는 그림 이상의 세계에 눈을 떴다.


스콰르초네는 라틴어 문헌과 로마 유물, 고대 조각에 대한 열정으로 유명했으며, 제자들에게 그리스·로마 고전 양식을 직접 따라 그리고 분석하게 했다. 만테냐는 이 교육을 통해 젊은 나이에 고대의 언어를 익혔고, 회화를 조각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방식에 만족하지 않았고, 스무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스콰르초네와 결별하며 독립적인 화가로 나아갔다.


그의 독자적인 시도는 파도바 에르미타니 성당의 프레스코 작업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특히 [성 야고보의 순교 (Martyrdom of St. James)]에서는 고대 로마 건축을 연상케 하는 배경 안에 비극적 사건을 밀도 있게 압축해 넣었다. 개선문 구조 안에서 인물들은 극적인 제스처를 취하며, 원근법의 통제 아래 정렬된다. 이 그림은 단순히 종교적 감흥을 유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선을 조형적으로 조직하는 방식을 통해 관람자의 인식을 지배한다.


martyrdom-of-st-james-1448.jpg!Large.jpg 만테냐, 성 야고보의 순교, 1453-1455, 파도바 에르미타니 성당



만테냐는 인간의 고통조차도 조각처럼 표현하려 했다. 1458년경에 제작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The Agony in the Garden)]에서는 밤의 정적 속에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와 졸고 있는 제자들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다. 배경의 폐허는 로마 문명의 흔적을 상기시키며, 신약의 이야기와 고대 세계를 하나의 시각 구조 안에 연결한다. 이 작품은 조반니 벨리니가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림과 자주 비교되는데, 두 화가가 어떻게 감정과 구조, 자연과 형식 사이에서 전혀 다른 선택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

Andrea-Mantegna-Agony-in-the-Gar.png 만테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1458~1460, 런던 내셔널 갤러리
Giovanni_Bellini_-_Orazione_nell'orto.jpg 벨리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1459~1465, 런던 내셔널 갤러리



만테냐가 르네상스 회화에서 이룬 가장 대담한 실험은 만토바 공작 루도비코 곤차가의 의뢰로 제작한 [신혼의 방’(Camera degli Sposi)]이다. 이 방 전체를 하나의 환영적 공간으로 설계한 그는 특히 천장 중앙에 설치한 원형 오큘루스를 통해 관람자를 완전히 새로운 시점으로 끌어들인다. 천장을 들여다보는 인물들, 휘날리는 비둘기, 난간에 매달린 아이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며, 회화와 건축, 공간과 환영의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이 작품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회화가 공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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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테냐, 신혼의 방, 1465–1474, Palazzo ducale mantova



만테냐의 내밀한 감정의 구조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은 단연 [죽은 그리스도 (Dead Christ)]였다.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이 침대 위에 누워 있고, 시점은 발끝에서 시작된다. 일반적인 인체 비례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면서 관람자는 자연스레 그리스도의 얼굴로 이끌린다. 이는 극단적인 포샤도(forshortening)*를 통해 죽음을 마주하는 시선을 조형화한 것이며, 어떤 과장도 없이 침묵 속의 비극을 전달한다.

The_dead_Christ_and_three_mourners,_by_Andrea_Mantegna.jpg 만테냐, 죽은 그리스도, 1480,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이 작품은 당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회화를 바라보는 시점의 전복'이라는 면에서 전례가 없었다. 그리스도의 시신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이 시각은 관람자에게 마치 시신을 직접 대면하는 듯한 감각을 주었고, 이는 일반적인 성화에서 통상적으로 보던 평면적 구도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었다. 죽음이 신성하게 포장되기보다는 현실적이고 물리적인 사건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관람자들은 강한 정서적 충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만테냐는 이 작품을 통해 회화가 단순히 장식이 아니라 시각적 사고의 실험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시신의 묘사, 특히 발의 왜곡과 인체 비례의 파괴는 고전적 이상미에서 벗어난 의도적 구성으로 읽혔고, 이는 르네상스 회화의 형식 실험을 한층 전위적으로 끌어올린 사례로 받아들여졌다. 후대 예술가들이 이 작품을 반복적으로 인용하고 재해석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은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형이상학적으로 해석하기보다, 관람자가 그것을 물리적으로 응시하도록 강제한다. 그것은 신의 죽음을 인간의 눈높이에서 체험하는 경험이었고 회화가 어떻게 신학적 주제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만테냐의 세계는 단단하고 조율되어 있으며 서정보다는 구조를 추구한다. 그는 회화 속 인물을 조각처럼 다루었고 감정을 기하학처럼 계산해 배치했다. 그에게 르네상스는 고대의 재현이 아니라 고대를 통해 인간과 시선, 공간을 다시 설계하는 과정이었다.


한 편, 그와는 다른 방향에서 인간의 내면과 자연의 빛을 따라간 화가가 있었다. 그는 만테냐의 친구이자 경쟁자였고, 동시에 가족이었다. 조반니 벨리니. 만테냐가 돌의 언어로 르네상스를 설계했다면, 벨리니는 물의 언어로 그것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이제, 르네상스 북부 회화의 또 다른 거장, 벨리니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포샤도 : 회화나 드로잉에서 입체적인 형태를 평면 위에 그릴 때, 관찰자의 시점에 따라 대상이 압축되어 보이는 현상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가까운 부분은 크게, 멀어진 부분은 작게 그려서 깊이감과 입체감을 주는 방식




3. 물과 빛의 화법, 벨리니의 베네치아


르네상스 회화의 흐름이 구조와 논리에 의해 정제되고 있었다면, 조반니 벨리니는 그 정제된 틈 사이로 빛과 감정, 고요한 정서를 스며들게 한 화가였다. 그는 고대의 이상이나 영웅적 서사보다 바람이 스치는 풍경 속에서 명상에 잠긴 인물의 표정을 주목했고, 회화라는 평면 위에 물처럼 흐르는 정서의 공간을 창조해냈다.


조반니 벨리니는 1430년대, 베네치아 화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야코포 벨리니는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화가였으며, 형 젠틸레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공식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 안에서 조반니는 비교적 조용한 존재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오래, 깊게 자신의 세계를 갈고닦은 화가였다. 초기에는 아버지와 형의 도제적 영향 아래 있었고, 그 회화 역시 당시 유럽 회화의 전형적 도식에 가까웠다. 그러나 곧 그는 외부에서 새로운 자극을 받게 된다. 그 인물이 바로 안드레아 만테냐였다.


조반니의 누이인 니콜로사 벨리니가 안드레아 만테냐와 결혼하면서, 두 화가는 가족이자 동료, 그리고 긴장 속의 예술적 반사체가 되었다. 만테냐는 이미 파도바에서 고대 조각과 원근법을 깊이 연구한, 철저히 구조 중심의 화가였다. 그의 화법은 조형적이고 서사적이며 극적인 구도를 기반으로 한다. 벨리니는 이 매서운 시선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실제로 벨리니의 초기 작품들에서는 만테냐 특유의 선명한 윤곽선, 돌처럼 단단한 인물 표현, 정면 구도의 구성 방식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벨리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만테냐의 엄정함을 받아들이면서도, 베네치아의 빛과 물의 감각을 회화 속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이러한 전환의 징후는 벨리니가 만테냐와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들에서 특히 선명히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The Agony in the Garden)]는 만테냐의 동일한 주제 작품에 대한 벨리니의 응답처럼 읽힌다. 두 작품 모두 예수가 고통 속에 기도하는 순간을 묘사하지만, 만테냐의 버전이 고대 폐허와 조각적 구도를 통해 극적이고 구체적인 서사를 강조한 반면, 벨리니는 풍경과 빛의 서정성 속에 인물의 정서를 스며들게 한다.

Giovanni_Bellini_-_Orazione_nell'orto.jpg 벨리니,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뇌, 1459~1465, 런던 내셔널 갤러리


화면 속 예수는 외딴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뒤편에는 잠든 제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을 감싸고 있는 것은 바위의 강직함이 아니라 곡선의 지형과 희미한 아침 햇살, 그리고 먼 곳에 깃든 도시의 실루엣이다. 벨리니는 외형적 고통보다는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내면의 고요한 고뇌를 포착한다. 자연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감정과 내면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며, 관람자는 그 감정의 공간 안으로 부드럽게 이끌린다.


이 작품은 벨리니가 더 이상 만테냐의 영향 아래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신호였다. 그는 서사의 구도를 빌리되, 그것을 정서의 울림과 빛의 여백 속에서 다시 해석했다. 만테냐가 사건의 순간을 정지시켰다면, 벨리니는 감정이 스며드는 시간을 만들어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벨리니의 독자적인 예술 언어는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벨리니는 유화라는 새로운 매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템페라보다 느리게 마르고, 색의 그라데이션이 가능한 유화는 그에게 심리와 감정, 풍경의 연속적인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감수성은 그의 작품 [사막의 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in the Desert)]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Giovanni_Bellini_-_Saint_Francis_in_the_Desert_-_Google_Art_Project.jpg 벨리니, 사막의 성 프란체스코, 1475–80, 뉴욕 프릭 컬렉션

그림 속 프란체스코는 기도하거나 설교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자연 속에 멈춰 서 있으며, 그를 둘러싼 빛과 바람과 구름의 흐름이 고요히 감돈다. 배경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신의 현존이 스며든 자연 그 자체다. 벨리니는 종교를 교리보다 감각의 체험으로 그렸다.


그는 또한 제단화 형식에서도 빛과 정서의 서사화를 시도했다. [산 자카리아 제단화 (San Zaccaria Altarpiece)]에서는 성모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성인들이 좌우에 배치되어 있고, 배경은 아치형 건축 속으로 깊이감 있게 이어진다. 이 그림은 단순한 성인의 배열이 아니라, 공간과 감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고요한 극장’이다.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구조나 구도가 아니라, 공기와 색, 빛의 울림이다.

Pala_di_San_Zaccaria_(Venezia).jpg 벨리니, 산 자카리아 제단화, 1505, 베니스 산 자카리아 성당



벨리니의 빛은 단지 시각적 장치가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감정의 언어였다. 이는 [프라리 3부작 (Frari Triptych)]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구성과 인물의 시선 배치 속에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배치했으며, 전체 화면에 걸쳐 은은하게 흐르는 빛은 마치 침묵 속 기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회화는 거창한 서사 없이도 관람자로 하여금 감정의 공간 안으로 걸어들게 만든다.

Frari_(Venice)_-_Sacristy_-_triptych_by_Giovanni_Bellini.jpg 벨리니, 프라리 3부작, 1488, 베니스 산타 마리아 글로리오사 데이 프라리 성당


만년기의 벨리니는 신화 주제로까지 감성의 영역을 확장했다. [신들의 향연 (Feast of the Gods)]은 티치아노가 배경을 보완한 작품으로도 유명하지만, 원화의 중심 인물 배치와 정서적 분위기는 전적으로 벨리니의 것이다. 신화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어느 시골 마을의 잔치처럼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빛은 그들의 피부를 감싸며 흘러간다. 신과 인간,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흐리며, 벨리니는 다시 한 번 르네상스 회화를 감각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벨리니, 신들의 향연, 1514,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조반니 벨리니는 일찍부터 꽃피운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조용히 관찰하고, 스스로의 감각을 다듬어 나갔으며, 타인의 방식에서 배운 것을 자신의 언어로 다시 직조했다. 만테냐와의 관계는 그에게 고대의 감각과 구조적 시선을 열어주었지만, 그는 그것을 베네치아의 물결 위에 실어 부드럽게 녹여냈다. 만테냐가 돌처럼 회화를 새겼다면, 벨리니는 빛으로 회화를 녹여냈다.


그리고 그 빛은 티치아노와 조르조네, 틴토레토까지 베네치아 회화 전체로 이어지는 유산이 되었다. 정제된 침묵 속에서 마음을 울리는 회화, 조형보다는 정서로 말하는 예술. 벨리니의 세계는 조용하지만, 끝없이 깊다.




4. 서로를 비춘 두 거울, 그리고 다음 시선


안드레아 만테냐와 조반니 벨리니. 이 두 사람은 북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서로 다른 결을 대표하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긴 호흡 안에 있던 예술가였다. 만테냐는 고대의 돌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그 구조와 질서를 회화로 재건하려 했고, 벨리니는 물과 빛, 침묵과 감정을 통해 인간의 내면과 자연의 교감을 시각화했다. 한 사람은 조각처럼 형상을 깎았고, 다른 한 사람은 서정처럼 분위기를 쌓아 올렸다.


그러나 그 둘의 대립은 곧 르네상스가 품었던 가능성의 다양성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전의 부활은 단일한 양식의 복원이 아니라, 각기 다른 시선과 감각이 하나의 고대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었다. 만테냐의 투시와 구조, 벨리니의 빛과 정서. 그 각각의 길이 르네상스라는 광대한 지적 지형도를 그려냈다.


이제 우리는 북이탈리아의 정제된 시선을 뒤로하고, 다시 남쪽으로, 르네상스의 심장부인 피렌체로 발걸음을 옮기려 한다. 그곳에서 르네상스는 단지 회화의 혁신이 아니라, 철학과 문학, 정치와 예술이 하나의 세계관으로 어우러진 거대한 실험이 된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무대 위에서 한 화가가 등장한다. 그는 신화와 종교, 꿈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을 그려냈고, 피렌체의 정신을 회화로 번역한 예술가였다. 그의 이름은 산드로 보티첼리. 그리고 그가 화가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또 한 명의 위대한 인물, 후원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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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 (출처 : Wikimedia) / 로렌초 (출처 : Wiki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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