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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D Aug 03. 2019

꿈 쪽으로 한뼘 더

브런치작가가 되다

직업으로 편집디자이너를 택한 건 디자인이 좋아서였다. 디자인 전공은 아니었지만 포토샵과 일러스트를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있었다. 시작은 웹디자인이었다. 아르바이트로 미용실 홈페이지 관리를 했다. 내가 작업한 이미지가 사이트에 뜨는 것이 신기했다. 전공으로 배운 코딩과 프로그램 언어는 너무 복잡했고 흥미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학원에서 본격적으로 디자인 공부를 했다. 출판디자인을 배웠는데 글과 사진을 적절히 편집해 책으로 만드는 일이 흥미로웠다. 소규모의 잡지사에 취업을 하며 디자이너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13년이 흘렀다. 몇 번의 이직을 했지만 직업은 여전히 편집디자이너다. 그동안 잡지사와 신문사, 디자인기획사를 거쳐 현재는 일반 기업의 디자인팀에서 일하고 있다.  




어제, 여전히 진행형인 편집디자이너라는 직업에 새로운 직업이 하나 더해졌다. 브런치작가다. 그저께 작가신청을 했고, 어제 오후 브런치작가 선정 통보를 받았다. 디자인을 갓 시작했을 때처럼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믿음이 동시에 팔딱거린다. 브런치의 첫 글은 내가 언제부터 글 쓰는 삶을 생각했는지 써 보기로 했다.  


5년간 디자인회사에서 여행사의 홍보물과 책자, 잡지 디자인을 했다. 일을 하면서 세계 곳곳의 멋진 풍경과 여행 글을 매일 접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나라들을 이야기를 읽고 보는 일은 신기했다. 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게 됐다. 그 무렵 회사는 눈에 띄게 성장했다. 세 명이 일하던 디자인팀의 인원이 열 세 명이 됐다. 인원이 늘자 회사는 디자이너들을 교묘하게 경쟁시켰다. 나는 열 세 명의 디자이너 중 입사와 직급으로 서열 3위였지만 경쟁에서 밀렸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행복하지 않았다. 그해 1월 회사를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났다. 




자존감이 바닥인 상태로 퇴직 상태가 되자 견딜 수 없게 괴로웠다. 가만히 있다간 홧병이 날 것 같았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너무 내 몸과 마음을 회사에 쏟았었다는 후회를 해봤자 소용없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랬다고, 나의 자존감을 찾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하루에 8시간 3개월간 매일 영어로 수업을 듣는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학원에 나처럼 직장을 다니다 온 사람은 두 명 뿐이었다. 대부분 외국계나 대기업 취업을 위해 영어 공부를 하러 온 갓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이었다. 나보다 적게는 두 살부터 많게는 열두 살까지 어렸다. 나이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땅이었던 나는 그 중에서도 막내인 s와 가장 친해졌다. 


대부분 취업 준비생이다 보니 수업내용은 취업에 초점이 맞춰졌다. 어떤 회사에 가고 싶은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 당연히 나도 그들과 똑같이 해야 했다. 그 시기에 나는 치열하게 미래를 준비하는 어린친구들을 보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꽤 많이 가졌다. 나는 저들만큼 치열한 고민을 했었나. 디자이너로 10년을 일했지만 남은 건바닥에 떨어진 자존감뿐이었다. 계속해서 디자인을 하는 게 맞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일하고 싶은 회사에 대해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수업이 있었다. 대부분은 국내 대기업과 외국계 기업의 이름을 댔다. 한 친구는 외국계 항공사에 가고 싶다고 했고 다른 친구는 한국의 대기업에 가고 싶다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제약회사의 이름을 댔다. 각자의 전공과 관심분야에 맞는 회사를 골랐고 이유도 그럴듯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디자인 일을 했으니 L여행 잡지의 편집장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이후 나는 꿈에 대해 물을 때 마다 여행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나중에는 “내 책 나오면 싸인 받으러 와.”라는 농담까지 할 정도였다. 반복해 말을 하다 보니 정말 여행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2016년 5월이었다.  




그해 8월에 나는 이직을 했다. 영어 공부를 한 덕에 외국인 비율이 높은 회사에 취업이 됐다. 입사하기까지 세 차례의 면접을 봐야했다. 2차 면접에서 나는 내 꿈을 다시 확인했다. 이사님과의 개별 면접이었다. 경력직이니만큼 그동안 했던 업무와 능력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다. 마지막으로 이사님이 “최종 꿈이 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여행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디자이너 면접에서 여행 작가라니. 멍청한 대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이사님은 웃으셨고 다행히 나는 이틀 후 3차 면접을 봤다. 2016년 8월이었다. 


다시 직장인이 되었다. 이미 나는 삼십대 중반이었고 언제까지 디자인을 할 수 있을지(내가 버틸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마흔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며 본격적으로 작가 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여행글쓰기 수업을 하는 곳을 찾아냈다. 수업을 등록하고 퇴근 후 매주 화요일 수업을 들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재미있었다. 취향이 비슷하니 대화가 잘 통했다.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기대는 없었지만 목표는 있었다. 마흔 전에 책을 내자. 2017년 6월이었다.


틈틈이 여행을 다니고 글을 썼다. 초반의 열정이 식어 갈수록 글을 쓰는 빈도가 줄었고 글에 발전이 없었다. 여행 글은 어느새 일기가 됐다. 글과는 담을 쌓고 살아오던 사람이 한 순간에 글을 잘 쓰게 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꽃이 피려면 씨를 뿌리고 싹을 틔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는 씨를 뿌리지도 않았으면서 ‘꽃은 언제피나’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허송세월로 1년을 보냈다.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지만 보기 좋게 탈락했다. 2018년 12월이었다.   




여전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행 작가가 되겠다는 꿈은 여전했다.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나에겐 씨를 뿌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2019년 1월, 다시 글쓰기 수업에 등록했다. 평일엔 회사를 가고 주말엔 글쓰기 수업을 들으러 갔다. 집에서 한 시간 반 거리의 신촌으로. 100일 동안 매일 글을 썼다. 100일이 지난 후에는 목표를 바꾸었다. 365일 동안 매일 글을 쓰기로. 매일 글쓰기 188일째 되던 날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그동안 글을 쓰면서 쌓인 글들을 다듬다보니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공감받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소개 글을 쓰고 신청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브런치 작가가 됐다. 2019년 8월이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앙드레 말로의 말을 좋아한다. 오랫동안 그리던 작가의 꿈 쪽으로 한 뼘 더 다가선 느낌이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다. 무언가를 꿈꾸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당신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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