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이름의 탄생
7살이던 나는 엄마, 언니와 함께 캐나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우리 가족은 기러기 1세대다. 우리 엄마는 비행기 안에서 아빠가 준 장문의 편지를 읽으며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90년대 후반이라 영어만 잘해도 먹고살기 좋은 시절이었다. (그게 지금도 사실이라면 난 아마 성공했을 텐데 씁쓸하다.) 엄마는 항상 국제적인 아이로 키워 도시의 차가운 여성으로 자라나길 바랬고 그 꿈을 커다란 이민가방에 넣고 커다란 모험에 몸을 던졌다. 슈트를 입고 커다란 회의에 나가 연설을 하는 멋진 딸을 기대했던 엄마이지만 나는 지금 박스티를 입고 머리를 질끈 묶고 평일 낮에 집 식탁에서 글을 쓰고 있다.
너무 어렸던 나는 캐나다의 첫 기억이 모두 생생하지는 않다. 그중에 각인된 기억이 하나 있다. 캐나다로 간 엄마는 외롭기도 하고 정보도 얻을 겸 한인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후 생활했던 나라들에서도 한인사회란 대부분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교회의 어떤 집사님과 엄마는 언니와 나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앉았다. 루트 콜라를 시키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캐나다 학교를 다니려면 영어 이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 이름은 고은*. 아무리 생각해도 현지인들이 발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적응하려면 영어식 이름을 지어서 입학하는 것이 나에게 더 수월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럼 애 이름은 무엇으로 할까요 집사님?”
“얘는 쥬디! 쥬디라고 해요. 쥬디처럼 생겼네! 얘 둘째는 음…”
난 긴장된 두 눈으로 그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앨리스…!”
그리고 난 앨리스가 되었다. 그 후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앨리스라고 불린 적이 훨씬 더 많다. 앨리스가 더 편하고 익숙할 만도 한데 항상 어딘가 한 구석이 찜찜했다.
어린 시절 엄마는 나에게 ‘고은*’라는 이름을 어떻게 열심히 지었는지 누누이 이야기했다. 난 너무 중성적인 이름이라 남자 이름 같다고 놀림을 많이 받아서 싫었지만 엄마는 항상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이 이름을 지으려고 용하다는 스님한테 가서 돈도 엄청 많이 주고 지은 이름이야. 사주도 다 알아보고 얼마나 공들여서 지은 이름인데!”
그런데 앨리스는 캐나다의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어떤 이름 모를 아주머니에 의해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지어졌다. ‘고은*’라는 나의 이름과 함께 주어진 나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노란 머리와 파란 눈의 ‘앨리스’라는 이름의 백인 소녀를 모방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맞지도 않는 옷을 입은 느낌이랄까.
훗날, 가족들에게 ‘앨리스’라는 이름이 얼마나 불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누군가 이름을 물어보면 “I’m Alice!”라고 말하는 게 왠지 떳떳하지 않은 느낌을 받아 소극적인 목소리가 되었는지 이야기하면 언니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언니는 ‘쥬디’라는 옷이 잘 맞았나 보다. 아니면 ‘쥬디’로서의 외국생활이 더 행복했던 것일까?
그렇게 캐나다 밴쿠버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루트 콜라와 함께 ‘앨리스’는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