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큰 도시 바르셀로나. 관광지로 워낙 많이 알려져 있어 우리의 여행 일정 역시 5박 6일로 넉넉하게 잡았다. 49일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무는 여행지다.
첫날은 여행 내내 목에 걸고 다녔던 무거운 DSLR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 편하게 가벼운 마음으로 분위기를 느끼러 나섰다. 특별한 목적지도 없이 지도도 보지 않고 방향만 잡아서 마냥 걷다가 아는 곳이 있으면 갈 생각이었다.
람블라스 거리 끝자락, 비교적 조용한 곳에 위치한 숙소에서 나와 중심가를 향해 걸었다. 번화가로 가면 분명 어딘가엔 구경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큰 도시긴 하구나."
마드리드 이후로 소도시 위주로 여행을 다녔더니 거리의 인파가 낯설었다. 거기다 지금까지 여행지에서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너비의 거리. 너무 많은 유동인구에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큰 도시에 온 설렘보다 소매치기에 경계심만 잔뜩 생겼다.
1)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큰 시장, 라 보케리아
"저기가 시장인가 봐. 가볼까?"
람블라스 거리를 따라 걷다 우측으로 사람들이 많이 가는 모습에 시선을 뺏겼다. 그 시선의 끝엔 현지인들도 많이 이용하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큰 시장인 라 보케리아가 있었다. 사람들을 뒤따라 갔다.
"이게 뭐야?"
"뭔지 모르겠는데."
현지인들도 많이 오는 곳인 만큼, 현지 문화가 많이 반영된 시장. 처음 보는 비주얼의 음식들도 꽤나 보였다. 가까이 가서 하나하나 구경하고 싶었지만 앉아서 먹는 사람들이 많아 멀리서 구경했다.
"와, 여기는 스케일도 남달라."
주렁주렁 매달린 각종 향신료와 육류들. 큼직큼직하게 매달아 놓은 것이 절로 시선이 갔다. 현지에서 살지 않는 이상 구매를 할 일은 없는 것들. 현지에서 내가 오래 살기로 해도 이런 종류는 적응하고 구매하기까지는 한참 걸릴 것 같은 비범함이다.
"우와! 이거 봐."
"손기술도 좋네."
"귀여워!"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나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 예쁘기만 하고 맛은 없는 어느 인스타그램 감성 카페의 디저트가 떠올라 맛은 장담 못하겠지만, 제작 기술은 인정할 만큼 대단했다. 어릴 적 먹던 불량식품이 떠오르던 알록달록 모양들. 정신없는 통에 고민하다 뭔지도 물어보지도 못했다. 과연 이건 뭘까?
"채소 봐. 엄청 신선해."
어떻게 채소에서 저렇게 윤기가 좌르르 흐를 수 있는지. 공기가 좋고 토양이 좋으면 이렇게 번지르르 해지는 것일까? 진열된 건 분명 시장인데 품질은 마치 백화점에 있는 것 같았다.
"주스나 둘이 한 잔으로 나눠서 마실까?"
원래 시장은 자질구레하게 먹으러 가는 곳 아닌가! 관광객으로서 어떤 곳인지 구경만 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시장을 쭉 돌아보니 아무것도 먹지 않고 가는 게 어딘가 아쉬웠다. 배불러서 모두 지나오다 끝내 시장을 나설 때쯤 과일주스 한 잔 구매해 나눠 마셨다.
2) 매력적인 호수가 있는, 시우타데야 공원
지도도 제대로 보지 않고 한참을 걷다 구글맵을 켰다.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봤더니 마침 보이는 건너편의 공원 하나. 공원이라니 큰 기대는 없지만, 관광지처럼 표시되어 있어 가보기로 했다.
"호수공원 같다."
공원의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국내의 큰 공원 느낌과 흡사했다. 피크닉을 한창 즐기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물건을 판매하다 걸린 불법체류자들이 물건 들쳐 메고 경찰들에게 쫓기고 있는 모습이 곳곳에 보이는 게 그나마 느껴진 차이랄까. 그늘 속에 조깅하기 좋아 보인 마드리드의 레티로 공원과는 반대로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피크닉에 최적화된 공원이었다.
공원에 대한 흥미를 잃었지만 우리의 걷기는 멈추지 않는다. 어찌 됐건 아직 온 길을 되돌아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계속 앞으로 직진했다. 언젠가 나올 출구를 찾아서.
"저기 분수대 있다!"
"여기는 공원 분수대도 조각을 해놨어."
분수대 주변으로 둘러앉은 사람들을 보니 이곳도 핫한 곳인가 보다. 길게 뻗어 나오는 분수가 주변으로 퍼지면서 시원해 오래 앉아있기 좋아 보였다.
"출구가 반대편에 있겠지?"
강한 햇빛 아래 오래 앉아있는 게 싫어 분수 앞에서 기념으로 남길 사진만 찍고 자리를 떴다. 계속 반대편으로 걷는 데 이게 과연 출구가 반대편에 있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다시 한 바퀴 돌아 나가야 하는 건가 고민하며 방향을 틀려고 하던 찰나에 출구를 발견해 공원 밖으로 나왔다.
3) '새파랗다'가 잘 어울리는, 바르셀로네타 해변
공원을 지나 계속 걷다 보니 어느덧 인적이 드문 골목을 걷고 있었다. 우린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일까? 걷다가 단체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무리를 본 거 말고는 관광객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더니 어느덧 구시가지의 모습은 사라지고 주변의 풍경은 신시가지로 바뀌었다.
"우리 바다 근처까지 왔는데 바다로 갈까?"
말이 바다 근처지, 아직은 한참 걸어가야 하는 바다. 지금까지 걸은 걸 생각하면 오래 걷는 것도 아니라 별거 아니게 느껴졌다. 거기다 생각지도 않은 바르셀로나의 바다라니, 돌아가면 다시 올 일은 없을 것 같고, 온 김에 가 봐야지 않겠나.
"우리가 지금까지 본 바다랑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러게. 지중해라 그런가?"
바르셀로네타 해변은 '새파랗다'라는 말을 시각화한 그 자체였다. 에매랄드 빛도, 옥빛이 가미된 바다 빛도 아니고 진한 코발트블루 색이었다. 어쩜 바다가 아름답게 파랄 수 있는지. 보통 바다 색이 예쁘면 옥빛인 경우가 많은데, 새파란데 아름다웠다.
"벌써 8시 다 돼가."
"해 지기 전에 빨리 가자."
"저녁은 어떡하지?"
점심 먹고 출발 해 해가 질 때가 될 때까지 온종일 걸어 다닌 하루. 해가 늦게 져서 그렇지, 이미 한국이었으면 해가 넘어갔을 시간이었다. 사람들을 피해 인적이 드문 해변가로 가 바람맞으며 사진 찍고 시간을 보내니 그냥 상쾌하고 기분이 좋아, 다리가 아픈 것도 배가 고픈 것도 몰랐다. 12시쯤 점심을 먹고 라 보케리아에서 둘이 나눠 마신 음료 한잔이 전부인 상태로 걸어왔으니 배가 고픈 게 너무 당연하다. 기꺼이 바다까지 보고 나서야 우리의 저녁을 어디서 해결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피카소 박물관도 들르면서 쉬지 않고 걸어왔으니 최단시간 최다 걸음을 경신한 날이 아닐까. 가끔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고 발길 닿는 대로 걷는 여행도 필요하다 느꼈다. 예상치 못하게 마주하는 그 도시의 풍경들이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