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여름날 오전의 상쾌한 공기가 숨이 막힐 듯이 밀려들어왔다.
[ 이봐요, 어디예요? ]
[ 지금 어디예요? 많이 늦어요? ]
[ 무슨 일 생겼어요? 왜 안 와요? ]
나는 툭, 휴대폰을 던지듯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곧 참지 못하고 다시 휴대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하고 무심한 신호음이 울렸다. 그리고 곧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로 시작하는 여자의 음성이 들려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 어디 아파요? 전화 좀 받아요. ]
짜증이 밀려왔다. 아침 일찍 카페에 나와 문을 열고 남자를 기다렸지만, 12시가 넘도록 남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해도 답이 없었다. 스토커처럼 구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제 그렇게 나선 남자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딸랑딸랑, 그때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나는 남자인가 싶어 얼른 돌아보았다.
“안녕, 다아씨?”
곱슬머리 여자가 밝게 인사를 했다. 나는 꾸벅, 성의 없이 인사를 했다. 여자는 자연스럽게 늘 앉는 구석 자리로 향한다.
“주문은-”
“다아씨, 무슨 일 있어?”
“네?”
뚫어져라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여자의 시선에 머쓱해진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여자는 주변을 휙, 둘러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색이 안 좋네. 그런데 오늘은 혼자야?”
“몰라요, 오늘 농땡이라도 피우려나 보죠.”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별일도 다 있네. 아무튼 나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 줄래?”
“네.”
언니에게 커피를 내어준 후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메시지는 어느새 읽었다는 표시로 바뀌어 있었지만, 여전히 남자로부터는 답이 없었다. 괘씸하긴 했지만, 어쨌든 읽을 수 있는 상태인 걸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다아씨, 미안한데-”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여자가 손가락으로 카운터를 톡톡, 두드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네, 언니?”
“급하게 받아올 서류가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 짐 좀 봐줘.”
“네, 다녀오세요.”
왜 이렇게 멍한 거야, 정신 차려.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으며 자책하고 있는데 지이잉, 하고 휴대폰이 울렸다. 드디어 답장이 온 걸까? 나는 얼른 휴대폰을 열어보았다.
[ 다아야, 바쁘니? ]
그 사람이었다. 나는 숨을 삼켰다.
[ 아니요, 무슨 일 있으세요? ]
[ 그럼 셋만 세어볼래? ]
셋을 세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그 사람의 알쏭달쏭한 답장에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딸랑딸랑, 하고 종소리가 났다. 나는 당연히 여자가 돌아온 거라고 생각해서 돌아보지도 않고 “다녀오셨어요?”하고 말로만 인사를 했다.
“응?”
여자의 유쾌한 목소리가 아니라 뜻밖의 저음에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서, 선배?”
“새로 시작한 과외가 근처라서 잠깐 들렀어.”
“밖은 많이 덥죠? 과외는 어땠어요? 몇 학년인데요? 아, 이런 제정신 좀 봐요. 시원한 커피 한 잔 드릴까요?”
당황한 나는 정신없이 말을 쏟아냈다. 내 페이스에 휘말리지 않고 그 사람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시원한 커피 한 잔 줄래?”
“네, 잠깐만 기다리세요.”
나는 허겁지겁 키친으로 뛰어 들어갔다. 에스프레소를 내리는 동안 그 사람은 한쪽 벽면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책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부디 이 커피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가 되기를 빌었다.
“좋은 책이 많구나?”
내가 커피와 쿠키를 가지고 가자 그 사람은 어느새 책 한 권을 골라 읽고 있었다.
“제가 아직 서툴러서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 사람이 커피를 맛보는 그 짧은 0.1초도 안 되는 순간이 얼마나 떨리던지! 마주 잡은 두 손에서 땀이 흥건히 날 정도였다. 수능을 칠 때도 이 정도로 긴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침내 그 사람이 커피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손을 꼭 쥐었다.
“와, 정말 맛있어.”
상냥한 평가였다. 하긴 그 사람은 맛이 없어도 맛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저 저 커피가 정말로 맛있는 커피이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잠깐 앉아도 되니? 그런데 오늘은 혼자야?”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 사람의 맞은편에 앉으며 “네.”하고 대답했다.
“저런, 힘들겠구나.”
“그, 그렇지도 않아요. 손님도 별로 없어서.”
내 말에 그 사람이 카페를 휙, 둘러보더니 과연 그러네, 라는 듯 웃었다.
“새로운 과외는 어떠세요?”
“중학교 3학년 여자아이인데 굉장히 귀여워. 재미있을 것 같아.”
“다행이네요.”
지이잉, 하고 진동이 울렸다. 나는 앞치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광고 문자였다.
“다아야?”
“네?”
“혹시 무슨 일 있니?”
아차, 하고 정신을 차린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일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도대체 남자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점심은 어떻게 하니?”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보니 12시가 막 넘은 시간이었다.
“보통은 시켜먹어요, 간단히 샌드위치 같은 걸로 해결하기도 하고.”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고 이번에는 정말로 여자가 돌아왔다.
“다녀오셨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인사를 건넸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아까보다 훨씬 밝은 목소리였다. 여자는 어색한 표정으로 “응, 고마워.”하고 간단히 대답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나는 슬슬 일어서 볼게.”
하지만 그 사람은 책을 덮더니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 벌써 가시게요?”
“응, 약속이 있어서.”
그 사람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내게 건넨다. 나는 한사코 그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괜찮아요, 선배, 정말.”
“안 받으면 미안해서 다시는 못 와.”
그 사람이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진 것은 나였다.
“자주 들를게, 과외하는 집이랑 정말 가깝거든.”
그렇게 약속을 남기고 그 사람은 문을 열고 나갔다.
“우와, 정말 잘 생겼네! 난 무슨 연예인인 줄 알았어!”
그 사람이 나가자마자 여자가 참았던 숨을 내쉬듯 흥분해서 소리쳤다.
“남자 친구야?”
“네? 아니요, 그냥 학교 선배예요.”
“아깝네, 정말 잘 생겼는데.”
그 사람에 대한 칭찬에 나는 괜히 으쓱해졌다. 여자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재밌는 사람이야, 다아씨.”
요 근래 여자는 거의 매일 와서 하루 종일 카페에 머무르며 우리는 제법 친해졌다. 올해 스물여덟의 여자는 지혜라는 흔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작은 회사에서 일을 하던 여자는 얼마 전에 회사를 그만두었고 요즘은 출판을 목표로 소설을 쓰고 있다고 했다. 명랑하고 밝은 성격이라 남자에게도 꽤 스스럼없이 대하는 편이었고, 내게도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베이컨 샌드위치 하나 줄래? 조금 출출하네.”
여자가 명랑하게 말했다. 내가 베이컨 샌드위치를 꺼내려는 찰나, 딸랑딸랑, 하고 종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났다. 그 사람은 성큼성큼 내게 다가오더니 내 손에 뭔가를 쥐어준다.
“서, 선배?”
“넉넉히 샀어. 점심 맛있게 먹어.”
다정하게 속삭인 후 그 사람은 순식간에 카페를 빠져나갔다. 나는 대낮에 꿈이라도 꾼 걸까, 생각하며 손을 보았다. 손에는 종이 가방 하나가 들려있었다. 이게 있으니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종이 가방 속에 담긴 상자를 꺼내 열자 신선한 초밥이 빼곡하게 들어있었다.
“언니, 초밥 드실래요?”
나는 빙긋, 웃으며 여자에게 말했다.
“다아야, 오늘은 아르바이트 안 가니?”
잠결에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웅얼거리며 시계를 보았다. 시곗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시간은 10시 20분. 카페는 아침 11시에 문을 열어, 밤 10시에 문을 닫는다. 그리고 나는 11시부터 8시까지 일을 한다. 나는 10분만 더 잘래, 라고 중얼거리며 돌아누웠다.
“엄마는 지금 나가니까, 알아서 일어나.”
엄마가 문을 닫고 나갔다. 잠에 막 다시 빠져들 즈음 나는 불현듯 내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제 결국 남자는 하루 종일 연락이 없었다. 맙소사, 그럼 늦은 거잖아! 나는 스프링처럼 벌떡, 일어나 침대를 빠져나왔다. 대충 씻고 나와 손에 집히는 대로 옷을 껴입었다. 집에서 나오면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10시 50분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한 블록만 가면 횡단보도가 나온다. 50미터 단거리 질주를 하듯 나는 횡단보도까지 전속력으로 달렸다. 빨간 신호등에 걸려 횡단보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서있는데 카페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혹시 내가 어제 나오면서 불을 끄지 않았던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손잡이를 살짝 돌려보니 문이 열려있었다.
“누구 있어요?”
내 목소리가 넓은 공간으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우산꽂이에 꽂혀있던 장우산 하나를 발견하고는 얼른 집어 들었다. 그리고 살며시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층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았다.
“누, 누구 있어요?”
나는 다시 한번 물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우산을 다잡았다. 그리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살금살금 까치발로 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꺄아아아아악!”
갑자기 눈앞에 튀어나온 형체에 놀라 두려움에 질린 비명과 함께 ‘그것‘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우산으로 강도의 머리를 내리치려던 나의 계획은, 내 두 팔이 단단한 손에 붙잡히면서 단번에 무산되고 말았다. 흉기를 들이댈 거라고 생각해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 미안해, 나 이렇게 죽을 건가 봐. 그냥 경찰에 신고할걸, 괜히 용감한 척했어. 이렇게 일찍 죽을 줄 알았으면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봐 둘 걸. 다진이한테도 잘해줄 걸. 그 짧은 순간, 수만 가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빛의 속도로 스쳐 지나갔다.
“설마 강도를 이걸로 해결할 생각이었어?”
웃음이 섞인 낮은 목소리는 낯익은 것이었다. 나는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내 팔을 꽉- 붙잡고 있었다.
“파, 팔 좀 놔줘요, 아파요!”
나는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남자는 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고 우산을 빼앗아 든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들어왔어요? 열쇠는 나한테 있잖아요? 그보다 어제는 어떻게 된 거예요? 연락은 왜 안 돼요? 무슨 일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줘야 걱정을 안 하잖아요!”
남자는 쏟아지는 내 질문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우산을 들고 성큼성큼 1층으로 내려간다.
“이봐요!”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 내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계단 중간에서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미간에 주름이 생길 만큼 인상을 팍, 쓰면서.
“이봐, 아직 머리가 울리니까, 조용히 좀 하지?”
그리고는 계단을 마저 내려가 우산을 제자리에 두고 평소처럼 검은색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는 CD를 고르기 시작했다. 입이 한 뼘은 나온 나도 앞치마를 두르고 밤새 묵은 공기를 내보내기 위해 창문을 모조리 활짝 열어젖혔다. 기분 좋은 여름날 오전의 상쾌한 공기가 숨이 막힐 듯이 밀려들어왔다. 맑은 공기 덕분인지 번뜩,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나는 얼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열쇠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열쇠는 분명히 내 주머니 안에 얌전히 있었다. 그러면 남자는 어떻게 들어온 걸까? 전에 남자는 내게 열쇠를 받기 위해서 우리 아파트까지 찾아왔었다. 즉, 열쇠는 한 개뿐이란 말이었다. 내가 혹시 문을 잠그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분명히 어제 퇴근할 때 문이 잘 잠겼는지 다시 확인했었는데?
“하나씩 물어. 그렇게 한꺼번에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을 해?”
남자가 불쑥, 말했다. 딩딩딩, 하고 잔잔한 기타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열쇠는 나한테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들어왔어요?”
남자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나도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두 열쇠는 모양도, 크기도 완전히 똑같은 쌍둥이 열쇠였다.
“그건 이제부터 네 거야, 잊어버리지 않게 잘 챙겨.”
내 열쇠. 나는 내 손바닥 위의 반짝이는 열쇠를 바라보았다.
“정말 나한테 열쇠를 맡겨도 괜찮겠어요?”
“전부터 주려고 복사해둔 거였어. 네가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내가 영 귀찮아서 말이야. 야, 그거 잃어버리면 죽는다.”
그동안 나는 이 카페에 이방인(異邦人)이나 다름없었다, 마치 이곳에 잠시 들르는 손님들과 같은. 하지만 이 열쇠를 받음으로써 비로소 정식으로 이곳에 있기를 허락받은 기분이 들었다.
“고마워요.”
“이제 됐지? 얼른 청소 시작해! 내가 없으니까, 엉망이야, 아주!”
남자가 커다랗게 소리치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나는 피식, 웃으며 열쇠를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씩씩하게 청소를 시작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묻고 싶은 말도, 따지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열쇠를 받았다는 사실에 기뻐 그만 잊고 말았다. 그렇게 다시 평범한 하루가 돌아왔다.
“이게 전부 뭐예요?”
7월의 끝자락, 남자는 초록색 생명체들이 왕성하게 뻗어 나온 화분들을 통유리 앞에 가득히 늘어놓았다. 카페는 여전히 손님이 없다. 장마가 끝나고 몇 차례의 비가 지난 후 뜨거운 여름이 우리 앞에 와있었다.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는 갖가지 모양의 식물들이 햇살을 받기 위해 잎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보면 몰라? 화분이잖아.”
남자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하나하나 잎을 매만지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설마 내가 화분을 몰라서 묻겠어요? 그러니까 왜 갑자기 화분을 이렇게나 많이 가지고 왔어요?”
나는 남자의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삐죽삐죽한 가시처럼 생긴 이파리를 살짝, 건드리자 상큼한 향기가 풍겨 났다. 화분 구석에 조그맣게 이름표가 꽂혀있었다, 로즈마리.
“키워본 적 있어, 식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때 애플민트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어쩐지 오래 살지 못하고 금방 말라죽어버렸어요. 그 후로 식물을 키우겠다는 생각은 깨끗이 접었어요, 좋아하기는 하지만.”
“역시 짝사랑 전문이군. 얘들도 너를 안 좋아하나 보네.”
남자의 말에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갑자기 남자가 내 손에 검정색 펜을 쥐어주더니 로즈마리의 이름표를 뽑아서 내게 내밀었다. 내가 어쩌라는 거냐는 듯 쳐다보자 남자가 이름표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 아이는 네가 책임지고 잘 키워봐, 이름도 지어주고.”
“싫어요! 금방 죽일 거예요, 나는.”
“세상에 처음부터 뭐든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하는 수 없이 펜 뚜껑을 뽁, 열었다. 특유의 잉크 냄새가 코끝을 찡, 하게 만들었다. 싫다고 해놓곤 금세 이름을 뭐라고 지으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또박또박, 이름표에 이름을 적기 시작했다. 뭐라고 적는 거야, 하며 남자가 힐끗, 이름표를 훔쳐보았다.
“너도 참 가지가지하는구나.”
남자가 답이 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일어섰다.
“그쪽이 나는 짝사랑 전문이라면서요? 전문가다운 이름이죠, 뭐.”
“하여간 구질구질하게.”
말은 못 되게 하면서도 남자의 표정은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그래도 이제 절대 죽이진 못 하겠다, 이왕이면 한 번 잘 키워봐.”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일어나 가버렸지만, 나는 그대로 앉아 이제는 나의 것이 되어버린 로즈마리 화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삐죽삐죽하게 솟아난 잎들을 손가락으로 톡, 하고 건들자 상큼한 향기가 밀려왔다.
“안녕, 난 다아야.”
나는 남자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그맣게 로즈마리에게 말을 건네 보았다.
“만나서 반가워.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줘.”
나의 ‘윤후‘야.
“야, 내친김에 테이블보도 바꿔버리자. 이리 와서 좀 도와, 어서!”
남자가 수납장에서 새로운 테이블보를 꺼내며 내게 소리쳤다. “알았어요.”하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일어서며 나는 마지막으로 화분을 돌아보았다. 노란 햇살을 머금은 로즈마리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와, 정말 예쁜데요, 이 식탁보?”
새로운 테이블보는 새로이 우리 식구가 된 식물들처럼 싱그러운 녹색과 달콤한 아이보리색으로 이루어진 체크무늬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카페는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대충 늘어놓은 것 같지만, 하나씩 들여다보면 어쩌면 이렇게 센스가 좋을까, 싶은 인테리어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맹세컨대, 그것은 절대 남자의 작품은 아니었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먼지 한 톨도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이렇게 성가신 소품들을 가져다 놓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사람은 사장님뿐인데, 여행에서 돌아오실 때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로 보아서는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이건 누가 고른 거예요, 그쪽은 아닌 거 같고?”
나는 하얀 테이블보를 걷어내고 새로운 테이블보를 테이블 위에 펼치며 물었다. 남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유정이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름의 등장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남자는 전처럼 불쾌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 나는 심술이 났다.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유정씨.”
“나도.”
분명히 무시하거나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나도, 지금 그렇게 대답한 건가? 빠른 속도로 1층의 테이블보를 모두 갈아치운 남자는 2층의 테이블보를 갈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내가 따라 올라가려는데 자주 오는 여고생 무리가 들이닥쳤다.
“어서 오세요-”
얼른 벗겨낸 예전 테이블보들을 챙겨 세탁실에 가져다 놓고 나오니 여고생들은 평소처럼 2층에 올라가기 위해 계단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2층은 지금 테이블보를 갈고 있는 중이라 좀 기다려야 할 거예요.”
내 말에 여고생들은 잠시 실망한 기색을 보이더니 이내 1층 창가의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참 씩씩하고 밝은 아이들이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이 카페에 오는 손님들은 아주 한정되어 있어서 이제는 물을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내 예상대로 아이들은 아이스 카페모카 한 잔, 아이스 초코 두 잔, 그리고 아이스 녹차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나는 특별히 접시에 쿠키를 듬뿍 담아 가져다주었다. 내가 그 모든 행동을 끝낼 동안에도 남자는 1층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2층은 1층보다 테이블 수가 적어서 1층에서와 같은 속도라면 벌써 끝내고도 남을 시간이었는데-
“저기, 언니-”
여고생들 중 하나가 나를 불렀다.
“있잖아요, 아, 네가 말해-”
나를 부른 아이가 갑자기 다른 아이에게 말을 넘겼다. 그러자 그 아이는 또 다른 아이를 본다. 대체 무슨 어려운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결국 처음 말을 걸었던 아이가 다시 말을 꺼낸다.
“그 오빠 말이에요.”
그 오빠? 남자를 말하는 건가? 아이는 계단 쪽을 힐끔거리며 내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덩달아 나도 목소리를 낮추고 조그맣게 되물었다.
“저 말고 다른 직원이요?”
“네, 혹시 언니랑 사귀는 거예요?”
이런,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아니요, 그럴 리가.”라고 대답하자 질문을 한 아이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이 아이들, 설마 그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거참, 묘하게 인기가 많은 사람이라니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요? 그럼 여자 친구는 있어요?”
뭐, 일단은, 이라고 생각하며 없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조그맣게 한숨까지 내쉬며 다행이다, 라며 서로를 안심시켰다. 하긴, 이 아이들은 그 괴팍한 성격을 모를 테니.
“야, 잠깐만 올라와봐!”
양반은 못 될 모양이다. 남자가 계단에서 고개를 내밀고 내게 소리쳤다. “알았어요!”하고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내게 말을 걸었던 아이가 “언니, 고마워요.”라고 인사를 한다. 나는 남자가 다시 소리를 지르기 전에 얼른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저 귀여운 아이들의 환상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