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러브스토리의 결말

나는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사실.

by AYEON

“다아야, 왜 여기서 자고 있니?”


이건 꿈인가?


“이런, 곤히 잠들었네. 어째서 이런 곳에서 자고 있는 거야?”


꿈이다, 이건. 잠결에 들려오는 다정한 그 사람의 목소리에 나는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의 꿈을 꾸다니! 오늘은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


헉, 잠깐, 맙소사, 하느님, 부처님!


“일어났니?”


그 사람의 얼굴이 한 뼘 정도 거리에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았다.


“서, 선배?”


목소리도 갈라져서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이 몸을 뒤로 빼며 “응?”하고 유쾌하게 대답했다. 나는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해보려고 애썼지만, 역시 무리였다. 손목에 끼고 있던 고무줄로 통제 불능의 머리카락들을 대충 모아서 묶었다. 혹시 침이라도 흘린 건 아니겠지? 나는 얼른 입가를 손가락으로 슥, 닦아냈다. 참, 눈도 부었을 텐데! 나는 그대로 바닥에 구멍을 파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이, 일찍 일어나셨네요?”


아직 새벽의 어스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서늘한 아침이었다. 거실의 오래된 가구들은 푸른빛을 받아 차갑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사람이 테라스 쪽 유리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쉬운 듯 말했다.


“일출을 보려고 일어났는데, 널 보고 있는 사이에 해가 다 떠버렸어.”


나는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라 덮고 있던 이불을 홱, 밀쳐냈다. 이불? 그러고 보니 나는 쇼파 위에 누워서 자고 있었다, 폭신한 이불까지 덮은 채로. 하지만 나는 분명히-


“그런데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어제 새벽 늦게까지 테라스에서 남자와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그리고는-


“괜찮니?”


설마, 필름이 끊겼다던가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난 거야?


“아, 어제 잠이 안 와서 나왔다가 현이랑 와인을 마시고-”

“현이랑?”

“음, 그리고 또 와인을 마셨는데….”

“이런,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마신 거야?”


콩, 하고 그 사람이 가볍게 꿀밤을 때렸다. 내가 놀라 쳐다보자 그 사람은 조금 화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본다. 아아, 어렴풋이 기억이 떠오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졸린다며 눈을 감자 남자가 들어가서 자라고 말했었다. 그리고는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남자가 나를 쇼파로 옮겨준 걸까? 이불도 덮어주고?


“방에 들어가서 더 잘래?”

“아뇨, 일어날래요.”


나는 주섬주섬 이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산책이라도 할래? 아침 공기가 상쾌할 것 같아.”


그 사람이 싱긋, 웃는다. 나는 그 미소에 홀린 듯 그 사람을 따라 밖으로 나간다. 바다 냄새가 희미하게 실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감히 꿈꿔본 적도 없는 과분한 행복이다. 그 사람은 정원 구석구석을 천천히 살펴본다. 별장은 마을의 높은 곳에 위치해서 알록달록한 지붕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지붕들 끝에는 한적한 도로가 있고 곧 고깃배가 늘어선 부두, 그리고 바다가 이어진다. 어제는 달빛을 받아 노랗게 빛나던 바다는 갓 떠오른 태양 때문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현이랑은 사이가 꽤 좋아졌나 보구나?”


그 사람이 불쑥, 말했다. 멍하게 그 사람의 뒷모습을 훔쳐보고 있던 나는 당황해, 아, 하고 바보 같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여기 참 좋지 않니? 이런 곳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네, 정말.”


나는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 좋아요, 사실.


“자, 이거.”


울타리를 따라 하얀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 사람은 꽃 몇 송이를 꺾어 내게 건넨다. 하얀 꽃다발-


“이제 들어가서 아침 준비나 할까?”


그 사람은 아침 햇살처럼 싱그러운 얼굴로 웃었다.


“짐은 이게 다야?”


내가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자 그 사람이 캐리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시켜주며 물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갈 때는 그 사람의 차에 타기로 했다.


“선배, 잠깐만요!”


나는 다락방이 떠올랐다. 다시 여기에 올 일이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봐 두고 싶었다. 나는 후다닥 안으로 달려가 곧장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좁은 계단 위로 다락방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무뚝뚝한 음성이 훅, 날아들었다. 하필이면 이런 데서 마주칠 게 뭐람. 아침을 먹으면서도 남자와는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우리 둘 다 마치 어젯밤의 일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여, 여기에 있었어요?”


남자가 서서 펼쳐진 노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올라와?”

“그럼 허락이라도 받고 올라와야 해요?”

“응.”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계단을 한 칸 내려섰다.


“올라가도 돼요?”


남자가 노트를 접으며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유치해. 나는 계단을 올라가 창가로 곧장 걸어갔다. 남자는 들고 있던 노트를 내려놓고 다른 노트를 뒤적이고 있었다. 투명한 햇살이 창문 가득히 쏟아지고 있었다. 이제 겨우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대로 돌아간다면 전보다 더 어색해질 게 분명했다.


“저기요.”


남자가 보고 있던 노트에서 천천히 시선을 떼며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창틀에 기대 햇살을 등지고 섰다. 나를 응원이라도 하려는 듯 햇살이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나는 있는 힘껏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아침엔 고마웠어요.”


나는 남자의 표정을 읽으려고 애썼지만, 빛 때문에 환한 남자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곳에 있으면서도, 이곳에 있지 않는 듯한-


“그러니까 내 말은, 아무튼 고마워요.”


그제야 나는 남자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남자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엔 그냥 버릴 거야.”

“흥, 어련하시겠어요.”


나는 일부러 밉살맞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웃으면 어떡해, 반칙이잖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런데 너 어제는 반말하겠다더니, 왜 또 존댓말이야?”

“아, 그게 또 갑자기 바꾸려니까 어색하단 말이에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좋을 대로 해. 나중에 딴 말이나 하지 말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곤 피식, 웃는다.


“자, 그만 내려가자.”


남자가 테이블 위에 쌓여있던 노트들 중 하나를 챙겨 들고 내려가자는 듯 손짓을 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거, 가지고 갈 거예요?”

“뭐? 아, 이거?”

“그거 설계 노트 아니에요?”


나는 발돋움을 해, 남자가 들고 있는 노트가 내가 예상한 노트가 맞는지 확인했다. 분명히 내가 보았던 Design이라고 적힌 낡은 스프링 노트였다.


“이걸 왜-?”

“보물 찾기를 해보려고.”

“보물찾기?”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아, 너한텐 보물이 아닐 수도 있겠다.”라고.




“늦어서 미안해요,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딸랑딸랑, 맑은 종소리는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리는 알람 같았다.


“됐고, 발자국 생기지 않게 신발의 물기나 빨리 닦아!”


남자가 내 쪽으로 마른 헝겊을 홱, 던지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나는 운동신경을 100% 활용해, 그래 봤자 남들의 반도 안 되지만, 헝겊을 받아 들고 신발에 묻은 빗물을 꼼꼼히 닦아냈다. 그리고 러그 위에서 바닥의 물기도 털어냈다. 남자는 정성스럽게 먼지를 닦아내고 있었다.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잘 들어갔으니까, 지금 여기에 있겠지?”


정말 일상으로 돌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남자의 빈정대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왜 이렇게 마음이 놓이는 걸까? 이상한 일이다, 벌써 나이가 든 걸까.


“빨리 움직이지 못해? 30분이나 늦어놓고는 말이야.”

“네-에.”


성의 없이 대답을 하고 앞치마를 걸쳤다. 깨끗이 세탁한 앞치마에서는 향긋한 섬유 유연제 냄새가 풍겼다. 얼른 행주를 빨아 가까운 테이블부터 닦기 시작했다. 스피커에서는 낯익은 올드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장마가 안 끝났나?”


빗방울들이 유리창에 온몸으로 부딪힌 후 서로 뭉쳐 기다랗게 선을 그으며 아래로 흘러내리기를 반복한다. 반복, 또 반복. 평화롭고 안정적인 하루, 정말 ABBA와 잘 어울리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너 농땡이 피우지 마, 다 보고 있어.”


불쑥, 남자가 내 옆에 다가섰다. 나는 화들짝 놀라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두 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 중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바깥 풍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바삐 걷는 사람들, 젖은 도로 위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 정신없이 깜빡이는 신호등. 모든 것이 마치 TV 속 한 장면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푸른 잎사귀들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마치 온 세상을 축복하는 생명의 물처럼 보였다. 비 오는 날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왜 그동안 몰랐을까? 우리는 똑같은 머그잔을 들고 나란히 서서 한참 동안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마침 창밖으로 자주 오시는 할아버지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카페로 들어오실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문 쪽으로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께서 곧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반가움을 담아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건넸다. 할아버지는 가볍게 목례를 하신 후 늘 앉으시던 창가 자리로 가서 앉으셨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그런데 오늘은 혼자세요?”


내가 메뉴판과 물을 내려놓으며 묻자 할아버지께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메뉴판을 들춰보지도 않으시고 곧장 생강차를 달라고 하셨다. 주문을 받고 돌아오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언가, 무언가가 이상했다.


“야, 왜 그래?”


그런 나를 보며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상한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남자는 한참 동안 나를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더니 결국에는 포기하고 시선을 돌렸다. 따뜻한 생강차를 앞에 내려놓자 할아버지는 “고마워요.”라고 조그맣게 말씀하셨다.


“맛있게 드세요.”

“저기, 아가씨-”


할아버지께서 머뭇거리며 나를 불러 세우셨다. 나는 활짝, 웃으며 돌아보았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


“네, 말씀하세요.”


“노래를 좀 틀어주겠소? 우리 할멈이 좋아하는 노래였는데, 제목은 잘 모르겠네. 영화에 나오는 노랜데-”


할아버지의 부탁은 정말로 들어드리고 싶었지만, 그것은 확실히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제목도 모르고 가수의 이름도 모르는 노래를 틀어달라니. 내가 머뭇거리자 할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미안해요, 됐으니 가 봐요.”

“아마 러브스토리에 나왔던 곡일 거예요.”


남자는 어느새 CD를 찾고 있었다. 남자의 말에 할아버지의 표정이 밝아지셨다. 몹시도 그 노래가 듣고 싶으셨던 모양이었다. 할아버지의 미소에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찾았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피커에서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아, 이 음악! 하얀 눈밭을 뒹구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생각하셨던 곡이 맞았는지 할아버지께서는 더 이상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멜로디에 심취하신 할아버지를 남겨두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CD 케이스를 보니 그 곡의 이름은 Snow Frolic이었다. 그 영화의 결말이 어땠더라?


“어떻게 알았어요, 이 노래인지?”

“그냥 예감.”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농담이고, 그 할머니가 제목을 물어보신 적이 있었거든. 예전에 할아버지랑 같이 보셨던 영화라고.”


뭐야, 이 인간이 농담도 할 줄 알았어? 쿵, 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려온 것은 남자가 읽다가 내려둔 책을 막 집어 들려던 순간이었다.


“하, 할아버지!”


나와 남자는 거의 동시에 할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할아버지는 의식이 없으셨다. 당황해서 할아버지를 흔들어 깨우려는 나를 남자가 가로막았다.


“넌 빨리 119에 전화해.”

“아, 알았어요!”


나는 얼른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눌렀다. 그 사이 남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할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나는 119에 빠르게 카페 주소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뭐래?”

“금방 도착한대요. 할아버지 괜찮으실까요?”

“괜찮아, 괜찮으실 거야.”


5분쯤 후 앰뷸런스가 도착할 때까지 남자는 수시로 할아버지께서 숨을 제대로 쉬고 계시는지 확인했다. 나는 그 옆에서 남자의 지시대로 할아버지의 팔다리를 조심스럽게 주물러드렸다. 앰뷸런스가 도착하자 TV에서만 보던 119 구급대원 아저씨들이 할아버지를 들것 위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그리고 남자는 내게는 카페에 남으라고 한 후 할아버지를 따라 앰뷸런스를 타고 가버렸다.


그렇게 폭풍 같았던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다. 혼자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얼른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요?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당연히 남자로부터 걸려온 전화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객님, 신용 대출-”


툭, 대꾸도 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마자 다시 휴대폰이 바쁘게 울리기 시작했다. 또 상냥한 여자의 목소리면 기지국을 폭파해버리겠다는 다짐을 하며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나야.”


다행히 이번에는 틀림없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검사는 해봐야겠지만, 일단은 안정되셨어. 그리고 가족들에게 연락했으니까, 아마 곧 도착할 거야. 가족들이 오면 바로 돌아갈게.”


전화를 끊고 나서 문득 스피커에서 아직도 러브스토리의 OST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영화의 결말, 여자가 병에 걸려서 죽었던가? 그래, 그랬다. 어쩐지 비극의 징조 같아서 정지 버튼을 눌러버렸다. 카페 안엔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한 시간쯤 지나 카페로 돌아온 남자는 잔뜩 지친 얼굴이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너무 피곤한 얼굴이라 나는 가만히 눈치만 살폈다. 이윽고 남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할머니-”

“네?”

“돌아가셨다네, 며칠 전에.”


그래서 오늘은 할아버지 혼자 오셨던 거구나, 그래서였어.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로 할아버지는 줄곧 식사도 않으시고 잠도 통 못 주무셨대. 그러다 오늘 갑자기 가야 할 곳이 있다며 외출을 하셨는데, 그리고 아마 곧장 여기로 오셨던 모양이야.”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녀도 뭐도 아니었지만, 두 분이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정말 좋아했다. 나이를 먹고 늙어서도 남편과 손을 꼭 잡고 좋아하는 노래와 책 이야기를 하면서- 그렇게 두 분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을 만큼.


“기분이 이상하네, 어쩐지.”


입맛이 없다며 식사도 거른 남자는 오후 내내 여느 때처럼 책을 들고 앉아있었지만, 나는 남자가 몇 시간 째 같은 페이지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불규칙적으로 두드리기도 하고 계속해서 자세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가며 남자는 무언가로부터 버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결국 저녁 6시쯤 되었을 때 남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나는 지금 어디 좀 가야 할 거 같은데, 너는 어떡할래?”


남자가 앞치마를 벗어던지며 내게 물었다. 평소와 달리 하필이면 오늘따라 손님이 많았다. 2층에는 여고생 네다섯 명이 둘러앉아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고 1층 구석 자리에서는 곱슬머리 엉뚱한 여자 손님이 소설을 쓰기 위해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열쇠 주고 가요, 손님들 다 가면 내가 닫고 갈게요.”

“그럴래?”


남자는 순순히 내 손바닥 위에 열쇠는 건네주고는 곧장 카페를 뛰쳐나갔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어딘가를 향해 전력질주로 달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디에 가는 걸까? 불안해 보였던 남자의 행동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 카페를 지키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언니, 여기 물 좀 더 주세요!”


2층에 있던 고등학생 중 한 아이가 계단을 뛰어내려오며 나를 불렀다. 나는 얼른 냉장고로 달려가 여자아이가 들고 온 빈 물병과 새로운 물병을 바꿔주었다. “고맙습니다!”하고 내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한 후 아이는 교복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다시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pexels-evgenia-basyrova-5028871.jpg ⓒ Pexels, Evgenia Basyr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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