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나방 같은 별들이 가물거릴 때

그리고 결국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by AYEON

치익- 하고 뜨거운 열기에 놀란 고기가 내지르는 비명소리, 석쇠 위에서 먹음직스런 냄새를 풍기며 익어가는 고기, 노란 불빛 아래 서서히 퍼져나가는 뿌연 연기, 둥그런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아 늦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 우리들.


“이제 내가 할게, 와서 좀 먹어.”


그 사람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석쇠 앞에 서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더 드세요.”라고 말했지만, 이미 그 사람은 일어서서 남자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자, 어서.”


그 사람이 남자의 손에서 집게를 빼앗으며 부드러운 명령조로 말했다. 남자는 순순히 장갑을 벗어 그 사람에게 건네고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빈자리는 그 사람이 앉아있던 연주와 수진이 사이와 끝에 앉아있는 나의 오른쪽뿐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망설임 없이 수진이를 지나 내 옆에 털썩, 걸터앉았다. 무안해진 수진이가 연주 쪽으로 당겨 앉아 빈자리를 없애버렸다.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나는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접시 좀 줘.”


나는 팔을 뻗어 테이블 중간에 있던 빈 접시와 포크를 집어 탁, 소리를 내며 남자의 앞에 내려놓았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바비큐 한 조각을 덜어서는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뭐할까, 저녁 먹고?”


선미가 입을 오물거리며 물었다. 나방 한 마리가 테이블 위에 놓인 램프 근처를 파닥파닥 날아다니고 있었다. 수진이가 손을 휙, 휘두르자 나방은 놀라 멀리 날아가 버린다.


“글쎄, 뭐 재미있는 거 없을까?”


나는 남자를 곁눈질로 살폈다.


“찾아보면 어릴 때 하던 보드 게임 같은 게 있을지도.”

“보드 게임? 그거 괜찮네, 팀 나눠서 설거지 복불복 어때?”


지원이가 눈을 반짝이며 제안했다. 다들 나쁘지 않다는 듯 동의했다.


“아까 다락방에서 본 거 같은데, 내가 찾아볼게.”


어떻게든 이 불편한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내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연주가 같이 가자고 일어섰지만, 나는 한사코 괜찮다고 사양하고 혼자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부엌 쪽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에 의존해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등 뒤로 사람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으며 나는 어느덧 다락방으로 오르는 계단 아래에 서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스위치를 눌러도 다락방은 밝아지지 않았다.


“아마 전구가 나갔을 거야.”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불쑥, 나타난 남자는 스위치를 몇 번 눌러보더니 들고 있던 플래시를 켰다.


“놀랐냐?”


피식, 웃으며 남자가 물었다.


“얼굴이 엄청 하얗게 질렸어.”

“그, 그쪽이 갑자기 나타나서 그렇잖아요!”


컴컴한 어둠을 빈약하기 짝이 없는 플래시 불빛이 힘겹게 가르며 고가구들을 비추고 있었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선뜻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따라가지 않고 가만히 서있자 남자가 계단 중간쯤에서 나를 돌아보았다.


“계속 거기에 있을 거야?”

“아, 아니 오, 올라갈 거예요.”

“혼자 밑에 있는 게 더 무서울 텐데?”


웃음 띤 남자의 말에 나는 얼른 계단을 뛰어올라 남자에게 바짝 붙어 섰다. 남자는 다시 씩씩하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고 나는 조심스레 그 뒤를 따라 올라갔다.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서인지 아니면 창문 가득 들어오는 달빛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락방은 아래에서 보던 것만큼 어둡지는 않았다. 남자는 보드 게임이 있을 법한 서랍장들을 열어보고 있었다. 조금 여유가 생긴 나는 남자로부터 플래시를 받아 서랍을 비춰주었다.


“밥은 다 먹었어요?”

“아니.”

“혼자서도 찾을 수 있어요, 내려가서 먹어요.”


바삐 움직이던 남자의 손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너처럼 성격 이상한 애는 처음이야.”


정말 성격 이상한 사람이 누군데, 흥. 하지만 나는 남자가 뜬금없이 이런 말을 꺼낸 이유가 더 궁금했기 때문에 잠자코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왜 자꾸 착한 척을 해?”

“무, 무슨 말이에요? 내가 언제요?”

“네가 아무리 착한 척을 해도 절대 네 친구가 될 수는 없어.”


마침내 남자가 서랍에서 보드게임 상자를 찾아내 흔들어 보였다.


“여기 있네, 그만 내려가자.”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친구가 될 수 없다니?”

“글쎄.”


남자는 순순히 대답할 의향이 없어 보였다. 화가 난 나는 플래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향해 비췄다. 정면으로 쏟아지는 빛에 눈이 부신 남자는 왼팔을 들어 눈을 가리며 “무슨 짓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말해요.”


화가 나 씩씩거리는 나를 보며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솔직히 내가 봐서는 그쪽도 내숭인 것 같지만, 아무튼 그 얌전한 척하는 네 친구 말이야.”


설마 연주를 말하는 건가? 지금껏 연주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계속 말하라는 듯 눈짓을 했다. 남자는 아직도 모르겠냐는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 친구 흉내를 내고 있잖아, 아까부터 계속.”

“그런 적 없-”

“그런다고 네가 그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는 가지만, 결국 소용없을 거야.”


나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항상 남자는 내게 반박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설사 내가 의도적으로 연주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더라도 무의식 중에 연주 흉내를 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남자의 말대로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나는 연주가 될 수는 없다. 나는 그 사람의 여자 친구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남자가 미웠다, 괜한 화풀이란 것은 알지만.


“내가 말했죠?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지 말아요. 뭐든지 전부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지 말아요. 그쪽이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지만, 그쪽이 항상 옳은 건 아니에요!”


쾅쾅거리며 나는 계단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남자는 천천히 내 뒤를 따랐다. 때마침 현관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수진이와 마주쳤다.


“찾았어, 게임은?”

“응.”


나는 짧게 대답하고는 얼른 밖으로 뛰쳐나왔다. 등 뒤에서 수진이가 남자에게 상냥하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분하게도 남자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사람 앞에서 잔뜩 골난 표정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아이우에오‘를 여러 번 반복하며 애써 웃는 얼굴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찾았니?”


연주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위에는 남자가 먹다 남겨놓은 스테이크 조각이 담긴 접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내가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연주가 말을 걸어왔다.


“다락방 전등이 고장 났다며? 괜찮니, 그런 거 엄청 무서워하잖아?”

“아, 응. 정말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더라, 무서웠어.”

“그러게 같이 간다니깐, 너도 참. 구운 파인애플 먹을래?”

“응, 먹을래.”


연주가 내 접시에 파인애플을 덜어주고 있는데, 남자가 보드게임 박스를 오른쪽 옆구리에 끼고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내 옆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내게 말했다.


“나도 줘, 파인애플.”


나는 말없이 파인애플을 반으로 갈라 남자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남자는 정말이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사를 다시 시작했다. 간간히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눴고 간혹 어색하게 웃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나였다, 남자가 아니라.


“와, 이거 오랜만이다, 이거! 나 왕년에 호텔 왕이었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서울이 그렇게 사고 싶었었는데 여태까지 한 번도 못 샀었어. 오늘은 꼭 사보고 말테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바비큐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사람이 마지막이라며 조개와 새우가 담긴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연주의 옆자리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신나게 하는 거야? 아, 이거야?”


그 사람이 흥미로운 듯 보드게임 상자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형, 우리 그걸로 설거지 복불복해요! 사람이 많으니까, 커플로 팀을-”


커플로 팀. 지원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온 순간 나를 비롯한 몇 명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우리는 홀수였다. 즉, 어느 한 명은 팀에 속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 한 사람은 누가 되어야 하는 걸까?


“나는 심판할래.”


타의에 의해 떠밀리는 것보다는 자의로 나서는 것이 그나마 덜 비참하다고 판단한 나는 얼른 손을 들며 말했다. 우리 중 넷은 커플이고 수진이와 남자는, 아무튼 결국 남는 사람은 나였다. 정말 나는 이 여행에 왜 온 걸까?


“너 설거지 안 하려고 그러는 거지?”


선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웃는 사람은 지원이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설거지도 선미와 지원이가 했다.




나는 이불을 몸에 감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창문을 통해 어스름한 달빛이 들어와 벽의 무늬를 선명하게 비춰주었다. 기하학적인 무늬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요한 와중에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2시. 모두가 깊이 잠든 시간, 왜 나는 잠이 오지 않는 걸까! 나는 다시 반대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 바람에 침대가 흔들려 옆에서 자고 있던 연주가 살며시 눈을 떴다.


“왜 그래, 다아야?”

“미안, 깼어? 잠이 안 와서.”

“불편해서 그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뭐, 곧 잠들겠지. 어서 자, 깨워서 미안.”

“응, 너도 얼른 자.”


그리고는 다시 눈을 감더니 이내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계속 뒤척여도 쉽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아서 연주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애쓰며 밖으로 나왔다. 거실 구석에 놓여있는 작은 스탠드에서 나오는 빛이 거실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걸음을 옮겨 테라스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으-앗!”


그때 어둠 속에서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고 놀란 나는 소리를 지르려다 얼른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았다. 그림자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야, 너 뭐하냐?”


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나타났다. 나보다 더 놀란 얼굴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났다.


“놀랐잖아요!”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이 시간에 갑자기 기척도 없이 나타나서는 난데없이 소리를 지르고 말이야.”

“그쪽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당연히 놀라죠.”

“너 엄청 겁이 많구나, 완전히 겁쟁이네.”

“흥, 그쪽도 놀랐다면서요? 그쪽도 겁쟁이네요, 나 같은 겁쟁이 때문에 놀랐다니.”


이런 쓸모없는 말다툼.


“됐어, 말을 말아야지. 안 자?”

“잠이 안 와서요.”

“뭐라도 좀 마실래?”


나는 바다 쪽을 보고 놓여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음, 네.”

“가볍게 술이라도 마실래, 아님 따뜻한 우유?”

“그쪽은요?”

“글쎄, 와인이나 한잔 할까?”

“좋아요.”


남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있으려니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테라스 벽의 전등에 오렌지색 불이 켜졌다. 내가 뒤를 돌아보자 급히 돌아서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나를 배려해준 건가, 설마? 나는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는 걸 느꼈다. 나는 난간으로 다가갔다. 쏴아아, 하는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밝은 달이 검은 바다 위로 길게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렇게 멍하게 있다가 물귀신한테 홀릴지도 몰라. 정신 차려.”

“무, 물귀신?”


남자가 와인과 크래커를 담은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밤바다를 보고 있으면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지?”


나는 놀리지 말라는 듯 눈을 홀기며 냉큼 크래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안 믿어요, 그런 이야기.”

“그거 참 다행이네.”


쪼르르, 소리를 내며 붉은 와인이 흘러내려 투명한 잔을 붉게 물들였다.


“말에 가시가 있네요, 어쩐지.”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별 수 없고.”


남자는 부정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차피 계속해봤자 나만 열을 낼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얼른 포기하고 대신 와인 잔에 손을 뻗었다. 쓰지만, 달콤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어 갔다.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왔다.


“너 무슨 꿍꿍이야?”


앞뒤를 잘라먹고 남자가 불쑥 물었다. 당연히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무슨 말이냐는 듯 남자를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설마 나랑 김수진을 어떻게 해보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냉큼 대답했다.


“맞는데요.”


우리 학번에서 단연 인기가 가장 많았던 건 연주였지만, 나중에 듣기론 부끄러움이 많고 조용한 수진이의 성격 탓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애만 태워야 했던 남자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했다.


“왜 거절했어요?”

“꼭 이유가 있어서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아닌 것처럼 꼭 이유가 있어서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야.”


내내 궁금하던 질문이 툭,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혹시 못 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어쩌면 끝까지 모른 척하는 편이 좋았을 말이었다. 내 말에 그 사람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고 있던 얼굴이 여느 때처럼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무슨 의미야, 그거?”

“그냥 별생각 없이 물어본 건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남자의 목소리에서 화가 묻어 나왔기 때문에 나는 얼른 사과했다. 남자에게도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내 사과에 남자는 조금 화가 누그러진 듯 조용히 와인을 한 모금 홀짝였다.


“너는 내가 김수진이랑 사귀면 좋겠어?”


남자가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얼굴에는 다시 옅은 장난기가 맴돌았다.


“내가 좋다고 하면 사귈 거예요? 나야 좋죠, 당연히.”

“왜 네가 좋은데?”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귀게 되면 친구로서 당연히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런 건가?”


나는 어느새 깨끗이 비어버린 남자와 나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쪽, 친구 없죠?”

“뭐?”

“친구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한 거예요.”


항상 친구의 불행을 원해온 주제에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착한 여자 흉내는 그만해, 못 봐줄 정도로 어설프니까.”

“왜 아까부터 자꾸 가식이라고 해요? 정말 아니거든요?”

“친구의 행복이 너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녀석이 왜 친구의 남자 주위를 자꾸 어슬렁거려? 그게 네가 말하는 우정이야?”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그쪽이 자꾸 오해하는 거 같아서 말해두는 건데, 나는 선배랑 고등학교 때부터 알아온 사이예요. 다 같이 아는 사이라서 어쩌다 보니 자주 마주치는 것뿐이에요. 딱히 일부러 어슬렁거리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단 한순간도 꿈꾸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주변에서 빙빙 맴돌면서 두 사람이 헤어질 날을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솔직히.


“흠, 그래?”


허무하게도, 남자의 대답은 그것이 전부였다. 여름밤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와닿았다. 남자는 말없이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내가 먼저였어요, 선배를 만난 건.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인데, 내 친구와 사귀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거리를 둘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변명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쪽한테는.”

“그런데 왜 네 친구한테 빼앗겼어? 네가 먼저 만났다면서?”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지금 나한테 왜 빼앗겼냐고 물어본 거야?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내 사람인 적이 없었다. 연주를 만나기 전에도, 만난 후에도. 그 사람에게 나는 언제나 그저 친한 후배일 뿐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당치도 않는, 나의 뻔뻔한 욕심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빼앗기다니 무슨 말이에요? 나는 선배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남자라면 거짓말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예리한 사람이니까. 나를 비겁하다고 생각할까? 하지만 나는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내가 용기 있게 달려가 사랑을 고백한들 그 사람이 자신도 예전부터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말해주는 기적은 결코, 죽어도 없을 테니까.


“-않겠지 당연히.”


남자가 내 말을 이어받았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희미하게 빛을 내는 오렌지색 전등 불빛 주위로 나방이니 하루 살이니 하는 벌레들이 몰려들어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나도 불빛을 보고 몰려든 저 벌레들 중 하나일까, 그런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해요?”


남자가 어두운 바다에서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거침없이 대답했다.


“어째서 내가 너를 비겁하다고 생각해야만 하지? 네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내가 이러쿵저러쿵 간섭할 일이 아니잖아.”


지금까지 실컷 간섭했으면서 뭐야. 나는 김이 빠진 탄산음료처럼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남자는 평소보다 더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잠시 보더니 이내 다시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화가 그런 식으로 끊기자 초조함이 밀려왔다. 남자와의 침묵이 어색하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라 무슨 말이든 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말로 아무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쪽이 좋아했다던 사람 말이에요, 실은 아직도 좋아하는 거죠?”


하지만 호기심을 이길 수 없었던 판도라처럼, 나는 그리 현명하지도 지혜롭지도 못한 인간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남자의 차가운 시선이 바늘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아직도 좋아하면서 왜 헤어진 거예요?”


하지만 나는 경박한 내 입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만, 해.”


의외로 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다정하게 타이르는 듯했다.


“누군가에 대해 알게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책임지겠다는 의미고, 좋든 싫든 아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야. 그러니까 거기까지만, 해. 그걸 묻는 이유가 네 친구를 위한 것이든, 아니면 너의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든.”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하게 내게 묻는다.


“더 마실래?”


나는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남자는 자신의 빈 잔과 나의 조금 남은 잔에 와인을 채웠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없이 고요한 밤공기 사이로. 가시 방석에 앉아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몇 시간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때를 보고 나방 같은 별들이 가물거릴 때라고 하나 봐요.”


이번에는 세이프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국 침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튀어나온 나의 엉뚱한 말에 다행히 남자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흥미를 보였다.


“예이츠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에요. 흰 나방들이 날갯짓하고 나방 같은 별들이 가물거릴 때.”


나는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이 촘촘히 박힌, 그러나 어느덧 어슴푸레 밝아오는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남자도 내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밤을 지나 차갑게 식어버린 새벽 공기가 뺨에 닿았다.


“그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나오는 거지?”


남자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혹시 알고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


“그 영화 봤어요? 아니면 혹시 소설?”


나는 반가움에 눈을 빤짝이며 물었다, 흥분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둘 다. 그 녀석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해서 그 영감님이 나오는 영화는 아마 거의 다 봤을 거야. ‘용서받지 못한 자’나 ‘페일 라이더’까지 구해서 봤을 정도니까. 흥, 그런 영감의 어디가 좋다는 건지.”


그 녀석, 남자는 무심코 뱉은 말이라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남자가 말하는 그 녀석은 남자가 좋아했다는, 수진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분명히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그 여자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문득 카페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음반들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것들도 그 여자의 취향 인지도 모른다.


“그거 질투예요?”


이것은 질투다.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내가 모르는 사람의 흔적들이 가득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심술이 났다. 어쩌면 그 빳빳하게 다림질된 하얀 테이블보도, 벽에 걸린 그림들도, 하늘거리는 커튼도, 모두 그 여자가 골랐을지도 모른다.


“참, 나 그쪽한테 따질 게 있어요!”


나는 남자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혹시라도 그 여자를 질투하고 있는 내 마음을 알아차린다면, 이 사람은 나를 정말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남자는 다행히 내 말에 반응을 보였다.


“뭘?”

“우리 동갑이잖아요?”


여기에 와서 수진이를 통해서야 비로소 남자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아마도. 네가 스물셋이라면.”

“그런데도 나는 그쪽한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는 말이군요.”

“그래서?”

“불공평해요, 이건!”


사실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왜 나는 그동안 이 남자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만약 이곳에 함께 오지 않았다면, 나는 끝까지 이 남자의 연락처도, 나이도, 그리고 그 여자에 대해서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면 너도 말을 놓던가, 그렇게 억울하면.”


남자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재깍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이 많은 내가 왜 유독 남자는 그렇게 무관심하게 대했던 걸까? 무언가 중요한 고리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도저히 모르겠다.


“흥, 놓으라고 하면 못 놓을 줄 알아요?”

“그동안 나한테 존댓말을 쓴 게 그렇게 억울하냐?”

“그쪽은 처음부터 나한테 반말이었잖아요!”


뭐야, 너 미쳤어?


남자가 내게 처음으로 했던 말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살면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미쳤냐는 말을 들을 기회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니기에 충격은 의외로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럼 내 나이를 물어보지 그랬어, 그렇게 억울하다면?”

“그쪽이 워낙 노안이라 당연히 나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죠!”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는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잡티 없이 하얀 피부는 정말 스물세 살 남자의 피부라고 하기에는 억울할 정도였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남자가 노안이라는 것은 나의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정말로, 왜 나는 한 번도 남자의 나이를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혹시 집에 거울 없냐?”

“있는데, 왜요?”

“그럼 거울을 좀 보면서 사는 게 어때?”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며 못 들은 척을 했다. 그러자 남자는 장난스럽게 와인 잔을 들어 내 얼굴을 비춰주려고 했다. 보지 않으려는 나와 보여주려는 남자 사이의 조용한 실랑이. 그리고 결국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웃었다. 어느새 뿌옇게 밝아오는 하늘의 가장자리, 곧 해가 떠오를 것이다.


“나 정말 말 놓을 거야, 이제부터.”

“마음대로 해.”


어느새 찰랑이던 붉은 와인이 가득하던 병은 빈병이 되어 덩그러니 우리 앞에 놓여있었다.


“이제 졸려.”


흐아아암, 하고 커다랗게 하품을 하고 난 후 내가 중얼거렸다. 뒤늦게 와인의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야, 방에 들어가서 자!”


남자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이미 내 두 눈은 감기고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내 귀에서 점점 멀어졌다.




pexels-marek-piwnicki-10050643.jpg ⓒ Pixels, Marek Piwnic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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