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른한 여름날의 오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와아, 너무 예쁘다!”
시원한 바람이 몰려와 머리칼을 헝클였다. 나는 눈앞의 아담하지만 예쁜 집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얀 벽의 아담한 이층 집은 오랫동안 손질을 하지 않아 군데군데 잡초가 솟아난 정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붉은 지붕은 파란 하늘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고 푸른 정원을 감싸는 하얀 울타리는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다.
“오랫동안 못 와서 청소부터 해야 할 거예요.”
남자가 육중한 나무문을 끼익, 밀었다. 그러자 먼지가 소복이 쌓이긴 했지만, 멋스러운 가구들로 가득한 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환기를 시키지 않아서인지 쾌쾌한 냄새가 밀려와 코를 간질였다. 참지 못한 내가 에취, 하고 요란하게 재채기를 했다.
“우선 환기부터 시켜야겠다.”
그 사람이 커튼과 창문을 열기 시작하자 햇살이 거실 깊숙이 쏟아져 들어왔다. 남자는 일단 짐을 내려두라며 쇼파의 덮개를 벗겨냈다. 우리는 모두 짐을 내려두고 각자 청소 도구를 하나씩 챙겨 들었다.
“야, 넌 이쪽으로.”
남자는 내 손목을 잡아끈다.
“어, 어디 가는데요?”
“다락방.”
“다, 다락방이요?”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남자와 둘이서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다락방의 낡은 전구가 켜지는 순간, 나는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락방의 한쪽 구석에 유럽의 벼룩시장에서 팔 것만 같은 앤티크한 전축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외에도 손 떼가 묻어 반들반들하게 윤기가 나는 고가구들도 여러 개 있었다.
“엄청 비싸 보이는 것들이네요!”
내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그걸 보고 비싸 보인다는 생각부터 하다니, 넌 정말-”
“흥, 다른 사람들이 솔직하지 못한 거예요. 다들 그 생각부터 먼저 했을 걸요,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이 있지.”
남자가 전축 옆에 놓인 상자를 뒤적이며 말했다.
“뭐 찾는 거예요?”
나는 호기심에 그의 옆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상자 안에는 LP 레코드 음반이 가득했다.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레코드를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와, LP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할아버지 취향이 좀 고상하셨거든.”
“그쪽 할아버지요?”
“이 집,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시던 집이었어.”
그의 말에 나는 다락방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먼지가 뽀얗게 쌓인 탁자 위에는 여러 권의 노트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놓여있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 이름표가 붙은 부분의 먼지를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Design‘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는 스프링 노트는 표지의 모서리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날 정도였다. 대충 노트를 스르륵, 넘겨보니 페이지마다 빽빽하게 도면 같은 것들이 어지럽게 그려져 있었다.
“어라, 이거 ‘오늘‘ 아니에요?”
한 건물의 외관을 스케치해놓은 페이지에서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스케치 속의 그림은 분명히 카페였다. 남자가 손의 먼지를 털어내며 내게 다가와 어깨너머로 힐끗, 그림을 살펴보더니 무심하게 대답했다.
“맞아.”
“설마?”
“유명하진 않으셨지만, 건축가셨어, 우리 할아버지.”
“와, 건축가요!”
남자는 다시 LP 상자를 뒤지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신기한 듯 그림을 이리저리 살피는 동안 남자는 마침내 하나의 레코드를 꺼내 전축에 넣었다.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공기를 타고 천천히 퍼져나갔고 그 울림은 가슴을 떨리게 만들었다.
“가우디처럼 당신의 도시를 만드는 게 꿈이셨지. 하지만 알다시피 결국 할아버지가 만든 집들은 누구나 지을 수 있는, 이렇게 평범한 집들뿐이었어. 할아버지는 가우디 같은 천재가 아니셨거든.”
나는 노트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쩐지 따뜻한 느낌이 드는 집들이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는 할아버지의 집들이 좋아, 예술적 가치는 없을지라도.”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낯설어서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처음 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저렇게 웃으니까, 전혀 다른 사람 같잖아? 늘 화난 표정이어서 몰랐는데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네?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갑자기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쪽 할아버지는, 다행히 그쪽이랑은 성격이 많이 다르셨나 보네요?”
“야, 그거 무슨 의미야?”
“이런 집을 지으셨다면 분명히 다정하신 분이셨을 거예요, 그렇죠?”
남자의 말대로 곳곳에서 정성이 느껴지는 따뜻한 집이다. “응.”하고 남자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왠지 가슴이 간지러웠다.
“저기-”
다락으로 올라오는 계단 위로 수진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유리창을 닦으려고 하는데 마른 수건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래서.”
수진이의 떨리는 눈동자가 남자를 지나 내게 닿았다. 마치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세탁실에 있을 텐데. 아, 내가 찾아줄게.”
남자가 들고 있던 걸레를 내려놓고 수진이가 서있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남자와 수진이 계단 아래로 내려가고 혼자 남은 나는 남자가 두고 간 걸레로 창틀을 닦기 시작했다. 뽀얀 먼지가 닦여나간 자리에는 고운 나뭇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꺄아, 정말?”
“하하하, 진짜야!”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웃음소리에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건전지가 다 된 시계의 바늘처럼 뚝, 멈추었다. 웃음소리는 또 다른 웃음소리에 묻히고, 또 이어지는 웃음소리. 위가 따끔거렸다. 안 돼, 그만. 나는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걸레질을 시작했다. 창틀, 전축, 탁자, 의자를 다 닦고 난 후에도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벽에 걸린 램프의 등을 벗겨 닦는 일까지 끝내고 나니 더 이상 다락방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선뜻 아래로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혹시 내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게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던 내 눈에 아까 보다가 내려둔 노트가 눈에 띄었다. 노트를 펼치니 뽀얀 먼지가 노란 햇살 위로 뿜어져 나왔다. 카페의 도면에는 군데군데 연필로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두 지금은 높다란 책장이 세워져 있는 벽면들이었다.
“다아야, 혼자서 뭐하니?”
갑작스런 인기척에 나는 놀라 노트를 확, 덮었다. 그 사람이 계단에 서서 반쯤 몸을 드러낸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계단을 마저 올라오더니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휙, 다락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와, 정말 멋진 다락방이구나!”
“아래층은 청소 다 끝났어요?”
“응, 거의. 여긴 다 끝난 거니?”
“네, 아마도.”
툭, 하고 커다란 손이 내 머리 위에 얹혀졌다. 놀란 내가 고개를 살짝 들고 올려다보자 그 사람은 싱긋, 미소를 짓는다.
“수고했어.”
“서, 선배?”
“왠지 좀 기운이 없어 보이는데, 괜찮아?”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스며들어온 햇살을 만나 마룻바닥에서 꼬물거리며 올라오던 먼지가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 순간, 바삐 흘러가던 시간이 우리 곁에서만 유독 천천히 흘러가는 것 같았다. LP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멜로디가 우리를 감쌌다. 이 나른한 여름날의 오후,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와, 바다다!”
“이게 얼마만이냐, 좋다!”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를 보며 선미와 지원이가 동시에 외쳤다. 이미 완벽한 바캉스 차림으로 무장한 그 아이들은 들고 있던 짐을 모래사장 위로 던져버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다로 향해 뛰어갔다.
“서, 선미야! 너 간식까지 던지고 가면 어떡해!”
수진이가 내동댕이쳐진 간식 바구니를 주워 들며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선미와 지원이는 첨벙첨벙,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저 둘은 정말 찰떡궁합이야, 그렇지?”
“누가 아니래, 환상의 커플이지.”
연주의 말에 수진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가볍게 따라 웃으며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쯤에다가 내려놓고 우리도 물에 들어가자.”
별장에 있던 파라솔을 텅 빈 모래사장 중간에 꽂고, 그 그늘 아래 각자 들고 온 짐들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우리도 곧장 선미와 지원이를 따라 바다로 뛰어들었다. 차가운 소금물이 발목을 휘감고 하얀 거품이 종아리 여기저기에 달라붙었다. 폐 깊숙이까지 소금기가 묻어나는 공기가 침투한다. 바다의 감촉, 바다의 내음, 바다의 소리!
“이번에는 다아!”
마치 그것은 신호와도 같았다. 지원이를 선두로 그 사람과 남자가 내게 달려왔고 튜브에 매달려 있던 나는 물속으로 고꾸라졌다. 맙소사! 너무 놀라 비명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발버둥을 쳐보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첨벙, 하고 나는 물속으로 가차 없이 내던져졌다. 꼬르륵, 소리를 내며 기포가 올라왔다. 나는 물속에 있었다. 한 손으로 코를 막고 한 손으로는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수심이 깊지는 않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더 멀게, 하지만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선배, 윤후 선배! 누가 나 좀 살려-
“자, 내 손 잡아!”
숨이 막혀올 때쯤 햇볕을 등지고 선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그림자의 주인이 누구인지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커다란 손이 내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가까스로 물에서 빠져나온 나는 정신없이 바닷물을 뱉어냈다. 나의 구세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홀딱 젖어서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나를 걱정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오직 그 사람만이 생각났다. 그 짧은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그 사람의 이름을 수백 번도 더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 사람이 나타나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저 우연이라고 해도 좋았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라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일단 물에서 나가자.”
그 사람이 내 손을 꼭 잡더니 해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참방참방, 걸음마다 바닷물이 이리저리 튀었다. 방금 전 물에 빠졌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가슴까지 오던 수위는 점점 얕아지더니 어느새 발목 즈음에서 찰랑대고 있었다. 마침내 모래 위에 발을 딛자 하얗고 고운 모래들이 축축한 내 발에 달라붙었다.
“자, 도착했습니다.”
파라솔 아래에 도착했을 때 그 사람이 내 손을 놓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나를 그늘에 앉히고 아이스박스에서 작은 물병을 꺼내 건넸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발에 쥐라도 났었니?”
“아, 그게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균형을 못 잡아서 그만.”
“이런, 정말 큰일이 날 뻔했구나. 미안해.”
“아니요, 아니요, 선배가 저를 구해주셨잖아요.”
그 사람이 따뜻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정말 다행이야, 아무 일도 없어서.”
속삭이듯 달콤한 목소리,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은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노라고. 숨이 막혀오면서 생각난 것은 당신뿐이었노라고.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알아달라고.
“선배-”
“응?”
“할 말이 있어요.”
내 친구의 남자 친구인 당신을.
“무슨 말?”
“선배, 사실은-”
“나도 물 좀 줘, 목말라.”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놀란 나는 숨을 삼켰다, 고백의 말과 함께. 남자가 내 손에서 물병을 홱, 낚아채가더니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니?”
그 사람이 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말을 삼켜버린 후였다. 남자는 순식간에 물 한 병을 다 비운 후 빈 병을 덜렁,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때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는 그렇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 저는 괜찮으니까, 선배도 물에 들어가라고 말하려던 거였어요. 걱정 말고 가서 같이 노세요. 저도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 사람에게 급히 지어낸 변명을 둘러댔다. 그 사람은 미심쩍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크게 의심은 하지 않는 듯했다.
“너 무슨 일 있었냐?”
남자가 모래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게 물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 아까 우리가 친 장난 때문에.”
“너 바보냐? 그 얕은 물에 빠져 죽을 뻔이라도 한 거야?”
그 사람의 설명과 거의 동시에 남자가 비난하듯 말했다. 남자의 말투에 놀란 사람은 그 사람이었다. 정작 나는 익숙한 남자의 폭언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바보냐는 말은 이미 수십 번은 들은 말이었다. 사실 바보 정도면 애교라고 봐줄 만한 수준이었다.
“흥, 그쪽 때문이잖아요! 나 수영 못한단 말이에요!”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네가 수영 못하는 걸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쪽이 나를 물에 빠트렸잖아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대화였다, 그 사람이 끼어들기 전까지는.
“사이가 좋구나, 너희들.”
그 사람이 웃으며 던진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당신이 그렇게 웃지 않았으면 좋겠어. 질투를 느꼈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런 헛된 꿈을 꾸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미워 죽겠어. 그 사람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내 머리에 수건을 푹, 덮어주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나는 먼저 들어갈게. 조금 더 쉬다가 들어와. 몸 안 좋으면 바로 말하고.”
노란 튜브를 타고 물 위를 둥둥 떠다니며 연주가 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사람은 망설임 없이 연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울면 안 되는데-
“봐, 말 안 하기를 잘했지?”
남자가 무릎을 세우고 앉아 무릎 위에 팔을 얹으며 말했다. 결국 눈물 몇 방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모래 위로 떨어졌다.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던 마음은 바람이 빠져버린 풍선처럼 힘없이 축, 늘어졌다.
“실은 나도 봤어, 너 물에 빠진 거.”
“봤으면 좀 구해주지 그랬어요?”
나는 울먹이다 말고 투덜거렸다.
“구해주려고 달려가는데, 형이 먼저 널 구한 거야.”
“그래요?”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나도 너를 구할 수 있었다는 말이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어. 다만 저 형이 네게 가장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너를 구해준 거야. 거기에는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었어.”
“알아요, 그렇게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렇게 잘 안다면서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려고 했어? 지금 네 마음을 말하면 여태껏 네가 해왔던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이 될 거야.”
나는 창피해서 어디로든 숨어버리고 싶었다. 만약 그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면 아마 나는 앞으로 그 사람의 옆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선택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아까 먹은 바닷물을 입이 아니라 눈으로 뱉어내는구나, 대단한데?”
나는 놀리지 말라며 남자의 팔을 가볍게 밀쳐냈다. 그러자 남자는 피식, 웃는다. 그 웃음은 무심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한 느낌이 들어 나는 왠지 마음이 놓였다.
“왜 그렇게 친절하게 굴어요, 갑자기?”
“뭐?”
“아니에요, 아무것도.”
나는 모래를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손을 한번 흔들어 보였다. 남자가 머뭇거리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힘껏 남자의 손을 잡아당겨 남자를 일으켰다.
“이제 물에 들어가요! 여기까지 왔는데 앉아만 있으면 아깝잖아요!”
“야, 너 괜찮-”
“괜찮아요, 괜찮아!”
파란 하늘과 그보다 더 파란 바다, 그리고 그보다 더 푸르렀던 우리의 청춘. 나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가르며 첨벙첨벙, 물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