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사랑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 모두가 파멸하고 마니까."
화요일 아침,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카페에 나타났다. 내내 남자를 걱정했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남자는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제대로 안 해? 거기 얼룩이 남았잖아!”
“다 닦았는데, 무슨 소리예요?”
그렇게 투닥거리고 있는데 딸랑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우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동시에 돌아보았다. 연주가 살며시 안으로 들어서며 생긋 웃어 보였다.
“아직 오픈 전이니? 들어가도 돼?”
“연주야? 아, 들어와.”
나는 연주를 창가 쪽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리고 곧장 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연주의 앞에 시원한 물이 담긴 컵을 내려놓았다.
“선미도 이리로 오기로 했어. 오면 같이 주문할게.”
“선미도 와? 수진이는?”
“수진이는 아마 학원에 있을 거야.”
남자가 음악을 틀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 걸 보며 나는 살그머니 연주의 반대편에 앉았다. 연주는 가방에서 책 몇 권과 지도를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게 다 뭐야? 여행이라도 가려고?”
“응, 어디가 좋을까?”
“글쎄, 또 어디 가려고?”
연주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번에는 다 함께 가자. 오빠랑 지원이도 같이.”
아, 또 이 기분! 나는 테이블 아래로 두 손을 아플 만큼 꼭 잡았다.
“그저께 도서관에 들렀다가 선미를 만났거든. 마침 수진이도 근처에 있어서 같이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했는데, 다음 주쯤에 시간 어때? 여태 함께 놀러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런데 너 아르바이트는 쉴 수 있겠어?”
연주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곁눈질로 남자를 살피며 내게 물었다. 나도 연주를 따라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는 고개를 든다. 나는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얼른 시선을 옮겼다.
“글쎄, 잘 모르겠어.”
“음, 어떻게든 꼭 같이 가야 해, 알았지? 한 명도 빠지기 없기야.”
“갈 수 있도록 노력은 할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연주는 조용히 책장을 팔랑이며 살펴보기 시작했다. 딸랑딸랑, 다시 종소리가 울리며 선미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연주가 선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와, 분위기 정말 좋네.”
나는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선미에게 자리를 내주고 물을 내어왔다. 연주가 메뉴판을 보는 동안 나는 앞치마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주문을 받기 위해 기다렸다.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 선미야, 넌?”
“음, 나도.”
나는 메모지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또박또박 받아 적었다. 연주와 선미가 그런 나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아 보통은 남자가 음료를 만들지만, 남자는 내가 주문을 받는 걸 보고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쉰 후 남자에게 배운 대로 엉성하게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만들어냈다.
“음, 맛있다.”
나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선미의 옆에 앉았다. 연주는 여전히 팸플릿을 살피고 있었고, 선미는 계속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수진이는 일요일이랑 월요일이 좋다고 하네. 그럼 그때로 할까?”
“나도 월요일이 휴무라서 그때가 좋을 거 같아.”
“그럼 그렇게 하자. 그런데 갑자기 숙소를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오빠가 일단 알아보겠다고는 했는데 성수기라서.”
“아, 누구 별장 같은 거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으려나? 그럼 좋을 텐데.”
선미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여기 있는데.”
불쑥, 끼어든 뜻밖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네?”
“혹시 그 여행에 내가 동행해도 될까? 대신 그리 좋지는 않지만, 적당히 쓸 만한 숙소 정도는 기꺼이 제공할 의향이 있는데.”
맙소사, 이게 무슨 상황이야! 남자가 팔짱을 끼고 나를 보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주가 그의 제안에 관심을 보이며 팸플릿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정말이에요?”
그가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갑자기 함께 여행을 가겠다고 나서는 걸까, 나랑 친한 것도 아니면서? 그와 함께 일한 지 2주가 넘도록 우리는 서로의 휴대폰 번호조차 모르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지금 내가 일 안 한다고 화가 난 거죠? 자, 일할게요. 농담은 그만하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여유롭게 미소까지 지으며 대답했다.
“나 지금 농담하고 있는 거 아닌데,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그럼 갑자기 왜-”
“어차피 다음 주에 혼자서 별장에 갈 생각이었어. 혼자보다는 사람이 많을수록 재미있고, 네게 진 빚도 갚을 수 있잖아. 이보다 더 서로에게 좋은 제안이 어디 있겠어? 네 친구들만 괜찮다면 나는 함께 가고 싶은데.”
내게 진 빚? 그는 평소와 달리 유난히 밝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그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다른 생각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사교성이 바닥인 남자의 입에서 사람이 많을수록 좋다는 등의 말이 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희도 그쪽만 괜찮으시다면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선미가 웃으며 대답했다. 연주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눈치였다. 나는 의도를 알 수 없는 그 제안이 도무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내게는 선택의 권한이 없었다.
“저야말로 감사한 일이죠, 끼워주신다면.”
그가 영화 속 비열한 악당처럼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진심이에요?”
나는 그날 이후로 생각이 날 때마다 이렇게 묻는 게 버릇이 되었다.
“한 번만 더 하면 정말 서른일곱 번째야.”
그러면 남자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내가 몇 번째 질문을 했는지 몹시도 친절하게 알려주곤 했다. 서른일곱 번의 확인, 그러나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 남자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정말 우리랑 같이 갈 거예요? 솔직히 말해 봐요, 당일에 안 된다고 할 거죠? 나 골탕 먹이려고?”
“내가 너를 왜 골탕 먹여? 뭐, 나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
“그런 게 아니라, 이상하잖아요!”
“아무튼 서른여덟 번이야.”
당장 이틀 앞으로도 다가온 여행은 나의 불안함과는 달리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남자가 의외로 너무나 잘 협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남자의 적극적인 행동들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서 오세요.”
딸랑딸랑, 종소리가 울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가 반사적으로 인사를 했다. 문이 열리고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우산을 탁탁, 털며 들어선다. 화장기가 전혀 없는 얼굴에 고불거리는 머리를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여자의 콧등에는 동그란 안경이 느슨하게 걸쳐있다.
“어머, 무슨 비가 이렇게 쉬지도 않고 온데요?”
“오랜만이에요.”
그가 아는 체를 하자 여자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오른다.
“나를 기억해요?”
“네, 당연하죠.”
“어머, 고마워라!”
단골손님이겠거니, 하고 나는 차가운 물과 메뉴판을 준비했다. 여자가 계단 아래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을 보고 나는 재빨리 다가갔다. 남자가 웬일로 행동이 그렇게 빠르냐는 표정을 짓는 것을 무시하며 나는 여자가 그 커다란 가방에서 무지막지하게 큰 구형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이 쏟기지 않도록 컵을 노트북에서 멀리 떨어진 테이블 한쪽 구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주문은 바로 하시겠어요?”
“아, 네!”
여자는 내가 건넨 메뉴판을 마치 소설책이라도 읽듯이 흥미롭게 살펴본다.
“어떻게 여기서 일하게 됐어요?”
그러다 불쑥, 내게 물었다.
“네?”
당황한 나는 멀뚱히 여자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그러자 여자가 명랑하게 말했다.
“미안, 이상한 질문이죠?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시원한 걸로.”
남자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 이미 커피를 만들고 있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풍겨 났다.
“저기요, 저분은 자주 오는 손님이에요?”
내가 커피와 함께 낼 쿠키 몇 개를 작은 접시에 덜며 조그맣게 물었다.
“예전에는 자주 왔었는데, 최근에는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은데?”
남자가 웬일로 선뜻 대답을 해주었다. 갓 내린 커피와 커피에 잘 어울리는 아몬드 쿠키가 담긴 접시를 나무 쟁반에 담았다. 나는 요상한 표정으로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자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주문하신 커피입니다.”
나는 혹시 여자가 또 이상한 질문을 할까 봐 얼른 쟁반을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남자가 책을 들고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나도 책을 들고 스툴에 앉았다. 얼마 전부터 나는 ‘폭풍의 언덕‘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듯이 진정한 독서의 즐거움은 반복해서 읽는 것이라더니, 나는 금세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요크셔 지방의 황량한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뭐야, 폭풍의 언덕?”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남자가 내가 읽고 있던 페이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왠지 부끄러워서 얼른 책을 덮었다.
“왜, 왜요?”
“네가 이런 책도 읽어?”
“뭐야, 읽으면 안 돼요?”
내가 삐딱하게 묻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이 작품 좋아해. 히스클리프라는 인간이 품고 있는 증오와 배신감, 복수심! 캐서린의 감출 수 없는 욕망과 나약함! 끔찍할 정도로 처절하고 지독한 이야기잖아. 사랑이 그저 아름답고 달콤할 거란 착각을 제대로 깨부수는 아주 위대한 작품이라고 생각해. 그들의 사랑으로 인해 주변 사람들 모두가 파멸하고 마니까, 그리고 그들 자신도.”
그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건 처음 본다. 나는 멍하게 그의 말을 듣고 있기만 했다. 그는 곧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으쓱했다.
“결말은 별로 마음에 안 들지만.”
책 표지에 그려진 황무지를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결말을 떠올려 보았다. 그럼에도 사랑과 희망은 피어난다던가? 그런 우스운 이야기-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 말에 그가 놀란 듯 나를 잠시 응시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가 없었다. 여행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내일도 비가 오면 어쩌지? 내일 아침 마트에서 함께 만나 장을 보고 곧장 남자의 별장으로 향하기로 했다. 오늘까지도 장난이었다고 말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이 남자는 우리와 함께 여행을 갈 생각인 걸까?
“먼저 갈게요, 내일 봐요.”
“응.”
남자가 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로 무심하게 대답했다.
“저기요-”
“또 정말 갈 거냐고 물을 거면 그냥 가.”
정곡을 찔린 내가 입을 삐죽거리는 걸 어느새 봤는지 남자가 말했다.
“아파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갈 거니까, 혹시나 내가 아파서 못 가도록 기도하느라 괜히 힘 빼지 마. 어차피 가서 힘쓸 일 많을 테니까.”
“그거 물으려던 거 아니었거든요?”
“그럼?”
나는 불쑥,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가 무슨 의미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아직 그쪽 번호도 모르고 있더라고요, 내일 혹시 연락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연락할 일?”
그가 입가에 옅은 웃음이 지었지만, 기분 나쁜 웃음은 아니었다.
“공일공, 공일공일, 사사사사.”
그리고 그는 갑자기 굉장히 빠른 속도로 숫자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요! 다시, 다시!”
나는 허겁지겁 휴대폰에 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주인을 닮아 참 무뚝뚝한 번호로군. 나는 이름을 적는 칸에 ‘싸가지‘이라고 적은 후 저장 버튼을 눌렀다.
“설마 유치하게 이상한 이름으로 저장한 건 아니겠지?”
남자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아, 아니거든요! 그럼 내일 봐요!”
정곡을 찔린 나는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왔다. 푸르스름한 공기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시간, 어디선가 풍겨오는 음식 냄새,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 나는 행여 서글픔에 발목이라도 잡힐까,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혀 그칠 기미가 없는 이 비에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도 깨끗이 씻겨 내려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의 장마는 유난히 길었다.
다행히 아침 하늘은 마치 가을처럼 맑고 청명했다. 작은 캐리어를 현관 옆에 끌어다 놓고 나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아직 남자가 오기로 한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아있었다. 아무래도 나가서 기다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나의 직감은 적중했는지, 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흰색 승용차 한 대가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내가 서둘러 그 차로 다가가자 조수석 창문 너머로 퉁명스러운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일찍 왔네요?”
“짐은?”
“이거요, 트렁크에 실을게요.”
내가 캐리어를 끌고 트렁크 쪽으로 향하자 툭,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트렁크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언제 내렸는지 남자가 내 캐리어를 번쩍 들어 싣는다.
“고마워요.”
남자는 대답 없이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간다. 나는 어색하게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내가 안전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
끼이이이익-
빠아아아앙-
찢어지는 파열음과 머리를 울리는 경적 소리. 갑자기 차가 멈추며 나는 그대로 앞으로 쏠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머리를 부딪치는 것만 겨우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괜찮아?”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너무 놀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정신없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두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남자가 갑자기 두 손을 뻗어 내 양 어깨를 꼭, 붙잡았다. 그러자 호흡이 한결 쉬워졌다.
“젠장!”
내가 숨을 제대로 쉬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화가 난 표정으로 문을 벌컥, 열고 뛰쳐나갔다. 밖을 내다보니 비싸 보이는 차 한 대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서있었다. 그리고 아저씨 한 분이 난감하다는 듯 차에서 내리셨다.
“갑자기 끼어드시면 어떡해요!”
“미안해요, 학생. 내가 너무 급해서 다치지는 않았어요?”
다행히 아저씨는 순순히 사과를 하며 나와 남자를 살피셨다.
“야, 너 괜찮아?”
나는 차에서 내리며 남자의 물음에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긴 했지만, 다친 데는 없어요.”
“이거 내 명함인데 혹시라도 나중에 아픈 곳이 있으면 연락해요. 교통사고는 며칠 뒤에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니까. 내가 지금 급하게 병원에 가야 해서 먼저 실례해도 될까요? 정말 미안해요, 학생들.”
아저씨는 나와 남자에게 명함을 한 장씩 쥐어준 후 순식간에 차를 몰고 사라져 버렸다.
“너 정말 괜찮아?”
“네, 네, 정말 괜찮아요.”
남자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나는 애써 웃음까지 지어가며 대답했다. 하지만 남자는 여전히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그쪽은 괜찮아요? 다친 데는 없어요?”
그제야 남자는 정신을 차린 듯 “응.”하고 짧게 대답했다.
우리는 모임 장소인 대형마트까지 가는 동안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와 남자는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1층으로 향했다. 1층에 올라가니 바로 연주와 그 사람이 보였다.
“다아야!”
연주도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는 그 사람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웬일인지 남자가 먼저 선뜻 연주와 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왔어요?”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남자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우리 왔어요! 늦은 거 아니지?”
곧이어 선미와 선미의 동갑내기 남자 친구인 지원이가 완벽한 바캉스 차림으로 나란히 나타났다. 누가 봐도 여행 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법한 차림의 두 사람을 보며 우리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수진이는 근처라던데 오래 걸리려나?”
선미가 주변을 휙- 둘러보며 말했다. 때마침 멀리서 걸어오는 수진이가 보였다. “수진아!”하고 선미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우리를 발견하고 달려오던 수진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꼭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곤 뭔가 결심이 선 사람처럼 우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현아.”
수진이는 남자 앞에 서더니 약간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다.
“응, 김수진.”
남자는 자연스럽게 그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놀란 사람이 비단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두 사람, 아는 사이야?”
수진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아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 너일 줄은 몰랐어. 세상 정말 좁다, 그렇지?”
“그러게.”
여행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남자가 카트를 가지러 간 사이, 선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수진이를 추궁했다. 나는 조용히 선미와 수진이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수진이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하고 있잖아, 벌써.”
“그럼, 정말 네가 귀에 닳도록 말하던 현이가 저 현이야?”
선미가 경악한 얼굴로 저 멀리서 카트를 끌며 걸어오는 남자를 돌아본다. 비록 나는 수진이로부터 귀에 닳도록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지만, 아무튼 역시 충격이었다. 세상에 수진이가 좋아했던 사람이 저 남자일 줄이야!
“어색해서 죽는 줄 알았어. 그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거란 말이야.”
아직 다시 누군가를 좋아할 준비가 안 되었다고, 그 남자가 수진이를 거절하면서 그렇게 말했었다고 했다. 다시 누군가를? 그렇다면 전에 좋아했던 사람은 누구지?
“어쩌긴! 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다시 만날 수는 없는 거잖아? 네가 아직 마음이 있다면, 우리도 기꺼이 도울게.”
내가 잠자코 있자 선미가 내게 눈치를 준다.
“응, 나도 도울게.”
나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영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