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화 선배들의 비밀기지

"참나, 우린 진짜 어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by AYEON

월요일 아침부터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다. 감기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예의상 물어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남자의 휴대폰 번호를 몰랐다. 내가 카페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2주가 넘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연락처도 모르는 사이다. 나는 한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그냥 침대 위로 내던졌다. 그 남자한테 예의는 무슨, 무시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인 걸. 나는 침대 위로 내던졌던 휴대폰을 다시 찾아들고 고등학교 때의 친구인 민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왠지 집에 있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민서와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고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배가 고프긴 했지만, 점심을 함께 먹기로 해서 그냥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인 식당으로 향하며 나는 카페의 동정을 살폈다. 하지만 내가 어제 퇴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유리벽에는 블라인드가 굳게 내려져 있었다.


“다아야, 여기!”


마침 식당 입구에 막 도착한 민서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보는 민서는 여전했다. 오랜만에 봐도 늘 변함없는 것이 오래된 친구의 좋은 점이 아닐까?


“어떻게 지냈어, 민서야?”

“나야 잘 지냈지! 넌?”


민서를 입구에서 만나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는데도 잘 차려입은 여자들이 우아하게 브런치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초라한 내 모습이 창피해서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아침은 먹었어?”

“아니, 늦게 일어났거든.”

“맛있는 거 많이 먹자, 오늘!”

“응, 좋아!”


우리는 고등학생 때처럼 마주 보며 웃었다. 우리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비에 젖은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부담스러울 만큼 친절한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샌드위치와 파스타, 시원한 에이드 두 잔을 주문했다.


“마지막 여름방학이구나. 그럼 곧 졸업이네?”

“응, 그렇지. 넌 어때 일은?”

“학생 때가 좋다는 말이 괜히 있겠어?”


전문대 간호학과를 나와 사회생활 반년차에 접어든 민서는 콧등을 찌푸리며 웃었다. 민서를 가장 최근에 만난 건 올해 초였다. 그때 민서의 남자 친구는 마치 배우처럼 아주 잘생긴 한 살 연하의 남자였다. 번뜩, 그 얼굴이 생각나 물었다.


“참, 남자 친구랑은 잘 지내?”


남자 친구라는 말에 민서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한참 후에야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 그때 걔? 얼마 전에 헤어졌어,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뜻밖이었다. 민서는 그 남자 친구를 정말 좋아했고, 또 자랑스러워했었다.


“어째서?”

“나는 직장인인데, 걔는 아직 학생이고. 만날 때마다 점점 부담스러워지더라고, 물론 그쪽도 그랬겠지만. 그래서 그냥 헤어지자고 했어.”


민서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라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내 난처함을 알아차렸는지 민서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심각하게 생각할 거 없어, 난 괜찮으니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왜 점점 진심으로 사랑하는 일은 어려워지는 걸까? 더 어려운 일들은 척척 해낼 수 있게 되는데 마음을 내어주는 건 더 어려워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민서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모두 내어줬지만, 한 번도 응답받아본 적 없었던 내 마음, 그 마음은 지금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너는 새로운 소식 없어?”


민서가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내게 물었다. 새로운 소식은 물론 연애를 뜻한다.


“없어, 난 늘 똑같아.”


나는 힘없이 웃는다.


“어휴, 재미없어. 참, 선배들은 잘 지내?”


민서는 내가 아직도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마 그렇겠지, 모를 리가 없을 거야.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할까? 민서는 옛날부터 그 사람을 좋아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하곤 했었다, 그건 연예인을 동경하는 것과 같다고.


“응, 잘 지내.”

“윤후 선배는 아직 그 친구랑 사귀고?”

“그렇지, 뭐.”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마침 웃음을 가득 머금은 직원이 우리가 주문한 음식들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얼른 먹자. 배고팠지?”

“응, 맛있겠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한 잔 마신 후 오후 근무인 민서와 헤어졌다. 카페에서 나올 즈음엔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혼자가 된 나는 오랜만의 햇빛을 즐기기 위해 조금 걷기로 했다. 모처럼 활짝 갠 날씨 때문인지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그 인파 사이를 느긋하게 걸었다.


“어이, 이게 누구야?”


최근 허브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해진 아이스크림 가게 앞을 지날 때였다.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고 커다란 장비 같은 것들이 보이는 걸로 보아 무슨 촬영 같은 걸 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기웃거리다 그냥 가던 길을 가려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인사를 해왔다. 돌아보니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가 서있었다.


“재인 선배!”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와락, 질렀다. 선배가 재빨리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쉿- 소리를 냈다. 나는 급히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배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여간, 너는 여전하구나. 꼬맹이, 잘 지냈어?”

“정말 오랜만이에요, 선배! 음, 선배는 그동안 많이 변했네요? 셔츠, 잘 어울려요.”


나는 반가움에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고마워. 그래도 생각보다는 나쁘진 않지?”


선배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재인 선배는 무척이나 자유분방한 성격이라서 어떤 조직에 얽매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줄 알았다. 그 사람과 재인 선배는 오랜 친구였지만, 언젠가 한 번은 내가 어떻게 친구가 되었냐고 물어봤을 만큼 두 사람은 모든 면에서 달랐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의 선배는 무척이나 어른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네, 정말 잘 어울려요! 역시 선배는 뭘 입어도 잘 어울리네요!”


내 능청스런 대답에 선배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 힐끗,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서둘러 말했다.


“바쁘죠, 선배? 전 그만 갈게요, 다음에 꼭 봐요.”

“꼬맹아, 약속 있어? 어디 가는 중이야?”

“아니요. 좀 전에 친구랑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선배도 알죠, 제 친구 민서?”

“그럼, 알고말고. 네 유일한 친구잖아.”

“선배! 아니라고요. 제일 친한 친구이지 유일한 친구는 아니에요!”


나는 발끈했다. 그런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선배는 웃으며 다시 한번 시계를 보더니 빠르게 말했다.


“한 30분 정도만 기다릴래? 촬영은 다 끝나서 이제 뒷정리만 하면 되거든.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녁이나 같이 먹자.”


그리고는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서둘러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서, 선배-”


나는 선배를 불러보았지만, 그 말은 공중으로 흩어져버렸다. 하는 수 없이 아이스크림 가게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귓가에 조곤조곤한 노랫말이 들려온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바쁘게 걷는 젊은 여자,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들고 나란히 발맞추어 걷는 커플,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 그 뒤를 유모차를 끌고 따라가는 젊은 엄마,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 모두 행복해 보여서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선배의 말대로 촬영이 끝나서인지 구름 떼처럼 모였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잘 어울린다고 했던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린 선배가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땀을 흘려가며 바삐 물건들을 정리하고, 주변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영락없는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어쩐지 낯설어, 하고 나는 혼자 웃었다.


“많이 기다렸지?”


선배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아니요, 정말 금방 끝났네요.”

“배고프지? 뭐 먹을까?”


선배가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고쳐 매며 물었다.


“선배가 먹고 싶은 거 먹어요.”

“그럼 오늘은 몸보신 좀 해야겠다. 얼마 전이 초복이었지? 삼계탕 먹자.”

“네, 좋아요.”


역시,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웃었다. 재인 선배는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이다. 좋고 싫음이 뚜렷하지만, 결코 이기적이진 않다. 나는 재인 선배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말과 행동이 좋았다.


“일하는 건 어때요? 힘들지 않아요?”

“끔찍해. 소중한 여름방학을 이렇게 보내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래도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네요, 선배.”


선배가 내 머리를 가볍게 콩, 쥐어박는다. 선배는 늘 나를 어린애처럼 대한다.


“아까부터 자꾸 나를 무시하는데 실례야, 이래 봬도 이번 인턴 중에서 가장 촉망받는 기대주란 말이야. 그러고 보니 너도 올해 졸업이지?”

“네.”

“뭘 할지는 생각하고 있어?”

“생각은 해보려고 하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하고 싶은 게 뭔지도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아요.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삼계탕 집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선배가 내 등을 톡톡, 가볍게 두드렸다.


“너는 생각이 지나치게 많아, 그래서 정작 너 자신에 대해서는 제대로 바라보질 못해. 조금만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보면 너도 분명히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야. 물론 네가 잘할 수 있는 일도.”

“과연 그럴까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선배는 힘차게 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밀었다. 유명한 집이라서 그런지 역시 실내는 가득 찬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자, 삼계탕 먹고 힘내자. 이모, 여기 한방 삼계탕 2개요!”


선배의 말대로 그 집의 삼계탕은 정말 맛있었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선배는 뭔가 모자란 듯 계속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더니 기발한 생각이라도 떠오른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물었다.


“이렇게 헤어지긴 아쉬운데, 윤후도 부를까?”

“윤후 선배요?”

“응. 그 녀석 안 본 지도 한참 됐는데, 마침 잘 됐어.”


선배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벌써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뚜르르, 뚜르르. 신호음은 내게도 들릴 만큼 컸다. 그리고 이윽고 “응.”하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일하게 재인 선배에게만 무뚝뚝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나와, 지금 당장.”

“무슨 말이야, 갑자기?”


선배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지금 인질을 하나 붙잡고 있거든. 알지, 나 한번 마음먹으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는 거?”


인질? 뭐, 나?


“인질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말 그대로 인질이야.”

“구재인, 너 또-”

“좋아, 인질의 목소리를 들려주지.”


선배가 휴대폰을 불쑥, 내 앞으로 건넸다.


“살려주세요, 라고 해.”

“네?”

“어서.”


나는 마지못해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여보세요.”라고 말했다.


“이런, 다아니?”


그 사람은 단번에 내 목소리를 알아차린다. 나는 조그맣게 “네.”하고 대답한다. 수화기 너머로 그 사람의 한숨 소리가 들린다.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일지 눈앞에 선하다.


“나오실 수 있으세요? 아, 약속 있으시면 안 나오셔도 돼요.”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라고 선배가 입모양으로 내게 잔소리를 한다.


“미안해서 어쩌지? 오늘은 연주랑 약속이 있거든.”

“그, 그럼 어쩔 수 없죠.”

“아, 혹시 괜찮으면 연주랑 같이 가도 될까?”

“연주랑 가, 같이요? 괘, 괜찮아요, 저는.”


갑자기 선배가 휴대폰을 내 손에서 거칠게 낚아채갔다.


“됐어, 오지 마. 우리 둘이서만 재-미있게 놀 거야.”


그 사람이 뭔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선배는 “아무튼 우리는 지금부터 맥주를 마시러 갈 거야.”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이거 은근히 섭섭하네, 이 배신자.”

“네?”

“그야말로 커플 천국, 솔로 지옥이로구나.”


선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정말로 시원한 맥주나 한 잔 하자.”




선배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이었다. 강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아지랑이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나무로 된 울타리에 나란히 걸터앉아 우리는 맥주를 홀짝였다.


“정말 좋아요,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여기 오면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거 같아서 숨겨놓고 자주 오는 데야.”

“숨겨놓다니요?”

“아무나 데리고 오는 곳이 아니란 말이지. 꼬맹이, 너는 특별대우야.”


특별대우. 여자 선배들의 짓궂은 심술도, 친구들의 시샘 어린 시선도, 주변의 쑥덕거림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했었다, 학교의 유명 인사였던 두 사람이 나를 특별하게 대해줬으니까. 언젠가 내가 재인 선배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줘요? 그때 재인 선배는 조금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었다. 글쎄, 왜일까, 아마도 네가 우리의 첫사랑을 닮았기 때문일까. 나는 잘 모르지만, 선배들의 선배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었다. 선배들의 첫사랑, 그 사람을 닮은 나. 그 사람에게 고마워해야 할지, 질투를 해야 할지.


“에이, 거짓말!”


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선배는 펄쩍 뛰며 “내가 거짓말이나 할 사람처럼 보여?”라며 더 큰 소리를 친다. 웃느라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나는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선배가 “잠시만.”하더니 전화를 받는다.


“여기? 비밀기지야. 응, 오려고? 알았어.”


비밀기지, 재인 선배의 작명이 틀림없다. 나는 천천히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선배가 전화를 끊자 나는 떨리는 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물었다.


“누구예요?”

“윤후. 지금 이쪽으로 온대.”


그 사람이 이곳으로 온다, 그 사람이.


“여기가 선배들의 비밀기지예요?”

“응, 어릴 때 그때 우리가 몇 살이었더라, 아마 초등학교 때였을 거야. 둘이서 방학숙제 때문에 박물관에 다녀오다가 엄청 싸웠거든. 왜 싸웠는지는 기억도 안 나. 아무튼 둘 다 엄청 화나서 무작정 말도 없이 걷다가 보니 이 언덕 아래였어. 그리고 꼭대기까지 경주라도 하듯이 뛰어올라왔는데, 마침 해가 지더라고. 그리고 이 풍경을 보게 된 거지. 그리고 말없이 화해했어. 이 아름다운 광경이 잔뜩 화났던 마음을 풀어준 거지. 그 밤톨만 한 초딩들한테도 먹히는 풍경이라고, 이게.”


그럴 만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다시 한번 멀리 도시의 야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밀기지. 선배와 그 사람의 비밀기지. 내가 이 장소에 초대된 첫 번째 사람이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일까?


“그다음부터 우리 멋대로 여기를 비밀기지로 삼았어. 아, 너한테 처음 가르쳐주는 거니까, 너도 비밀로 해야 한다? 여기, 사유지거든. 주인이 엄청나게 무서운 할아버지래.”

“네! 비밀 꼭 지킬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원한 바람과 함께 그 사람이 도착했다.


“빨리 왔네?”

“여기에 있을 거 같아서 오던 중이었어. 다아야, 안녕!”


나는 너무 들떠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인사를 했다.


“왔어요, 선배?”


재인 선배는 차에 가서 맥주를 더 가져오겠다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방금 전까지 선배가 앉아있던 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연주는요?”

“일찍 헤어졌어. 재인이가 귀찮게 했지?”

“아뇨, 전혀요.”

“깜짝 놀랐잖니, 갑자기 재인이랑 있다고 해서. 어떻게 된 거야?”

“우연히 만났어요, 길에서.”


그 사람은 “그러니.”하고 가볍게 대꾸했다.


“와줘서 고마워요, 선배.”

“뭐야, 재인이가 정말 괴롭힌 거야?”


눈치 없는 사람. 다른 일에는 놀라울 만큼 눈치가 빠르면서도 정작 내 마음은 결코 눈치 채지 못하는 이 사람은 정말 놀란 얼굴로 내게 묻는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안 오면 정말 괴롭힐 생각이었어.”


선배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맥주를 건넸다.


“건배라도 한번 하자. 이렇게 셋이서 보는 거 정말 오랜만이잖아. 뭐라고 할까? 그래, 꼬맹아, 네가 한 마디 해봐.”


선배가 나를 가리켰다. 나는 “제가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웃으며 “응.”하고 대신 대답했다. 나는 난감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란 말인가? 선배와 그 사람은 맥주를 앞으로 내민 채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바, 반갑습니다.”


그게 뭐야, 라며 선배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우리는 캔을 부딪쳤다.


“정말 재미도 감동도 없네.”


재인 선배가 이건 말도 안 된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 사람이 “솔직히 동의해.”라며 웃었다. 마치 우리가 고등학생이던 시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각자의 손에 들린 맥주 캔만 빼면. 가끔 차가운 캔 커피를 들고 학교 옥상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었다. 재인 선배는 그때도 재미없는 아이라며 나를 놀렸고, 그 사람은 옆에서 웃기만 했다. 그때 그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곤 했었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 녀석,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예나 지금이나 재인 선배는 귀신같다. 나는 번뜩, 정신을 차린다.


“이렇게 선배들이랑 맥주를 마시고 있으니까, 왠지 정말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요.”


나는 미지근해진 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참나, 우린 진짜 어른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어.”


재인 선배가 내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어른이 된다는 게 단순히 술을 마시고, 담배를 살 수 있고, 19금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니잖아?”

“웬일로 네가 멀쩡한 소리를 다 해? 그런 의미에서 아마 우리 중에 가장 어린 사람은 바로 널 거야, 구재인.”


그 사람은 재인 선배 앞에서만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다.


“시끄러워, 애늙은이.”


재인 선배의 말에 우리는 웃음을 터트린다. 장마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밤하늘엔 별이 총총 떠올랐다. 아름다운 여름밤이었다.


“건배나 한 번 더 할까? 자, 반-갑습니다!”


재인 선배가 선창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캔을 부딪쳤다. 짠, 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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