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잖아."
사장님은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게다가 살갗도 까맣게 그을린 산적 두목 같은 사람이었다. 당연히 이런 카페의 주인은 섬세하고 우아한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 상상과 전혀 다른 인물의 등장에 조금 놀라고 말았다. 게다가 사장님은 자신의 커다란 덩치만큼 큰 코끼리 인형을 나와 남자에게 나란히 안겨주셨다. 아마 태국에서 사 온 기념품인 모양이었다.
“새로운 가족이 들어온 기념으로 파티라도 할까? 오늘 어때, 다아씨?”
직접 고른 CD를 플레이어에 넣으시며 사장님은 조금 들뜬 표정으로 물으셨다.
“파티는 무슨 파티예요? 그럴 시간에 차라리 베이커리 재계약 조건이나 제대로 살펴보세요.”
남자는 서류뭉치를 사장님 앞에 들이밀었다. 사장님은 연신 지루한 표정으로 계약 조건에 대한 남자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하신다.
“이 카페, 그냥 네가 가지지 않으련? 네게는 특별히 헐값에 넘기마. 어떠냐?”
“공짜로 주신다고 해도 싫어요, 성가시기만 해요.”
남자는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퉁명스레 대답했다. 나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멈춰있는 난파선처럼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카페가 좋았기 때문에 남자의 말에 발끈했지만, 사장님은 오히려 크게 웃으셨다.
“말은 그렇게 해도 너도 실은 이곳을 좋아하잖니? 어른의 눈은 속일 수 없는 거란다. 어서 어른이 되려무나. 현아, 그때는 네게 모두 다 주마.”
사장님의 말에 남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지금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지만, 어떤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한참 잠자코 있던 남자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어디에 가실 거예요? 우크라이나예요?”
“그래,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까지 가볼 생각이다. 어떠니, 이번에는 너도 함께 가지 않으련?”
이 멜로디! 나는 어디선가 들어본 선율에 귀를 쫑긋 세웠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찾아다니는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나온 노래였는데, 하지만 제목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싫어요. 그리고 저 쓸데없는 물건은 대체 뭐예요?”
“코끼리 인형이 어때서 그러냐? 귀엽지 않니?”
남자가 전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여전히 이 서글픈 멜로디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엄마가 같이 보자며 비디오를 빌려왔는데, 결국 엄마는 보지 못해서 혼자 본 뒤에 반납했었다. 그러니까 제목이 뭐였지?
“해바라기란 영화에 나온 곡이야. 헨리 맨시니, 사랑의 상실.”
그때 갑자기 남자가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그리고 사장님이 몹시 그리운 얼굴로 덧붙이셨다.
“우크라이나의 끝없는 해바라기 밭과 그 해바라기 밭을 헤매는 소피아 로렌이 정말 인상 깊었던 영화였지. 이게 벌써 30년도 더 지난 영화지, 아마?”
30년 전, 아직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의 영화였구나.
“서로 사랑했지만, 결국엔 함께 할 수 없었던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였지. 마침 우크라이나에 가게 되어서 틀어보았단다.”
“그보다 어서 계약서에 사인이나 해주세요. 오후까지는 꼭 보내드린다고 했어요.”
잠자코 있던 남자는 테이블 위에 올려둔 계약서를 가리키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사장님은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시며 “어디 볼까?”하고 계약서를 들여다보신다.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일까?
“그러고 넌 계속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거야?”
불똥이 나한테 튀었다. 왜 자꾸 반말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해봤자 통하지도 않을 것 같아서 일단은 선배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하자고 소심하게 마음먹었다. 내가 입을 삐죽거리며 테이블을 닦기 시작하자 사장님은 조용히 웃으시며 내게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정말 못된 녀석은 아니야. 표현하는 게 서툴 뿐이지. 그러니 잘 좀 부탁해.”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못된 녀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덧붙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그냥 멋쩍게 웃고 말았다.
하루 종일 손님은 겨우 열 명 남짓이 고작이고, 그나마도 오전에는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정성껏 쓸고 닦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나는 그 무의미한 반복이 오히려 즐겁게 느껴졌다.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사장님은 마침내 계약서에 사인을 하신 후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남자가 힐끗,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곗바늘은 11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장님께서는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시작하셨다.
“나는 점심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겠구나.”
“양로원에 가시기로 하셨어요?”
“응, 다시 출국하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여드려야지. 안 그러면 그 노인네들이 두고두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통에 살 수가 있어야지.”
“계약서는요?”
“여기 있다. 다른 힘든 일은 없니?”
나는 계속 청소를 하는 척하고 있었지만, 실은 귀를 쫑긋 세우고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남자는 “별로 없어요.”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나는 이 카페가 도대체 어떻게 유지되는지 궁금했다. 임대료와 재료비에 아르바이트생이 두 명,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윤이 남는 장사가 아니다.
“아무튼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구나. 노인네들을 점심도 못 먹고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니.”
“오늘은 약주하지 마세요, 내일 일찍 출국하시잖아요.”
“알았다, 녀석. 그럼 수고해!”
나는 사장님께 꾸벅, 허리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사장님은 약간 멋쩍으신 표정으로 내게 손을 흔들어 보이신 후 바람처럼 사라지셨다. 카페 안은 다시 정적이 흘렀다. 오래된 영화 음악은 계속 반복되어, 어느덧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햅번이 기타를 치며 부르던 노래가 벌써 세 번째 나오고 있었다.
“저기요.”
남자는 막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방해받는 것이 몹시 불쾌하다는 듯이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제 뭐할까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보였다. 남자도 별 수 없이 나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 같았다.
“그냥 앉아있어.”
남자가 늘 자신이 앉아서 책을 읽는, 카운터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순히 그가 말한 테이블에 앉았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말이 많은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주로 정적이 흐르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적당히 할 말이 생각나지도 않아도 딱히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야 할 필요를 느낄 수 없었다. 남자는 거의 말이 없는 편이라서 어떤 날은 몇 시간씩이나 정적만 흐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지 이곳에서는 그조차 편안하게 느껴졌다.
딸랑딸랑, 그 정적을 깨고 누군가가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인사를 하려고 손님을 본 순간, 이내 아쉬움은 감출 수 없는 놀라움으로 변했다.
“선배!”
“안녕? 마침 근처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들렀어. 연주한테 들었거든, 여기서 일하게 됐다고.”
그 사람이 환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내게 다가왔다. 나는 예기치 못한 그 사람의 등장에 넋이 나가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 사람은 뒤쪽에 서있던 남자에게도 밝게 인사를 건넸다. 남자는 시큰둥하긴 했지만, 어쨌든 “네.”라고 짧게나마 대답을 했다. 나한테는 대꾸조차 잘 안 하는 사람이니 그 정도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점심은 먹었니?”
“아뇨, 아직.”
“괜찮으면 같이 먹을까?”
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질문은 내게 한 것이었지만, 그 질문의 실질적인 대상은 남자였다. 하지만 남자는 의도적으로 피한 건지, 아니면 정말 그 사람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지못해 내가 나섰다.
“저기, 나가서 점심 먹고 와도 될까요?”
그제야 남자는 “마음대로 해.”라고 대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확신했다, 아까는 확실히 일부러 모른 척한 게 분명해.
“나가요, 선배.”
바짝 약이 오른 나는 얼른 앞치마를 벗어던지고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일부러 큰 소리로 “다녀올게요.”라고 말하며 카페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바깥의 공기는 후끈했지만, 습도는 높지 않아 불쾌하진 않았다. 아니, 푹푹 찌는 날씨였어도 불쾌할 리가 절대 없겠지만.
“뭐 먹으러 갈까?”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 사람과 둘이서 있을 수 있는 이 시간을 조금 더 소중하게 여기고 싶었다.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카페 앞에 세워둔 차의 조수석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 예전에 자주 갔었던 거기는 어떠니? 안 가본 지 오래됐지?”
‘우리, 예전에 자주’라는 그 사람의 말에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러니까 나와 그 사람은 몇 번인가 교외에 있는 식당에 간 적이 있었다.
“덥지 않니? 에어컨 켤까?”
“아니요, 바람이 시원해서 좋은 걸요.”
교외라고는 해도 사실 차로는 1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 곳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 풍경은 제법 한적해져 있었다. 이렇게 그 사람과 둘만 있는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 사람은 내 친구의 남자 친구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일하는 건 어때? 힘들진 않니?”
“힘들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하는 일도 별로 없는 걸요.”
사실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침과 저녁의 청소를 빼곤 하루 종일 멀뚱멀뚱 앉아있는 것뿐이었으니까. 이러고 돈을 받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한 번은 물어봤었다, 대체 왜 나를 뽑았냐고. 그러자 남자는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는 듯이 쳐다만 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사실 저는 그곳에 별로 필요한 사람이 아닌 거 같아요.”
“그런 말이 어디 있니, 네가 왜 필요 없어?”
“늘 생각하지만, 선배는 저한테 너무 관대한 경향이 있어요.”
내 말에 그 사람은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는 너를 오래 알아왔잖아. 그래서 네가 얼마나 좋은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어. 아직 적응을 못해서 그런 거니까, 곧 괜찮아질 거야.”
나는 그 사람이 속삭이듯 들려주는 말들이 좋았다. 하지만 가끔은 묻고 싶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정말.”
그 사람의 차가 먼지를 일으키며 멈춰 섰다. 식당은 그리 붐비지 않아 바로 자리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창가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잘 지내셨어요?”
세련된 슈트를 차려입은 젊은 지배인이 우리에게 다가와 아는 척을 하자 그 사람이 반가운 듯 웃으며 “안녕하세요.”하고 답했다.
“지난번에는 죄송했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나는 지배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를 힐끗 살피는 지배인의 눈길에 비로소 모든 것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이곳은 나와 그 사람만의 추억의 장소가 아니었다. 지배인은 지금 왜 그 사람과 함께 온 사람이 연주가 아닌지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동생이랑 같이 왔으니까, 특별히 더 맛있게 해 주세요.”
“아, 동생분이시군요? 당연하죠, 그럼 천천히 보시고 결정하십시오.”
동생, 그 사람으로서는 최선의 단어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긴, 여자 친구의 친구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배고프지? 뭐 먹을래?”
그 사람이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부드럽게 물어왔다.
나는 숨을 고르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조용한 내부에서는 낯익은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남자도 평소처럼 자주 앉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그의 곁에 살그머니 다가갔다.
“다녀왔어요.”
남자는 책에서 눈도 떼지 않고 “응.”하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여기 따뜻한 물 한잔만 주겠소? 너무 뜨겁진 않게.”
창가의 테이블에 다정한 노부부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려고 하자 남자가 일어나 나를 막아섰다. 마치 내게 화가 난 사람 같았다. 겨우 5분쯤 늦었다고,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인가?
“됐어, 내가 갈게.”
남자는 따뜻한 물을 유리컵에 담아 할아버지께 가져다 드렸다. 할아버지는 물을 한 모금 마셔보시더니 할머니 앞으로 밀어놓으셨다. 할머니는 행복하게 웃으시며 약봉지를 꺼내 알약들을 입안에 털어 넣으시고 그 물을 마시셨다. 할아버지는 그런 당신의 아내를 기특하다는 듯 바라보셨다.
“내가 해도 되는데….”
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남자는 못마땅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멋쩍어진 나는 괜히 책을 살피는 척 시선을 옮겼다. 책장에는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었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책들을 쓸어보았다. 손끝에 걸리는 책이 한 권 있어 책을 꺼내어 보니 ‘폭풍의 언덕‘이었다. 찬찬히 책장을 넘겨보니 예전에 잔뜩 화를 내며 읽었던 기억이 났다.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열정적이다 못해 미친 사랑. 나는 그들의 이기적인 사랑에 화가 났었던 것 같다, 가여운 에드거는 어떡하란 말인가, 하고. 그래, 어쩌면 나는 끝내 캐시의 사랑을 얻지 못한 에드거에게 지극히도 주관적인 감정이입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과연 나는 에드거를 대신해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누군가의 불행을 딛고 피어나는 사랑을 처음부터 원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사랑은 내 친구의 사랑이 끝나지 않는 한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야, 안 들려?”
갑작스런 그의 부름에 나는 깜짝 놀라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책을 주워 책꽂이에 꽂았다.
“무슨 일이에요?”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알아?”
그가 살짝 비켜서자 처음 보는, 아마도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서있었다. 그 낯선 남자는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다는 듯이 환하게 웃어 보였지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그저 어색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김영호라고 해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남자는 내게 오른손까지 내밀며 정중하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얼떨결에 악수까지 했지만, 여전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남자는 뭐야?
“사장님을 담당하는 편집자.”
남자가 뒤늦게 설명을 덧붙였다.
“현이랑 일하는 게 쉽지는 않죠? 이 녀석이 워낙 무뚝뚝해야 말이죠. 이 녀석이 괴롭히면 말해요, 제가 단단히 혼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그는 신뢰가 가득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특히나 적어도 한 인물에 대한 생각은 일치하는 것 같았고, 어색한 분위기를 아주 능숙하게 풀어가는 노련미도 멋있었다. 괜히 어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 현아, 이건 전에 네가 부탁했던 책.”
“고마워요, 한국에 없으면 외국 헌책방이라도 뒤지러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형 덕분에 비행기 값은 굳었네요.”
나는 그가 빈정거리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지 구별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낡은 책 한 권을 받아 들고는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조심스레 살피고 있었다.
“네 생일 선물이야, 조금 이르지만. 다음 주였지, 네 생일?”
생일, 그 단어에 그가 잠깐 인상을 쓰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하긴, 스무 살이 넘고부터는 나도 결코 생일이 반갑지만, 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공식적으로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기 때문에 생일을 싫어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반응은 그런 종류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좀 더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라고 할까. 뭐,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만 가봐야겠다. 그럼 다음에 봐요, 다아씨.”
“안녕히 가세요.”
“선물 고마워요, 형.”
시끌벅적한 인사를 끝으로 팀장님이 나가시고 남자는 선물로 받은 낡은 책의 표지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나는 그 책의 제목을 보려고 몸을 조금 기울였다, ‘William Shakespeare’.
“셰익스피어?”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고 말았다. 그가 동작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놀란 나는 손으로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내 목소리는 그의 귀에 닿아버린 후였다.
“알아?”
틀림없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나긋하게 물었다.
“그, 그럼요! 셰익스피어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 정도는 교양이지. 그리고 수업시간에 배운 적도 있는 걸요, 로미오와 줄리엣이랑 햄릿.”
“수업시간?”
“전공과목이었거든요, 셰익스피어.”
“전공?”
“영문학이에요, 미리 말하지만 영어는 못해요.”
그는 조그맣게 웃으며 “너랑 안 어울리네.”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웃음은 아니었기에 나도 그냥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대꾸하며 웃어버렸다. 그러자 그가 책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럽게 넘기며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비극이 좋아, 아주 사람의 본성을 처절하게 망가뜨리잖아? 더럽고 탐욕스럽고 악하고.”
“그런 거 좋아해요?”
“지극히도 사실적이잖아.”
“혹시 성악설 지지자예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다?”
“그럼 너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하다고 믿는 사람인가?”
“설마요!”
우리는 동시에 풋, 하고 웃어버렸다.
“동화처럼 그리고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는 너무 현실성이 떨어지잖아. 실제로 대부분의 우리 인생은 해피엔딩이 아닌데.”
남자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그때 처음 해보았다.
너와 내가 있었던, 우리들의 그해 여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