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 너와 나 사이, 우산

멀리서 내가 준 우산을 쓰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가 보였다.

by AYEON

“미안해요, 네, 그럼 내일 봐요.”


나는 휴대폰을 등 뒤로 던지고 다시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오늘은 수진이의 생일이었다. 방학이 3주나 지나갔고 어느덧 7월이 시작되었다.


“아직도 이러고 있어? 약속 있다며?”


엄마가 문을 벌컥, 열고 여전히 침대 위에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나를 나무란다. 그리고 오늘은 방학이 시작된 후 처음으로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다. 나는 꼼지락거리며 겨우 침대를 벗어난다.


“일찍 들어올 거니?”

“아마.”


내가 화장실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걸 보고서야 엄마는 볼일이 있다며 집을 나섰다. 위이잉, 하고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멍청하게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았다. 펌이 다 풀려 부스스한 머리, 시커멓게 내려온 다크써클, 두 볼 여기저기에 불긋불긋하게 올라온 뾰루지, 방학이 시작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얼굴에도 몸에도 살이 통통하게 붙어있었다.


“나가기 싫다, 정말.”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주섬주섬 옷을 벗고 샤워기의 물을 틀었다. 오늘 아침에서야 갑작스럽게 생일 파티에 대해 통보받은 나는 카페로 전화를 걸었다.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못 간다고 말하자 그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심 안 된다고 말해주길 바랐는데, 역시 그럴 일은 없었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들뜨기는커녕 차라리 그 남자랑 같이 카페에 있는 편이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뱃속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는 듯한, 그 팽팽한 긴장감은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물줄기도 차마 씻어내지 못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나는 선풍기 앞에 앉아 머리를 말렸다. 옷장 문을 열고 한참을 입을 만한 옷이 있나 들여다보았지만, 후줄근한 티셔츠들만 가득할 뿐이었다. 겨우 그나마 말끔한 하얀 티셔츠를 골라내 무릎 위로 조금 올라오는 청치마와 함께 입고, 부스스하게 말려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대충 올려 묶었다. 선크림을 바르고 파우치를 뒤져 빨간 립글로스를 찾아내 허연 입술에 슥, 발랐다. 매일 들고 다니는 때가 탄 낡은 에코백에서 지갑을 꺼내 작은 핸드백에 넣었다. 작년 여름에 사놓고 몇 번 신지 않은 샌들을 꺼내 신었다. 현관 옆 거울에 비친 나는 아까 욕실 거울 속의 나보다는 확실히 나아 보였지만, 그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나는 여전히 초라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하늘이 흐리지만, 일기예보에서는 그냥 흐리기만 하고 비가 오지는 않을 거라고 했다. 일기예보를 믿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비가 오지 않으면 우산은 짐이 될 테니 그냥 나가기로 했다.


“덥다.”


차라리 햇빛이 쨍쨍한 날이라면 이렇게 습하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길 건너로 카페의 귀퉁이가 보였다. 내가 없어도 저곳은 언제나처럼 평범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학교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나른한 노랫소리에 깜빡, 깜빡 눈꺼풀이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한다. 딩동, 이번 정류장은- 하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떠보니 약속 장소인 학교 정문 앞이었다.


“다아야!”


내리는 사람들의 꼬리에 붙어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리자 연주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주는 하얀 블라우스에 짧은 청치마를 입고 있었다. 치마 아래로 가늘고 흰 다리가 시원하게 쭉 뻗어있었다. 연주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뒤돌아볼 만큼 예뻤다. 내가 멍청하게 가만히 서있자 연주가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다아야!”


그녀가 내 옆에 서는 순간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집중되는 것 같았다. 나는 당혹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부끄러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필이면 비슷한 옷을 입고 오다니!


“다, 다른 애들은?”


목소리가 형편없었다. 나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며 연주가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왔다. 하지만 나는 우리를 둘러싼 시선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아직. 다들 조금 늦을 거래.”

“어디 들어가지 않을래? 오늘 많이 덥네.”

“그럴까?”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그들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었다, 연주와 나를 비교하는 노골적인 눈빛. 연주는 절대 모를,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래서 견딜 수 없었다.


“선미는 도착했다는데, 이리로 오라고 할까?”

“응.”


나는 에어컨 바람이 가장 세게 닿는 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그 눈빛들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차가운 커피를 단숨에 반쯤 들이켰다. 이렇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마는 나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연주야!”


카페의 자동문이 지잉-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후끈한 공기와 함께 선미가 들어왔다. 금방 우리를 발견하고는 연주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왔다.


“다아, 오랜만! 그런데 안색이 별로네?”

“아, 그래? 너무 더워서 그런가 봐.”

“정말 덥지, 오늘? 그런데 넌 어떻게 그동안 연락 한번 안 하냐?”


그러는 너는 왜 안 했냐는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유치하게 말꼬리를 잡는 것 같아서 그만뒀다. 연주가 선물은 샀냐고 묻자 선미가 작은 종이 가방을 흔들어 보였다. 유명 액세서리 브랜드의 이름이 적힌 종이 가방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조금씩 돈 모아서 선물 사기로 했어.”


내가 뚫어져라 종이 가방을 보고 있는 걸 깨달았는지 연주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 설명에 기분이 더 상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난 그런 말 못 들었는데….”


선미는 내 말에는 전혀 관심 없다는 듯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앗, 깜빡했어!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연주가 몹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수진이 도착했다는데? 나가자.”


선미가 휴대폰을 가방 안에 집어던지며 말했다. 수진이는 눅눅한 공기가 무겁게 짓누르는 버스 정류장 앞에 서있었다. 연주와 선미는 살갑게 인사를 건네며 수진이에게 다가갔다.


“수진아, 생일 축하해!”

“이제 너도 별 수 없는 늙은이야, 알지?”


선미와 수진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한 친구였고, 연주는 수진이와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어서 대학에 오기 전부터 서로 얼굴은 알고 있었다고 했다. 저마다 오늘의 주인공인 수진이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지만, 나는 적당한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결국 인사를 하지 못했다.


우리가 특별한 날이면 곧잘 가는 식당에서도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순전히 지난 3주 동안 연락이 끊어진 탓이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완전한 타인처럼 느껴졌다. 있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참, 다아야, 아르바이트는 어때?”


항상 그렇듯 연주가 잊혀있던 내 존재를 상기시켜주었다. 내게 대화의 화살이 날아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나는 입에 가득 물고 있던 음식을 허겁지겁 삼키고 짧게 대답했다, “그럭저럭 괜찮아.”라고.


“무슨 아르바이트야?”

“그냥 카페, 우리 동네에 있는.”

“전에 오빠랑 한번 가봤었는데, 조용하고 좋더라.”

“손님이 별로 없거든.”

“우리 다음에는 거기서 만날까?”

“응, 언제 한번 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오지 않을 텐데, 뭐.


“참, 같이 일하는 사람은 어때? 괜찮아?”


연주가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남자가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으면 사람 좋은 연주가 이렇게나 싫어할까?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고 어깨를 으쓱했다.


“여전히 밥맛이지만, 생각만큼 끔찍하진 않아.”


뭐, 이제는 면역이 되어서 그런지 일일이 발끈하지도 않게 되었다고 하면 되려나. 그래, 정말로 생각만큼 끔찍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나는 그곳으로 가고 싶으니까.


“그런데 수진아, 머리 잘랐구나? 잘 어울린다.”


화제를 바꾸고 싶어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하자마자 후회스러웠다. 갑자기 어두워진 수진이의 얼굴을 보며 내가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기분 전환 좀 하려고 잘랐는데 괜찮아?”


수진이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기억나, 내가 좋아하던 애?”


우리가 신입생이었을 때 수진이는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우리에게 고백했었다. “실은 오랫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라고 수줍게. 하지만 내가 알기로 수진이에게는 지금껏 남자 친구가 한 번도 없었다.


“얼마 전에 고백했었는데, 잘 안 됐어. 진작 자를걸 그랬어. 다들 어려 보인대, 정말 그래?”


식사 내내 우리는 웃고 떠들었지만, 그것은 가식적이고 어색한 연기였다. 수진이는 애써 더 밝은 척을 했고, 다른 아이들은 그런 수진이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나는 포크로 음식을 난도질해놓았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점심 식사였다. 수진이가 저녁에는 가족들과 외식을 한다기에 다들 일찍 헤어지기로 했다.


“다아는 연락 좀 해.”


선미는 끝까지 내게 연락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나는 짜증이 치미는 것을 꾹 참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수진이와 나는 같은 방향에서 버스를 타기 위해 나란히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까는 미안해.”

“아니야,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정말 괜찮다니까.”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서서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있잖아, 그 애가 뭐라고 했어?”


나는 천박한 호기심과 어색한 침묵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 애? 아아, 그냥 미안하다고. 아직 다시 누군가를 좋아할 준비가 안 되었다는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그냥 알았다고 하고 말았지.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말이야, 그렇게라도 거절당하고 나니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편안해진 거 있지?”


그렇게 말하는 수진이의 표정은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였다. 나도 편안해질 수 있을까,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모두 말하고 나면? 오랫동안 좋아했다고 사실은 당신이 연주와 헤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어떻게 그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어, 나는 항상 당신의 불행을 바라고 있었다고!


“정말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되겠지.”


수진이는 힘없이 웃으며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도 곧바로 따라온 버스에 올라탔다. 아직 시간은 오후 4시가 채 되지 않았다. 카페에 들를까? 엉킨 이어폰 줄을 풀고 있는데 토독토독, 빗방울이 창가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몹시 후텁지근하고 흐리더니 결국 비가 쏟아지고 마는 모양이다. 집에 두고 온 우산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어폰 줄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꼬이고 꼬여서. 나는 짜증이 나서 그냥 가방에 다시 그것들을 구겨 넣었다. 잔뜩 열을 받아 뜨거웠던 대지를 차갑게 식히는 비, 특유의 비 냄새가 아스팔트 위로 솟아오른다.


기사 아저씨가 틀어놓은 트로트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나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비를 덜 맞으려고 달리는 학생, 어디서 구했는지 신문지를 덮어쓰고 뛰는 양복 입은 아저씨, 포기하고 천천히 비를 즐기는 젊은 남자, 어느새 우비를 입고 있는 노점상 할머니, 그 와중에도 유유히 우산을 쓰고 걷는 중년 여인, 신이 난 길거리 우산 장수에게서 우산을 사는 아가씨도 보인다.


버스에서 내리자 데자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페를 처음 발견했던, 그리고 빗속에서 그 남자를 처음 보았던 날도 나는 이렇게 우산 없이 버스 정류장에 서있었다. 이렇게 비를 맞은 채 카페로 간다면 남자는 또 무시무시한 얼굴로 화를 낼까? 버스 정류장에 선 채로 나는 눈을 감았다. 쏴아아아- 비가 쏟아지는 소리, 부우웅- 자동차가 지나가는 소리, 첨벙첨벙- 누군가가 빗속을 걷는 소리.


“야, 너 또 우산 없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깜짝 놀랐잖아요! 어디 다녀오는 길이에요?”

“너는 무슨 여자애가 걸핏하면 우산도 없이 다녀?”


남자가 불쑥 내게 우산을 내밀었다. 굵은 빗방울이 그의 어깨로, 그의 머리로 떨어진다. 조금씩 짙은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그의 옷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벌써 다 젖었고.”


나는 이미 짙은 푸른빛으로 변해버린 청치마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써.”

“괜찮아요, 정말.”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일단 카페로 가자. 손님들이 두고 간 우산이 몇 개 있을 거야. 고집도 적당히 부려, 정말 짜증 나니까.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어쩌겠다는 거야.”


결국 우리는 적정한 선에서 타협을 했다. 남자가 우산을 들고, 나는 비에 젖지 않도록 가방을 품에 안았다. 횡단보도를 반쯤 건넜을 때, 그가 그만 가라며 우산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쓰고 가.”


나는 엉겁결에 우산을 받아 들었다. 빗속을 달려가는 그의 왼쪽 어깨가 오른쪽 어깨보다 더 젖어있었다.


“고, 고마워요!”


나는 천천히 집으로 가기 위해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가 준 우산을 쓰고. 어느새 나는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던 비는 아침이 되니 그쳤지만, 구름은 손에 잡힐 듯 낮게 깔려있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카페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비가 온 뒤라서 인지 어제처럼 흐리지만, 무덥지는 않았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한 손에는 작은 종이 가방을 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나는 씩씩하게 인사를 하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그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있지는 않았다. 그는 커다란 거울 앞을 왔다 갔다 거리다가 나를 슬쩍 쳐다보곤 다시 거울로 시선을 옮겼다.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으니 사람이 전혀 달라 보였다. 남자는 옷발이라더니 새삼 그가 제법 잘생긴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백하건대, 지금껏 내 머릿속의 그는 항상 고약한 표정을 짓고 있는 뿔이 두 개 달린 악마였다.


“오늘은, 음, 뭔가 이상하네요?”


나는 머쓱하게 이 낯선 상황에 대해 물었다.


“오늘은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 안 했던가?”

“안 했어요.”


나는 조금 짜증이 치밀었다. 남자는 셔츠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우산과 작은 종이 가방을 쥐어주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가죠, 뭐.”


새침하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그래, 사람이라면 사과를 해야지! 나는 그의 사과를 기대하며 돌아섰다.


“우산은 알겠는데, 이건 뭐지?”


그는 내가 쥐어준 종이 가방을 흔들며 물었다. 나는 기분이 상했지만, 애써 화를 억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쪽 생일이라면서요, 이번 주.”


일단 선물을 사두긴 했는데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할지도 모르겠고, 선물을 줘도 되는 사이인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왜 선물을 주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서 며칠 동안 서랍 속에 묵혀둔 터였다. 하지만 어제 그의 젖은 어깨를 떠올리며 기분 좋게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선 참이었다.


“아, 그럼 이건 생일 선물이라는 건가?”

“내키는 대로 생각해요. 그리고 오늘은 이왕 출근했으니까, 일하고 갈게요.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그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마지못한 듯 “마음대로 해.”라고 짧게 말했다.


“아, 혹시 생일이 오늘이에요?”

“생일은 맞는데, 그래서는 아니고.”


뭔가 더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거기서 그의 대답은 끝이었다. 그는 내가 준 종이 가방을 열어보지도 않고 가방 옆에 휙, 던져둔다. 기분이 상했지만, 기분이 상했다고 말하는 건 왠지 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인 것 같아 참아보기로 했다.


“그럼 일단 열쇠는 두고 갈게.”


그는 테이블 위에 열쇠 하나를 올려둔다.


“하지만 집에 가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가도 상관없어.”


나는 열쇠를 얼른 주머니에 챙겨 넣고 혀를 쏙, 내밀었다, 물론 그는 보지 못했지만. 그는 거울을 다시 들여다보더니 셔츠 단추를 단정하게 잠갔다. 하지만 걷어 올린 소매는 다시 내리지 않았다.


“저기-”


그가 가방을 메고 카페 문을 나서려는 때, 나는 그를 불렀다.


“생일 축하해요.”


그가 내 말에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신나는 생일 파티를 즐기기 위해 나가는 것은 아님을 어렴풋하게 느꼈던 것 같다. 거울 앞에서 들뜬 아이처럼 한참 동안 멋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런 그가 결코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치 처음 결혼할 여자의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는 남자처럼 조금 긴장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설마 정말 부모님께 인사라도 드리러 가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저렇게 고약한 남자가 대체 어떤 여자와 결혼을 한다는 건가? 아니, 그보다 아직 어린데 벌써 결혼을 할 리가 없잖아? 그렇다고 속도위반을 할 타입은 아닌 것 같고. 아, 어쩌면 저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사실은-


“별 생각을 다 하네, 이제는.”


나는 한숨을 쉬며 높은 스툴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조그만 선인장 화분 세 개가 나란히 놓여있는 바에 엎드렸다. 낮게 틀어놓은 에어컨 소리만이 위이잉- 하고 소음을 만들어낸다. 눈앞의 광경들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진다.


“우리, 구면이지?”


나는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하지만 카페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 걸까?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 사람은 나의 고등학교 선배였다. 내가 갓 입학했을 때 그는 3학년이었다. 학교 안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선생님들에게도 그 사람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 그가 전교생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학생회장에 선출되었을 때도 모두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했었다. 하교 시간이면 다른 학교 여학생들이 그 사람을 보려고 몰려오기도 했었다.


나는 음악을 틀기 위해 일어났다. 바 뒤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벽장에는 음반들이 빼곡하게 꽂혀있었다. 그 수많은 음반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기는 일은 결코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그냥 오디오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아마 그가 넣어두었을 CD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틀즈였다. 유명한 노래들만 골라놓은 음반이었는지 익숙한 노래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음, 오늘은 비틀즈인가? 좋은 밴드였지.”


불쑥 끼어든 나이 든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CD 케이스를 떨어뜨렸다. 내 반응에 놀라셨는지 할아버지께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셨다. 자주 오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문 앞에 서계셨다.


“이런, 내가 아가씨를 놀라게 했나 보구려.”

“아, 아니에요. 어서 오세요!”


할아버지께서 할머니 손을 꼭 잡으신 채로 늘 앉으시는 창가 자리로 가셨다. 할머니를 위해 의자까지 빼주시고 할머니께서 자리에 앉으신 후에야 반대편으로 가서 앉으셨다. 나는 유리컵에 시원한 물 두 잔을 담아 가져다 드렸다.


“주문해야지요?”


할아버지의 물음에 할머니께서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시며 대답하셨다.


“나는 커피 한 잔이면 되어요.”

“그럼 냉커피 두 잔만 주시겠소?”

“네,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나는 그에게 배운 대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할머니께서 기침을 콜록콜록하셨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걱정스럽게 “괜찮아요?”라고 물어보시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한 후 재빨리 커피 잔을 내려놓고 그 옆에 놓여있던 생강차가 든 병을 꺼내 들었다. 포트에 뜨거운 물을 끓이고 정성 들여 생강차를 저었다.


“저, 죄송해요. 하지만 차가운 커피는 아무래도 기침에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제 마음대로 생강차를 끓여봤어요. 차 값은 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나는 차를 내어드리며 최대한 정중하게 말씀드리려고 노력했다. 내 말에 할아버지는 소리 내어 웃으셨고, 할머니께서는 조그맣게 고맙다고 속삭여주셨다.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나는 허리를 숙여 꾸벅 인사를 하고 바로 돌아와 스툴에 다시 걸터앉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는 내가 드린 생강차를 기분 좋게 마시시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셨다. 두 분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와 저렇게 다정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까?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제대로 남자 친구 한 번 사귄 적 없는 내게 그 사람 외에는 달리 떠올릴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미래는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꿈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편두통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손님이 없었다, 항상 그렇듯이. 오후 4시가 조금 넘었을 때 나는 결국 카페 문을 닫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잔뜩 흐린 하늘이 한밤중처럼 어두워, 이 넓은 공간에 혼자 있으려니 괜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매일 아침마다 청소를 하는 데다 오늘은 손님도 그 노부부가 전부였기 때문에 마감은 금방 끝났다. 마지막으로 블라인드를 내리고 에어컨을 껐다. 전등을 끄고 열쇠로 문을 잠그고 시계를 보니 4시 36분이었다. 결국 시간은 채우지 못했다. 오후가 되자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또 한바탕 쏟아질 것 같은 날씨 때문인지 거리는 한산했다.


내가 집에 들어서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열어두고 갔던 베란다 문을 닫고 눅눅한 공기가 싫어 에어컨을 켰다. 집 안은 깜깜했다. 엄마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우산은 가지고 갔을까? 뭐, 괜한 걱정이겠지만.


재빨리 샤워를 하고 나온 후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다. 평소처럼 엄마가 1인분 분량으로 담아두는 볶음밥 재료들과 친절하게 이름표까지 붙어있는 반찬통들이 나란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컨테이너 하나를 꺼내 볶기 시작했다. 지글지글, 먹음직스런 소리를 내며 채소들이 익어간다. 밥까지 넣고 노릇하게 볶아 접시에 담아내니 절로 배가 고파졌다.


“무슨 비가 이렇게 정신없이 쏟아진다니?”


내가 막 볶음밥을 먹으려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엄마가 우산을 탁탁, 털며 들어섰다. 역시 엄마는 우산을 가지고 갔었다. 엄마는 나를 힐끗 보며 “일찍 왔네, 이제 저녁 먹는 거야?”라고 성의 없이 물어보고는 곧장 우산을 펼쳐놓으러 베란다로 갔다.


“엄마, 저녁은?”

“먹었어. 우산 안 가져갔었어?”

“응. 그런데 비오기 전에 들어왔어.”

“다행이네. 그런데 어쩐담, 저 사람?”


엄마가 바깥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엄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엄마가 보고 있는 아래쪽을 내다보았다. 헉! 순간 나는 정말로 헉, 하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우산도 안 쓰고 계속 저러고 있네. 취한 건가? 아직 시간도 별로 안 늦었는데.”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거실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있었다.


“밥 먹다 말고 뭐하니?”

“엄마, 나 잠깐만 나갔다 올게.”

“뭐? 갑자기 왜?”

“꼭 사야 하는 게 있었는데 들어올 때 깜빡했어.”

“비가 이렇게나 오는데? 내일 사면 안 되니?”

“안 돼, 오늘 꼭 필요해.”


나는 엄마가 방금 펼쳐놓은 우산을 집어 들고 엄마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엄마와 내가 본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나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지만, 그래도 만나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1층에 있던 엘리베이터는 한참 동안 올라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다. 아래층 할머니를 마주쳤는데도 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말이 많으신 분이라 분명히 조만간 엄마에게 내가 버릇이 없다는 이야기가 흘러들어 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뭐 하는 거예요, 여기서?”


그리고 나는 곧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비를 맞고 있는 사람 앞에 섰다. 오렌지색 가로등 아래서도 입술이 파랗게 보이는 걸 보니 이러고 있은 지 오래된 모양이었다.


“왜, 왜 이러고 있어요?”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설마 이 사람, 울고 있는 건가? 나는 당황스러워 할말을 잊고 말았다.


“-줘.”

“네?”

“열쇠 돌려달라고.”


열쇠? 아, 오늘 아침에 그가 내게 주고 간 카페 열쇠를 말하는 건가?


“혹시 그거 때문에 여기 온 거예요? 나한테 열쇠 받으러?”

“시끄러, 열쇠나 줘!”

“지금 없어요, 집에 있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가지고 올게요.”


그가 버럭 화를 내는 바람에 심술이 났지만, 그래도 우리 집까지 열쇠를 받으러 찾아온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순순히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뭐 사러 간다더니 왜 빈손이야?”


엄마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레 대답했다.


“돈을 안 가지고 나갔더라고.”

“넌 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물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거기 엄마가 방금 닦았단 말이야.”

“응, 응.”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내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뒤졌다. 나는 열쇠가 손에 닿자 그것을 꺼내 얼른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갔다 올게.”


비는 아까보다 더 거세게 오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에게 다가간 나는 말없이 열쇠를 내밀었다. 그러자 그가 차가운 손으로 열쇠를 낚아채갔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섰다.


“저기-”


내게 인사도 없이 가려는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내가 쓰고 있던 우산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나를 한번 보더니 다시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나는 달려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거 쓰고 가요, 이걸로 어제 빚은 갚은 거예요.”


나는 그의 손에 억지로 우산을 쥐어주고 집을 향해 달렸다. 멀리서 내가 준 우산을 쓰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그가 보였다. 빗방울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나저나 엄마한테 또 잔소리를 듣겠군,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돌아섰다.




pexels-miftah-rafli-hidayat-4007154.jpg ⓒ Pixels, Miftah Raf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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