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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라의앨 Jan 03. 2021

지긋지긋하던 서울이 아름답게 느껴지던 순간

암벽에서의 첫 만남 그리고 두 번의 식사




때는 2014년 가을, 통대생활에 허덕이며 첫 학기와 여름방학을 보내고 2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학기 중이었는데 일주일 정도 미니 방학이 있었다. 역시나 스터디로 하루하루를 채워가고 있는데 오랜만에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앨리스~ 공부하느라 많이 바쁘지?
우리 주말에 클라이밍 오픈데이 하는데 혹시 시간 되면 올래?


내가 입시를 결단하고 준비하는 과정도 모두 알고 있던 지인이라 힘들게 통대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여름방학 때 소개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소개팅 건으로 이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었다. 하지만 소개팅할 정신도 여유도 없어 정중히 거절했었다. 마침 그 주는 평소보다 여유가 있었고 나도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좋아하고 하니 스트레스도 풀 겸 가보기로 했다. 어차피 원데이 클래스처럼 하루하고 끝나는 거니 부담도 없었다.


운동복 차림에 모자를 눌러쓰고 약속된 장소로 갔다. 나를 포함해 열명 정도의 참가자가 있었고 지인을 포함해 주최 측에서 4명이 함께했다. 경기도 의왕에서 진행된 실외 암벽등반(클라이밍) 오픈데이. 나도 처음 해보는 거라 기대가 됐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행자는 다들 오늘  자리에  어떤 기대감으로 왔는지 물었고 각자 소개와 함께 간단히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주최 측에서 기본적인 안전사항과 수칙 등을 설명하고 본격적인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나를 포한한 대부분 클라이밍을 처음 해보는 거라 어설프고 서툴렀다. 내 차례가 되어 암벽 앞에 섰는데 실제로는 10미터 조금 넘는 높이의 암벽이 왜 그리 높아 보이던지... 암벽을 손으로 만져보고 살펴보고 손과 발을 옮겨가며 올라가야 하는데 시작부터 콱 막혔다.


클라이밍을 해본 적이 없으니 뭘 어떻게 하는지 손과 팔, 발과 다리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도움과 참가자들의 응원으로 한 손 한 발 내디뎌가며 한참을 올라간 것 같았다. 그런데 고개를 들어 보니 아직 한참 남아있었다. 그리고 손과 팔에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그만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아래에서 빌레이(안전장치로 줄을 잡아주는 것) 해주던 담당자가 외쳤다.


힘들면 쉬어가도 돼요!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되면 다시 해봐요!


그래서 잠깐 멈추었다. 아래에서 잡아주는 줄에 의지해서 그냥 몸을 축 늘어뜨리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너무 오래 쉬는 건가 싶어 눈치가 보이기도 했지만 이 상태로는 팔도 다리도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오르고 싶어 졌다. 끝까지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해보겠다고 했다. 나를 지켜보던 다른 참가자들도 힘내라며 목청껏 응원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한 손 한 손 다시 내디뎠다. 어딜 잡고 어디에 발을 딛고 일어서야 할지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처음보다 한 결 수월하게 오르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하나씩 하다 보니 어느새 꼭대기에 도착. 완등이다! 종을 울리고 신나게 줄을 타고 내려왔다. 땅에 발이 닿자 사람들은 내 안전모를 치며 기쁨으로 축하해주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통번역대학원에서의 두 번째 학기를 보내며 내 부족함, 내 모자람만 드러나는 것 같고 실력은 늘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하고 지칠 때도 있었고 쉬고 싶어도 그냥 계속 달려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는데 이 날 클라이밍을 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스스로 좀 자유해졌다고나 할까. 그때를 떠올리니 지금도 코 끝이 찡해진다. 그만큼 내게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그 날 오픈데이 이후 난 온몸에 근육통이 와서 혼이 났지만 그때 내게 필요했던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값진 시간이었는데 사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주최 측 슈퍼바이저로 왔던 사람인데 이 날 전체적인 소개와 진행을 맡았고 내가 클라이밍 할 때 빌레이를 해주었던, 내 줄을 잡아주었던 사람이다. (알고 보니 내 지인이 전에 나와 연결해주고자 했던 소개팅남이었던 것! 지인과 이 사람은 당시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연결은 해주고 싶은데 소개팅은 안 되겠다 싶으니 물밑작업을 해두고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거참... 고맙게 허허)


딱히 연락처를 주고받지도 않았고 따로 이야기를 나눈 것도 아니었지만 그 날 내가 본 그 사람은 자신감 넘치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고 진심을 다해 일하는 것이 느껴졌다. 기회가 된다면 이야기를 더 나누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 날 저녁, 그 사람이 SNS에서 친구 요청을 했다. 난 (일부러) 시간을 좀 두고 수락했고 다음날엔가 쪽지가 왔다. 쿵쾅거리는 심장에 나도 놀라 집 앞 천변을 한 바탕 뛰고 와서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답장을 보냈다.


당시 주고받았던 처음이자 마지막 SNS 메시지


그렇게 연락을 몇 번 주고받다가 처음 따로 만나 밥을 먹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스터디를 하고 과제를 하다가 저녁 먹으러 나간 거라 난 청바지에 스니커즈 차림이었다. 교대역 1번 출구에서 만나 한 초밥집에서 저녁을 먹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좋아 좀 걷기로 했다. 커피 한 잔씩 테이크 아웃해서 예술의 전당까지 걸었고 음악분수 앞 잔디 위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 살아온 이야기, 지금 하는 일과 공부를 어떻게 하게 되었고 왜 하는지,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고 각자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평소에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등 아주 굵직하고 무거운 이야기부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잘은 몰라도 삶을 대하는 태도가 진지해 보였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 같진 않았다. 꿈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좋은 말을 듣기 좋게 꾸며내지 않는 진솔한 사람이라는 것도 느껴졌다.


다음날엔 카페에서 스터디 자료를 준비하는데 어느 카페냐며 연락이 왔다. 자기도 카페 가서 일해야 하는데 그 카페는 피해서 가려고 한다며. 그래 놓고 굳이 내가 있는 카페로 와서 옆 테이블에 앉아 몇 시간 동안 그 사람은 일을 하고 나는 공부를 했다. 그리고 그날도 저녁을 같이 먹고 강남대로를 걸었다.


강남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에요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그가 말했다. 사람 많고 복잡한 걸 정말 싫어하는데 사무실이 강남 한복판이라 늘 여길 벗어날 생각만 했다고. 그런데 이렇게 같이 있으니 강남이 꽤 괜찮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소름 끼쳤다. 대학생이 되면서 혼자 상경 후 자취 8년 차였던 나도 서울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면서 사람 많고 차 많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드는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전화통화를 하며 우리는 조심스레 교제를 시작하기로 했다. 클라이밍 했던 날 이후 세 번째 만난 날이었다. (부끄부끄)




여담이지만 지금도 가끔 우리가 소개팅으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한다. 내가 소개팅을 대단히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안 해본 사람도 아니다.


소개팅은 뭔가 부담스러웠다. 주선자를 생각해서라도 신경 써서 꾸미고 나가야 한다는 압박감도 싫었다. 어색함이 싫어 애써 대화를 이어가는 것도 불편했다. 자기 조건과 스펙 자랑하기 바쁜 사람도 있었고 결혼이 급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게 눈에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당장 외로워서 누구라도 만나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연애도 결혼도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 소개팅도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 만나보고 아니다 싶으면 말았다. 그랬던 내가, 이 사람을 소개팅으로 만났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그는 소개팅으로 만났어도 서로를 알아봤을 거라고 하는데 글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누군가에게는 소개팅이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될 수도 있지만 나한테 맞는 방법은 아니었다. 내가 가장 나답고 또 자연스러울 수 있는 자리에서 상대를 만날 수 있어서 새삼 감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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