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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라의앨 Aug 16. 2020

애증(愛憎)하는 두 언어

영어-한국어와의 잔인하고도 애틋한 동행 이야기

이건 영어로 뭐야?

9살 때 가장 많이, 자주 들었던, 듣기 싫은 말이었다. 난 '미국에서 온 한국어 못하는 전학생'이었다.


서울에서 회사생활을 하시던 아빠가 늦깎이 대학원생이 되어 미국으로 가시면서 온 가족이 이민을 결심했고 생후 18개월이었던 나는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처음으로 바다를 건넜다. 하필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난 수두에 걸렸고 울고 불고 하는 나를 달래며 손짓 발짓으로 겨우 베이비파우더를 구해 발라줬다는 이야기, 그리고 엄마가 나를 포대기에 업고 밥솥과 된장, 고추장을 양 손에 들고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디딘 이야기 등 눈물 없인 듣기 힘든 이야기가 많다. 그 이후로 8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면서 난 자연스럽게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이민 1.5세대가 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온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눈 앞이 깜깜해졌다. (어릴 때지만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고 부모님이 한국인이라는 것 외에 난 한국에 대해 아는 바도,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한국이 웬 말이야... 친구들도 다 여기 있는데 가긴 어딜 가?


하지만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너무 어리기도 했고 가족은 함께 지내야 한다는 아버지의 철학(?)에 따라 우리 가족은 대한민국으로 왔고 대전에 새 둥지를 틀었다.


난 (지금은 없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왜 있는지 모르겠는, 족보 꼬이게 만드는 주범이라고 여겼던) '빠른 년생'이다. 그래서 귀국 당시 나이로는 초등학교 3학년 2학기에 해당했지만 한국어가 안 되는 상황에서 3학년으로 진학하기에는 무리가 될 수 있다는 부모님의 판단에 (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난 2학년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종종 학년을 꿇은 것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한국에서 입학한 게 아니기 때문에 난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덕분에 난 같은 해에 태어난 또래 친구들과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당시 내 한국어 구사 수준은 '하(下)'였다. 집에서 부모님이 한국어로 말씀하시는 걸 들으며 생활해서 듣는 건 ‘대충’ 알아들었지만 읽고 쓰는 것은 거의 안 되는 수준.


그때만 해도 대전의 외진 동네에 위치한 우리 학교에는 외국생활을 하다 온 학생이 몇 없었고 친구들은 날 신기해했다. 물건을 가리키며 이건 영어로 뭐냐고 묻기도 하고 영어 단어를 제시하며 발음 좀 해보라고 하기도 했는데 난 그게 너무 싫었다. 튀고 싶지 않았고 주목받는 게 싫었다. 요즘 말로 '원 오브 뎀(one of them)'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교과서를 읽어보라고 지목하시거나 내 발표 순서가 되면 한국어를 못해서 또는 영어를 잘해서 튀었다. 그나마 영어 잘하는 건 머쓱하고 쑥스러운 정도였지만 국어시간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못하는 걸 계속 시키니 죽을 맛이었다. 당연히 학교 가기가 싫어졌다.




문화 충격도 컸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 몇 가지만 꼽자면...


흙먼지 날리는 운동장
내가 뛰놀았던 운동장은 잔디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국 와서 처음 학교에 간 날 아이들이 뛰노는 운동장은 흙먼지가 날려 뿌옜다. 사막에 모레 바람 부는 줄...


냄새나는 화장실

요즘은 한국 화장실 특히 학교 화장실이 정말 깨끗해졌지만 90년대 초반의 학교 화장실은 정말 냄새나고 지저분했다. 게다가 좌변기(쪼그려 앉는 변기)를 처음 접한 나는 화장실 가는 게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처음 몇 주 동안은 학교에서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참았다가 집으로 달려가서 볼 일을 보곤 했다ㅠㅠ


한 학급에 60명???

당시 우리 학교에는 옆 동네 학생들도 있었다. 아직 옆 동네에는 초등학교 (그 당시는 '국민학교'였지)가 없었기 때문. 그래서 한 반에 남학생 30명, 여학생 30명 정도로 65번까지 있었던 기억이 난다. 책상을 다닥다닥 붙여놓고 앞뒤로 공간도 없이 아이들이 앉아있었다. '돛 데기 시장'이라는 표현이 딱이다. 6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쉬는 시간에 떠드는데 난 너무 시끄럽고 어안이 벙벙해서 귀를 막았다가 열었다가를 반복하며 이게 내가 다닐 학교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아무리 90년대 초반이라도 일반 초등학교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극과 극을 경험했던 거다. 하하.)


직접 하는 청소

간단한 정리가 아닌 청소도 학생들이 직접 하다니, 놀라웠다.

수업을 마치면 책걸상을 쭉 뒤로 밀고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기름걸레로 바닥을 닦고 물걸레로 창틀과 교실 곳곳을 닦는 모습이 신선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번 하면 또 열심히 제대로 하는 성격이라 시키는 대로 참 열심히도 했다. 우리 분단이 청소를 하던 주간에 처음 직접 교실 청소를 하고 먼지를 너무 많이 먹었는지 다음날 몸살감기를 앓았다. 그래도 학생들이 직접 청소를 하는 것, 내가 생활하는 공간을 책임지고 정리하고 깨끗하게 한다는 건 교육적으로도 긍정적인 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직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해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한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화장실 청소를 직접 하는 건 무리가 된다고 본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는데 2020년 현재는 어떤가요?)


억지로 먹어야 하는 급식

당시 우리 학교는 급식실에서 국과 밥, 반찬 등을 교실로 가지고 와서 선생님과 급식 당번이 반 친구들에게 배식을 해주었다. 식판에 음식을 받았고 각자 자리에 앉아서 점심을 먹었는데 다 받은 음식은 반드시 모두 먹어야 했다. 다 먹지 않으면 교실 앞에서 무릎 꿇고 앉아 벌을 받아야 했다. 편식하지 않고 음식을 골고루 먹도록 한다는 취지는 알겠지만 억지로 먹이는 건 개인적으로 반대다.


교사의 학생 처벌

선생님이 늘 회초리를 들고 있고 학생을 때릴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내가 경험했던 미국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 경우에 따라 어느 정도 필요할 수는 있지만 초중고 학창 시절을 돌이켜봤을 때 선생님의 감정 격화로 인한 과도한 처벌도 많았다. 아무리 어려도 학생들, 심지어 말 못 하는 아기들도 어른이 감정에 휘둘려 말하고 행동하면 분위기를 읽는다. 교단 붕괴로 몸살을 앓는 요즘도 문제고 과도한 처벌이 난무했던 과거도 문제였구나.


이 외에도 골목길 양 쪽을 가득 메운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 씁쓸한) 불법주차 차량, 한국식 나이 계산법이 따로 있다는 사실, 음력과 양력의 개념 등 내게는 새롭고 놀라운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렸지만 이 시기는 정말이지 내 인생의 암흑기였다. 언어도 몰라 문화도 몰라.. 말대로 총체적 난국.




그러다가 내게 구세주 같은 선생님이 나타났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임신 중이셔서 육아휴직을 내셨고 갓 교대를 졸업하신 ㄱ 선생님이 우리 반 임시 담임으로 오셨다. (지금 생각하면 스물네다섯, 정말 어리고 꽃다운 나이...^^)


열정 넘치는 새내기 교사이기도 했고 그 선생님의 성향이기도 했겠지만 ㄱ 선생님은 내 상황을 재빠르게 파악하시고는 내게 특별수업을 제안하셨다.


매일 수업 마치고 한 시간 씩 특별수업.
한국어 읽고 듣고 쓰는 연습 하되
솔직한 감정 표현 (aka. 마음관리, 스트레스 관리)을 위해 영어로 일기 쓰기 허용.


한 마디로 나머지 공부를 하는 것인데 어린 내가 잘은 몰라도 이건 발전의 기회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나는 선생님의 제안이 제법 마음에 들었고 흔쾌히 좋다고 했다.


특별수업은 바로 시작됐다. 6개월 동안 월화수목금 주 5일 하루도 빠짐없이 공부했다. 선생님이 읽어주시는 걸 듣고 따라 하고 내가 직접 소리 내어 읽고 쓰는 연습을 했다. 그리고 매 특별수업은 받아쓰기 시험으로 마무리되었다. 처음에는 당연히 헤매었다. 10문제 중  2~3문제를 겨우 맞추는 정도. 하지만 어렸던 만큼 학습도 빨랐다. 받아쓰기 시험에서 동그라미의 개수가 점점 많아졌고 난 자신감이 붙었다.


사실 못하는걸 계속 들춰내며 공부하고 시험 보는 과정은 애한테나 어른한테나 몹시 괴로운 일이다. 이 사실을 알고 미리 장치를 마련하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어 일기를 쓰도록 허용해주신 게 난 정말 정말 좋았다. 숙제로 한국어 일기를 쓰기는 했지만 내 감정을 한국어로 표현하는 것은 아직 어려웠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영어로 일기를 쓰면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고 이때만큼은 일기 쓰기가 숙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봐야 '~해서 즐거운 하루였다' 식의 초등학생 일기^^)


또, 선생님은 내 한국어 일기는 빨간펜으로 여기저기 고쳐 주셨지만 영어 일기에 쓴 내용을 보시고는 오히려 선생님이 모르는 영어를 물어보셨다. (어른이 되어보니 그건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른 척해주신 거였지만^^) 내가 한국어로 모르는 것도 많지만 선생님도 모르는 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어린 내겐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던 것 같다.


학기말에 특별수업도 끝이 나고 3학년이 되기 전 학부모 상담 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영어 일기는 솔직한 감정표현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영어 실력 유지가 중요하다고 생각돼서 허용하신 거라고. 영어를 할 줄 아는 것도 아주 큰 축복이고 내 인생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으니 앞으로도 영어도 꾸준히 공부하고 감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때는 몰랐지. 영어가 내 인생에서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줄은...)


그렇게 반년을 꼬박 선생님과 함께 공부한 결과 난 수업 시간에 일어서서 천천히나마 교과서를 읽고 웬만한 받아쓰기에서는 80점 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쉽게도 100점은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아홉 살 적 받아쓰기에서도, 이후 중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에 이르기까지 각종 시험에서도...^^


한국어 구사력을 어느 정도 갖추고 난 후 다른 과목에서 성적을 내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내 상황을 모르셨던, 아니 솔직히 말해 딱히 관심도 없으셨던 것 같은 3학년 담임 선생님은 내 성적표를 보시고는 "네 등수는 뒤에서 따지는 게 더 빠르다"며 비꼬듯 말씀하셨던 게 기억난다. 거기다 대고 구구절절 설명하지도 못하고 혼자 기분 상해서 꽁해있었고 그 해 그 선생님에 대한 별 다른 기억은 없다.


이후 3학년 때 처음으로 글짓기 대회에서 동상을 탔다. 환경을 주제로 한 교내 글짓기 대회였는데 한국어로 글을 써서 상을 받았다는 건 개인적으로 정말 큰 성취였고 이를 계기로 자신감이 많이 회복됐던 것 같다. 그리고 4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성적우수상을 받았다. 남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린 나이에 나름 마음고생하고 힘든 시기를 견뎌낸 내게는 정말 의미 있고 큰 성취였다.


지금의 내가 보는 당시의 ㄱ 선생님은 정말 지혜롭다. 이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한국어 때문에 스트레스받다가 부모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비관하며 방황하는 소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내게 맞춤형 선생님을 붙여주신 것만 같다. 늘 ㄱ 선생님께 감사해왔다. 그래서 지금도 비밀번호 질문은 꼭 '가장 좋아하는 선생님 성함은?'으로 설정한다. 틀리거나 헷갈리거나 잊어버릴 걱정이 전혀 없으니까. 고등학생, 대학생이 되어서는 선생님과 연락이 닿아 직접 찾아뵙고 인사도 드렸는데 최근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따로 연락드리지 못했다. 이 참에 연락 한번 드려봐야지... :D




공부도 늘 중간보다 조금 잘하는 정도에 머물렀던 나는 중고등학교에서도 영어 말고는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학생이었다. 그나마 영어는 좀 하니까 영어 관련 대회도 나가고 상도 받곤 했지만 그렇다고 1등/100점은 아니었다. 영어를 문법 없이 익힌 케이스라 중고등학교 때는 문법을 몰라 고생했다. 이 문장이 몇 형식 문장이고 무슨 용법이고 등을 판서해 놓고 설명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지 않았다. 문법을 모르면 찍을 수밖에 없는 문제에서 난 늘 정답을 비껴나갔다.


고등학생이 되어 부모님은 영어를 살려 대입을 준비하라고 하셨지만 쓸데없는 자존심이 발동했다. 꼭 영어 아니어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노력도 충분히 하지 않고 능력도 갖추지 못한 사춘기 소녀의 자존심에 불과했다. 고3이 되어서도 성적은 생각만큼 오르지 않았고 난 결국 수능 점수를 반영하지 않는 영어우수자 수시 전형으로 영어영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었다. (부모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어쩌면 나 자신보다 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알고 계시다는 걸 이때 알았다.)




대학에서의 영어는 또 달랐다. 영어 잘하는 친구들이 차고 넘쳤고 난 계속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남들은 나를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봤지만 난 자신이 없었다. 언어의 뼈대를 잡아주는 문법에 취약했기 때문. 그래서 결국 내 손으로 문법책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난 그 유명하고도 클래식한 English Grammar in Use를 선택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한국어로 영어 문법을 봤을 때 여전히 이해가 잘 가지 않았기 때문. 이 책은 아직도 내 책꽂이에 있고 지금도 확인이 필요할 때 가장 먼저 들여다보는 책이다.) 책의 내용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 보지는 않았고 내가 헷갈리거나 정확한 차이나 용도를 모르겠는 부분을 골라서 살펴봤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1년 동안 호주에서 지낼 기회가 있었다. 교환학생도 아니고 무소속으로 호주에 덩그러니 가니 심심했다. 그래서 병원에서 봉사활동도 하고 카페에서 일도 하다가 3개월 정도는 유료 영어 수업을 수강했다. 그 수업에서 만난 선생님께 온갖 질문을 하며 궁금한 부분을 해결할 수 있었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익힌 후 한국에서 초중고대학교까지 다니면서 내 영어가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이 3개월 동안 내 영어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물론, 아직 완성되진 않았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새로운 것도 너무너무 많다.)


대학생 때 영어는 일상이었다. ‘영문’보다는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문학 수업은 필수과목만 듣고 주로 어학과 통번역 수업을 들었다. (그래서 영어영문학사인데 셰익스피어 수업도 듣지 않았다...^^) 통역 입문과 번역 입문, 미디어 번역 수업이 재미있었고 영어로 진행하는 각종 리더십 수업도 빼놓지 않았다. 국제관계과 정치외교, 여성학, 환경 등 관심 과목 중에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도 챙겨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영어를 읽고 쓰고 영어로 발표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또, 교내 통역봉사단 소속으로 활동하며 교내외 행사에서 통역도 하고 국제학생회 소속으로 외국인 교환학생과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국문화 및 각종 교류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어보다 영어를 더 많이 쓰는 날도 많았다.




나는 대학교에서 그 흔한 경영 입문이나 경제학 입문도 듣지 않았다. 그저 관심 가는 수업만 듣고 좋아하는 교내외 활동만 했다. 이력이 될 만한 인턴 경력도 전혀 없었다. 틈틈이 통번역 아르바이트하면서 용돈 벌이를 하고 방학 때는 대외 활동하고 여행 다니기 바빴다.


그렇게 재미나게 대학생활을 하다 보니 졸업반이 되었다. 다들 취업준비로 전쟁인데 난 취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한 번도 내가 회사 생활하는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을 포함한 주변의 영향 때문인지 대학교 졸업하면 당연히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부를 더 해야 한다면 어느 분야로 가야 하나, 내가 뭘 좋아하나 생각해봤다. 관심 분야는 크게 두 가지로 추려졌다. 한국문화와 통번역.


낯설었던 한국 생활에 차츰 적응해가면서 난 한국이라는 나라와 사람들, 그리고 한국문화 특히 음식이 정말 좋아졌다. 내가 보고 느낀 한국을 다른 나라와 그 사람들에게 리고 싶은 마음에 국제학생회 활동도 한 것이었고 그 연장선 상에서 뭔가 좀 더 크게 판을 벌여보고 싶었다. 나름 고민한 끝에 내가 추구하는 가치에 부합한다고 판단되는 한 학교에 석사과정 지원 원서를 넣고 기다렸다. 1차 서류 합격 통보 차 전화가 왔는데 면접 전에 물어볼 게 있다며 담당자가 내게 질문을 했다.


우리 학교는 연구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관인데 지원자는 연구보다는 활동에 관심이 많아 보이시네요. 혹시 박사까지 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내 답은 '아니오'였다. 난 한 분야를 깊이 있게 파고들거나 진득하게 앉아 연구하는 걸 잘하지도 못하고 즐겨하지도 않는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알기에 연구에 매진하시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박사가 괜히 박사가 아니다.) 그 담당자는 내가 관심 있어하는 분야에서 추천할 만한 학교와 일해볼 수 있는 기관을 몇 군데 말씀해주시며 이쪽으로 조금 더 알아보면 어떻겠냐고 조언까지 해주셨다.


난 당연히 면접에서 떨어졌고 그 담당자께 진심으로 고마웠다. 덕분에 난 구체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진로를 고민해볼 수 있었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얕은 지식과 제한적인 경험밖에 없었단 내 수준에서 고민한다고 당장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일단 이 분야는 접어두기로 했다. (하지만 이후 한국문화를 알리는 일을 할 수 있는 생각지 못한 기회가 생겼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하기로 하자.)




남은 건 통번역이었다. 부모님은 진작에 이 분야를 추천하셨다. 대학 입학이 정해진 직후부터 그 학교에 통역봉사단이 있다고 먼저 알려주신 것도 엄마였고 아빠는 전문 통역사가 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여성으로서 할 수 있는 좋은 전문직이라며 관련 기사 링크를 보내주시곤 했다. 아르바이트와 동아리 활동으로 통역과 번역 일을 조금씩 하면서 쉽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4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전 여름방학에 강남에 위치한 통번역대학원 (이하 '통대') 입시학원에 덜컥 등록했다. 처음 입시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는데 입이 쩍 벌어졌다. 학생들은 1~2분 정도 되는 영어 뉴스를 듣고 (별도의 메모 없이) 그 내용을 정리해서 한국어로 요약 발표를 했고 강사는 발표를 듣고 피드백을 해주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나도 분명히 들었고 내용도 다 알아들은 것 같은데 막상 요약하려고 하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난 대체 뭘 들은 거지? 다른 학생들은 막힘없이 쭉쭉 통역하는 모습을 보며 난 글렀다 싶었다.


학교마다 일정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보통 통대 입시가 10월부터 시작되니 8월에 학원에 처음 등록한 나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였다. 물론, 잘하는 친구들은 학원 안 다니고도 합격하고 한두 달만 바짝 준비하고 합격하기도 하지만 난 그 부류는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수업 듣고 복습하고 '나름' 입시 준비를 했다. 하지만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씩 매일같이 수업 듣고 복습하고 스터디하고를 반복하며 준비한 다른 학생들에 비해 난 준비 기간도 짧았고 그 기간마저도 올인해서 공부하지 않았다. 그만큼 절박하지 않았던 거다.


역시나 그 해 통대 입시에서 보기 좋게 똑 떨어졌다. 통역 시험 내용도 평이했고 심지어 교수님이 내용 기억나는 단어라도 이야기해보라며 시간을 주셨는데도 난 끝내 답하지 못했다. 사실 절박하게 준비하지 않아서인지 불합격 통보를 받고 실망하거나 우울하지도 않았다.


그럼 나 이제 뭐하지?

당장 그 해 대학원 진학은 물 건너갔으니 뭘 해야 하나 고민하며 구직사이트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대기업에는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고 딱히 공채 준비를 할 자신도 없었다.


한국문화 관련 기관을 기웃거리다가 우연히 한 대기업에서 ‘외국인 임원 영어 통번역 계약직’ 채용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말하자면 인하우스 통번역사인데 반드시 통대 졸업자가 아니어도 지원 가능한 포지션이었다. 애초에 정규직 생각도 없었고 다음 스텝을 결정하기 전까지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그 회사가 뭐하는 회사 인지도 모른 채 지원했고 면접까지 봤다. 그리고 합격했다.




감사하게도 나는 한국어와 영어 두 언어 모두 모국어처럼 배우고 익힐 수 있는 나이에 적절한 환경에 노출되었다. 그래서 나는 두 언어 모두 문법을 따지는 과정 없이 문장을 만들어 구사할 수 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고 그 기회와 환경에 감사한다.

넌 영어 잘해서 좋겠다
그럼 그렇지 역시 해외파였구나


아니라고는 못하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뒤늦게 한국어를 배우는 과정도, 영어를 잊지 않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


특히 해외파로 외국생활을 통해 영어를 접하고 배우면 여러 측면에서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보증수표는 아니다. 조금은 쉽게 출발하는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그 이후의 노력이 없으면 의미가 없어진다. 잘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게 그래서 중요하고 또 어렵다.


언어를 원래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한국인이라고 다 한국어 잘하는 건 아닌 것처럼.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무언가를 잘하는 사람은 그 수준까지 가기 위해 생각보다 아주 많은 애를 썼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물론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훨씬 탁월한 분들을 보면 나 또한 그분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그래서일까? 나는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가 빙판에서 펼치는 화려한 연기를 볼 때마다 그렇게 눈물이 핑- 돌더라.


쓰다 보니 첫 글인데 많이 길어졌다. ‘육아맘의 통번역 일기’든 ‘프리랜서의 육아일기’든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고전적인 방식을 택했다. 시간순 스토리텔링. 차근차근 내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풀다 보면 덧붙이고 싶은 생각도 있을 테고 더 깊이 나누고 싶은 주제도 있을 터.


*자연스럽게 하나씩 마음 가는 대로 쓸 테니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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