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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라의앨 Dec 26. 2020

앨리스로 통하는 프로젝트

행정업무 처리부터 통번역까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팀 구성 및 프로젝트 준비


나의 고용 재계약이 성사됨과 동시에 한국 본사에서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위한 팀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P 상무님은 미국 법인에서, 그리고 V 수석님은 한국 본사에서 프로젝트 기획 및 총괄을 맡으셨다. 나는 한국과 미국 간 커뮤니케이션 담당이자 팀 막내로서 총무를 맡았다. 이어서 프로젝트 매니저(PM)와 의료보건 전문가를 영입했고 (개발자와 데이터베이스 아키텍트, 테스트 담당자를 포함하는) 개발팀을 꾸렸다. 영업 담당자프로젝트 코드(자금) 관리자까지 갖추어졌다. 순식간에 우리 팀은 3명에서 20명으로 늘어났다.


팀이 꾸려지는 동안 주요 실무자들이 모여 외부 컨설팅을 진행했다. 우리 프로젝트는 의료정보시스템 구축 사업이었다. 쉽게 말해 미국 병원에서 의사들이 사용하는 EMR(전자의무기록) 시스템을 개발하여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병원 시스템과 의료서비스 전달체계는 물론이고 미국의 의료 IT 관련 법과 정책 등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관련 경험이 있는 외부 컨설팅사와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며 배우고 묻고 정리하며 팀이 나아갈 방향을 정했다.


두 곳의 컨설팅사로부터 제안을 받아 워크숍을 진행했다. 각각 1주일 간 워크숍 진행 후 내용을 정리하여 1차 보고서를 작성했고 1주일 간 내부 회의를 거쳐 보완 작업 후 마지막 1주 동안 최종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한 곳의 컨설팅과 함께 미국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2달간 두 곳과 워크숍을 진행하며 난 고강도 통역을 했다. 두 컨설팅사 모두 미국에 본사를 두고 각각 베트남과 인도에 개발팀이 있는 회사여서 워크숍은 영어로 진행되었고 모든 내용 통역이 필요했다. 영업 담당 재미교포 J 과장님은 내게 'UN 식 동시통역'을 요청하셨는데 나는 당시 동시통역을 할 줄 몰랐다. 그래서 솔직하게 동시통역은 할 줄 모른다고 말씀드렸는데 알고 보니 한두 문장을 들고 옮기는 순차통역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 당시에도 지금도 통역을 요청하는 쪽에서 동시통역과 순차통역을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지금도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순차통역을 동시통역으로 생각하고 계신 분들도 많이 보고 동시통역으로 의뢰받지만 실제로 원하시는 건 순차통역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도 많다. 전문 통역 서비스를 이용해보거나 경험해보지 못한 경우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잘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업계 종사자로서 올바른 정보와 기준을 제공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많은 선후배 동료께서 이미 잘 정리해주신 글도 있지만 혹시 아직 두 가지의 차이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나만의 버전으로 따로 정리해볼 생각이다.


미국 출장이요? 저도요?

파트너사를 찾기 위해 두 번 미국 출장을 갔다. 팀에서 출장을 계획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가 출장자 명단에 오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업 기획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단계에서 파트너를 찾는 중요한 비즈니스 미팅이 연달아 잡혀 있었고 수석님과 개발팀 리더께서 통역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나도 함께 출장 결재를 올리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미국에 처음 가는 데다 정말 오랜만이라 진심으로 설렜다.



2011년 5월, 첫 해외출장, 첫 미국출장길.




파트너사를 찾아 떠난 두 번의 미국 출장


인천 - 보스턴 - 텍사스 - 뉴욕 - 인천

5월과 7월에 일주일 씩 미국 출장을 다녀왔다. 빠듯한 일정이었지만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는 생각에 그저 신났던 기억:)


잠재 파트너사를 찾는 게 출장의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굵직한 비즈니스 미팅이 빼곡하게 잡혀있었다. 이동이 아주아주 많았고 자동차든 비행기든 머리만 대면 잘 자는 나는 이동할 때마다 곯아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난 여행과 출장에 최적화되어 있는 것 같다^^


연착된 국내선 비행기릉 기다리며...


국내선 비행기로도 이동했는데 연착은 일상이었다.

7월에 두 번째 미국 출장을 떠나는 날엔 늦잠을 잤다. 하필 러시아워에 비까지 와서 당시 살던 분당에서 인천공항까지 3시간이나 걸렸다. 함께 출장 가는 수석님과 책임님들께 사죄하는 마음으로 카운터 티켓팅 마감 잡아달라고 하고 결국 마감 직전에 도착해서 간신히 티켓팅을 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선배님들은 그런 나를 두고두고 놀리셨다고 한다..^^

한 잠재 파트너사와의 첫 미팅

미국 회사를 공식 방문하고 전문가와 임원을 마주하고 회의를 하는 건 나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척^^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 회사와 사업 소개를 하고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며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순차통역을 했다. 역시나 폭풍 노트 테이킹.


회사생활을 많이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여러 회사 내부를 구경하고 사람과 기업문화를 조금이나바 경험해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분명 가는 회사마다 색깔이 달랐다.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려워도 느껴지는 분위기나 사람들이 중시하는 가치 등이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미팅 후 숙소로 돌아가는 길


몇몇 잠재 파트너사들과의 미팅을 마치고 나오면 우리끼리 리뷰 미팅을 했는데 사실 첫인상, 첫 느낌이 그대로 결과까지 이어지곤 했다. 첫 느낌이 좋았던 곳과는 원활한 소통으로 서로 필요한 것들을 주고받았고 바로 2차 미팅이 잡혔다.


5월에 만났던 몇 곳 중 한 곳과 이야기가 잘 되어서 7월에 두 번째 미팅을 하고 파트너십을 맺어 함께 시범사업을 진행해 보기로 했다. 시범사업 기간은 대략 3개월 정도로 잡았다. (실제로는 기간이 1.5배 정도 길어졌지만ㅋㅋ)


한국에 돌아와서 파트너사와의 일정 조율 후 시범사업에 함께할 팀원을 선발하고 장기출장 준비에 돌입했다. 사업 총괄 수석님과 시범사업 PM 1명, 개발인력 5명, 아키텍트 1명 그리고 통역사인 나까지 총 9명이 함께하게 되었다.

장기출장 준비 및 킥오프

일반 해외출장이 아닌 장기 해외출장을 가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나 하나가 아닌 함께 가는 팀 전체를 챙겨야 했다. 사내에서 진행하는 항공편 예약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를 통해 일이 진행되었다.


1. 비행기 티켓 예약

유일하게 사내 예약팀을 통해 진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담당자에게 내선으로 전화를 걸어 일정 확인 후 예약팀에서 예약을 진행하여 여정표를 보내주는 방식이었다. 번거로웠지만 회사 정책이니 따르는 게 맞다.


2. 숙소 예약

숙소는 인터넷 예약도 가능했지만 전화로 직접 진행하는 게 빠르고 정확했다. 영어로 예약을 해야 하니 주로 내가 통화를 했고 어차피 같은 기간 같은 곳에서 머물러야 하니 결국 모든 출장자의 영문명을 받아 내가 대표로 예약을 했다.


해외 출장 때 묵게 된 숙소는 대부분 4성급 이상 호텔에 1인 1실이었다. 하지만 지역별로 금액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조건을 충족하는 호텔을 찾거나 수화기를 붙잡고 네고(비용 협상)를 해야 했다. 처음에는 네고하는 게 어려웠는데 점점 요령이 생겼다. 한 번 가면 여러 명이 장기로 묵기 때문에 할인을 받기도 했고 심지어 지배인과 논의하여 해단 호텔 예약 시 적용할 수 있는 우리 회사 할인 코드를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3. 각종 서류 준비 및 공증

한국과 미국은 비자면제 파트너십을 맺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비자가 없어도 최대 90일까지는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장기출장을 가는 것이었고 정확히 얼마나 있다가 올 지 정해진 바가 없었다. 3개월을 목표로 했지만 단 며칠이라도 이 기간을 넘길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안전하게 모두 비즈니스 비자를 받고 입국하기로 했다. 비자 발급은 각자 미국 대사관을 통해 진행했다.


비즈니스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파트너사로부터 일종의  초청장 또는 두 기업이 비즈니스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가 필요했다. 그래서 파트너사에게 공문을 요청했고 개인별로 해당 공문과 함께 번역 공증을 받아 대사관에 제출해야 했다. 우리 팀뿐 아니라 컨설팅을 받았던 회사에서 미국으로 파견 오는 인도 개발팀 몇 명의 서류도 함께 공증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모두의 서류를 취합하여 번역한 후 공증사무소에 번역 공증을 맡겼다.


공증을 맡기는 건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척척 진행되는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공증이 마무리되었으니 찾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공증 사무소에서 서류를 받아왔다. 그런데! 사무실에 돌아와서 다시 보니 컨설팅사 개발팀 출장자의 성과 이름이 뒤바뀐 게 눈에 들어왔다. 인도 이름이라 생소하기도 했고 챙길 게 너무나도 많은 상황에서 정신이 없었는지 번역 과정에서 큰 실수를 한 것. 이 대로 서류를 제출하면 비자 발급도 안 되고 설령 된다 해도 미국 입국 시에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내용을 수정해서 다시 공증을 맡겨야 하는데 그러려니 추가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번역은 내가 한 게 맞지만 번역문에 대한 인증(공증)은 공증 사무소에서 한 것 아닌가. 공증사무소에서는 번역이 제대로 되었다는 걸 확인하여 인증해주고 그에 대한 비용을 받는 것인데  (번역사의 실수로) 잘못된 번역본에 도장을 찍어준 셈.


그래서 공증사무소에 이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고 사무소 측에서는 추가 비용 없이 해당 서류에 대한 공증을 다시 진행해 주었다. 신입사원의 실수에 공증사무소의 실수까지 더해지며 생겨난 아찔한 사건이었다. 그 후로 나는 성명과 각종 번호를 기입할 때 두 번 세 번 다시 점검하는 습관이 생겼고 번역 공증을 맡기더라도 그 자리에서 반드시 모든 서류를 검토한 후에 사무소 문을 나서게 되었다.


4. 프로젝트 코드 예산 계획

회사에서 프로젝트 코드를 받아 예산을 책정한 후 모든 크고 작은 비용처리를 진행해야 했다. 재무 관련 사항은 사실 내가 가장 모르고 취약한 부분이었다. 회사 내에서 돈이 어떤 항목에 어떻게 쓰이는지 등은 전혀 몰랐다. 이건 재무 관련 업무를 하는 사람이 아니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게 정상이고 그래서 V 수석님도 재무팀에서 S 과장님을 우리 프로젝트 코드 관리자로 영입했던 것.


그런데 V 수석님이 자리를 비웠을 때 S 과장님은 내게 코드 예산을 짜보라며 일을 주셨다. 내가 일반 정규직 사원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난 업무영역이 정해진 계약직 사원이었다. 계약서에 내 업무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었는데 예산 관련 업무는 명시된 업무 범주 밖의 일이었다. 회사 일을 위해 회사 돈을 쓴 직원이라면 누구나 비용처리 요청을 할 수는 있지만 프로젝트를 위해 어떤 지출 항목이 필요하고 어느 항목에 얼마나 할당할지 등 예산을 짜는 일은 분명 재무 또는 회계 담당자가 해야 할 일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팀에서 재무 담당자로 S 과장님을 모셔온 것 아닌가. (막말로 이건 과장님 당신이 해야 할 일이잖습니까?) 내가 해야 할 일도 아니었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라고 판단됐다.


두어 시간 고민 끝에 이 일을 부탁한 S 과장님께 직접 말씀을 드렸고 과장님은 반박하지 못하셨다. (나름 과장님을 배려해서 내 직속 상사를 통해 이야기하지 않고 직접 이야기한 거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이건 잘한 일인 것 같다. 결국 이 과장님은 이후 불미스러운 일로 퇴사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조직 내에서 상사가 시키는 일이 내 업무 범주를 벗어날 때 혹은 부당하다고 느낄 때, 내 능력 밖의 일이라고 느껴질 때 어떻게 대응하는 게 현명한 걸까. 사실 어려운 문제다. 어찌 보면 상사가 일을 주는 건 상사가 판단할 일이니까. 하지만 조직에 속해있든 프리랜서로 일하든 지혜롭게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동의하지 않는데 무조건 yes라고 하다 보면 언젠가 어디선가 터지기 마련이니까.


5. 출국 전 내부 킥오프 미팅

한국에서의 준비를 모두 마치고 출국 전 내부 킥오프 미팅을 했다. 사실 미팅이라기보다는 우리 팀이 모여 잘해보자며 함께 파이팅을 외치는 자리였다. 팀을 총괄하시던 V수석님은 사진 한 장을 띄워놓고 이 프로젝트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임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전하셨다.


Cabo da Roca (사진출처: https://www.pinterest.com/pin/248612841902481748/)

사진은 포르투갈의 카보 다호 카(호카곶) 었다. 난 사실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는데 의미가 마음에 쏙 들었다.


유럽 대륙의 서쪽 끝.
그리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


그 날 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꼭 저 카보 다호 카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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