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복한나라의앨 Dec 27. 2020

프로 장기 해외출장러 (feat. 네고왕)

프로젝트 통역사의 5개월 해외 출장기




세 달에 걸친 준비 끝에 시범 프로젝트 팀이 10월 초에 드디어 미국으로 출국했다. 정말이지 머나먼 항해를 떠나는 기분이었다. 이전 글​에서 앨리스로 통하는 프로젝트라고 했었는데 대략 이런 그림이었다.



난 유일한 20대 여사우였고 다른 팀원들은 30대와 40대 선임과 책임, 수석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난 한국에서 가져간 개인 스마트폰 하나와 미국에서 개통한 휴대폰을 가지고 다니며 늘 전화기를 붙잡고 살았다. 초반에는 주로 숙소 어레인지로 바빴고 이후에는 수석님 또는 상무님과 통화할 일이 많았다.


이 날은 주말을 끼고 미국에 도착해서 공식 일정은 없었고 각자 숙소 체크인하고 쉬다가 시내 구경 좀 하고 저녁을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늘 이렇게 푸짐하게 먹었던 건 아니고 뭔가를 시작하거나 마무리할 때 또는 뉴저지 본사에서 상무님이 오시는 날은 배 터지게 먹는 날이었다.




팀원들과의 ice breaking & more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소 회의실을 빌려 아이스브레이킹 및 내부 미팅 시간을 가진 것이었다. 사실 한국 본사에서 같이 일하긴 했지만 시범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하루 종일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함께할 사람들이었는데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각자 지금까지의 업무와 이력 등을 소개하고 이번 프로젝트에서 어떤 부분을 맡게 되었고 기대하는 바는 뭔지 등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진행하다 보니 생각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서로의 생각을 알게 되어 좋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후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모여 함께하는데 문제가 없을 수는 없지 않나. 하지만 적어도 속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해본 사람과는 나중에 또 다른 이야기를 진솔하게 할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프로젝트 진행할 때 문서화는 필수!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프로젝트 관련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쭉 나열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각자의 역할과 책임(Roles & Responsibilities)을 정했다. 할 일이 참 많고 막막했다. 이걸 정말 다 할 수 있을까...


일을 할 때도 그렇지만 프로젝트는 특히 문서화가 필수다. 어떤 형식으로든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 최첨단 툴도 많지만 우린 화이트보드에 자유롭게 적고 사진을 찍어 남기고 공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미국 회사로의 출퇴근

우리는 파트너사로 출퇴근을 했다. 한 마디로 잠재 고객사 현장에서 함께 지내게 된 것. 현지에서 현지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일하면서 미국인들 그리고 미국의 기업문화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정말 좋았다.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 해도 어른들의 세계는 전혀 다르니까. 미국 사회를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각자에게 제공된 개인 업무공간.


파트너사로 출근한 첫날, 놀랍게도 우리 팀원 각자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회의실 하나에서 다 같이 지내게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넓고 쾌적한 개인 업무공간을 마련해주다니 참으로 자비로웠다^^ (솔직히 본사 사무실보다 훨씬 좋았다는...) 여기에 필요한 각종 사무용품은 물론이고 각자 데스크톱까지 제공해주었다. 사진에 보이는 작은 노트북은 당시 개인 용도로 쓰던 휴대용 노트북인데 너무 느려서 업무용으로 쓸 수 없을 정도였다. 다행히 파트너사에서 데스크톱을 제공해줘서 편하게 문서작업 등을 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 시작을 기념하는 공식 만찬

우리 팀 세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10월 셋째 주 어느 날, 프로젝트의 모든 관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새 출발을 기념했다.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장을 입었던 날이 아니었나 싶다. 업계 전문가들이 모인 곳에서 딱히 전문성도  경력도 없는 내가 저들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사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이 날 스탠딩으로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한국과 미국 측 프로젝트 총괄께서 건배사를 하고 즐거운 대화를 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그리고 스테이크가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었던 것도...^^




4성급 호텔에서 콘도형 레지던스로


출장 가서 3주 정도는 4성급 호텔에서 묵었다. 좋은 호텔에서 지내는 게 처음에는 좋았지만 그것도 잠시. 집 같아야 할 숙소가 부담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부엌이 없으니 모든 걸 사 먹어야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고민 끝에 난 콘도형 레지던스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거리도 더 가깝고 비용도 저렴하고 무엇보다 부엌이 있으니 간단한 조리도 가능하다는 걸로 수석님을 설득했다.


당시 장기 투숙했던 콘도형 레지던스 호텔

난 새로 옮긴 숙소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방과 거실과 주방이 구분되어 있었고 넓어서 답답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스튜디오형 원룸에서 혼자 살았는데 그 방보다 훨씬 좋았다^^)


다른 분들도 숙소를 옮기니 이제 좀 사람 사는 곳 같다며 만족해하셨다. 주말에는 장 보러 가는 날로 정하고 함께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사 왔고 가끔 간단한 요리를 해서 함께 모여 나눠먹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 식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장 보러 갔던 한인마트. 없는것 빼고 다 있던 곳!


여기서 4달 넘게 묵었는데 그러다 보니 프런트 직원도 계속 바뀌고 우리가 오히려 터줏대감이 되어가는 재미있는 현상이^^ 중간중간 프로젝트 총괄하시는 상무님이 계신 뉴저지 미국법인에 가는 일정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짐 싸서 체크아웃하고 이틀 뒤에 다시 돌아와서 체크인하고를 반복하는 게 너무 힘들고 번거로웠다. 그래서 난 숙소 지배인과 네고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네고 왕은 나였구나ㅋㅋㅋ)


우리는 장기출장으로 여기 와있는 팀이고 관계자들이 자주 오갈 예정이니 특별 할인을 해달라고 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몇 명이 고정적으로 머물 거고 몇 명은 자주 오갈  예정이니 일종의 최소 인원 예약 개념으로 가격 할인을 요청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지배인은 우리 회사 특별 코드를 만들어 기존에 머무는 프로젝트 팀원은 물론 이후 미국 법인과 한국 본사에서 출장 오시는 분들도 같은 가격에 묵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또, 숙박 기간이 길어질수록 가격이 낮아지기 때문에 다른 지역으로의 출장이 있을 때 체크아웃하지 않고 그대로 쭉 숙박하는 걸로 계산해도 원래 정가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묵을 수 있게 되었다. 이 협상을 성사시키고 얼마나 뿌듯했는지!




초고강도 통역


막내 사원으로서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았지만 나는 분명 통역사로 본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었다. 초반에 세팅할 때는 행정업무가 많았지만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내 업무는 99% 통역이 되었다. 우리 팀이 만나는 파트너사 내 담당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1. 경영진

본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싶어 하는 경영진과 비즈니스 측면의 이야기를 했다. 현재 어떤 어려움이 있고 이 사업을 통해 뭘 얻고자 하는지 등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었다.


여기에는 수석님과 PM님 그리고 경우에 따라 개발팀 리드께서 참석하였다. 수석님과 PM님은 영어를 듣는 데는 무리가 없으셨고 말하는 것은 좀 부담스러워하시는 정도였는데 정확한 이해와 전달을 위해 통역을 요청하셨다.


비즈니스 관련 통역은 쓰는 언어 자체가 어렵지는 않았지만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뉘앙스를 잘 전달해야 하는 부담감이 컸다. 주로 c레벨의 임원들이 참석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격식을 어느 정도 차리는 것도 중요했다. 영어를 쓰면 서로 이름 부르고 편하게 대하기 때문에 격식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2. 의료진

시스템의 실제 사용자가 되는 의료진과의 회의도 많았다. 여기에는 현직 의사와 간호사, 임상병리사 등이 포함됐다. 현재 사용 중인 시스템을 직접 보여주며 실제 업무 할 때 어떻게 쓰고 있는지, 사용자로서 느끼는 불편과 필요, 요구사항 등을 듣고 의견을 묻는 시간이었다.


의료 환경에서 쓰는 용어 특히 각종 약어 등이 생소해서 처음에는 진땀을 뺐는데 용어는 점차 익숙해지면서 의료진과의 회의는 오히려 수월한 편이 되었다. 그래도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달하는 건 쉽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이해를 제대로 못한 것 같아 다시 되묻고 확인하여 통역하기도 했다.


3. IT 담당자

가장 어려운 통역은 단연 IT 회의였다. 의료진의 요구사항을 받아 그걸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는 자리에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나오는데 이건 정말 내게 너무나도 큰 난관이었다.


난생 처음 가본 데이터센터


용어는 그렇다 쳐도 개념 자체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되묻고 이해하고 다시 통역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떻게 어떻게 통역을 하긴 했지만 이건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IT 전문가들이기에 몇 개 키워드로 서로의 말을 이해하고 알아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 번은 두세 번 통역을 했는데 서로 이해가 안 갔는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림으로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했던 적도 있다. 통역사로서 참 비참하고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은 순간이었다.


당시 내 감정과 상태를 기록했던 SNS 포스팅.

이 과정을 겪으면서 멘붕도 겪었고 배움도 있었고 나 스스로의 한계도 느꼈다.



나는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기까지 경영진과 의료진, IT 담당자들과 돌아가며 비즈니스, 의료, IT 통역을 온종일 했다. 통역사는 한 명인데 동시다발적으로 통역이 필요한 상황이 계속 생겼다. 좋은 업무공간이 있었지만 난 정작 통역하느라 내 자리에 앉아있을 시간이 없었다.


통역 수요가 너무 커져버렸고 나도 팀원들도 추가 인력을 요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누군가를 채용해서 미국으로 오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고민 끝에 현지에서 통역사를 임시로 채용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파트타임으로 2명을 채용했고 초반에 적응기가 필요하긴 했지만 모두에게 윈윈인 결정이었다.


 일 외적으로도 나는 내 또래와 어울리는 소소한 기쁨도 누게 되었다. 퇴근 후 핫플레이스에서 저녁도 먹고 시티라이프를 즐기는 날도 생겼다. 내겐 정말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그중 한 명은 나보다 두 살 위 언니인데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다. 지금도 SNS로 소식을 주고받는데 최근에 셋째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젊은 시절 만나 꿈을 나누었던 우리가 어느덧 결혼하고 엄마가 되어있는 모습을 보면 신기하고 감격스럽다. 또 일로 만났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이 허락된 게 정말 감사하다^^




주말 자유시간과 소소한 일상 여행


주말은 대부분 자유시간이었다. 멀리 가진 못해도 주변에 가볼만한 곳을 찾아다니곤 했다.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이라는 모토를 가지게 된 게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배드민턴 채와 공을 구입해서 퇴근 후 숙소 앞 공터에서 운동도 하고 숙소 근처를 걷고 뛰기도 했다.


주말에는 근처 해변에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고 핫한 레스토랑이나 카페에 가보기도 했다. 유명 대학 캠퍼스 투어도 큰 재미였다.


주말에 종종 갔던 Galveston의 아름다운 석양.


반팔 차림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던 11월 말 텍사스.


주일에는 한인교회도 가보고 현지 교회도 가봤는데 현지 교회 한 곳이 말씀도 좋고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서 꾸준히 예배를 드렸다. 한국에서만 신앙생활을 해본 내게 색다른 경험이었고 당시 힘들었던 마음을 내려놓고 기댈 수 있는 참 감사한 곳이었다. (돌아보니 모두 은혜였다)




돈 모으는 재미


월급쟁이가 돈 모으기 쉽지 않다는 말 익히 들었지만 6개월 회사 생활해보니 그 말이 정말 와 닿았다. 월급 받아서 월세 내고 관리비와 교통비, 통신비 내고 저축 조금 하고 나면 정작 내 맘대로 쓸 돈은 없었다. 그렇다고 저축을 많이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고 모아도 일 년에 얼마 못 모은다는 사실이 좀 씁쓸했다.


그런데 그랬던 내게 장기출장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월급은 원래대로 받고 그 외에 출장비와 일비가 통장으로 입금되는 것이었다. 월급 자체는 사실 많은 편이 아니었지만 출장비와 일비를 더하니 월급보다 많았다. 막내라는 이유로 팀 사람들에게 늘 얻어먹다 보니 출장지에서 돈 쓸 일이 없었다. 점심을 간단히 샐러드로 해결하는 날 밥값이나 가끔 옷 쇼핑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게 약 5개월 간의 장기출장을 마치고 오니 말 그대로 통장에 돈이 쌓여있었다. (또 느껴보고 싶다. 그 기분...^^) 이 기간 덕분에 나는 2년간 대졸 신입 계약직으로 회사생활을 하며 3000만 원을 저축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돈은 대학원 입시 준비와 등록금으로 탈탈 털어 잘 썼지만 처음으로 돈 모으는 재미를 맛볼 수 있었던 기회였다.




결국 사람


일이 너무 많고 힘들었다. 이게 과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가 수 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회의감도 들었다. 당시의 나는 통번역 전문가도 아니도 특정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었기 때문. 개발팀 사람들은 나더러 “우리가 영어 배우는 것보다 앨리스가 코딩 배우는 게 빠를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건 내 영역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매일 하루 종일 함께하는 사람들 때문에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또 그중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다소 외로웠던 시간도 견뎌낼 수 있었다.


20대인 나는 아직 경험은 부족하지만 젊음과 열정이 있었고 그만큼 잠재력이 있었다. 지금 다시 새로운 걸 시작해도 되고 아직 미혼이기에 온전히 나에 집중할 수 있었다.


30대 선임님은 어느 정도 경력이 있고 커리어를 쌓아온 시점에서 공부를 더 해보고 싶지만 공부가 이후 직장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니 대뜸 회사 그만두기란 쉽지 않은 상황. 장기출장 나와있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도 조심스럽고 결혼에 대한 부담도 있다고 하셨다.


40대 수석님은 무언가를 책임지는 자리에서 큰 부담을 느끼신다고. 이 분야를 잘 모르는데 총괄하는 자리에 있으니 쉽지 않고 책임져야 하는 가족이 있으니 마음이 무겁다고 하셨다.


이렇게 우리는 각자의 고민을 안고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V 수석님은 한국 본사와 텍사스를 오가며 늘 힘든 건 없는지 물어보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지나치듯 가볍게 말씀하셨지만 참 도움되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많이 아는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나 많다는 걸 깨달아가는 것 같아요. 저는 제 박사 전공과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지만 공부한 게 헛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석사와 박사 과정을 거치면서 지식을 쌓은 게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찾고 정리하는 방법을 배웠거든요. 그건 어디서든 적용할 수 있는 거고요.

수석님의 개인적인 다른 이야기들도 들으면서 느낀 바가 많았다. 꼰대처럼 굴지 않고 내 이야기에 정말 귀 기울여 주셨다. 조언도 함부로 하지 않으시고 늘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해주셨다. 직장인으로 성실하되 직장생활을 참 재미있게 하신다는 생각도 들어서 이런 분과 함께라면 직장생활 계속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였다.


아무튼 이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어서 감사했고 전부는 아니지만 몇몇 분들과는 지금도 가끔 안부를 하곤 한다. 이제는 다른 회사의 임원이 되고 사장님이 되신 분도 계신데 뜬금없이 메시지를 보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하고 전화통화를 하며 근황을 전하기도 한다. 이러나저러나 인연은 참 귀한 것이다 :D (코로나 전에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만나 밥도 같이 먹곤 했는데 코로나 잠잠해지면 뵙고 싶은 분들이 많다..)




이듬해 2월, 출국 4달 만에 드디어 시스템을 일부 오픈했다. 처음 해보는 시스템 오픈이 기대되고 설레었는데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시스템 오픈일에 남겼던 에피소드 포스팅


그렇게 첫 오픈이 있었고 이후 수정 보완 과정을 거치며 이전보다는 그래도 조금은 여유 있는 일정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시범 프로젝트였고 궁극적으로 실제 계약까지 성사시키는 게 목적이었다. 일단 시범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핵심인력 두세 명을 제외하고는 점진적으로 귀국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나도 미국에서의 장기출장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0월 초에 출국해서 2월 말에 귀국했으니 다섯 달을 꽉 채웠구나.


일이 힘들긴 했지만 재미있었다. 그리고 경력도 없는 신입 계약직 사원이 열정 페이가 아닌 제대로 된 월급+a까지 받아가며 이렇게나 다양한 경험을 하며 배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정말 치열한 하루하루였고 후회도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3일 정도 휴가를 쓰고 혼자 여행을 했다. 회의 잡히면 달려가고 부르면 달려가는 생활을 다섯 달 가까이하고 나니 혼자 좀 있고 싶었다. 우리 팀이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오롯이 혼자 내 마음대로 해보고 싶었다.


차 없이 뚜벅이로 다니기 좋은 도시 샌프란시스코에서 4성급 호텔이 아닌 호스텔에 묵으며 20대 여성으로 자유롭게 여행했다. 숙소에서 만난 친구들과 같이 웃고 떠들며 다니기도 하고 혼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짧았지만 정말 좋았다. 다섯 달 동안 수고한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앨리스로 통하는 프로젝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