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수, 어디까지 경험해 봤니?
통역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사실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일 자체도 수요가 있어야, 즉 어디선가 누군가가 불러줘야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옮기는 일이다 보니 발화자(연사)의 스타일이나 속도에 맞춰야 한다. 통역을 위해 필요한 사전 준비부터 현장에서의 세팅, 콘텐츠, 심지어 마치는 시간까지 어느 것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오늘은 필자가 일하면서 경험했던 ‘내 손 밖의’ 변수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1. "OO 연사께서 불참하신다고 합니다."
보통 국제행사는 프로그램이 있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누가 어떤 발표나 연설을 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 그래서 국제행사 동시통역을 의뢰받으면 파트너와 업무 분담을 한다. (동시통역은 2인 1조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파트너와의 팀워크가 중요하다!) 통상 20-30분마다 통역사 두 명이서 번갈아가면서 통역을 하는데 보통 연사별로 파트를 나누곤 한다. 예를 들어, 발표자가 A, B, C, D, E 이렇게 다섯 명이면 통역사 1이 A, C, E(전반부), 통역사 2가 B, D, E(후반부) 이런 식으로 맡아서 준비하고 통역하는 것이다. 시간과 순서를 고려해서 이렇게 파트를 나누는 것인데 현장에서 갑자기 B 연사가 불참하게 됐다는 업데이트를 받았다.
이렇게 되면 골치 아파진다. B가 빠지면 통역사 1이 A 발표 이후에 C발표까지 연달아 통역을 해야 한다. 발표 하나당 10분 내외라면 큰 무리 없이 소화 가능하다. 하지만 발표 하나가 20~30분 정도로 잡혀있는 경우에는 혼자 40~60분을 통역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혼자 1시간 동안 동시통역을 한다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퀄리티에 지장이 없기는 힘들다. 들으면서 생각하고 말하는 작업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이런 일을 1시간 동안 했을 때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럴 때 방법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불참하는 B 연사를 제외하고 C, D, E 발표에 대한 업무 분담을 다시 하는 것. 이건 상대적으로 발표 내용이 테크니컬 하지 않거나 발표자료가 주로 그림이나 사진으로 구성된 경우 가능한 옵션이다. 두 번째는 B 연사 불참과 무관하게 각자의 연사를 맡아서 그대로 가는 것이다. 이 경우, 통역사 1이 업무로드가 많아지고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각자 맡은 발표자의 자료로 사전 준비를 끝낸 상태이기 때문에 자신이 준비한 것을 자신이 하는 것이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후자를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OO 순서에서 OO 추가되었습니다."
1번의 경우가 사전에 계획되었으나 현장에서 취소된 케이스라면 2번은 계획에 없던 것이 추가되는 것이다. 통역사라면 솔직히 1번보다는 2번이 훨씬 두려울 것이다. 준비한 것을 안 하면 내가 준비한 시간과 노력이 아깝긴 하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아쉬움에 그칠 뿐이지만 준비가 안되어 있는 걸 갑자기 해야 한다고 하면 바짝 긴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국제행사 개회식에서 내외귀빈을 소개하는데 갑자기 명단에 없는 이름과 직책, 기관명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름이야 그렇다 쳐도 직책이나 기관명은 사전에 준비해두지 않으면 즉석에서 하기가 쉽지 않다.
환영사와 개회사는 보통 정해진 기관의 정해진 연사가 하지만 축사는 현장에서 변수가 많은 편이다. 갑자기 축사가 추가되기도 취소되기도 한다. 그래도 환영사, 개회사, 축사 같은 인사말은 스크립트가 제공되는 경우도 있다 보니 직전에 부스 안으로 스크립트를 출력해서 주시는 경우도 있고 (이렇게라도 주면 감사!) 스크립트가 없다 해도 내용 자체가 길지 않고 좋은 취지로 잘해보자는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크게 문제 되지는 않는다. 당황스럽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통역하면 된다.
3. 분명히 자료 없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통역사에게 자료는 필수다. 발표자료가 있어야 전체적인 내용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전문 용어와 표현도 정확하게 미리 체크할 수 있다. 자료가 없다고 통역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자료를 사전에 받아서 준비하고 통역하는 것도 자료 없이 소위 말하는 "쌩동시"를 하는 것은 퀄리티 측면에서 천지차이다.
대부분 발표자로 오시는 연사들은 매우 바쁘신 분들이다. 그래서 발표자료를 여유롭게 만들어서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빠르면 3-4일 전, 보통 하루 전, 행사 당일 자정 넘어서 이런 식으로 받는다. 그래도 행사 시작 전에 자료는 받으면 대부분의 통역사는 밤을 새워서라도 보고 간다. 자료가 왔는데 안 보고 가면 그건 통역사의 책임이기 때문.
현장에서 자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보통 현장 담당자에게 조르다시피 해서 겨우 받아내거나 현장에서 화면을 띄워주는 콘솔 담당자께 자료를 직접 달라고 하기도 한다. (어디서나 쉽고 빠르게 파일을 받기 위해서 USB는 꼭 챙겨 다닌다!)
이렇게 해서 행사 시작 전에 자료를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끝까지 자료 없다고 했는데 막상 본인 차례에 엄청난 PPT를 준비해 오셔서 화면에 띄우는 경우도 있다. 이러면 통역사는 좌절한다. 그리고 꾸역꾸역 "쌩동시"를 해 나간다. 역시나 불가능은 아니지만 퀄리티는 보장할 수 없다. 연사는 본인이 잘 준비해 온 자료를 가지고 멋지게 발표를 하는데 통역사도 자료를 사전에 충분히 숙지하고 통역하면 내용 전달력이 훨씬 좋아진다. 그래서인지 통역사와 일을 많이 해보신 분들 중에 발표자료는 물론, 개요까지 정리해서 주시는 분도 계시다. 그대로 보고 달달 읽어 내려갈 게 아닌 이상 단순히 스크립트를 주는 것보다 이렇게 키 포인트로 흐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통역사에게, 그리고 통역 퀄리티를 높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는 걸 아시는 분들이다.
4. "죄송합니다. 이번 회의가 취소되었습니다."
국제행사는 한 번 잡히면 행사 자체가 취소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비즈니스 미팅의 경우 일정이 취소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2~3주 전에 잡힌 회의인데 1주일 전에 갑자기 담당자가 한국에 올 수 없게 되었다며 회의가 취소된 적도 있고 이틀 전에 급하게 회의가 잡혔는데 하루 전에 무산됐다며 취소되기도 한다.
숙소나 식당 예약을 하면 '취소 및 환불 규정'이라는 게 있다. 숙소나 식당은 예약이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예약을 받지 못하는데 예약을 일주일 전, 또는 하루 전에 취소하면 그때까지 받지 못한 예약도 있을 것이고 당장 하루 전에 그 빈자리를 메꾸는 게 쉽지 않기에 결국 그 숙소나 식당은 손해를 보는 꼴이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을 두고 있다. 통역도 마찬가지다. 잡혀 있는 통역 일정이 있으면 그날 그 시간은 물론이고 앞뒤 이동시간까지도 다른 일을 받지 못한다. 게다가 통역 전에 사전준비를 하기 때문에 이 시간과 노력까지 감안했을 때 통역 또한 '취소 및 환불 규정'이 꼭 필요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업계에서 이 규정대로 비용을 지급하는 경우는 현실적으로 많지 않다. 그럼에도 견적서 전달 또는 계약서 작성 할 때 이 내용을 포함하고 고객사에도 사전에 안내하고 있다. (이걸 경영에서는 customer education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취소 혹은 연기되었다고 미리 연락이라도 주면 다행이다. 회의 일정이 잡혀있는 상태에서 자료 요청할 겸 담당자에게 연락했는데 "죄송합니다. 저희 일정이 좀 미뤄졌습니다. 일정 잡히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답이 오고는 이후 연락이 다시 오지 않는 경우도 다반사다. 실제로 일정이 미뤄졌는지, 다른 통역사를 고용했는지, 아니면 내부적으로 어떤 이슈가 있어서 그런 건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처음에는 일정이 취소되면 많이 속상했는데 이제는 무덤덤하게 "네 알겠습니다" 하고 내 앞에 주어진 다른 일들에 더 집중하는 쪽을 택한다. 그래도... 일정 취소나 연기, 장소나 시간 변경 등의 중요한 내용은 가능한 한 빨리 공유해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5. 통역부스 이모저모
현장에서 통역사는 다양한 세팅에서 통역하게 된다. 동시통역은 주로 공간 내 가장 뒤쪽 한쪽 코너 또는 옆쪽 벽면에 부스를 설치해 두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부스에서 무대와 연사가 보여야 하기 때문에 기둥이나 콘솔 등 시야를 막는 것들을 피해서 설치한다. 부득이하게 무대와 연사가 안 보이는 세팅일 경우 장비팀에서 별도로 모니터를 설치해서 필요한 요소들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현장에서 최적의 통역 환경을 위해 정말 애써주시는 분들! 늘 감사합니다.)
순차통역으로 이루어지는 회의나 행사는 세팅이 무궁무진하다. 통역사가 연사와 함께 무대에 서서 통역하기도 하고, 연사는 무대에, 통역사는 무대 아래 자리에 낮아서 통역하기도 한다. 비즈니스 미팅의 경우 양자회담처럼 한쪽에는 A사, 다른 한쪽에는 B사 담당자들이 일렬로 앉고 통역사가 A에 고용되었다면 A사 담당자들이 앉은 쪽에서 가장 직책이 높으신 분 또는 통역이 가장 많이 필요한 담당자 옆에 배석한다. 또 타원형 테이블에 쭉 둘러앉아 자유롭게 토론하는 경우에는 통역사가 중앙에 앉아서 통역하기도 한다. 그래서 순차통역 건의 경우 고객사 또는 에이전시에 현장 세팅을 사전에 물어보기도 한다. 적어도 내가 통역을 서서 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복장도, 노트도, 마음도 준비할 수 있다.
순차통역이야 워낙 세팅이 다양하니 차치하고 동시통역 하면서 가장 신박(?)했던 세팅 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한 번은 현장에 도착했는데 통역 부스 안에 타자기(?)가 놓여있었다. 짐을 내려놓고 장비팀과 이야기를 하는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행사는 속기가 필요해서 속기사들이 영-한 통역을 듣고 한국어로 타이핑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속기 장비를 통역 부스 안에 두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속기사 1명과 통역사 1명을 위한 자리만 마련해 두신 것. 통역사 1명은 밖에서 대기하다가 바꿀 차례가 되면 들어오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어디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이 장비업체는 동시통역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곳이었던 것 같다. 고객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통역서비스를 제공하는 통역사와 장비업체는 고객의 요구를 최대한 받아들이되 안 되는 건 안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더 큰 문제는 원인은 모르겠으나 무대 마이크 소리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 동시통역하는데 floor 사운드 안 들어오면 통역 불가능에 가깝다. 부스 문 열어놓고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네, 안됩니다 고객님^^ 결국 이것저것 시도해 보다가 안돼서 스피커를 부스 안에 두고 스피커를 귀에 대고 위스퍼링 하다시피 동시통역을 했다. 통역부스에 속기사 1명, 통역사 2명이 끼어 앉은 채로 말이다. 게다가 속기사의 타자 치는 소리까지... 90분짜리 행사였는데 이 날은 정말이지 하루종일 통역하는 것보다 열 배는 더 힘든 날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이에 비하면 귀엽지만 새로운 경험이어서 나누어본다. 야외무대에서 진행되는 행사였는데 현장에서 부스가 안보였다. 보통 야외 행사는 공간이 넓다 보니 무대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에 부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 날은 눈을 씻고 봐도 부스가 보이질 않았다. 행사 시작 1시간 전이었으니 아직 설치를 안 했을 리는 없고... 현장 담당자에게 부스 위치를 물어보니 멋쩍어하시며 따라오라고 해서 졸졸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가더니 무대 뒤로 가는 것이 아닌가? 허허
부스에 앉고 보니 내 앞에 보이는 장면. 전광판을 이어 붙인 무대 배경 벽 뒤에서 보니 전선과 깜빡이는 조명으로 가득했다. 통역하려면 무대가 보여야 하는데 모니터 설치 가능하냐고 물어보니 안된다고... 결국 그렇게 무대 뒤에서 벽 보며 온전히 귀에 의존하며 통역을 진행했는데 다행히 큰 이슈 없이 마무리되었다.
You can't stop the waves, but you can learn how to surf.
(파도를 멈추게 할 수는 없어도 파도 타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오늘은 통역 현장의 behind the scenes를 가감 없이 적어보았다. 초년차 때는 이런 변수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현장에서 많이 당황했다. 하지만 연차가 쌓이면서 이런 변수가 생겼을 때 조금은 덜 당황하고 빠르게 그리고 (적어도 남들이 봤을 때는) 태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물론, 아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변수들이 또 기다리고 있겠지만! 방심은 금물!) 무엇보다 이런 에피소드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해서 생겨나고 동료 통역사들과 각종 에피소드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때로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게 너무 없고 모든 게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특히 고객사가 안 되는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거나 무례할 정도로 '갑질'을 할 때도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각자의 영역에 있어 서로를 '전문가'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관계를 '갑과 을'이 아닌 '파트너'로 인식하고 바라볼 때 모두가 만족할 만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먼저 유연하게 멋지게 파도를 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