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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Dec 24. 2019

글을 업으로 하는 직업

동경하나 쉽게 얻을 수 없는

어렸을 적 꿈이 참 많았다. 개중엔 글을 업으로 하는 것들도 있었다. 작가가 꿈이었던 엄마와 그런 엄마를 둔 덕에 책으로 가득 찬 집에서 자란 영향이겠지. 천재 한량 시인이라던지, 잡지에 글을 기고하는 사람이고 싶었던 적이 있다. 이 소망은 지금도 유효하다. 따지고 보면 나는 내 것을 표현하기보다 남의 것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누군가의 삶, 글, 말에서 영감을 얻고 내 삶은 어땠는가, 하고 반추해보는 것이 습관이기도 하고. 언젠가는 인터뷰어로 살아보고 싶기도 하다. 언젠가는 나만의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으로 살기에 나는 너무나 게으른 인간이다. 좋은 구절, 단어, 표현들을 읽고 생각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어딘가 적어놔야지, 하는 생각만 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쓰려고 노력한다. 쓰다만 글들과 맺지 못한 글들이 블로그 임시저장글에, 에버노트의 한 페이지에, 텔레그램 나에게 보낸 메시지에 잔뜩이지만. 의지박약러의 삶은 늘 이러하다.


사실상 어느 정도는 글을 업으로 삼고 살고 있다. 모두발언 말씀자료, 축사, 보도자료, 질의서, 연설문 등등. 국회 일의 8할은 글쓰기다. 그리고 그 글쓰기의 8할은 기획력이다. 생각을 글로 풀어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 생각을 만드는데 굉장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런데 그 글들은 내가 쓰고 싶은 글들이 아니다.


적어도 주 3회 짧게는 1장, 길게는 3장 분량의 말씀자료를 작성한다. 쓴다는 말보다 작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일이다. 스태프라는 직업의 특성상 '나'의 글보다는'그' 혹은 '그녀'의 글을 써야 한다. 운이 좋게 의원과 나의 생각의 결이 같다면 글쓰기는 훨씬 수월해진다.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더라도 표현의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면 나는 나의 작법 대신 그의 작법에 맞춰야 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 과정은 엄청난 스트레스 동반한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보좌진인 이상 어쩌겠냐, 의원에게 맞춰야지.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겪고 있는 스트레스나 고민들은 그 농도가 매우 옅어진다. 그러나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관철시키고 설득하는 부류에 속한다. 평행선을 달리더라도, 찍소리 안 하고 순응하는 스타일이 되지 못한다. 의원의 지점과 나의 지점 가운데 협의점을 찾아가는 과정들을 거쳤으나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우리 사장님이 하자는 대로 맞춰야지. 그래서 매일 머리를 뜯으며 글을 짜낸다. 완성한 글이 매번 마음에 들지 않아 차곡차곡 스트레스를 적립하고 있다. 이제 내려놓기에 이르렀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글의 서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메시지는 같을 수 있으나 풀어내는 방식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글의 완성도는 디테일에 있다고 생각한다.(글의 논리구조가 탄탄하다는 전제하에) 뻔한 이야기를 해도 뻔하지 않게 하는 힘.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감동을 주는 글. 사례를 넣을 수도 있고, 유려한 문장으로 마음을 건드릴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을 좋아한다. 힘이 있지만 동시에 따뜻하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절절함은 느껴지지 않지만 '문재인'이라는 사람의 인품이 드러나는 글들이다.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예열 작업이 필요하다. 따뜻한 글을 쓰는 사람이고 싶은데, 우리 사장님은 간결하고 딱딱한 글을 선호한다. 감정을 건드리고 서정적으로 풀어내는 문장들을 사족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딱딱한 글이 나쁜 글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인은 누군가의 마음을 훔치는 직업이다. 말 하나하나의 무게감이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다. 이성으로만 사람을 매혹시키기는 한계가 있다. 거짓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울릴 줄 알아야 한다.


파격적인 어젠다를 던지거나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를 할 때는 논리구조만 탄탄하다면 글 자체의 꾸밈은 생략할 수 있다.(다른 부분들이 가미된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되겠지만) 문제는 누구나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할 때이다. 정치권의 특성상 지금의 패스트트랙 정국과 같은 진흙탕에 빠져 있을 때는 딴소리를 하면 '저 새낀 이 시국에 저런 이야기를 왜 하지?' 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의원, 기자, 보좌진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매일 아침에 열리는 당 지도부회의 공개발언에서는 대부분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나오기 마련이다. 표현 하나, 문장 하나가 좋은 메시지, 그저 그런 메시지를 가른다. 물론 이런 글을 잘 쓰기란 쉽지 않다.


국문학과를 졸업한 이인영 대표는 표현에 예민한 편이다. 나는 이런 작업들이 정치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정치는 프레임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인영 대표가 프레임 전쟁을 잘 이끈다고 생각하지는 않음) 간결하고 쉬운 단어로 상대를 규정하고, 공격하고, 때로는 구슬리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 잘빠진 프레임이 나오면 기자들은 그 프레임을 받아쓰고, 국민들은 언론사들의 헤드라인을 접하고, 그렇게 상대는 우리가 만든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프레임만 잘 짜도 그들의 발언과 행동의 진위와 관계없이 상대 정당, 상대 정치인은 우리가 규정한 '누군가'가 된다. 그래서 나는 말과 표현의 중요성을 아는 것이 정치인의 자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프레임을 매일매일 뽑아내기는 매우 어렵다. 그럼에도 정치란 이러한 전략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 하는 일이다. 번지르르한 말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선의를 구호가 아닌 결과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화학작용이 필요한 법이다.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서, 글을 매일같이 쓰고 있으면서도 글에 대한 갈증이 난다. 진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선거 캠프의 한 도사님이 내게 말했다. '글 써봐라. 작가 하면 김은숙만큼 대박 난다.' 탈국회를 향한 몸부림, 재밌는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뒤섞여 요즘은 총선 끝나고 시나리오 수업을 들어볼까, 작법 책을 사볼까, 하고 있다. 아, 친구랑 재밌는 책(이라 쓰고 돈 되는 책이라 읽는)을 쓰기로 했는데 바빠서 이것도 올스탑 상태다. 다 게으른 내 탓이다. 브런치 글을 시작으로 나는 뭐라도 써볼 작정이다. 소설도, 시도, 에세이도, 일기도 뭐든 좋다. 내 것을 만들고 싶다. 당신의 글이 아닌 나의 글. 평범한 이들의 위대함을 풀어내는 글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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