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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Dec 24. 2019

sleepless city

서울의 불빛들을 사랑해


2019년이 일주일 남짓 남았다. 몇 년 전부터 느끼지만 거리의 캐럴을 듣기란 쉽지 않고 연말 분위기도 나지 않는다. 세상이 그런 건지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지 크리스마스나 한 해의 마지막 날에 큰 감흥이 없다. 여름휴가나 겨울휴가만이 기다려질 뿐.


내 일상 속에서 유일한 연말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국회 정문과 본청 사이에 있는 분수대다. 12월이 되면 전등으로 장식을 해놓는데 불이 들어온 모습은 꽤 설레는 풍경을 자아낸다.


요즘 국회의 밤엔 분수대 말고도 여러 불빛들이 빛난다. 의원회관과 본청 사무실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 불빛, 뚜껑이 열리며 태권브이가 나온다는 본청 지붕의 청동색 빛. 원래라면 한창 성탄절, 연말 그리고 신년을 맞아 지역구를 돌고 있을 국회의원들로 텅 빈 곳이었을텐데 필리버스터 덕분에 국회의 빛은 사그라들 틈이 없다.


여네 마네 하다가 월요일 저녁 7시쯤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시끄러운 고함소리와 함께 본회의기 개최됐다. 예산부수법안을 처리하는데 잔뜩 소란이 일었고, 선거법이 상정되자 예정되었던 필리버스터가 시작됐다. 나는 그 시각 의원회관 사무실 책상 앞이었다.


친한 보좌진들, 기자들과 한국당의 투쟁의지가 너무 약하다, 황교안은 로텐더 홀에서 얼마나 외로울까, 민경욱 코어가 강하네, 필라테스 하나보다 하는 시답잖은 농담들을 주고 받으며 상황을 관망했다. 한국당 꼰대들의 훈계를 듣고있자 하니 안 그래도 피폐한 정신이 더 괴로울 거 같아 에어팟을 끼고 노래를 틀었다. 에픽하이의 in seoul. 가사와 참말로 어울리는 밤이었다.


필리버스터를 하는 의원들과 본회의장을 지키는 의원들, 회관에서 대기하는 보좌진과 정론관에서 기사를 쓰던 기자들 모두에게 sleepless night이었다. 커다란 모니터 앞에 자료들을 잔뜩 띄워놓고 밀린 대학원 과제를 두들겨대던 내게도. 그렇게 나는 도시의 꺼지지 않는 불빛으로 남았다.


국회에서 떠들어대고 있는 한국당 의원들도 결국엔 자기 나름대로 치열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는 거겠지. 그 치열함이(옳고 그름을 떠나) 또 하나의 도시의 빛을 만들어내고 있는거겠지. 익숙해졌다. 국회의 끝없는 갈등과 무능함에. 열을 내다가도 허허 웃어넘기기도 한다. 여당이 되어서 그런가, 내가 투쟁의지가 약해졌는지도 모른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한국당 보좌진들을 보며 우리는 참 다르구나 하다가도 그들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이겠지 하고 만다. 우리는 그렇게 도시의 비생산적인 불빛의 일부가 되어간다.


그럼에도 나는 작열하는 도시의 불빛을 사랑한다. 그 빛들은 누군가의 피로일 수도, 가시일 수도, 슬픔일지도 모르지만 명멸하는 빛들은 내게 묘한 안정감을 준다. 그저 아름답기 때문에 혹은 누군가도 나처럼 잠 못 이루고 있다는 동질감 때문에. 늦은 밤 불이 꺼지지 않은 국회를 잠시 서서 보다 집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하늘에서 달을 찾았다. 달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수호성이 달이라 그런지(별자리 맹신자) 빛을 좇는 하루살이처럼 달을 쫓아가며 산다. 달이 없는대로 꽉찬 달이 뜬대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빛들을 사랑하며,  빛을 존재하게 하는 어둠마저도 사랑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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