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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Dec 24. 2019

다정함에 파묻힐 것 같은 밤

나는 너의 다정함이 무서워


A는 자신을 잘 숨길 줄 아는 이다. 사람들 앞에서 쉽게 웃고 망가지기를 거리끼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다른 이들이 편해지면 그걸로 됐다고 한다. A는 단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타인 앞에서 자신을 낮춰도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가 전혀 마모되지 않는 사람.


A의 실제 성격은 시끄럽고 쾌활하기보다는 조용하고 묵직하다. 나는 가끔씩 A가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에서 혼란스럽지 않을까 걱정하곤 한다. A는 그럴 때마다 싱긋 웃으며 말한다. 괜찮아, 이 모습도 저 모습도 다 나니까. A가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행복이다. 남이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행복해지는 사람. 스스로 행복해질 줄 아는 사람.


나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A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요상한 우월감을 느낀다. A에게 나는 투정 부리듯 말한다. 나는 너의 대부분의 모습을 사랑하지만, 그래도 너의 담담한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줘. 남들은 잘 모르는 네 모습을 보여줘. 내 인생은 너무나 빠르고 복잡하고 시끄럽고 빨가니까. 니가 수묵화 같은 모습으로 옆에 있어주면 안정감을 느끼니까. 나한테 투정 부리는 모습을 봐도 좋은 걸 보니 나는 너를 독점하고 싶나 봐. 나만 아는 모습을 내 안에 가두고 싶나 봐.


내가 이렇게 해서 네가 웃으면 나는 그걸로 됐어. 니가 웃는 모습이 나까지 웃게 하니까. 나는 가끔 그의 대책없는 다정함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담담한 어투로 말을 건넬 때, 눈물이 날 것 같은 때도 있다. 나는 너의 다정함이 무섭다. 이 다정함이 사라지는 때가 오면, 나는 많이 슬플 거 같다. 나의 징징거림과 화와 투정을 때로는 시답잖은 농담으로 때로는 느긋이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안을 주는 A는 어쩌다 내 인생에 나타났을까.


A에게 말했다. 나는 영원을 믿지 않아. 나에게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은 가족에 국한돼. 자신할 수 있어. 나는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연애한 이들에게 사랑이라는 온전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 순간순간 이게 사랑이라는 걸까, 하는 감정이 지나가긴 했지만 그 관계 자체가 사랑으로 점철된 적은 없는 거 같아. 그래서 너의 이 다정함도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믿어. 언젠가 너가 사라지고, 내가 너를 잊고, 그렇게 살아갈텐데. 그런데 너의 이 절절한 다정함은 문득 문득 생을 살아가면서 떠오를 것 같아.


A가 말했다. 그게 영원한거야. 항상 인지하지 않아도 문득문득 내가 떠오르는 게 영원이 아니고 뭐야.


나는 A가 내 곁에 영원히 있어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아서 좋다. 쓸데없는 희망을 안겨주지 않아서. 그는 그냥 여기 있을 뿐이다. 내가 A를 먼저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특별한 존재가 아닌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너는 내 곁의 어떠한 사람보다 특별한 사람이다. 근데 너는 마치 특별하지 않은 사람처럼 군다. 한 번도 평범해본 적이 없던 A는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집을 사고 유명해지는 것보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A야, 행복하려면 돈이 필요해. 너는 한 번도 물질적 부족함을 느껴본 적이 없잖아. 그래도 너는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조금은 흔들리고 헤매겠지만 결국엔 행복해지는 길을 찾을 것 같아.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가끔씩 A에게 심술이 나 연락을 하지 않는 날, 귀신같이 알고선 얼굴을 불쑥 들이민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는 너 보고 싶었는데. 나는 아프지 않게 니 가슴팍을 치며, 징그럽다느니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지 실없는 핀잔을 주고 A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러면 A는 또 싱긋 웃는다. 그렇게 다정하지 말어. 너 없으면 나 진짜 어떡하라고, 하는 말에 A는 답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다정할 뿐이다. 나는 가끔 너의 다정함에 파묻혀 이 밤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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