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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Jan 04. 2020

굿바이 2010's

뒤늦은 복기. 이겨낸다! 귀차니즘!


나는 10학번이다. 스무살 때 대학에 들어갔고 해의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 나이의 앞자리 숫자도 변했다. 그래서 2010년에서 2020년으로 바뀌는 해가 나에게는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아직은 한참 남았다고 생각했던 20대를 지나 서른이 된 것이다. 서른을 맞이했을 때 기대했던 모습 중 이룬 것도 이루지 못한 것도, 이루지 못할 것들도 있다. 나는 과거를 돌아보기보다는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뒤늦게나마 나의 20대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순전히 개인적인 기록을 위해서다. 20대의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이겨낸다! 귀차니즘!


1편은 삶의 큰 흐름으로 2편은 개인적인 조각들에 대해 다뤄보려한다.


0. 재능과 노력 모두가 아쉬웠던 10대

어릴 적부터 나름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고, 중학교 입학 후 수업만 착실히 듣고 치른 시험에서 전교 1등을 차지하고 나선 나는 공부를 놓지는 않되 그렇다고 죽도록 하지도 않는 학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엄마는 그때의 전교 1등이 나에게 독이 되었다고 지금까지도 말한다.


누구를 때리거나 돈을 뺏거나 하는 사고를 치진 않았다. 다만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수업을 빼먹고 머리를 염색하고 이리저리 볶아보는 일탈을 일삼는 학생이었다. 그러나 늘 전교 10등 안을 맴도는 성적 덕분에 선생들은 나를 예뻐했다. 그리고 나는 그 특권을 학창시절 내내 영유했다.


타고난 머리가 나름 괜찮으니 노력만 더해지면 좋겠다는 아쉬움을 갖던 엄마는 나를 동네 고등학교가 아닌 시골 기숙사 학교로 유배보냈다. 중학교 겨울방학 선행학습을 하러 기숙사에 짐을 옮기고 차를 타고 점으로 사라지는 엄마를 보면서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다음날 귀를 찢는 점호 벨소리를 듣고 비몽사몽 아침을 먹기 위해 기다리던 줄에서 이탈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 전까지. 그 시간에 일어날 리 없는 엄마가 공중전화의 신호음이 한번도 가기 전에 전화를 받고, '엄마' 하고 내뱉는 순간 눈물이 터져나왔다. 떨어져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 전학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결국 3년 내내 시골학교에 처박혀 있었다. 아빠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폈고, 나와 엄마는 베갯잇을 적시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학교 곳곳에 CCTV가 설치돼있고, 개인 노트북이나 핸드폰은 사용이 불가하며, 밤 12시까지 야자를 해야했던 학교(야자 시간에 화장실 가는 것도 벌점을 주는 비인간적인 학교였다)에서 나는 공부보다는 독서와 잠에 열중하는 학생이었다. 그 시절에는 공부 빼고는 다 재밌었다. 모의고사 성적을 대문짝만하게 일렬로 세워 게시판에 전시하던 학교에서 나는 노력에 비해 늘 상위권을 차지하는 학생이었다.


학창시절 나의 목표는 연세대 정외과였다. 연세대 티셔츠를 잠옷으로 입고, 슬로건을 학교 독서실에 붙여놓고 야자 2교시까지는 늘 엎드려 자던 나에게 사감은 코웃음 치며 말하곤 했다. '그렇게 잠만 자면 꿈에서는 연세대 가나?' 중학교 시절 들었던 버릇이 고등학생이 된다고 달라질 리 없지. 돌아보면 무슨 생각으로 수능을 치러 갔는지 모르겠다. 수리 시간에는 아는 문제만 풀고 엎드려 잤다. 제2외국어 시험까지 마치고 나는 기숙사가 아닌 집으로 돌아갔다. 가채점을 하고선 빼박 재수행이라고 생각했고, 내 성적을 전화로 들은 담임은 한숨을 쉬었다.


가채점을 요상하게 했는지 성적표에 찍힌 등급은 +1이었고 표준점수도 꽤 잘 나왔다. 연세대에 갈 성적이 아니었을 뿐. 재수하기엔 아깝고 그냥 가기엔 아쉬운 성적표를 쥐고 냉철하게 생각했다. 너의 끈기와 적성으로 재수는 무슨 재수냐, 그냥 못 먹어도 고다. 그렇게 나는 이대와 외대에 합격했다. 내 인생에서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학교였다. 고대 서어서문학과를 나온 엄마의 친구가 외대에서 외시 준비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추천이 있었고 여대에 가기 싫다는 생각으로 내 인생 2막이 이문동에서 열렸다.



1. 스무살, 내가 원하던 캠퍼스 라이프는 이게 아니야.

OT를 위해 상경해 외대앞역에 내린 나의 첫 느낌은 '이게 서울이야?'였다. 신촌에서의 캠퍼스 라이프를 꿈꾸던 내게 좁고 퀴퀴한 외대앞 골목과 공사판이었던 조막디한 학교는 절망만을 남겨줬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정문에서 후문까지 15분각! 개이득!을 외치며 수업을 듣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 학년에 120명이나 되는 스페인어과에서 나는 마음맞는 친구들 몇과 어울려 다녔고 친구보다는 선배들과 가깝게 지냈다. 축구동아리도 재미없어 한 학기만에 때려치우고 아싸 아닌 아싸로 대학시절을 보냈다. 남들 다하는 미팅도 해보고 소개팅도 해보고 클럽도 다니고 원주율(3.14) 학점도 받아봤다. 별거 없던 스무살이었다. 마냥 설레지도 반짝거리지도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조금 날카로웠고 마음앓이를 하기도 했으며 흘러가는 시간을 그냥 내버려뒀다.


1-1. 내 인생에 대기업 입사란 없다. 진로찾기 대모험.

나를 포함해 회사원 아버지를 둔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살면서 한번도 삼성, LG, SK 등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 꿈들은 여럿 바뀌었지만 민간 영역보다는 공적 영역에서 일을 하겠다는 의지는 변치 않았다. 아, 입학을 결정하게 된 외시 준비는 진작에 포기했다. 나는 인풋 대비 아웃풋이 최대한 빨리 나오기를 원하는 사람이고 언어를 공부로 하는데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희박한 합격률 또한 주요한 이유였다. 국정원에 다니는 삼촌의 추천에 따라 휴학을 하고 대구로 내려갔다. 몇가지 책을 사서 보다가 때려치웠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키는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또 나는 어느 정권이든 충성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아니오'라는 답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선 기자 준비에 돌입했다. 사회의 문제를 찾아내고 대안을 마련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경북대 신방과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해 양해를 구하고 경대 학생들과 스터디를 시작했다. 상식 공부에 논술 준비까지 꽤 오랜 시간을 준비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론'고시'인 만큼 투입하는 절대 시간이 필요했다. 와중에 JTBC 인턴도 지원해봤지만 낙방이었다. 3개월 남짓하고 그만뒀다. 그리고 학교 동기에게 지방선거를 도와줄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당연히 수락했다.


국민들 대부분이 아는 국회의원의 지역구였다. 지선에 자기 사람들이 출마하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재밌게 일했다. 선거 공보물도 만들고 로고송도 만들고 사진도 찍고 후보와 함께 명함도 돌렸다. 꼭두새벽에 나와 12시가 넘어 들어가는 생활도 즐거웠다. 2014년, 세월호에서 아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던 때가 생생하다. 사고 당시 백반집 TV에서 속보를 접했다. '전원 구조'라는 속보를 보며 점심을 후다닥 먹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우리는 가끔은 울며, 웃으며 그렇게 선거를 끝냈다. 결과는 당선이었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24살이었다.


2. 인적성 시험도 없고 자소서도 한 장만 내면 되는 직장, 국회

지방선거를 뛰면서 만난 한 선배는 국회에서 일하고 있는 보좌진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으면 국회에 들어와서 경험해보는 게 어떻냐고 조언해줬다. 나는 그 당시 정치대학원을 가느냐, 국회에 가느냐 기로에 서있었다. 서울대와 서강대 두 군데에 지원을 했는데 서울대는 떨어지고 서강대는 붙었다. 그래서 국회행을 선택했다.


국회의 입사시스템은 간단하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선거캠프를 통해서 당선된 의원과 같이 국회에 들어온다.

2. 국회 홈페이지 채용공고를 보고 지원한다.

3. 낙하산 프리패스


선거가 없는 해였으니 나는 2번을 통해서 국회에 들어왔다. 첫 시작은 보건복지위원장실의 3개월짜리 입법보조원이었다. 축사, 말씀자료 작성, 법안 만들기, 토론회 준비 등 전반적인 국회의 일들은 두루 겪은 편이었다. 아, 여자라는 이유로 차 내는 일과 설거지도 내 몫이었다. 소중한 동갑내기 친구도 얻었다. 인턴을 지원하기 위해서 몇 군데 원서를 넣고 면접도 봤다. 국회는 이력서 한장, 자소서 한장, 포트폴리오 약간만 제출하면 되는 곳이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나 남다른 아이디어 같은 것들을 짜내느라 고생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사실 대기업 원서를 한번도 안 써봐서 어떤 항목이 필요한지는 잘 모른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괜찮은 직장이니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면접을 본 서너군데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2015년 8월, 나는 대학교 졸업을 했고 불안함에 떨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면접을 봤던 ㅇ의원실 보좌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국정감사 기간이 곧인데 비서관 한 명이 육아휴직을 써서 손이 필요하다며, 인턴이 아닌 입법보조원으로 일해볼 생각이 있냐는 제안이었다. 그때의 나는 사명감과 국회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불타오를 때라 '돈이나 직급은 개의치 않는다! 함께 일하고 보좌관님께 많이 배우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사수는 나의 이러한 모습을 높게 평가했다고) 그렇게 나는 두 번째 입법보조원 생활을 시작했다. 8월에 입사해 바로 국정감사 준비를 하고 나는 첫 번째 국정감사를 꽤 훌륭하게 치러냈다. 급하게 준비했지만 그럴싸한 야마를 뽑아내고 질의서를 만들어내고 의원이 질의장에서 피감기관을 향해 내 질의서를 읊었다. 짜릿한 경험이었다. 물론 의원실 생활 중에 인턴 언니와의 불화, 비서관들의 시기와 질투 등은 양념처럼 내 인생에 끼어들었지만, 돌이켜보면 뭐 인간이란 것이 다 그런 것이고 국회란 곳은 좀 더 그 경향이 심하구나, 하고 체념하고 산다.


16년 총선을 앞두고 모시던 의원이 컷오프됐고 새로운 후보와 함께 선거를 치렀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그렇게 백수가 된 나는 20대 국회 개원 한달 후에 사수와 함께 새로운 의원실로 옮겼고, 사수가 청와대로 적을 옮기면서 의원실에 오만정이 떨어진 나는 경남도지사 선거를 위해 사표를 기꺼이 냈다. 내 나름대로의 승부수였다. 그리고 지금의 의원실에서 비서관으로 승진했고 21대 총선을 준비한다.


3. 국회는 내 청춘이 아깝지 않았던 곳일까.

국회에서의 4년 반을 하나하나 복기하고 싶지는 않다. 대부분 비슷한 패턴들이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며 살아왔다. 어디든 그렇듯 쏟아지는 일보다는 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가 무거웠다. 성깔을 죽이며 사는 게 힘들었고, 그래서 불합리한 일에는 목소리를 냈다. 때로는 현실에 굴복하기도 편승하기도 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도 더러 있었다. 안그래도 더러운 성격이 심각하게 더러워지는 곳이 국회였다. 내가 상사가 되면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내가 의원이 되면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참아냈다. 늘 한계에 부닥쳤다. 그럼에도 잘 버텨왔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바꾸고 싶다는 마음으로 국회에 발을 들였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일을 하면 그걸로 되었다, 라는 마음이 전부였다. 그게 제일 힘들더라, 는 결론에 이르렀다. 좋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고 좋은 일을 하겠다는 마음만으로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숙제처럼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다 보면 사고가 마비된다. 글을 쓰고 문제를 찾아내지만 온전한 나의 뜻이 아니었다. 성과를 내야 하니까, 의원 이름이 한 번이라도 뉴스에, 신문에 더 나와야 하니까, 선거에서 이겨야 하니까. 한바탕 일이 몰아치고 나면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내가  일이 정말로 세상을 바꿨을까. 나는 진실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문제를 찾아내고 대안을 제시했는가.' 대답은 '아니오'다. 해야 하니까, 했던 것일 뿐이다. 의원이 좋아하는 아젠다니 팠을 뿐이다. 그리고 이 자괴감은 나를 조금씩 잠식하며 국회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키워냈다. 좋은 일은 여기가 아니어도   있어.


국회는 사람의 사고을 제한한다. 국민을 위해 일하는 곳이라곤 하지만 여의도 정치 셈법에 움직이는 곳이다. 한국의 직장 대부분이 그렇듯 잦은 이동은 끈기가 없다는 평을 만들고, 한 곳에서 꾸준히 일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한 때는 그 사고에 갇혀있었다. 여의도에서 커리어를 쌓고 언젠가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출마하면 되겠지.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더러운 꼴을 봐도 조금만 더 버텨야지. 모두 여의도식 사고다. 나는 이 사고를 깨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서른이 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지금 나는 내 30대를 국회에서 보내지 않을 방법을 고민한다.


국회에서의 5년 가까운 시간들은 나에게 많은 것을 안겨주었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글을 쓰던 시간, 상사와 동료들의 비열한 공작들, 때로는 참는 법을, 정당하게 문제제기하는 용기를, 다른 기회를 위해 이룬 것들을 던지고 내딛는 새로운 도전을, 사람 때문에 머리를 싸매던 괴로움을. 그 어느 직장보다 좋든 나쁘든 많은 것을 경험했다. 그러나 늘 그림자로 남아야 하는 보좌진만 남았지 ‘나’는 남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흡수하기보다는 끊임없이 밖으로 무언가를 끄집어내야 하는 일의 특성상 많은 것들이 소진됐다.


그래서 30대에는 나의 것을 만들어 볼 계획이다. 20대의 시행착오와 결핍을 하나하나 채워가보려고 한다. 국회에 온 것을 후회하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겠다. 가슴이 뛰었던 곳이고 실제로 가슴을 뛰게 하는 일도 해냈다. 굳이 대답하자면 후회는 없다. 그러나 반짝거리는 기억은 몇 되지 않는다. 국회는 한계가 뚜렷한 곳이다. 나 자신도 의원 개개인도. 원하던 것은 다 이뤘다. 이제 새로운 곳에서 다른 것들을 이뤄보려한다. 4월 총선까지는 선거 준비로 눈코뜰새 없이 바쁠테지만 나는 더이상 남의 운명이 내 운명이 좌지우지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내 것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이제 가진 것을 내던지고 다시 시작하는 일만 남았다. 두렵지만 재밌을 것 같다. 그리고 결국엔 잘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도 있다.


아주 긴 고민의 시간이 한동안 계속될 것 같다. 나는 그 시간들이 고통스럽겠지만 기대가 된다. 나의 생을 온전히 살아내는 30대를 만들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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