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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Jan 09. 2020

제임스 본드가 되고 싶었다

현실은 100점에 55점

007시리즈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영원한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 존잘남 피어스 브로스넌, 007 시리즈의 부흥을 가져온 다니엘 크레이그, 매력적인 본드걸들. 잘 빠진 본드카를 타고 유럽 곳곳을 누비며 총격전과 추격전을 이어가는 영화를 누가 좋아하지 않으랴. 브리오니와 톰포드의 환상적인 수트를 입고 우아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총을 쏘는 대체 불가 요원은 내게 이룰 수 없는 로망이었다.(한때 국정원을 준비했던 것은 알게 모르게 이러한 로망이 꽤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교환학생으로 마드리드에 있을 때 Skyfall이 개봉했는데 초딩 수준의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주제에 더빙판을 보러 가기도 했다.(자막판이 우리나라처럼 활성화 돼있지 않은 탓) 


사람은 갖지 못하는 것에 욕망하기 마련이다. 대한민국은 총기소지가 불법인 나라다. 경찰들조차 실탄을 쓸 일이 많이 없다. 군대에 가지 않는 여성이 총을 손에 잡아보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고 싶은 건 불법이 아닌 한 해보자' 주의인 나는 최근 극에 달은 스트레스를 푸는 동시에 못 다 이룰 로망을 경험이라도 해보고자 실탄사격장을 찾았다. 


매그넘, 베레타, 글록.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권총들이 나열된 것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믿음 아래 나의 픽은 글록17. FBI의 권총이자 전 세계 군과 경찰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권총이다. 글록의 멋은 디자인이라고는 1도 신경쓰지 않은 투박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얄쌍하게 빠진 총보다 투박한 총이 더 매력적이게 다가왔다. 매드맥스, 스카이폴, 스펙터, 다크나이트, 인셉션에서도 글록이 나온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영화들이다. 글록을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물론 영화에서처럼 한손으로 빵야빵야는 못하겠지만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Hold up your hands! Police, don't move.' 혹은 'Freeze!'하며 간지나게 쏘고 싶었다. 웬걸, 두손으로 꽉잡은 권총의 첫인상은 '오우씨, 무거운데'였다. 이걸 어떻게 한손으로 흔들리지 않고 쏘는거지? 하는 의문은 글록이 그나마 다른 권총에 비해 가볍다는 요원의 이야기를 듣고 더욱 강해졌다. 요원이 설명하는 영점을 어쩌구, 수평을 어쩌구하는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귀마개 탓도 있었지만 바로 옆에서 들리는 총소리에 위축됐기 때문이다.


일단 쏴보자 하고 당긴 첫 발의 느낌이 생생하다. 심장은 콩닥거리고. 탄피는 가슴으로 튀고. 손엔 땀이 나고. 영점을 맞추느라 한쪽 눈을 감고 있자니, 알콜중독자마냥 손이 덜덜 떨렸다. 직장 상사라고 생각하고 아주 작살을 내겠다는 자신감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 되는대로 쏘긴 했는데 역시나 성적은 엉망이었다. 


10발 중 2발은 표적에 맞지도 않았고, 7발의 점수는 55점. 아, 역시나 나에게 블랙요원의 길은 허락되지 않는구나. 같이 간 친구는 97점의 성적을 냈다. 성이 진씨인데 진씨들은 다 총을 잘 쏘나보다. (예를 들어 진종오) 사격하러 간다고 옷도 블랙 수트를 입고 갔건만, 부끄러운 성적을 안고 친구의 표적을 뺏어 인증샷이나 남겼다. 


긴장해서 그런지 내가 무슨 위급한 상황에 투입된 요원이 된 기분이었다. 어두컴컴한 사격장에서 표적을 겨누는 블랙요원. 총을 다 쏘고나서도 두근거리는 심장소리는 꽤 오랫동안 들렸다. 묘한 쾌감이 있는 행위였다.

내 부끄러운 성적은 뒤로하고 일단 상황극에 몰두했다. 친구가 찍어준 영상보면 뒷모습은 하릴없는 국정원인데. 역시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크다.


설욕전을 위해 다시 실탄사격장을 찾았다. 총기는 저번과 같이 글록17. 이번에는 15발에 129점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첫번째 사격처럼 손에 땀이 나지도 않았고 영점도 잘 맞췄다. 나름대로 연발로 쏴보기도 하고. '오, 나 이번에 좀 요원같았어.'하고 본 사격동영상은 안습 그자체였다. 윙크고자인 내가 영점을 맞추려고 한쪽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마치 짜부된 만득이였고, 심지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에는 반동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더라, 이것이에요. 성적은 잘 나왔을지언정 표정은 아주 못볼걸 본 사람처럼 오만상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방금 다시 동영상 봤는데 다시봐도 못봐주겠다.)


이렇게 나의 제임스 본드의 꿈은 좌절됐다. 그래도 뭐 어때. 007처럼은 아니지만 하고 싶은 걸 또 하나 해냈다.뒷모습만은 제임스 본드니 절반정도의 성공이 아닌가. 귀차니즘이 베이스가 된 나란 인간에게 이러한 동력은 매우 소중하다. 나는 조만간 또 총을 쏘러 갈 것이다. 하루하루 병신력을 갱신하는 상사덕분이다. 아, 얼마나 건전한 스트레스 해소법인가. 다음번에는 상사 사진을 붙여놓고 쏴도 되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총을 양손으로 잡고, 영점을 맞추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련의 과정에서 느껴지는 긴장감과 총알이 발사되며 나는 탕-소리와 함께 느껴지는 짜릿함이 좋기 때문이다. 사격은 나의 삶의 방식과 유사한 점이 많다. 표적 하나만 보고 그 표적을 맞추기 위해 쏘는 행위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까지 달려드는 성격과 꽤 어울리지 않는가. 나는 목표지향적이고 성취감에 중독되어 있는 편이다. 성취 후에 밀려드는 허무나 공허는 크지 않다.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때문이다. 그 목표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스쿼트 중량을 늘리는 것, 책을 완독하는 것, 오늘 이렇게 나의 기록을 하나 더 늘려가는 것. 나는 이렇게 소소한 짜릿함을 느끼며 살고 싶다. 큰 성취에서 오는 벅참도 좋지만, 사소한 것들의 위대함을 늘 새기고 싶다. 돌아보면 큰 성취는 그만큼의 빈칸을 안겨줬다. 무엇을 이루기위해 이를 악물고 감내하고 노력했던 에너지가 훨씬 컸던 탓이다. 후회는 없다. 55점짜리도, 129점짜리도. 이러한 결과도 저러한 결과도 다 내가 만든 것이다. 총을 쏠 때는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에 집중하게 된다. 거시적인 목표를 향해 나는 또 달려가겠지만, 그럼에도 순간을 놓치고 살지는 말자. 이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생을 이루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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