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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Nov 16. 2020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 동물과 살고 있는가

101일간의 여정 4주차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함께 해온 친구, 대학 친구, 그리고 그들의 지인들이 모였습니다.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써 내려가는 답변들을 읽는 시간이 너무나 신납니다. 미지의 사람들의 삶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거든요. 10여 년 가까이 시간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의 새로운 면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잘 알아가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매일 답변을 공유하고, 2주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10명이 써 내려갈 101일간의 여행기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매우 설렙니다. 모두에게 의미 있는 여정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16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 동물과 살고 있는가


우리 집에 아주 우연하게 착륙한 우리의 외계인 송강호를 소개할 시간이다. 2013년 생, 제주 출생, 남아, 러시안 블루, 송강호, 별명은 십억이, 꼬무. 원래 이름은 쿤이었다. 까마쿤이라는 아이스크림에서 따온 아주 어이없는 이름. 아빠는 강아지 파였고 엄마는 동물을 좋아하나 키울 생각은 없는 사람이었다. 나와 동생은 심지어 동물을 무서워했다. 초딩 때 아빠가 친구네 강아지를 데리고 왔지만 사람을 좋아하며 쫓아오는 그 쪼꼬만 생명체가 뭐가 그리 무서웠는지 아침마다 나와 동생은 하얀 아기 말티즈를 피해 도망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결국 아빠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강아지를 친구네 돌려줘야 했다. 그러던 우리가 어떻게 고양이를 키우게 되었는가. 


바야흐로 내가 국정원과 언론고시를 준비하겠다며 본가에 내려와 휴학 중이던 2013년이었다. 제주도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친구가 자신의 동기가 군대에 가야 하는데 고양이를 2년만 맡아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강호의 사진을 본 누구나 이 아이를 데려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제주총각 송강호는 비행기를 타고 대구로 날아와 우리의 가족이 되었다. 친구 말로는 개냥이라고 하던데, 낯선 장소와 사람들 사이에서 송강호는 밀당 고수 미묘로 성장했다. 간식 먹을 때는 기가 막히게 알아서 다리에다 머리통을 부비고, 사람이 그리울 땐 이불 속을 파고들어 볼에다가 꾹꾹이를 하고, 새벽에 우당탕 놀고 싶을 때는 머리카락을 물어뜯는 우리집의 사랑스러운 침략자.


이름은 전적으로 나의 의견이 반영됐는데 송강호 배우를 워낙 좋아한 탓에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물론 고양이 송강호의 미모는 배우 송강호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내 새끼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진짜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심장을 부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꼬무란 별명은 동물 이름을 음식 이름으로 지으면 오래 산다는 미신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꼬막무침의 줄임말이다. 십억이는 10억을 줘도 강호를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생긴 별명이다. 


강호가 오고 나서 처음엔 깜짝깜짝 놀랐다. 살금살금 걷는 걸음이나 한밤중에 펄쩍 침대와 옷장과 책장을 괴도 루팡처럼 뛰어다니는 습성 같은 것들 말이다. 부주의한 내가 물렁물렁한 생명체를 만지다가 얘가 다치면 어떡하지, 하는 우려도 함께였다. 물론 지금은 나의 신체 일부처럼 만지고 깨물고 그런다. 난생 처음 비염도 얻었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물고 빨고 안고, 그러면 눈을 비비고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리다 잠이 든다. 아침에 퉁퉁 부은 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송강호를 포기할 수는 없다. 너와의 연애는 너무 고통스럽지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누군가의 메모처럼. 


우리 모두 새로운 가족과 함께하는 삶이 서툴렀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생활방식을 바꿔가며 서로가 잘 지낼 수 있는 루틴들을 만들어갔다. 나는 강호를 만나고 난 후, 새로운 사람과 함께 살면 어떻게 나 자신을 바꿔야 할지 조금은 알게 됐다. 반려동물은 영원한 아기 같은 존재다. 완전한 소통이 힘들고 연약하고 모든 것을 돌봐줘야 하니까. 나는 강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엄마가 되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내새끼한테 최고로 좋은 걸 먹이고, 좋은 데서 재우고, 행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도 안 먹는 영양제를 챙겨 먹이고, 고단백 그레인프리 유산균 함유 사료와 닭가슴살, 참치, 연어 등등 건강을 해치지 않는 간식들을 찾아 헤매고.  찌부가 돼서 잠에 곯아떨어진 모습을 봐도 내 눈에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새끼다. 모든 고양이들은 사랑스럽지만 그래도 내새끼가 다른 집 고양이보다 훨씬 이쁘다. 극성 엄마의 모습을 문득문득 발견했다. 


집에 홀로 두고 나가는 날이면 복도에서 애처롭게 현관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눈에 밟혔다. 그리고 죄책감이 따라왔다. 잠을 너무 많이 자도 걱정이고 자지 않아도 걱정이다. 어제보다 덜 뛰어놀면 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피곤한 날이거나 귀찮은 날에 강호가 달리기를 하자며 나를 깨물어도 애써 모른 척하고 잠들 때가 있다. 그러면 그다음 날 '나는 나쁜 누나야’라며 자책한다. 길어봤자 30분인데, 그걸 못 참고. 워킹맘이 된 나의 모습이 이렇겠구나. 


내 수명을 떼다 주고 싶을만큼 사랑스러운 우리 아가. 가끔은 허공을 보고 하울링 하는 우리의 외계인. 우리는 강호가 그럴 때마다 외계의 행성과 교신중이라고 믿는다. 어쩌다 우리집에 불시착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네 덕분에 우리의 삶은 한층 더 다채로워졌고 행복해졌단다. 애교 따위 없어도 돼. 그저 건강하게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어다오. 존재 자체로 너는 너의 본분을 다하였다. 아주 성공적으로 우리 가족을 침공한 깜찍한 우리의 침략자.



17 밤에 쓴 편지를 아침에 읽어보았는가


편지를 마지막으로 썼던 것이 언제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구 남친의 생일날 억지로 감동을 쥐어짠 편지가 가장 최근이었던 것 같다. 편지를 가장 많이 쓰던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기숙사형 학교인데다 핸드폰도 쓰지 못했던 감옥이었기에 엄마와 자주 이메일과 손편지로 소통했다. 물론 핸드폰을 몰래몰래 쓰면서 매일 밤 통화도 했다. 


학교 수업이 끝난 뒤 우리는 한 시간의 석식시간 후 율호 독서실로 끌려가야만 했다. 강제로 12시까지 야자를 해야 했는데 첫 두 시간은 일단 취침이 루틴이었다. 그리고 20분간의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빠르게 라면을 먹고 남은 두 시간동안 문제집을 뒤적거리다 기숙사에 올라갔다. 달콤한 취침시간은 종종 악마 사감의 등짝 스매싱으로 방해받곤 했다. 그녀는 전직 투포환 선수였다. 스매싱의 위력으로 잠이 달아나면 나는 그 시간 동안 옆 짝꿍이나 나보다 앞쪽에 앉은 친구들에게 쓸데없는 쪽지나 미래에 대한 공상으로 가득 찬 편지를 쓰곤 했다. 3년 내내 요주의 인물이었기에 나의 독서실 자리는 사감의 감시 책상 바로 앞이어서 쓰던 편지를 빼앗기는 불상사도 더러 있었다. 그녀는 나의 편지를 읽고 비웃음을 날린 뒤 벌점을 주고 유유히 떠났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험한 말이 나온다. 


내가 썼던 편지들 대부분은 야자시간, 즉 밤에 쓴 편지다. 그러나 아침에 다시 읽어본 적은 없다. 야자 시간에 쓴 편지들의 대다수는 헛소리들이었고, 때론 아침에 다시 읽어보기에는 간지러운 말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편지지를 가득 채우고 난 뒤, 내가 쓴 편지를 읽어보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이 부분에 이런 말을 덧붙일 걸, 이건 빼버릴 걸,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편지를 다시 쓰거나 하지는 않는다. 더 쓰고픈 말이 떠올라 편지지 한 장을 꺼내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까지 들어차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뒤로하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어느 때의 편지에 못 다 전한 말을 전하기 위해 한 번 더 편지를 건네는 기회가 생기니까. 


18 어떤 춤을 배웠는가


우리 아파트 앞 상가 4층에는 발레 학원이 있었다. 첫째 딸에게 엄마 아빠는 가능하면 많은 경험을 선사하고자 했다.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알기 위한 탐색의 시간들이었다. 6살 때의 일과를 복기해본다. 유치원에 다녀와 어떤 날은 미술학원을, 어떤 날은 수영장에 갔고, 어느 날에는 집 앞 4층으로 향했다. 피아노 학원은 매일 다녔다. 이 중 피아노에만 재능을 보였고 나머지는 거의 배우지 않는 것이 나을법한 수준이었다. 미술학원 선생님은 미술 대신 다른 걸 배워보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기도 했다.


어쨌든 팔다리가 길쭉한 체형이니 발레도 잘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나는 타고난 뻣뻣맨이었다. 플리에, 탕뒤, 쥬테 등 다양한 동작을 배웠지만 엉성한 소금쟁이를 보는듯했다. 6살이면 뭘 해도 귀여울 법하지만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 나는 지금도 손이나 몸을 쓰는 일에 젬병이다. 시작한 김에 1년은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학원을 다니고 있던 도중 한 아이의 유괴사건이 발생한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이름이 매우 특이했기 때문이다. 박초롱초롱빛나리 양이 발레학원 강사 일당에게 납치당한 일이었다. 당시에 꽤 떠들썩하게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했었다. 아빠는 지레 겁을 먹고 발레 수업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로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혼자서 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들고 방방 뛰긴 했지만.


그리고 15년이 흘러 스페인어과로 진학을 하면서 나는 하루만에 춤을 익혀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새내기 배움터에 갔는데 띠부론이라는 노래에 맞춰서 춤을 단체로 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금 어이가 없었다. 춤이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었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게 쑥스러워 쭈뼛쭈뼛대며 대충 동작만 따라했던 기억이 난다. 다시 떠올려보니 조금 수치스럽다. 아직도 전진스페인어과에서는 새터에서 띠부론을 추는지 궁금하다. 플라멩고 동아리도 있었는데 당연히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들어간 동아리에서는 새내기 신고식으로 꼭 그 해 유행하는 아이돌의 춤을 추게 했는데 나의 흑역사 중 하나다. 여자 동기 셋이 모여 시크릿의 매직을 연습했는데 다들 얼큰하게 취해 비틀거리며 어째 저째 춤을 마쳤는데 선배들의 아주 싸한 공기가 아직도 서늘하다. 이 역시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 


춤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클럽이나 페스티벌에서 내일이 없을 것처럼 한바탕 춤을 추고 다녔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음악이 좋고 그 분위기가 좋아서 절로 나오는 춤들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종이인형 광희가 추는 춤처럼 보일지 몰라도 뭐 어떤가, 나만 신나면 됐지.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그러고 다니지도 못한다. 그래도 마음만은 이팔청춘이라고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금 친구들과 넓은 잔디밭에서 우리만 있는 것처럼 신나게 춤을 추고 싶다. 서로 눈을 마주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땅이 꺼져라 방방 뛰어야지!


19 행복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또 다시 행복에 대한 질문이다. 사실 나는 행복에 대해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하고 살지 않는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행복의 역치 또한 낮은 편에 해당한다. 생은 찰나의 행복과 그보다 오래 지속되는 고통의 반복이니, 찰나의 행복을 자주 느끼자는 취지에서다. 강도보다 빈도에 집중하는 것이다. 타고난 천성도 작은 것에 쉽게 감탄하고, 남들이 엥?하는 지점에서 행복을 느끼기도 하지만 나 스스로도 그런 연습을 해왔던 것 같다. 아주 힘들었던 날, 퇴근하고 잠시 누워있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느끼거나. 실컷 울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하소연을 할 때 마음이 찡한 위로가 돌아올 때 내 주변에 참 좋은 사람이 많구나, 하며 행복을 만들어낸다. 기분이 안좋은 날은 부러 빨래를 돌리고 방 안에 가득한 섬유유연제 향을 맡아본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행복은 자신의 마음에서 탄생한다. 


하루를 찬찬히 되돌아보자. 어느 순간에는 아주 찰나의 행복이 존재했을 것이다.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자면 행복의 빈도가 아주 잦았다. 좋아하는 친구들의 생일을 맞아 맛있는 밥을 함께 먹었고, 미세먼지가 함께했지만 완연한 가을날을 느끼며 야외 테라스에서 밀린 수다를 떨었다. 품절로 한 달째 기다리던 히노끼 향 바디로션도 구매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동생과 팥호빵과 피자호빵 둘 중 뭘 먹을지 고민하며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부분들일지라도 행복의 역치가 낮은 나에게는 모두 행복이 탄생한 순간들이었다.


물론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껴지는 행복이 분명 있을테다. 그러나 이렇게 늘 강도가 강하고 순도가 높은 행복이 찾아올 수는 없다. 사실 행복이 별건가 싶다. 행복은 저절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기분전환을 위해 충동구매를 할 때가 있다. 충동 구매가 아니더라도 사고 싶었던 옷이나 소품들을 사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도피성 기분전환이라고 하고 이런 것들이 힘든 상황을 타개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어차피 행복의 지속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순간적이고 휘발성이 강한 행복은 행복이 아닌가? 내일을 살게 하는 힘이 곧 배달될 택배일 수도 있듯이 행복도 그러하다. 누가 뭐라고 하건, 잠깐일지라도 행복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


P.S 방금 옆에 앉아있는 동생에게 물었더니, 그녀는 불행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불행이 있어야 행복도 있다는 의미다. 과연 그럴까. 우리가 태어나서 행복한 상태만 유지되었다면 행복하지 않은걸까. 행복은 정말로 불행이나 어떤 반대의 성질로부터 탄생하거나 존재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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