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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Nov 22. 2020

모험을 한 적이 언제인가

101일간의 여정 5주차

각기 다른 분야에서 멋지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는 10명의 사람이 모여 매일 101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합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함께 해온 친구, 대학 친구, 그리고 그들의 지인들이 모였습니다.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써 내려가는 답변들을 읽는 시간이 너무나 신납니다. 미지의 사람들의 삶을 훔쳐보는 기분이 들거든요. 10여 년 가까이 시간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의 새로운 면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잘 알아가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매일 답변을 공유하고, 2주마다 한 명씩 질문 하나에 대한 글을 브런치에 연재하기로 했습니다. 10명이 써 내려갈 101일간의 여행기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매우 설렙니다. 모두에게 의미 있는 여정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21 나를 처음 알아본 사람은 누구인가


엄마가 아닐까. 내 인생의 절대적인 우군. 20개 남짓한 질문들을 작성하며 지금의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엄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시시콜콜 모든 것을 엄마와 공유하기 때문에 뭐가 됐든 엄마가 최초의 순간을 알아채는 사람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작가가 꿈이었고 어렸을 때부터 나는 자연스레 책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자랐다. 책과 가까이 자랐고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백일장 같은 데서 상을 종종 타오기도 했고 학교 신문에도 내 글이 실리기도 했다. 내가 쓴 시나 수필을 보고 가장 먼저 칭찬을 건넨 사람은 당연히 엄마였다. 공부도 곧잘 했다. 선생님들의 은근한 편애를 어린 나이에도 느낄 수 있었다. 똑같은 사고를 쳐도 훈방 조치로 끝나고 말거나, 전교 1등이 우리 반에서 나왔다는 자랑 같은 것들. 고등학교 때에는 선생님한테 항의가 들어와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공개적으로 사과한 적도 있다. 어린 나이에 높은 직급으로 승진했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때때로 잘못한 것도 없이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주눅 들기보다 내가 성취한 것들에 당당한 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했다. 누군가에게는 오만해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이런 나를 잘 알았다. 노력에 비해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을 간파했고, 운이 따른 것에 감사하되 늘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는 조언을 덧붙였다. 


엄마의 전적인 응원과 지지, 그리고 따뜻하지만 냉철한 조언과 함께 자란 나는 자기 위안의 대가가 되었다. 실패를 하더라도 쉽게 딛고 일어날 내면의 힘 같은 것들이 나도 모르게 잔근육처럼 자리 잡았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거나, 직장을 얻지 못하거나 할 때 잠시간은 좌절했지만 세상이 아직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위안하며 다시금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 


세상 일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고 느끼게 해 준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국회에서 만난 선배 ㅊ와 말을 트고 친해질 때는 그녀가 이미 국회를 그만두기로 결정하고 나서였다. 같은 상임위였지만 말은 몇 번 나눠보지 못했는데 그녀가 퇴사 전 티타임을 갖자며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녀가 내게 알려준 국회에서의 노하우나 다른 세상의 이야기들은 말 그대로 온통 내게 영감을 불어넣는 것들이었다. ㅊ은 내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나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이다. 더불어 나의 부족한 부분까지도 어떻게 타개해나가면 좋을지 자신의 생각을 조리있게 풀어놓는 나의 롤모델 중 하나다. 내가 거쳐왔던 의원실의 의원이나 보좌관들이 내게 주는 칭찬들보다 그녀의 말들이 내게는 더 소중하다. 진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시각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기 때문이다.


돌아와 어쩌면 나를 처음 알아보는 사람은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보잘것없는 재능을 알아봐 준 사람들은 더러 있었다. 그들의 말들은 잠시간 나의 자존감을 채워줬고 기분도 좋았다. 그러나 결국 내가 자신을 믿지 않으면 이 고행길을 걸을 힘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내가 가진 것보다 그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지는 않지만(때로는 그렇겠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이 무언가를 이루기에 모자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 나는 가능성이 무한한 사람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에 맞는 길들을 언제나 열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하늘에서 내려준 누구나 이마를 탁치는 재능은 없지만 나는 나의 평범함 속에서도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나갈 것이다. 재능은 스스로 끌어내고 단련해나가는 것이니까. 나 자신을 끊임없이 돌봐주자. 러브 마이셀프. 


22 내게 힘이 되어주는 현자는 누구인가


어질고 총명하여 성인에 다음가는 사람. 이것도 굳이 따지자면 엄마라고 대답할 것 같은데 참 난감하다. 우리 엄마는 부처에 가까운 인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죽으면 반쪽 짜리 사리가 나올지도 모른다. 현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요근래 있었나. 현자는 현자타임을 뜻하는 현타에나 나오는 말이 아닌가. 


사실 현자가 주는 힘(말)에 왠지 모를 반항심이 생겨나기도 한다. 나는 불교의 교리나 성경 말씀들에 때로는 거부감이 든다. 우리는 성인이 아니고 그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범인인데요. 삶은 너무나 고달픈데 현자들의 이야기는 약간 강 건너 불구경하는 식으로 느껴진달까. 더군다나 총명하고 어질어서 잘 살 수 있는 세상도 아니다.  


굳이 현자가 아니더라도 나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은 많다. 가족, 친구들, 직장 동료들이 보내는 지지만으로도 나는 충분한 힘을 얻는다. 또 누가 있지. 트위터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무명의 한 줄들도, 제현주 대표의 글과 활동도, 손정의 회장의 펀치라인도. 무심코 집어들어 읽는 책에도 마음을 울리고 힘이 되는 한 줄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현자는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사람일테다. 나는 그런 사람들 대신 내 주변 사람들, 지인이 아니더라도 미디어나 책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인간 군상들과 소설 속의 인물들에게서 힘을 받으련다. 


23 시계를 5분쯤 빠르게 맞춰두었는가


지각 맨의 인생에서 시계를 5분쯤 빠르게 맞춰두는 것은 의미가 없다. 더 나아가 5분 빨리 맞춰둔 시계는 안일함의 참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음, 시계가 좀 빠르니 좀 더 여유 있게 준비해도 되겠군' 하는 마음이 지각 대소동을 만드는데 일조하기 때문이다. 나는 원체 아침잠이 많은 편이고 준비는 후다닥 해치우는 편이다. 남자사람친구들조차 놀라는 나의 준비 속도. 9시 출근이면 8시 30분에 일어나는 게 나란 사람이다. 물론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과 늦지 않기 위한 경보에 가까운 걸음은 한 세트다. 


지각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너무 많다. 기숙사에 살 땐 점호 시간에 늦어 늘 벌점을 받기 일쑤였고, 그런 벌점이 쌓여 나는 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퇴사를 당한 기억도 있다. 물론 마지막 벌점 또한 자습시간 지각이었다. 본가에 내려가는 KTX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닫히려는 열차 문에 손을 끼워 넣어 승무원이 경악하며 나를 혼낸 적도 있다. 친구들은 약속 시간 전 계속해서 카톡을 보내 확인한다. '출발한 거 맞지? 일어났니?'와 같은 우려들이다. 미리 일어나 준비하면 참 좋은 것을 미련하게 급박하게 준비하고 나가는지 엄마의 잔소리를 늘 들을만하다. 


느긋하게 일어나는 것 치고는 빠른 외출 준비와 최단 소요 기간을 찾아내는 기지로 약속 시간을 잘 맞추긴 하는 편이다. 반면에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늦을 것 같으면 언제 오냐며 닦달하는 것이 나다.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물론 매번 지각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나는 기본적으로 끝이 닥쳐야 효율성이 오르는 유형이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그건 효율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글도 본 것 같다. 미리미리 할 일을 해치워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 있다면, 나는 정반대인 사람이다. 아마 완전하게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마감 기한이나 약속 시간에 쫓겨 허덕이지 않게 나름대로 스케줄 표도 짜 보고 이런저런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내 시간만큼이나 타인의 시간이 중하다는 것을 알기에 이 습관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일찍 준비하고 남는 자투리 시간을 잘 활용하지 못해서 기인하는 습관이랄까. 그 비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너무나 싫다. 뭔가를 기다리는 시간도. 그 시간을 잘 쓰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 윈윈인 셈이다. 그래서 요즘은 늘 가방에 책을 한 권씩 가지고 다닌다. 책만큼 빠르게 어떤 행동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미없는 책이라도 나는 활자에 아주 빨리 스며드는 편이다. 두꺼운 책은 가지고 다니기 어려워 이북리더기를 살까도 고민했지만 종이가 주는 안정감을 사랑해 두꺼운 책을 가져가고 싶은 날이면 큰 가방을 들기로 결심했다. 


사실 시계를 5분쯤 빠르게 맞춰두는 것은 효용이 없다. 누가 나 몰래 시계를 돌려놓지 않는 이상. 나는 그 대신 알람을 5개는 더 설정해놓는다. 귓전에 정신없기 울리는 알람 소리를 끄기 위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높은 성공을 불러온다. 물론 오늘은 제일 마지막 알람을 듣고 일어나 5분 정도 약속에 늦었지만 말이다.


24 아버지의 아버지를 기억하는가


질문을 바꾸겠다. 나는 아버지의 아버지를 만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의 기억에 존재하는 존재는 외할머니뿐이다. 나머지 세 분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의 어머니를 기억하는가, 에 대한 답을 하려고 한다. 사실 이 글은 작년 할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쓴 브런치 글이다. 아주 긴 답변이 될 듯하다.  https://brunch.co.kr/@aliceinsoulcity/7 (할머니 미안해)


그래도 질문에 맞게 아빠가 한번씩 전해주던 기억을 더듬어보자.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치매가 오셨다고 한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아빠가 할아버지를 찾아 나선 적도 있다고 들었다. 얼마 전 아빠가 할아버지의 목걸이를 찾았다며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치매 노인을 위한 목걸이. 아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슬픈 표정을 짓지 않아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아빠는 아빠의 아빠를 잃은지 30년도 넘은 것이다. 어릴 적 노래방에 갈 적이면 아빠가 꼭 마지막에 칠갑산을 부르며 눈물을 훔쳤던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본가에 내려가면 할아버지에 대해 아빠에게 물어봐야겠다. 


P.S. 회사 동료와 어르신들의 자서전을 만드는 사업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대단한 내용이 담기지 않아도 한 사람의 생을 담은 책이나 영상이 있다면 자식들도, 손주들도 기억을 안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족보란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름만 적혀있는 게 무슨 소용이야. 이름보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가 이어져 오는게 더 의미있지 않을까 싶었다.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도 가끔씩 정신이 맑을 때는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같은 아주 옛날의 이야기들도 생생하게 기억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들의 이야기가 역사이지 않은가.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질 역사들. 여러분들도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은 무언가를 남겨보는 것은 어떨까 제안해본다. 나는 언젠가 엄마 아빠의 엄마 아빠 이야기를 짤막하게라도 듣고 남겨볼 생각이다. 


25 모험을 한 적이 언제인가


삶이 모험이다. 모험. 늘 새로운 것을 찾는 빌어먹을 천성 때문이다.


나는 동네 고등학교가 아닌 연고도 없는 산골의 기숙사 학교로 진학했다. 부모님이 없는 삶과 사춘기 소녀들과의 복작거리는 생활은 그 자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의 모험이었다. 한창 예민하고 수능이라는 중차대한 목표를 두고 달려가는 또래들, 그리고 그 목표를 채찍질하는 학교 규율들(핸드폰 금지, 노트북 금지, 외출금지 등등) 속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재미를 찾으며 살아내는 것은 나의 첫 번째 모험이었다.


두 번째 모험은 론리 플래닛 한 권만 손에 들고 떠난 인도여행이었다. 스무살의 나와 ㅎ은 겁이 없었다. 여자 둘이서 인도를 여행할 생각을 하다니. 그것도 별다른 준비없이 말이다. 델리에서 조드푸르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이를 모를 인도 남자에게 엉덩이를 추행당하는 수모를 겪었고 밤새 달리는 기차 안에서 잠들지 못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던 기억이 난다. 이런 일을 2주간의 여행동안 종종 겪었고 그때마다 꺼져라는 말을 외치곤 했다. 


우리는 도시에 도착한 뒤 숙소를 찾아 골목 골목을 헤맸고, 식중독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너무 비싸지는 않고 동시에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관찰하며 다녔다. 인도에서 이너피스를 찾고 오겠다며 떠났것만 하루를 아무 사고 없이 잘 보내는 것이 우리의 미션이었다. 단 하루도 모험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따뜻한 물이 나오고 벌레는 나오지 않는 숙소를 구하고, 우리 입맛에 맞는 인도 음식을 찾고 길거리에서 울부짖는 강아지들에게 물리지 않고, 소똥을 밟지 않는 하루를 보내는 것. 


정신없이 일어나 타지마할로 향했던 날 나는 브래지어를 입는 걸 깜빡했다. 동네 옷가게에서 인도 전통복인 '사리'를 친구와 입고 갔는데, 인도 옷을 처음 입어본 두 소녀는 대충 거적때기를 두른 꼴로 돌아다녔다. 친절한 인도 아줌마들은 깔깔 웃으며 다가와 자신들의 옷핀으로 다시금 옷을 정돈해줬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노브라였던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우리는 깔깔 웃을 뿐이었다. 


갠지스강의 도시 바라나시는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였다. 하필 그 시기는 인도 최대의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에 갠지스 강에 몸을 씻으면 죄가 씻겨나간다나, 뭐 그런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묵을만한 숙소는 대목을 맞아 엄두도 못 낼 가격을 불렀고, 적정한 가격의 방은 창문이 없거나 화장실과 방이 한데 있는 곳이었다. 


일단 밥이나 먹자하며 들어갔던 빵집의 옆 테이블에는 프랑스 할머니 두 분이 계셨다. 콜라를 먹고 있는 '엔젤'이라고 불리는 인도 꼬마 아이도 함께. 여행객끼리 몇 마디 나누다가 우리는 숙소를 구하지 못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더니 '엔젤'이 알려줄 것이라며 그를 우리에게 인도했다. 작고 마른 아이를 따라 도착한 곳은 '타이타닉 호텔'이었다. 이 곳은 우리가 인도에서 묵었던 곳 중에서 뜨거운 물이 가장 잘 나왔고 쾌적한 숙소였다. 우리는 타이타닉 호텔 매니저의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러브스토리를 알게 되었고, 그는 델리로 돌아갈 기차표를 구하지 못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인맥을 이용해 표를 구해줬다. 바라나시 역이 서울역이라면 광명역쯤 위치한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였다. 여기서도 또 한 번 사건이 발생한다.


기차는 제시간에 오지 않았고 현지인들에게 표를 보여주며 기차가 언제 오냐 물어봤지만, 물어보는 사람들마다 다른 답을 내놓았다. 밤기차였는데 역무원은 다들 퇴근했는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처음 한 시간은 '인도니까, 이 정도는 뭐'라고 생각했다. 세 시간이 지나도 기차가 오지 않자 우리는 인도 사람은 아닌듯하지만 인도말을 이해하는 사람을 찾아 다시금 물어봤다. 그는 나이키를 신은 티베트 승려였고 우리의 기차는 다른 플랫폼에 도착해 이미 떠났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런 방송을 들은 적이 없는데? 인도 영어의 벽을 넘지못했다.


여행 마지막 날인 탓에 수중에 현금도 별로 없었다. 나이키 승려는 인도에선 돈 없으면 무조건 무시하니 자기 돈을 빌려주겠다며 선뜻 지갑을 열었다. 역무원과 쇼부를 봐서 자리를 구해보겠다는 말도 함께. 정 안되면 자기 칸에서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말도. 여행을 하면 한 번은 천사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하더니. 우리의 '엔젤'은 티베트 승려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남는 칸에 몸을 싣고 떠날 수 있었다. 다만 그 기차가 우리나라의 누리호 같은 기차였으며, 모든 역에 정차하고 빠른 열차를 먼저 보내는 완행열차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열두 시간 동안 찌는 더위와 인도인 특유의 냄새에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예정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놓쳤고 나는 설사병에 걸렸다. 


우여곡절 끝에 델리 역에 내려 나이키 승려에게 고맙다며 돈을 보내줄 계좌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는 웃으며 괜찮다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살면서 이런 우연과 호의를 겪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인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도 몇 가지 사건이 발생했지만, 그러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 이쯤에서 마무리하겠다. 어쨌든 나는 제시간에 비행기를 탔음에도 한국에는 그것보다 이틀이나 늦게 도착했고, 본가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응아를 참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 후로 인도를 생각하면 험한 말만이 나왔지만, 돌아보니 그때만큼 다이내믹했던 여행이 없었으며 하루하루 생에 집중했던 순간도 없었다. 


인도 여행은 가히 모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스무 살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모험.


그리고 나는 지금도 모험 중이다. 워라밸은 구리지만 높은 보수와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새로운 일을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순항중인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일단 시작하면 뭐라도 만들어 내는 나를 믿는다. 사실 내가 이렇게 호기롭게 직장을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2018년 지방선거 때 김경수라는 사람과 일하기 위해 의원실을 그만두고 떠난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왜 불안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금 당장의 안정적인 자리보다 가능성을 키울 수 있는 모험이 인생에서 더 많은 것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스스로 내린 선택인만큼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나는 그 과정에서 꽤나 많은 경험과 인맥, 성과를 얻었다. 2년이 지난 지금의 모험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잘은 모르겠다. 나는 불확실성을 즐기는 사람이고 그 불확실성 속에서 대부분 좋은 결과를 얻어왔다. 이 모험이 마무리가 되고 나면, 나는 또 모험에 나설 것이다. 아마 그 모험은 계속될 것 같다. 나는 재밌게 살고 싶다. 나의 재미란 안정된 삶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기력이 다하는 한 나는 모험을 아주 오래 하고 싶다. 마지막 모험은 우주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 편도행 티켓이 손에 쥐어지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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