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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May 21. 2020

할머니 미안해

내가 기억하는 윤달연 여사의 단편들, 그리고 마지막


우리 할머니 윤달연 여사는 36년생 무남독녀다. 물론 형제들이 있었지만 전쟁이다 뭐다 해서 죽고 할머니만 남은 것이다. 할머니의 아빠는 할머니가 20살이 될 때까지도 업고 다녔다고 했다. 우리 할미는 평생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왔다. 기숙사 생활로 한 달에 한번 집에 오던 고등학교 시절, 내가 올 때마다 진수성찬을 내놓는 엄마 아빠를 보고선 소리를 빽 지른 적도 있다. 평소에도 이렇게 맛있는 것 좀 내놓으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대상에 손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던 것 같다. 가부장제가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시절에도 물 떠오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니가 떠먹어라'를 시전했던 신여성이었다. 순종적이지 않은 아내에 할아버지는 바깥으로 나돌았고, 할머니가 가져온 많은 재산들을 도박과 사업, 사기로 몽땅 잃기도 했단다. 엄마는 어렸을 적 할아버지가 밤늦게 정장 입은 어깨 아저씨들을 집에 데리고 와 술판을 벌인 기억이 난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기분이 매우 좋아보였는데, 그 무리들이 바로 할부지한테 사업 사기를 친 일당들이었다.


할아버지가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 할무니는 자기 손에 물을 묻히는 희생적인 엄마가 아닌 자식들에게 생사를 내맡긴 이기적인 엄마로 살아왔다. 할아버지의 재산 까먹기로 가세가 기운 가운데 울엄마는 막내인 덕에 상대적으로 공부도 하고 고생도 덜했다. 대신 이모들과 삼촌은 할머니 대신 어린 나이부터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큰 이모는 아직도 그게 평생의 한이고, 할머니를 향한 증오는 할미가 돌아가시고 나서도 응어리져있다. 외삼촌은 외국으로 일터를 옮기고 한국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존재한다. 내가 태어나고 나서 할머니가 육아를 도왔고, 동생이 태어난 뒤에는 할머니와 같이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 할머니는 지독한 결벽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현관에서부터 양말을 벗고 바로 옆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고 나오지 않으면 집 안으로 한 발자국도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이었다. 외출복을 입고 침대에 눕거나 소파에 앉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 덕분에 이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친구가 집에 와서 외출복을 입고 잠깐이라도 침대에 걸터앉으면 그 날은 이불 빨래하는 날이다.)


나와 동생이 어렸을 적에 우린 할머니와 괴물놀이를 하곤 했다. 할무이가 앙 하고 손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쫓아오면 우리는 꺄르르 대고 도망가기 바빴다. 나이가 들어서는 우리가 할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리며 할머니가 꺄르르 대곤 했다. 할머니는 유머감각이 있는 사람이었고 식탁 앞에서 우리는 늘 실없는 소리를 해대며 밥을 먹었다. 


할머니는 어르신들의 유스케 가요무대와 추적 60분을 유독 좋아했다. 어렸을 적에 할머니 방에 자주 잠들곤 했는데 추적 60분은 어린 내게 너무도 무서운 프로그램이었고, 그때마다 엄마방으로 도망가곤 했다. 우리 할머니는 고기를 좋아했고, 소고기가 아니면 입에도 안대는 사람이었다. 그 덕에 엄마는 종종 열이 받았고 평생 철이 안 든 할미는 되레 역정을 냈다.  


나는 우리 할머니가 적어도 내가 시집갈 때까지는 살아계실 줄 알았다. 고기를 좋아하는 식성, 움직이는 것을 귀찮아하는 게으름, 건강염려증으로 복용하던 과도한 약들로 할머니는 비만을 앓고 있었지만 큰 병은 없었다. 아빠는 할머니가 자주 가는 약국 약사 아저씨에게 약을 이렇게 많이 먹으면 몸에 더 안 좋다고 으름장을 놓으라고 하기도 했다. 큰 병이 없으니 나는 할머니가 이렇게 더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을 줄 알았다.


기숙사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서울로 대학을 간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보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문득문득 예전과 같지 않음을 느꼈다. 방에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걸음은 무거워지고, 밥 먹는 것도 힘겨워하는. 대학병원에 가 검진을 해봐도 죽음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이테가 좀 더 많이 생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도중 할머니가 거동이 불편해졌다는 소식을 본가에서 전해들었다. 엄마가 할머니의 대소변까지 가려준다는 소식이 있은지 한 달 만에 할머니는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은 대구와 서울 사이의 300km 거리가 무색하게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엄마는 매일매일 병원에서 들려 할미 병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자우림의 '있지'를 들으며 매일 울면서 돌아왔다. 우리는 할머니가 요양병원에서 지내도 좋으니 이렇게라도 우리 곁에 좀 더 오래 있어주기를 바랐다. 2019년 5월 6일 월요일은 대체휴일이었기에 나는 주말을 이용해 대구로 내려갔다. 그리고 동생과 함께 할머니가 있는 요양병원에 들렀는데, 병실에 들어서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창가에 위치한 베드에 환자복을 입고 누워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어떡해, 어떡해 하는 말만 반복하면서. 내가 울면 할머니가 슬퍼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늙고 병든 노인의 모습은 충격적으로 각인됐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있을 때도 아팠는데. 그때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병원이라는 공간과 환자복만으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싶었다. 


'할머니, 나 안 보고 싶었어? 송강호(우리집 고양이)는 안 보고 싶어? 얼른 나아져서 집으로 가야지.'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정말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저 나를 거짓으로 안심시키고 할머니를 위로하기 위했던 말이었는지. 무기력한 노인의 모습은 처참했다. 나는 한 번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죽음은 아직 나에게 먼 일이었다. 부정하고 싶은 것들로 가득했다. 이 모습을 매일 마주하는 엄마의 마음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한참을 울다가 애써 웃으며 할머니와 농담 따먹기를 했다. 할머니가 좋아하는 베지밀 사 왔어. 먹을 것에 집착을 보이던 할머니는 고개를 내저었다. 할머니가 진짜 아프구나, 실감이 났다. 두서없는 말들을 늘어놓으며 할머니와의 면회시간을 보냈다. 한 순간도 할머니 손은 놓지 않았다. 우리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도 보들보들한 피부의 소유자였다. 할머니 닮았으면 여드름도 안 나고 꿀피부였을텐데, 매번 하던 말을 했다. 할머니가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이해는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까 운 것이 미안해서, 나는 할머니가 죽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했다. 그리고 그게 내가 본 할머니의 마지막이었다. 




한 달 하고 일주일이 지난 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향년 83세였다. 100세 시대가 무색하게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났다. 7시 30분쯤 걸려온 엄마의 전화를 받으며 그렇게 할머니의 죽음을 들었다. '이제 할머니 없다. 이제 우리 엄마 없다.' 상실을 전하던 엄마의 첫마디였다. 


새벽 5시 의사가 내진을 시작하는 시간, 할머니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심폐소생술을 진행했으나 숨을 거뒀다고 한다. 가시는 모습도 평온했다고 한다. 사실인지는 모른다. 우리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저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다. 병원에서 바로 엄마에게 연락을 취했고 엄마가 곧장 병원으로 향했으나 이미 할머니는 숨을 거둔 후였다. 일찍 깨우기 미안했다며, 엄마는 일부러 내가 일어날 즈음에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엄마란 이런걸까 싶었다.


사장에게 할머니의 부고를 전하고 KTX를 타고 대구로 내려갔다. 가는 길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이모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고, 엄마를 안는 순간 다시 한번 할머니를 병원에서 봤던 순간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할머니의 상실과 엄마에 대한 걱정이 한데 뒤섞였다. 이모들은 엄마를 안고 우는 나를 보며, '야는 운다. 엄마랑 같이 살아서 더 그런갑다. 일로 앉아서 밥부터 먹어라. 아무것도 못먹고 왔제'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죽음이 슬픈 건 엄마와 나뿐인 것 같았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선 엄마와 병원 뒤편으로 향했다. 담배를 나눠 피며 할머니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마는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너무 빨리 떠나버린 할머니가, 무심했던 병원이, 무감한 형제들에 대해. 나는 우리 엄마를 정말로 어떻게 해주고 싶었다. 내 인생의 친구이자, 동반자이자, 하나뿐인 사랑인 엄마를 떠나보낸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잠에서 벌떡 깨곤 하는데 엄마는 오죽할까 싶었다. 


염이 끝났다는 장의사의 말에 영안실로 자리를 옮겼다. 화장을 곱게 한, 얼음장처럼 차가운 할머니의 얼굴과 몸, 손과 발. 우리 할머니가 아닌 것 같았다. 엄마는 오열하면서 하염없이 할머니의 손과 발을 어루만졌다. 그제서야 실감이 났다. 우리 할머니는 숨을 쉬는 것을 멈췄다는 것을. 살면서 처음 마주하는 죽음의 온도였다. 


엄마는 고등학생 때 아빠를 잃었다. 어릴 때라 지금과 같은 상실감은 없었다고 했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면역력도 없었고 무지했다. 할머니의 죽음의 징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먹을 것을 그렇게 좋아하던 양반이 엄마가 온갖 음식을 만들어서 병원에 가도 할머니는 한 두 숟가락 들다 말았다. 돌아가시기 전 이틀 간은 식음을 전폐했다. 돌아보면 그때 할머니는 죽음을 준비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인지하는 것과 상관없이 몸은 그렇게 죽을 채비를 하나보다. 할머니는 지병이 없었다. 차라리 암투병 환자였다면 경과를 알 수 있었고 죽음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을텐데. 할머니가 이렇게 돌아가실 줄 알았다면 엄마는, 우리 가족은 내내 할머니 곁을 지켰을 것이다. 


여느 장례식장이 그렇듯, 손님들이 밀려오고 안주거리를 주워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휑한 공간을 마주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직장 동료들, 친구들을 마주할 땐 기분이 요상했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닌데, 어른 행세를 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정치권에 몸담은 덕에 부총리, 장관, 국회의원들의 조화가 배달됐다. 남들의 시선에 민감한 이모부는 의전 서열대로 조화를 정리하며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엄마는 장례식장에 마련된 방에서 도저히 잠이 안 와 할머니가 영정사진이 있는 빈소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무서울 줄 알았는데 할머니와 같이 있는 기분이었다나. 3일간의 장례가 끝나고 화장터로 가기 전 운구차는 우리 집 한 바퀴를 돌고 지나갔다. 원래는 관을 들고 들어가서 집 안을 한 바퀴 돌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아파트 입구에 다다러서 '집에를 한 번을 못 와보고'라며 오열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안아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화장장은 아주 멀끔한 곳이었다. 대리석 바닥에 차가운 기둥으로 높게 세워진 건물. 계속해서 들어왔다 나가는 리무진들.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고 했다. 한 줌의 재로 돌아가는 시간. 나는 살면서 엄마가 그렇게 우는 걸 처음 봤다. 절규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이렇게는 못 보낸다며 관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아빠가 엄마를 부축하려 해도 엄마는 무슨 힘이 어디서 그렇게 났는지 아빠를 뿌리치고 할머니에게 돌아갔다. 너무 화가 난다며, 너무 억울하다는 말과 함께 엄마는 가슴을 치며 울었다. 내가 언젠가 마주하게 될 엄마의 죽음이 두려웠다.


화장터로 들어가는 할머니의 관을 보며, 2009년 5월 23일이 떠올랐다.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내던 날이 오버랩됐다. 유리막에 가로막혀 뜨거운 불 속으로 사라지는 할머니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내가 목격한 몇 안되는 죽음이라는 것이 그랬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발만 동동 구르게 되는 것. 무력감과 절망감만 사무치는 것.


몇 시간이 흐르고, 할머니의 화장이 끝났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한 줌의 재가 된 할머니를 마주했다. 古윤달연 님. 직장에서 일상처럼 팩스로 전해지던 부고에서 수없이 마주하던 한자. 생과 사를 가르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한 한 글자를 보며 엄마는 씁쓸히 울었다.


할머니는 수목장을 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재가 비에 다 쓸려갈 것만 같아서, 할머니가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 하늘이 야속했다. 다시는 할머니를 볼 수 없다.




엄마는 한참을 말 그대로 울면서 잠에서 깼고, 울다 잠들었다. 엄마 곁에 있어줄 수가 없어서 괴로웠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마주한 동생이 엄마의 슬픔까지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 미안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엄마는 요양병원을 가는 길을 지나치던 때, 자우림의 있지가 흘러나오던 때, 할머니 방을 지나칠 때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임종을 지키지 못한 이들은 숨을 멎기까지의 그 시간을 상상하며 괴로워했다. 할머니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곁에 아무도 없어서 외로웠을까. 원망스러웠을까. 고통스러웠을까. 죽을 때 일생이 필름처럼 지나간다는데, 할머니의 필름에는 어떤 장면이 담겼을까. 엄마의 친구는 임종을 못 본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힘든 일이라고. 의사의 말대로 아주 평온히 맞는 죽음도 있다고. 


할머니 방을 정리하면서 내가 할머니에게 용돈을 한 번도 드린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있을 때 잘하라는, 뻔한 말이 가슴에 박혔다. 무심던했 내가 원망스러웠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추석에 처음으로 엄마아빠와 동생에게 용돈을 줬다. 후회를 덜기 위해서.


상실은 변함없이 실재했지만, 공백은 바쁜 일상이 채워나갔다. 엄마는 예전만큼 울지 않는다. 나도, 동생도, 아빠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육신이 사라지더라도 우리의 기억 속에, 시간 속에, 공간 속에 여전히 존재한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노래가 흘러나올 때, 할머니가 좋아하던 꽃을 볼 때, 할머니가 좋아하던 음식을 먹을 때. 할머니가 볼때마다 허허허하고 웃던, 우리집 고양이가 우스꽝스럽게 걸을 때.


'물질은 사라지지 않는다. 변형될 뿐. 산화되어 재만 남는다고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물질은 아주 작은 부분도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내 기억이 다할 때까지 내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할머니와의 기억이 잊혀지더라도, 할머니와 함께 공유했던 시간은 지금의 나의 일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럼에도 할머니에게 미안한 것 투성이다. 더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것, 할머니가 좋아하는 과자를 사가지 않은 것, 할머니를 더 많이 안아주지 못한 것. 할머니에게 전해주지 못했던 못다 한 사랑은 이기적이던 할머니가 가장 아꼈던 우리 엄마에게 쏟아부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 '아가'라 불리는 철없는 딸이다. 짜증을 빽 내기도, 화를 내기도, 부서질 것처럼 꽉 껴안기도 하면서, 일상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지멋대로인 딸. 엄마는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유일한 사람이다. 나라는 사람에게 한없이 과분한 사람. 우리 엄마여서가 아니라, 그냥 한 인격체로 존경해 마지않는 사람.


나는 자다가도 한 번씩 죽음에 대한 공포로 벌떡 깨곤 한다. 나의 죽음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 특히 엄마의 죽음이 두려운 것이다. 엄마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나를 언젠가는 마주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생각을 늘 유예한다. 정말로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을 나는 견뎌낼 수 있을까. 동생은 화장장에서 내게 '언니야는 엄마가 죽으면, 정말 많이 힘들어할 것 같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떨 때는 엄마랑 언니야가 동시에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라고 말했다. 


나에게 죽음은 어쩌면 '엄마'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서 겪을 가장 크고 아픈 상실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더 큰 사랑으로 치환할 것이다. 나는 윤달연 여사의 삶과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다. 더 사랑하며 살게. 미안해 할머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엄마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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