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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Sep 24. 2020

코로나 시대의 백수 -1-

stay gold


2020년 4월 13일. 낙선이 확정된 날 나의 백수 디데이도 정해졌다. 

작년부터 국회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에 대한 회의가 있었고,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유도리없는 사장님과 밀려드는 인터뷰, 회의 자료 작성으로 낙선 의원실 보좌진임에도 그 누구보다 바쁘게 일했다. 동료들은 내가 당선, 낙선 의원실 통틀어 제일 바쁜 것 같다고 탄식을 보내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기에는 바빠도 너무 바빴다. 선거 끝나고 처음으로 휴가를 가지 못했다.


그래도 밥벌이는 하고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180명의 당선인 명단을 놓고 동료 비서관과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고 싶은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아, 이거 20대 총선 때도 생각했던건데?'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오신 분들이겠지만, 내 시간과 젊음을 바치고 싶은 곳이 없었다. 만 5년의 시간동안 많은 것을 쏟아부었다. 번아웃이 제대로 왔다.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자리면 그 누구보다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 과연 세금이 아깝지 않게 나의 열과 성을 다해 업무에 열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의 대답은 단호하게 아니오였다. 그렇다하면, 다른 플랜 B는 있냐. 그것도 단호하게 아니오였다.


첫 2주간은 그나마 가고 싶은 이유가 있는 곳에 이력서를 넘겼다. 면접을 본 곳도 서류 탈락인 의원실도 있었다. 탈락 이유의 대부분은 어린 나이 때문이었다. 이래서 국회에 있기 싫다니까. 나이 어린 기집애가 높은 직급을 단 것이 죽기보다 싫은 사람들은 어디든 있다. 다만 국회에 그런 인간들이 많을 뿐. 기업엔 30대 임원도 나오는데 실력으로 사람 좀 뽑자, 하는 말은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동료들이 수없이 이야기해줬다. 크게 위로는 되지 않았다. 별로 상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회를 떠나고 싶었던 무수한 이유 중 하나가 눈 앞에 다시 한번 어른거렸을 뿐이다.




5월 29일, 사장님의 임기만료와 함께 나의 비서관직도 사라졌다.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침대 옆 유리창에서 쏟아져내리는 여름 햇살은 새벽에 나를 깨우기 일수였다. 물론 다시 잠들긴 했지만. 밀려있던 약속에 나가는 날과 하루 종일 집에서 한 발자국 나가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선거 끝나면 꼭 유럽에 가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코로나19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쉬운대로 국내여행을 준비했다. 사실 말은 준비고 나는 제안만 하고 계획은 여행메이트들이 맡았다.


가족들과 제주도 나들이를 다녀왔다. 비행기 타는 시간을 사랑하는 나에게 그 짧은 한 시간이 얼마나 달콤하던지. 해산물들로 가득찬 식사, 아무 목적지 없이 달렸던 해안도로, 푸르름만 가득한 숲길, 안도 타다오의 본태박물관.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마지않는 엄마와 동생. 모든 것이 평온하고 여유로웠다. 많이 웃고 걷고 달리고 자고. 블루투스로 흘러나오는 노래를 세상 신나게 따라부르면서. 서울패밀리, 송창식, 이선희, 방탄소년단 세대와 장르를 가리지 않고서. 1그램의 불안도 침입할 수 없는 온전한 시간이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불청객은 아니지만 불청객이 되어버린 전화를 받고 예정보다 일찍 상경했다. 그리고 비서관 대신 보좌관을 뽑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조금 짜증은 났지만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세상이 나를 못 알아보는군' 하는 자의식 과잉 마인드를 떠올리며. 이 면접을 마지막으로 국회에는 이력서를 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밀린 약속들을 정리하며 본가로 내려갈 날짜도 정했다. 




고등학교를 기숙사에서 보내고, 서울로 대학 진학을 했던 나에게 고향집은 편안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한 곳이다. 내방이 사라졌고(동생방이 되었다), 홀로 지내는 것에 익숙해진 탓에 온전히 혼자가 아닌 시간들이 그리운. 대학시절 휴학할 때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시간을 본가에서 보내고 있다. 애초에 한 달을 기한으로 잡아뒀지만 코로나 2단계 격상으로 본가에 좀 더 있지 했던 것이 추석 연휴 때까지 있어야겠다, 라는 마음으로 바뀌는 중이다. 


본가에 내려와서 하기로 결정한 것은 


1. 알라딘에서 읽고 싶었던 책 사기(집에도 쓰러질만큼 많은 책들이 쌓여있지만 왠지 새 책이 읽고 싶었다) 20권 가량을  호기롭게 주문했다. 그중 10권은 삼국지다. 8월 한 달간 빡세게 읽었는데 제갈공명까지 죽고 난 10권 진도가 더럽게 안 나가서 아직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있다. 그래도 곧 삼국지 완독이라는 목표 하나가 끝날 참이다. 영웅들의 무상함 속에서도 나의 타오르는 야망을 다시금 느꼈고, 기필코 나는 나의 야망을 이루리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또 이렇게 널널하게 사는것도 나쁘지 않은데, 하며 나태해졌고. 중간중간 가볍게 SF소설도 읽고 그러다가 또 정치 관련 책도, 경제 관력 책도 틈틈이 읽었다. 고3 때 이후로 이렇게 독서에 열중한 적이 없었다.


2. 골프 다시 연습하기

수험생 시절에는 공부하느라, 대학 와서는 노느라, 취직하고선 일하느라 연습을 손에 놓고 살다 쉬는 김에 골프채나 다시 잡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연습장을 끊었다. 엄마와 같이 하는 운동이라 그런지 귀차니즘을 복하면서 다니고 있다. 오랜만에 치는 거라 비거리는 아직 안습이지만. 가을이 되면 엄마와 라운딩에 나가서 초록색들이나 실컷 구경하고 올 참이다. (두 달이 지난 오늘 일주일째 연습을 가지 않고 있다. 내일은 꼭 가리라.)


3. 고양이와 하염없이 시간보내기

우리집 고양이는 제주총각으로 생후 7개월 차 입대를 맞이한 첫 가족과 이별해 대구로 건너왔다. 본가로 데려왔는데 비염을 얻고 세상에서 둘도 없는 깜찍한 고양이를 가족으로 맞이했다. 이름은 송강호 러시안블루. 당시엔 휴학 중이라 늘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서 함께 할 수 있었는데 다시 학교로, 또 회사로 돌아가면서 사진으로 동영상으로만 볼 수 있었던 내새끼. 우리 고양이여서가 아니라 정말 예쁜 내새끼를 부둥거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만으로 퇴사의 가치가 충분히 상승하고 있다. 새벽 느지막이 침대로 폴짝 뛰어올라와 쓰다듬어 달라고 얼굴을 부비는 생명을 세상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귀를 긁어대는 통에 꼬깔을 한동안 씌워놨는데 그럴수록 부쩍 애교가 느는 모습에 사랑스럽다가도 안쓰러운 마음이 잔뜩이었다. 물론 꼬깔을 벗는 순간 세상 자기 필요할 때만 다가오는 고양이로 돌아간다. 그래도 사랑해. 우리의 에일리언.


4. 영화와 드라마 잔뜩 보기

과자를 잔뜩 사들고 와 왓챠와 넷플릭스를 켠다. 그리고 좋아하던 영화를, 보고싶었던 영화를 드라마를 정주행한다. 섹스 앤 더 시티, 굿플레이스, 와이 우먼 킬, 미세스 아메리카, 워리어 넌, 작은 아씨들, 미스 슬로운, 엣지 오브 투모로우, 콜미바이유어네임, 판데믹, 세븐 플래닛 원 월드 등. 영화는 대체로 봤던 영화를 또 돌려보고 드라마는 새로 시작했다. 마더 네이쳐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데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인간은 이 지구에 너무나 유해한 동물이라는 점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비밀의 숲을 보며 나는 어쩔 수 없는 정치판 인간인가 싶기도 하면서 우리 동재 살려내. 토이스토리 시리즈를 보고 눈물을 쏙 빼기도. 하루종일 노트북 화면을 보고 있으면 죄책감이 스물스물 올라와서 자기 전에라도 책을 들고 몇 장이라도 넘기다 잠드는 선순환은 보너스다.


5. 인생 2막 고민하기

사실 이건 거의 방치하다시피 밀어두고 있는 일이긴 하다. 평생을 공적 영역에서 일하겠다는 일념 아래에 살아온 나에게 민간 영역은 무지의 늪 그 자체였다. 국회란 곳이 그렇다. 애자일, 슬랙 이런게 뭐죠? 저희는 모든 문서를 한글로 작성하고 카카오톡으로 업무공유한답니다? 철저히 여의도와 세종시에 갇힌 업무 스타일에만 익숙해져있던 나는 프라이빗이라는 광활한 대지 위에 던져진 아기 사자였다. 성질 더럽고 야망은 있지만 뭣도 모르는 내가 어떤 분야로 이직할 지를 정하는 것부터가 난제였다. 국회에서 성공적인 이직을 한 나의 멘토 선배의 조언에 따라 니즈를 나열하고 타겟팅해서 쿠션을 이리저리 치는 작업들을 해나가야 하는데 이 과정은 이직을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직 모험기를 작성해 볼 예정이다. 정말 잘 살고 싶다.


6.  ect...

초딩일기처럼 보여도 되도록이면 매일을 기록하기. 설거지와 빨래 정도는 내가 하기. 하루종일 늘어지게 자기. 주식 공부하기. 흠, 더 생각해보니 없다. 효율성과 능률은 개나줘버린 나날들이다. 사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유럽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는 때에는 하와이였을지도 모른다. 여행을 인생의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나에게 코로나 시대는 고문이지만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 그 자체도 나에게 고요함과 안정감을 채워주니 내가 어디에 누구와 있든 이 시간 자체가 매우 소중한 것은 매한가지다. 


나는 서른에 맞은 얼마 남지 않은 방황기를 어떻게서든 잘 보내볼 예정이다. 잘 노는 것도 힘들다는 시대에 번아웃을 이겨낸 것만으로도 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덧붙여 고용절벽이 너무나 자명한 때에 용기있게(라고 쓰고 무모하다고 읽는다) 다른 생을 위해 한 발자국을 내딛은 나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답답하고 불안함도 공존하는 시기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너는 잘 해낼 것이라고. 끝은 결국 니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쥘 거라고. 용기는 무섭지 않은 게 아니라 무섭지만 계속 나아가는 것이니까. 시간은 멈춰있지 않고 나는 순간을 살아내고 있다.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만들 수 있는 빛나는 때라는 것. Keep staying g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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