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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곰 May 30. 2020

드림 컴 트루

언젠가 올 나의 화양연화를 위해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어렸을 적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던 일들은 빛이 바래간다. 어떨 때는 내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니, 하며 감탄하기도 한다. 근 10년간 나의 뇌는 씹다 만 껌처럼 변해버렸다. 오호 통재라.


나는 꿈이 많은 아이였다. 천재 시인, 피아니스트, 앵커, 종군 기자, 한의사, 요리사, 공연 디렉터, 큐레이터, 작가, 외교관, 정치인, 또 뭐가 있었더라. 아, 나사에 취직해서 우주비행사도 되고 싶었다. 


첫째 딸에게 발레, 피아노, 수영, 골프, 바이올린 등 오만 예체능을 경험하게 한 엄마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딸은 공부를 해야겠구나. 예술적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일치감치 깨달은 나는 시인, 피아니스트 등의 꿈에 빨간줄을 죽죽 그었다. 그래 취미로 하자. 그리고 감상엔 재능이 필요없잖아?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선 수학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과 관련 직업도 포기해야겠군. 내나이 열입곱, 인정했다. 나는 지독한 문과인간이라는 것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해 국립외교원을 목표로 한 1차 계획은 무너졌다. 수능을 망쳤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들을 만나면 세계가 보인다던 외대에 진학했고, 나는 시험과 거리가 먼 인간이기에 고시 준비도 가뿐하게 패스했다.(1학년 때부터 로스쿨을 준비했어야 했는데 이 멍청이)




내 나이 서른. 꿈에 대한 인터뷰가 들어왔다. 동아일보 100주년을 맞이하야 청년 리더 100명의 꿈과 미래를 탐구해보겠다는 취지의 인터뷰였다. 


꿈이라. 내 꿈이 뭐였지. 국회의원? 시장? 대통령? 부자가 되는 것? 유명한 사람이 되서 영향력을 가지는 것? 뭐하나 딱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좋은 사람들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그 일에 성과를 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내 꿈이었고, 구체적인 직업군은 밥먹듯이 변화했다.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직업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다음 스텝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좋은 일을 하는 사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첫 번째 질문부터 막혀버렸다.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청년이 국회의원이 꿈이라고 하는 건 너무 식상하잖아. 사실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꿈도 아니고. 담당 기자에게 '꿈이 없어도 되는 세상이 제 꿈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꿈이 없어도,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먹고 사는 걱정 안하는 세상이 내 꿈인데요. 나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고 성취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 필요는 없잖아요. 저는 열정과 꿈을 강요하는게 맞는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한다는 보장을 해줄 수 있는 세상도 아니고. 성공해야만 가치있는 삶은 아니잖아요? 사실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인데요. 우리 사회는 평범함을 너무나 평가절하하는 것 같아요. 요즘 같은 시대에 평범하게 사는게 얼마나 힘든데요.'


인터뷰를 추천한 기자 친구는 스웩있는 답변이라며 이대로 가자고 했지만 다음 질문에서 또 막혔다. '그렇다면 그 꿈을 위한 소장품 하나를 보여주세요' 모호한 꿈만큼이나 선명한 소장품도 없었다. 음, 이 꿈은 인터뷰 답변으로 적절치 않군. 빨간 줄이 다시 한 번 죽 그였다.


꿈이 없어도 되는 세상. 꿈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은 세상. 성공하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 고등학교 때 소중하게 일기장에 적어놨던 꿈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려운 환경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자.


부자는 아니더라도 넉넉한 가정형편과 첫째인 덕에 원하는 것들 대부분을 누리고 살았다. 기숙사 고등학교에 입학한 탓에 집에서 먹을 것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다며 아빠는 당시 쓸 수도 없는 돈을 용돈으로 보내주곤 했다. 해외여행도, 교환학생도 부모님의 지원 아래 다녀왔다. 배우고 싶은게 있으면 엄마에게 말만 하면 됐다. 


대학 진학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있는 '등록금이 비싼' 사립대에 원서를 내는 것에 대한 주저함이 없었다. 내 성적이 얼마나 잘 나오는지만 걱정하면 됐다. 그러나 시골 동네에서 1등하는 애들이 모였던 우리 학교에는 성적이 잘 나와도 서울행 티켓을 포기하는 이들이 많았다. 부모님이 농사를 하셔서, 동생들도 공부를 해야 해서. 서울 사립대에 가는 대신 지방거점국립대로, 지방교대로 진학했다. 학교의 우열을 가리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가고 싶은 학교에 가지 못하는, 서울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해보고자 하는 욕망을 거세해야 하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미대를 준비하던 동생 주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술 입시에 정확하게 얼마가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건 사실이다. 동생에게 고3때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자기보다 훨씬 재능이 있는 친구들이 입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미대 진학을 포기하는게 안쓰럽다는 말을 밥 먹듯이 들었다. 




잘하고 말고, 재능이 있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할 기회라도 얻는 것. 설령 재능이 없어서 실력이 부족해서 그 분야에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기회를 얻고 경험을 한다는 것이 개인의 삶에 충분한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들이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부의 격차로 인해 욕망을 삭히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공부든 예체능이든 재능과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이들에게 기회를 주는 학교를 만들자, 였다.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하고, 그러고 나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기회의 결핍이 평생의 그림자로 남지 않았으면 했다. 편의점 알바를 하든, 식당에서 일을 하든, 중소기업에 다니든, 장사를 하든 사정에 따라 다시 학교에 기부하고, 그 기부금이 모여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학교. 재능이 있는데 어려운 친구들을 지원하는 장학재단은 이미 있으니까. 재능이 없어도 경험할 기회는 줘야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예술적 경험이 꼭 예술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아이들이 학습한 것이 이 4차산업혁명 시대에 다른 분야와 어떻게 융합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인터뷰 답변을 작성하며 13년전의 나를 떠올렸다. 내 일생의 꿈은 학교를 만드는 거야, 라고 친구에게 말하던 나를.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친구들이랑 그런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 떠올랐다. '야, 성공하면 우리 학교에 꼭 기부해라.'라며 협박하던 나도.




꿈을 나타내는 소장품은 '에버노트'라고 써내려갔다. 에버노트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적고, 관련된 법과 제도를 스크랩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말도 안되는 이유를 말했더니 담당 기자는 '무형의 클라우드에 무언가를 담는다는게 요즘 세대같고 신선하네요' 라는 꿈보다 해몽격 해석을 내놨다. 


몇 년안에 꿈이 실현될 것 같냐는 기자의 말에 5년 안에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호기롭게 대답했다. 꼭 학교의 형태가 아니여도 되니까. 시작은 멘토링 정도로 해도 되지 않을까. 입시를 경험한 친구들이 봉사활동 격으로 재능기부를 해줄 수도 있는 거고, 크라우드 펀딩도 있고, 예대를 졸업한 친구들에게 막무가내로 부탁을 할 수도 있고. 


30년이라는 길지 않은 삶을 산 내게 가장 부족한 것은 추진력이었다. 하고 싶은 것들은 많은데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박스 어딘가에 쳐박아 놓은 일들이 많다. 대부분 돈이 되지 않는 일들이고, 현실성도 없다. 그래도 시작이라도 해보면 그 경험이 언젠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가 만들고 싶은 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안전한 길만 가기엔 삶은 유한하다. 어차피 큰 돈을 벌기엔 이미 그른 삶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말도 안되는 아이디어들을 하나하나씩 해보자는 용기가 피어올랐다. 봉우리를 틔우지 못해도, 씨앗이라도 심어보자는 심정으로 부딪혀 볼 생각이다. 내일은 친구와 유튜브 촬영을 할 생각이다. 학교와 관련된 일은 아니고 어르신들을 위한 사회공헌 프로젝트다. 돈도 안될 거고 큰 반향도 없을테지만, 무형의 아이디어를 유형의 무언가로 만들어내는 것은 내 인생에서 큰 진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로 나는 언젠가 내 꿈을 어떤 형태로도 이루어낼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어렸을 때 하던 장밋빛 인생은 그리지 않게 된다던데. 나는 여전히 내 인생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믿는다. 아직 화양연화는 오지 않았다고. 그러나 반드시 언젠가는 오게 될 거라고. 이 근거없고 유해한 자신감이 아무쪼록 내 곁에 오래 남아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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