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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Mar 01. 2018

라떼아트 월드챔피언의 이민 이야기 by 케일럽

세상에서 가장 예쁜 커피를 만드는 남자 이야기




나의 10번째 청년 이민자의 이름은 케일럽이야.

일단 한마디로 그를 소개해볼게.

귀에 쏙 들어오는, 그에게 언제나 따라붙는 수식어면 간단하지.


한국인 최초,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쉽에서 우승한 라떼아트 세계 챔피언 - 케일럽 차.





대외적으로 소개하기가 이렇게 단순하고 명료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그건 '바리스타 케일럽 차'를 소개하는 거잖아.  '호주의 한인 청년 이민자 차성원'을 소개하기에는 부족한 말 같아. 그래서 나는 그를 이다음에는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케일럽'을 알았지만 그는 나의 지인도 친구도 아니었거든. 하지만 나는 지금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보다 어쩌면 그 남자,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그 남자를 더 잘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와 나는 언제부터 알게 된 걸까.

내가 안다고, 모른다고 할 수도 없는 모호한 남자야, 케일럽은.




내가 처음 그를 알게 된 것은

8여 년 전쯤 멜버른 한인 커뮤니티 카페에서였어.

10여 전만 해도 멜버른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좁고 폐쇄적이었어. 우리는 모두 '멜버른의 하늘'이라는 다음 카페에 모여 정보를 주고받고 친목을 다졌지. 영어도 못하고 어리고 가난한 워킹 홀리데이 나부랭이 (?) 였던 나는 감히 나도 끼워달라고 손을 내밀 수도 없을 정도로 커뮤니티는 교민들의 결속력이 강했어. 온라인에서도 (오프라인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름이 알려진 멜버른 '원로'들이 암암리에 승인을 내주지 않으면 새로운 사람들은 존재감을 드러내기가 조금 어려웠던 것 같아. 글 쓰고 표현하고 소통하는 것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눈팅족'이 되었지.


어느 날이었어.

한 남자가 신상이 드러난 채, 엉망으로 화살을 받고 있더라. 그의 실명과 나이와 비자 종류를 다 까발리며 나대지 말라고, 나는 네가 누군지 알고 너 같은 워킹홀리데이 새끼는 추방시켜버릴 수도 있으니 입 닥치고 조용히 살라는 여러 명의 '영주권자'들과 맞서고 있던 20대 후반의 한 청년, 그가 바로 케일럽이었어.

한인 사회에서 일하지도 않는 바리스타라는 사람에게 그들은 왜 이 정도로 맹목적인 증오와 거부감을 나타내는 건지, 홀로 외롭게 그들과 맞서고 있는 이 사람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한번 들여다 본거야. 궁금하잖아?


알고 보니 그는 '워킹 홀리데이 청년들의 현지 취업을 위한 영어 수업'을 무료로 하고 있는 사람이었어.

요식업에서 많이 쓰는 영어, 인터뷰에 필요한 영어를 추려서 교재를 만들어 희망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직접 가르치고 있었어. 풀타임으로 일하는 카페 일을 마치고, 자기 돈 들여서 장소를 빌리고 광고를 내서 말이야. 그때는 한인 업체들이 돈도 터무니없이 적게 주고 대우도 안 좋았거든. 영어가 된다면 굳이 그걸 참으며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본인이 했던 쓸데없는 고생을 후배들은 안 했으면 좋겠다며 이런 일을 시작했고 하자마자 거짓말처럼 바로 소수의 사람들의 타겟이 되었어.  



전문적인 선생도 아닌 주제에, 영어가 완벽하지도 않은 주제에, 지가 뭐라고 나서서 보기 싫게 까불지?

한인 사회에 대해서 뭘 안다고, 한인 업체를 욕해? 워킹 홀리데이 주제에 워킹 홀리데이를 가르쳐? 꼴 사납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겠지. 돈 안받고 저런 짓을 할 리가 있겠어?

저렇게 일을 벌여서 관심받고 뭔가 하려는 거겠지. 관종 새끼, 잘난 척하고 있네. 죽여버리고 싶다.



워킹 홀리데이기 때문에 힘든 점을 알고 그러니까 다른 워킹 홀리데이를 도와주고 싶은 거고, 영어가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왔기 때문에 그 고생을 알고 그래서 돕고 싶을 뿐이라는 그의 외침은 허공에 흩어졌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새로 온 워홀들의 현지 취업을 열심히 돕던 그의 클래스는 3기를 끝으로 마감을 하게 됐지.


그게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계기였어.







그 후로 수년이 흘렀어.

나는 한국인들을 만날 일이 전혀 없는 직장 생활을 몇 년 거쳐 나의 레스토랑 수다를 멜버른 시티에 오픈하였어. 그리고 첫 단골손님 중 하나였던 고현석, 해리 바리스타와의 인연을 시작했지.


https://brunch.co.kr/@alicemelbourne/125



그걸 시작으로 어쩌다 보니 우리 가게는 '멜버른 한인 바리스타들의 아지트'가 되었어.

처음에는 소수로, 한인 바리스타 그룹이 형성이 되나 싶더니 어느새 제법 규모와 체계가 있는 어떤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더라고. 흥미로웠지. 근데 그들은 그들 한 명 한 명이 모여서 어떤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모르는 거 같았어. 왜 구름 내부에서는 알 수가 없잖아. 각각의 빗방울들이 어떤 모습의 구름을 만들고 있는지는 빗방울은 알 수없지.  나처럼 구름 밖에서 관심 있게 보는 사람만 알 수 있을 거야.


그들은 정말이지 매우 흥미로웠어. 관찰하기 좋은 대상이랄까.

처음에는 단체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어린 커피 쟁이들이구나 하고 생각했었거든. 서로 관심사도 비슷하고 친하니까 몰려다니겠지 생각했는데 커져가는 구름처럼 계속 새로운 사람들이 영입되더라. 그리고 그들은 열심히 새로운 이들의 손을 잡아서 끌어올렸어. 아무런 대가도, 칭찬도 바라지 않고.

어려운 일들을 (사장한테 사기당했다거나, 이력서를 쓸 줄 모른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커피를 배우고 싶다거나) 들으면 누구 할 것 없이 발을 벗고 나섰고 새로운 사람들의 정착을 진심으로 도왔어. 일하는 곳에서 일을 소개해주고 힘들게 익힌 기술을 전수해주고 그렇게 끈끈히 한인 바리스타들의 고리를 연결하는 것을 나는 단골 가게의 여주인의 입장에서 지켜보았고 감탄하였지.


결국 그 해와 이듬해 그들이 손에 손을 잡고 이뤄낸 그 눈부신 성과들 (호주 바리스타 대회를 한국 바리스타들이 휩쓸었고, 한국인이 오너인 유명한 카페들이 등장 하기 시작했으며, 호주 바리스타들이 한국인 바리스타 등쌀에 일 구하기가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어. 과장하는 게 아니고 정말 그랬어!)을 보며 나는 그들이 해외 한인 사회의 미래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마침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지.

내 생각이 맞은 건지 지금은 워홀 커뮤니티와 학생 커뮤니티가 많이 생겼어. 고만고만한 우리들, 청년인 선후배끼리 서로를 끌어주고 당겨주면서 한인사회는 더디지만 꾸준히 발전하고 있어. 아주 예전, 힘 있는 사람들이 은혜를 베풀면 감사하게 여기고 우리끼리는 아무리 뭉쳐봤자 힘이 없었던 그때와 같지 않아. 한국인들끼리 일 소개하여주면서 소개비를 받고, 남 잘되는 거 보기 싫어서 서로 까내리고 비자와 나이로 편을 갈라서 개싸움을 하고 하는 일은 이제 거의 없어.


나는 이 모든 시작이 바리스타 커뮤니티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의 첫 번째 인터뷰이 해리와 오늘의 주인공 케일럽 바리스타가 있지.

처음 바리스타 커뮤니티를 만들고 활동했던 그들. 나댄다고 욕을 들어먹을지언정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그들.

이 두 명 외에도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다른 많은 초기 바리스타들이 있지만 나는 이 두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아. 나는 바리스타도 아니고 아무 상관없는 일을 하는 아웃사이더지만 어쨌든 멜버른에 살고 있는 한 명의 한인 청년으로서 그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아직도 들어.

판세를 바꿔줘서 고맙다고. 손을 잡아주고, 본인의 이익과 상반되더라도 옳은 일을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그때의 바리스타 그룹에게 전하고 싶어.


(지금은 한국과 호주, 그리고 다른 나라들에서 멋있고 열심히 살고 있는, 기억나는 얼굴들, 잘지내요 다들?)





그 흔한 커피 한잔

나는 그와 마신 적이 없고 우리는 이 인터뷰 전에는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케일럽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고 싶지 않아. 나는 꽤 오래 (좀 스토커스럽지만 ㅋㅋ) 그를 관찰하였고 나름대로 평가하였으며 어떤 고마운 마음과 안쓰러운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거든. 분명히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오래 같은 커뮤니티에 있던 내가 잘 아는데, 얼마나 많은 화살을 웅크리며 받아내고 아파했을지 나는 알 거 같은데 밖에서 만나는 케일럽은 언제나 강하고 멋있는 그야말로 '챔피언'같은 모습이니까.

그래서 그의 진짜 이야기가 궁금했어. 흔하지 않은 남자의 흔하지 않은 이야기가.


미리 말하자면 긴 이야기야.

하지만, 읽고 절대 후회 없을 이야기라고 생각해.

이민과 커리어라는 두 산의 꼭대기 정점을 찍으며 가장 깊은 고난과 가장 커다란 환희를 몇 번이고 겪은, 케일럽의 진짜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를 나만 알고 있을 수는 없잖아. 꼭 너와 나누고 싶어.

특히 바리스타이거나 바리스타 일을 꿈꾸는 너에게는 백번이고 추천할게. 절대 시간이 아깝지 않을 거야!

꼭, 나만큼 너도 재밌게 잘 읽어줬으면 좋겠어.


그럼 이제 시작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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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LICE) : 안녕, 케일럽! 만나서 반가워. 먼저 자기소개 좀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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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CALEB) : 안녕 내 이름은 캐일럽이라고 해.

나는 멜버른에 온 지 10년 차 이민자이고 직업은 바리스타야. 2015년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쉽 라떼아트 부분 세계 1위를 해서 한국인 최초로 바리스타 챔피언의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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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드는 직업이라는 건 알지만 그 이상은 몰라. 조금만 더 자세히 네가 하는 일을 설명해 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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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음, 여러 가지 일을 함께 하고 있어. 일단은 나의 이름을 건 커피 클래스로 커피에 관심이 있는 대중이나 바리스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라떼아트와 에스프레소를 강습하고 있어. 그리고 후배 바리스타들을 양성하고 대회를 준비하고 전 세계에서 열리는 커피와 관련된 워크샵과 세미나를 참가하는 일들을 하고 있어. 그리고 세계대회 공인 심사위원 자격으로 대회가 있을 때는 심사를 하기도 해. 다음 달에는 태국, 싱가포르 바리스타 국가대표전이 있어서 그 대회에 심사를 위해 참여하는 것이 예정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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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호주 챔피언도 아니고 월드 챔피언이라니 정말 대단해! 국제 대회 심사위원이라고 하니까 무언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너는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한 거야? 10년 전에 호주 오기 전부터 바리스타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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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난 정말 커피머신 잡기 전까지는 커피의 커자도 몰랐어. 마실 줄만 알았지 믹스 커피 말고 내가 커피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어. 거기다가 한국도 아닌 외국에서 커피를 할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어.

2008년에 워홀로 멜버른에 떨어졌는데 생각보다 일이 진짜 안 구해지는 거야. 하도 안 구해지니까 어쩔 수없이 한인 식당에서 일을 했었거든.  돈도 진짜 쥐꼬리만큼 주는데 일은 엄청 고되더라. 그때의 나야 가진건 패기와 건강한 몸뚱이뿐이니 체력적으로 버티는 건 그런대로 괜찮았어. 근데 생각지도 못하게 정신적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더라. 내가 일을 열심히 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일을 나보다 먼저 시작했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텃세를 부리고 비자 타입으로 사람을 무시하며 갑질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어느 순간 영혼을 팔아가며 그들에게 맞추며 먹고살기 위해 하루하루 감내하는 내가 있었어. 아니, 한국에서 사회생활하면서 갑과 을의 미묘한 관계에 따른 감정 소모에 질릴 대로 질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똑같은 패턴을 내가 또 반복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그 순간의 상실감이란. 아무튼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 영어를 익히고 기술을 배워서 현지 업체에서 일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어. 찾아보니까 멜버른에서 가장 유명한 윌리엄 앵그리스라는 학교에서 바리스타 코스를 운영하고 있는 거야. 이거라도 배워두면 어디라도 써먹겠지 싶어서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코스를 수료했지. 경력이 없이 수료증 만으로 일을 구하기는 힘들었지만 열심히 발품 팔아 돌아다닌 덕에 작은 카페에서 바닥부터 배우며 일을 시작할 수 있었고, 나는 그렇게 커피머신을 잡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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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아, 그랬구나. 나는 네가 원래부터 커피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우연히 호주 와서 먹고살려고 시작한 주방일이 잘 맞았던 것처럼 너도 먹고살려고 배운 기술이 천직이 된 케이스구나. 커피를 시작하고 바로 이 길로 가야겠다 싶었어? 운명처럼 커피와 사랑에 빠졌다거나 뭐 그런 느낌이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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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제대로 된 현지 일을 너무 힘들게 구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배웠어. 한인 가게에서 일할 때와는 시급이 두배 정도 차이 났기 때문에 여기서 잘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의 뇌를 지배했던 것 같아. 왜 뭐든지 백지일 때 빨리 익히잖아. 사람이 일단 절박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이 빨리 늘었어. 커피를 만드는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것이 나 스스로한테도 느껴질 정도였어. 아무래도 일이 손에 붙고 주위에서 잘한다 하니까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나면 충만하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지. 바리스타라는 직업 자체가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일이잖아. 사람을 만나는 걸 좋아하고 대화를 즐기는 나의 적성이 직업이 잘 맞는 것 같았어. 어느새 새끼 바리스타에서 점점 올라가서 헤드 바리스타가 되고 카페 메니져까지 올라갔지. 이 일이 꽤나 재미있구나 라고 생각한 것은 맞아. 하지만 딱 거기까지 였어.  ‘재미있는 일이지만 오래 할 일은 못되겠다’ 가 그때의 솔직한 내 생각이었어. 이거다 싶지는 않더라. 이 길로 쭉 나가볼 생각은 없었어. 그때의 나는 매일 하루에 5-6백 잔씩 죽어라 커피만 뽑았거든. 엄청 바쁜 카페에서 기계와 같이 신속하게 손님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손이 얼얼해질 때까지 죽어라고 커피만 내렸어. 매일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같은 일을 반복 반복.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 커피머신의 일부, 일하는 기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원래는 그만두려고 했었어.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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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러다가 언제 마음이 바뀐 거야? 지금처럼 확고하게 이 길로 나가겠다는 결심이 굳은 건 언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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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매너리즘이 올 때쯤 처음 바리스타 대회에 처음 참가하게 되었어. 나는 아예 기대도 안 했지, 언감생심 내가 무슨. 그런데 미친 듯이 커피만 뽑아대던 그 하루하루 사이에 나도 모르게 실력이 확 늘었는지 처음 참가한 대회에서 호주 내 2위를 달성한 거야. 그때 진짜 심장에서 무언가 꿈틀 했던 것 같아.

이거다, 새로운 목표가 생긴 거지.

커피 실력을 평가받는다는 게 사실 애매하잖아. 평가기준 자체가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떤 목표를 설정해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기가 힘든 면이 있거든. 그럴 때 이 대회라는 것이 나에게 이정표가 되어준 거야. 나는 뭐에 꽂혀야 파고드는 성격이거든. 목표가 있어야 달리는 스타일이라 목표를 잃었을 때는 동력도 잃게 되더라고.

 2015년에 호주 내셔널 챔피언이 됐을 때는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지 못해서 눈물도 흘렸어. 개인적으로, 일적으로 너무 힘들었을 때라 마음도 약해져있었나 봐. 비자와 직장이 모두 불안정한 상태에서 내가 과연 무얼 할 수 있을까 너무 무력하고 암담하던 시기였는데 당당하게 호주 챔피언 자리에 오르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보상받는 기분이더라. 카페에서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기계 같은 일상이 바리스타의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 내가 마음만 있다면 언제든 새로운 도전을 할 수도 있고 스스로 계속 발전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 한번 시야가 넓어지니까 이 업계에서 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일들이 보이더라. 그렇게 생각한 후로는 한 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커피만 생각하면서 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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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갑자기 궁금해진다. 바리스타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간 스타 바리스타, 커피 셀럽인 네가 원래 하던 일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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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나는 태권도를 여섯 살 때부터 했어. 나를 포함 모든 남자아이들이 전국적으로 그럴 때였으니 나도 했고 주위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그냥 꾸준히 다녔어. 연세대학교 체대를 태권도 전공으로 입학해서 대학생활을 했지.

별다른 꿈도 없었으니 졸업한 후 전공을 살릴까도 생각해 봤는데, 이 체육 계열이 사실 진로가 극명하게 나뉘어있거든. 체육 선생님이 되는 경우가 가장 많고, 아니면 대학원이나 유학을 가던지, 혹은 전혀 다른 생뚱맞은 일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어. 우리 과는 3학년 때 체육교육과와 사회체육과로 나눠지거든. 그런데 체육 선생님이 되려면 체육교육과로 지원해야 했는데 내가 공부를 너무 안 했나 봐. 체교과에 떨어지고 사회체육과로 결정이 났지.  대한민국 중고등학교 체육선생님에 대한 인식이라는 게 사회적으로 과소평가되어있다며, 교원 혹은 공무원 사회의 보수적 문화가 나에게 안 맞을 거 같다는 핑계를 댔고 애써 나는 선생님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며 위안을 해봤지만 씁쓸하더라. 몇십 년을 운동하고 공부해서 나름대로 그 분야 최고의 대학까지 올라갔지만 학업이 끝날 때쯤에는 그 길을 더 걸을 자신이 없어진 상태였었어.

분명히 내 뜻으로 걸어간 길이었는데도 그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 보니 그 길 위에서도 쉽게 길을 잃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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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완전 뜬금없이 체대 오빠였네. 그래서 전공에 회의가 들면서 다른 일로 눈을 돌리게 된 거야? 그래서 다음에는 어떤 일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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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군대를 ROTC로 대학 4학년을 마치고 해병대 장교를 지원해서 갔는데 생각보다 생각보다 이 상명하복 수직관계에 나는 별로 거부감도 안 들고 적성에 맞는 거 같더라. 말뚝을 박을까 생각도 했었어. 음악을 좋아하니까 음악을 한번 파볼까, 미술을 할까 만화를 그려볼까 아니면 계속 몸을 만들어서 UFC 선수가 되어볼까 등등 군대에 있는 동안 내내 생각은 많이 했는데 밥벌이할 정도로 내가 그런 쪽에 재주가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도전해볼 용기가 나지 않았지.





그러다가 전역하기 바로 전 우연히 국제회의 기획사라는 직업에 대해 알게 되었어. 작게는 컨벤션이나 세미나, 무역 전시회, 크게는 국가 정상회담이나 올림픽 같은 걸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이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훨씬 더 생소한 직업이었지. 듣자마자 확 꽂히더라. 너무 매력적인 거야. 마침 국가 자격증 1회 시험이 잡혔고 전역을 하자마자 나는 공부에 매달렸어. 6과목을 공부해야 하는데 시간이 딱 3개월밖에 없었거든. 미친 듯이 매달렸었는데 결국 0.3점 차로 나는 자격증 취득에 실패했어. 처음으로 내가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도전했다가 실패를 하니까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더라. 에라 모르겠다, 뭐라도 해보자 싶어서 취업박람회에 갔어. 처음 들어보는 금융 컨설턴트라는 직업이 있더라고. 지원을 했고 여의도의 한 종합금융회사에서 면접 기회를 얻어 합격까지 하게 됐어.  컨설팅과 VA자격시험을 보고 회사에 들어간 그때가 2004년이고 나는 26살이었어. 그만둘 때까지 나는 4년간 자산관리를 하는 금융컨설턴트로 회사생활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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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한국에서 제대로 된 직장생활도 했구나. 4년이나 했으면 영 안 맞는 일도 아니었을 것 같은데 왜 멀쩡한 직장을 팽개치고 호주행을 선택하게 된 거니? 회사생활은 어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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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나이가 어린 신입사원이다 보니까 주 업무는 컨설팅이라기보다는 영업에 가까웠어. 돈 있는 이 사람 저 사람 찾아서 만나고 다니면서 회사에 자산관리와 투자를 유치하도록 유도하는 게 주 업무였지. 갓 전역했던 나는 열정이 넘쳤어. 이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서기보다는 인정받고 싶었고 치열하게 살고 있는 그 느낌이 좋았지.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이 일이 적성에 꽤 맞는 것 같았어. 내 또래보다 돈도 훨씬 많이 벌었고 삶은 안정적이고 윤택했어.

그런데 1년 2년이 지나면서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가는 게 느껴지더라.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일하고 다시 월요일 출근. 이렇게 살다가는 소처럼 일만 하다가 돌연사로 죽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었어. 그러던 어느 날 터덜터덜 걷다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그때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비행기가 보이는 거야. 그때 속으로 다짐했어. 내가 언젠가는 저 비행기를 타고 이 나라를 뜨겠다고. 평생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처음에 일했던 회사는 같이 일했던 사람들도 다 좋았을 뿐 아니라 내가 열정과 애사심이 넘쳤는지 나는 첫해 최우수 신입사원으로까지 선발됐었어. 그런데 스카우트를 받아서 이직한 외국계 대기업 모 그룹에서는 불행히도 그렇지 않았어. 일에 대한 스트레스는 견뎌도 사람이 주는 스트레스는 못 견디겠더라. 조직원 상호 간의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아주 뼈저리게 느꼈지. 당시 내가 있던 지점은 영업이익 순위가 전국 최상위권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뭔가 항상 2% 부족한 느낌이었어. 내가 그 부분을 못 채우고 따라가지 못하는데 팀에서 어떤 방향성도 제시받지 못하게 되니 결국 내가 점점 지치더라. 안 되겠더라고. 화병으로 죽기 전에 끝내자 싶어서 사표를 던지고 그렇게 꿈꾸던 호주로 떠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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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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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일을 하면서 배운 점도 많아. 업무상 부자들을 많이 만나면서 세상은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걸 매일 느꼈어. 세상은 참 넓고 성공한 사람들은 정말 많다는 걸 배웠지. 수천 명의 고객들을 만나서 이 사람이 투자를 할지 말지,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를 5분 만에 간파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마음을 읽는 방법을 익힌 것 같아. 사람을 매일 만나는 지금의 직업에도 큰 도움을 주었지. 일 자체가 싫지도 않았고 배운 점도 많다고 생각해.

하지만 업무를 떠나서 회사라는 조직 생활 자체는 사실 회의적인 부분이 많았어.

호주는 개개인이 모여서 이 조직을 이룬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개인주의가 강하고 상대적으로 단체라는 개념이 약하잖아. 남이야 어떻던 내 일만 잘하면 된다, 이런 식이지. 하지만 한국은 팀과 단체를 위해 개인이 어느 정도는 희생을 감수하는 게 당연한 사내 문화가 만연한 곳이 아직도 많아. 그러다 보니 팀워크가 맞고 좋은 상사를 만나면 회사가 다닐만한 곳이 되는데 그게 아니면 지옥이 되는 것 같더라. 생산성을 떨어뜨리기만 하는 비효율적인 감정 소모가 너무 많았어. 내 시간, 여유가 전혀 없이 회사의 소모품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도 내가 한국의 회사생활을 싫어했던 큰 요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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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래서 회사 때려치우고 호주 올 때부터 이민을 작정하고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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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아니 그렇지는 않아. 이민에 대한 마음은 솔직히 굴뚝같았지. 근데 내가 뭐 방법을 아나. 그냥 막연히 언젠가는, 하는 정도였어. 그냥 한국에서 되도록 오래 떨어져 있고 싶어서 알아보니까 호주 워킹홀리데이 2년이 돈 안 들고 가장 오래 있을 수 있는 방법이더라. 단순히 오래 있고 싶어서 호주를 택했고 돈 안 드는 방법이라 워홀을 택한 거뿐이었어. 앨리스 네가 처음에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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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응, 나도 그랬어. 다른 데는 돈도 너무 많이 들고 캐나다나 일본은 워홀을 지원해도 떨어질 수도 있다고 하길래 호주가 가장 무난하다 싶었던 거지. 한국이랑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도 그때는 마음에 들었고. 와서는 생각 같지 않아서 많이 고생했지만 말이야. 처음에 오면 가장 많이 힘들어하는 부분이 영어잖아. 너는 어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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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대학 때 사귀던 여자 친구가 교포였거든. 연세 어학당을 다니던 친구였는데 그 얘의 친구들과 매일 어울리면서 영어에 취미를 붙였지. 다른 나라말로 소통이 된다는 게 너무 신기한 거야. 군대에 가서도 한미 해병 연합훈련의 통역장교 역할을 맡으면서 나름 영어를 계속 쓰려고 노력했어. 호주에 왔을 때 물론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소통은 될 거라고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던 것 같아. 근데 웬걸, 안 들려. 뭉개진 발음에 말은 왜 그렇게 빠른지. 내가 알던 릴랙스 한 미국 발음과는 너무 다른 거야. 안 들려, 하나도 안 들려. 그때 정말 멘탈이 붕괴되는 걸 느꼈어. 자신감이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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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나도 그랬어. 안 들려! 너와 다른 점은 나는 미국 영어도 전혀 못했다는 점이랄까….? ㅠ

안 들리는데 말은 계속 하지 뭐라고는 해야겠는데 입은 안 떨어지지. 멘붕이 올 수밖에 없어. 100% 공감해. 그래서 넌 영어를 어떻게 극복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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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진짜 이건 아니다, 안 되겠다 싶더라. 진짜 실생활 영어를 너무 듣고 말하고 싶은데 아는 사람은 없지 너무 답답한 거야. 그래서 하루는 그냥 무작정 밖에 나갔어. 길바닥에 앉아있는 노숙자 한분에게 돈을 주면서 말했지. 나 영어 배우고 싶으니까 아무 말이나 해달라고. 주머니에 있는 50불을 다 털어서 줬어. 그분도 외롭고 말할 상대가 필요했는지 옳다쿠나 하고 나를 붙잡고 신세한탄을 하더라. 왜 노숙자가 되었냐면, 남자 친구랑 같이 살고 있었는데 남자 친구가 바람이 나서 어쩌고 저쩌고…. 많이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얌전히 경청했어. 그 날 이후로는 돈을 들고 다니면서 다른 노숙자분들과 이야기를 많이 했어. 알아들으면 신나 하고 모르면 적어달라 해서 집에서 찾아보고 외우고 써먹고.  집에서도 밖에서도 영어만 생각하고 계속 공부했어. 드라마 하나를 봐도 대사를 다 외울 때까지 보고 그랬지. 한 6개월 정도 그런 생활을 하니까 어느 정도는 들리고 말할 수 있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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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같은 요식업계 안에서도 바리스타는 소통능력이 중요하게 평가된다고 알고 있어. 사실 요리사도 외국에서 근무하려면 영어가 기본적으로 돼야 하지만 아주 엉망만 아니면 실력만 가지고도 인정을 받기도 하거든. 직책이 올라가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우리는 팀 내에서 소통이 이루어지잖아. 손님에게는 중간에서 홀스탭을 한번 거쳐서 전달되니까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덜한 부분도 있어. 하지만 바리스타 같은 경우는 손님과 대화하는 스킬도 능력이라고 평가받지 않아? 외국에서 바리스타 생활을 할 때 영어가 얼마나 중요하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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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음… 사실 내 기준에서 좋은 바리스타는 손님하고 소통할 때 단순히 커피를 주문받고 건네주고 끝내지 않아. 하루가 어땠는지 주말에는 뭐하는지, 개인적인 대화를 자연스럽게 잘하는 것도 역량이라고 생각해. 사실 바쁜 일과 중에 커피를 한 잔 한다는 것은 단순히 카페인을 섭취한다는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있거든. 하루 중 잠깐 쉼표를 찍고 기분전환을 하는 역할을 하는 시간인 거야. 평소에 마시는 커피를 기억해주고, 사소한 일들을 기억했다가 언급해주면 손님들은 특별히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기분 좋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지.

영어가 완벽할 필요는 사실 없어. 우리는 보통 질문하고 들어주는 입장이기 때문에 말을 잘하는 것보다는 경청해주고 맞장구 잘 쳐주고 리액션을 잘해주는 게 더 중요할 수 있거든.

 의사소통이라는 건 정말 중요한 거야. 소통을 안 할 거면 그냥 좋은 기계를 쓰지 뭐하러 사람을 쓰겠어. 손님과의 소통도 그렇지만 함께 일하는 스텝들과 호흡을 맞추려면 대화를 많이 해야 하고 그러려면 어느 정도의 언어 실력은 필수인 것 같아. 특히 일반 스텝이 아닌 매니지먼트 이상의 직책을 맡고 있거나 하고 싶다면 말이야.

나는 개인적으로 영어실력보다는 성격이 가장 큰 몫을 했어. 일단은 다가가서 부딪히고 보는 스타일이거든. 내가 못 알아듣겠으면 메니져나 다른 스텝들한테 도움을 요청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말부터 걸었고 대담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처음에는 어렵고 어색했던 대화가 점점 자연스러워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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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2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기술을 배우고 새로운 세상에 도전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쉽지 않은 일일 수도 있잖아. 너는 어땠니, 두렵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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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한국에서는 20대 중반, 군대를 다녀온 남자, 회사원 등등의 꼬리표가 붙고 나이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어. 아 나는 몇 살인데 지금 뭐 하고 있나, 몇 살 이면 뭐해야 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멜버른에 도착한 순간부터 의도적으로 나이에 대한 의식을 지웠어. 나이를 의식하지 않게 되니까 나보다 나이가 어리고 많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었고 오로지 나한테 집중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다니게 되었어. 기준이 ‘내 나이’가 아닌 ‘내’가 된 거지. 틀에 박힌 고집은 빨리 버릴수록 유리해. 나이가 많다고 대접받으려고 하거나 나이가 어리다고 응석 부리고 기대려고 하거나 하는 고정관념은 시야를 좁히기 마련이니까. 한국에서 매일 정장 빼입고 자산관리에 투자 유치하던 내가 한참 어린 친구들과 함께 테이블 닦고 서빙하면서 뛰어다니게 될 줄 나라고 상상했겠어? 고집을 버리고 나이에 대한 틀을 벗고 나니까 그런 일하는 게 뭐 어때서? 싶더라.

배움과 도전에는 나이가 없잖아. 그냥 즐기면 되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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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월드 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난 후에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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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솔직히 말하면 달라졌어. 정말 모든 게.

우선 전 세계 커피업계 사람들이 나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물론 연봉이나 대우도 달라졌지. 한 곳에 정착해서 일하던 입장에서 이제는 세계를 다니고 가르칠 수 있게 되었어. 전 세계에서 초청을 받아 세미나와 워크샵에 참여하면서 정말 크게 성장한 것 같아. 기술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자극을 많이 받은 덕택에 한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세계대회 공인 심사위원 자격증도 땄어. 세계대회 주관사에서 시험을 치르는데 합격한 사람만 세계대회 심사를 할 수 있어. 나는 2017-2019년까지 심사할 수 있어.

내가 하루 수 백 잔씩 커피를 뽑아내던 커피 노예이던 시절에 샌알리라는 멜버른 유명한 카페에 맷퍼거 라는 친구가 있었거든. 그 친구를 우리는 커피 셀럽 (Coffee Celebrity)이라고 불렀어. 커피 업계에서는 정말 연예인급이니까! 그런 친구들이 대회 나가서 상 타고 우승하고 유명해지는 걸 보면서 동경하는 마음을 키워갔었지. 나도 언제쯤 저렇게 될까, 하는 동경이 결국에는 나를 움직이고 연습하게 하고 시합에 매달리게 했던 것 같아. 지금 돌아보면.


월드 챔피언이 되면서 이제는 사람들이 나를 커피 셀럽이라고 부르고 나의 라떼아트 기술을 부러워하는 날이 왔어.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지금 나는 더 바랄 게 없어. 간절히 꿈꾸고 죽도록 노력하니까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아직도 믿어지지 않고 감사한 마음뿐이야. 물론 지금은 맷퍼거 뿐 아니라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기라성 같은 바리스타 슈퍼스타들과도 격의 없는 사이가 됐어. 근데 나는 그런 게 아직도 너무 신기해.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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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우리 말나 온 김에 네 인생의 전환점이 된 그 순간인 대회 이야기 좀 해볼까?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쉽 경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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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2015년 호주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내셔널 챔피언 자격으로 나는 스웨덴 고텐버그에서 열린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쉽에 참가하게 됐어. 총 36국에서 참가했지.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얼떨떨한 기분이었어. 현실감각이 없다고 해야 하나,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해서야 진짜 내가 세계대회를 치르러 이 먼 스웨덴까지 왔구나 실감이 나더라. 각 나라에서 온 유명한 바리스타들이 주르륵 앉아있는데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더라고.

예선경기가 열렸어. 월드 무대는 규모부터 분위기고 국내 대회랑 진짜 달라. 그 중압감에 똑바로 서있기가 힘들 정도였어. 애써 아닌 척했지만 초조해서 손톱이고 발톱이고 다 물어뜯고 싶더라니까.

예선부터 나한테는 조금 불리한 상황이었어. 왜냐하면 대회 전에 왜냐하면 내 호주대회 시연영상이 세계대회 이전에 이미 유튜브에 퍼져버려서 다른 선수들이 내가 뭐할지 다 알고 있었거든. 내 거를 참고해서 자기 패턴을 더 경쟁력 있게 바꿀 수도 있고 심하면 카피할 수도 있기 때문에 원래는 유출하지 않는 게 관례인데 말이야. (실제로 인도네시아 한 바리스타가 내 거를 정말 카피했어.) 무거운 마음으로 예선을 끝냈어. 다행히 1위로 무난하게 통과를 했고 결승에 진출하게 되었어.


그 대회는 한국 커피업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며 이목을 집중했던 경기야.

왜냐하면  각기 다른 국기를 가슴에 찬 한국인 바리스타들이 큰 활약을 펼치며 선방하고 있었거든. 커피 인 굿 스피릿 분야에 (커피를 술과 섞은 음료) 영국 대표로 박상호 바리스타와 한국 대표 현상무 바리스타가 진출하였고 라테아트 분야로는 한국 대표 정경우 바리스타, 그리고 호주 대표인 나까지, 파이널에 한국 바리스타가 무려 4명이나 진출한 거야. 너무 반갑고 뿌듯했지.

현상무 바리스타랑 박상호 바리스타가 굿 스피릿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를 기원하며 나는 정경우 바리스타 하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 됐어.

떨리는 가슴을 겨우 달래며 백스테이지에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어. 그런데 이제 내 시연이 3분 남았는데 라떼아트를 그리는 도구 하나가 없어진 걸 그 때야 깨달은 거야. 손이 제멋대로 떨리더라. 나와 함께 호주에서 넘어온 컵 테이스팅 호주 챔피언 고현석, 해리 바리스타가 순식간에 뛰어가서는 도구를 구해온 거야. 덕분에 나는 시연장에 제시간에 들어갈 수 있었어. 사랑한다 해리야.  

그리고 도구를 빌려주신 김미지 부장님, 윤선희 위원님, 정유영 코치님 감사합니다.





파이널 시연을 시작했어. 심호흡하고 무대를 바라보는데 정말 하얗게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야. 그래서 더 일부러 아닌 척 당당하게 행동했어. 청중들에게 말도 걸고 시연 시작을 알리는 “타임”을 외쳤지.

나는 간절히 기도하며 그동안 수도 없이, 정말 수도 없이 연습한 대로 해나갔어. 시연 시간은 딱 10분이라 아주 작은 실수도 용납이 되지 않거든. 이 기회는 지나가면 오지 않기 때문에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했어.

그런데 그라인더에서 커피를 갈려고 하는데 커피가 안 갈려 나오는 거야. 예상치 못하게 시간을 잡아먹는 상황이 생기면서 나의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 했어. 그럴수록 정신을 더 집중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더라. 심장이 터질 거 같았어. 시연 마지막에 클로징 멘트를 하려고 다 준비해놨는데 총 여섯 잔의 라떼아트를 마치고 초시계를 보니 딱 1초 남아있는 거야. 오버타임은 일초에 1점씩 깎이거든. 어쩔 수 없이 시연의 종료를 선언하는 타임을 외칠 수밖에 없었어. 클로징 멘트도 포기했고 테이블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지만 이미 버스는 지나갔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진짜 운 좋아야 한 3위 정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무대에서 내려왔지.

개인적으로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던 아쉬운 시연을 마치고 나는 백스테이지에서 다른 결승 진출자 6명과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결과 발표를 기다렸어. 6위부터 순서대로 이름을 부르면 무대로 나가는 거였거든. 6위부터 차례로 대만, 태국, 일본 대표가 불려 나갔어. 내가 기대하고 있던 3위를 발표하는데 어? 너무 잘해서 우승할 줄 알았던 한국의 정경우 바리스타가 된 거야. 이제 나와 중국 대표만 남은 거지.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내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와도 안 이상할 정도의 속도로 뛰기 시작했어. 1초 1초가 아득하게 느껴진다는 그 기분이 이런 거구나 느꼈지.


그리고 2위를 부르는 사회자의 멘트.


“The national champion of……CHINA!!”


처음엔 멍하니 서있었어. 2위가 중국이라면 남은 건 1위 자리 하나인데 그게 호주 대표라고? 그게 나라고?

너무 현실감각이 없고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냥 멍했어, 이게 무슨 일인가 싶고. 내 앞에서 동료들이 끌어안고 울고 소리 지르고 난리가 났는데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어. 그 기분이 나, 아직도 생생해. 평생 잊을 수도 없고 잊고 싶지 않은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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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데 너는 왜 유독 한국인, 아시아계 바리스타들이 세계권 대회에서 이렇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해? 내가 부정적인 사람이라 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우리가 정확한 수치로 된 성적표나 등수를 받아야 마음 편하게 인정받았다고 생각하는 심리가 이 곳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손재주가 좋고 근성이 좋고 부지런한 특성도 분명히 발휘됐겠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수학 올림피아 같은 곳에서 순위를  싹쓸이하는 그런 종특(?) 이 여기서도 발휘되는 부분도 없지 않나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물론 나쁜 건 아니야! 그런 경쟁심리와 근성이 장점이기도 하니까.

내 이런 관점을 월드 대회 1등으로서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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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웃사이드에서 들여다보는 관점이라 새롭네.

내 생각에는 한국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는 일단 영리해서 인 것 같아. 대회에서 어필해야 하는 부분의 핵심을 날카롭게 파악하는 경향이 뛰어나고 그에 맞는 준비를 철저히 하거든. 근성이 좋은 연습벌레들이 많아. 그러다 보니 실력은 두말할 나위 없이 좋을 수밖에 없어.

한국에서는 시합을 준비하려고 해도 여건이 잘 안된다고 해야 하나? 오로지 실력과 열정만으로 나서기에는 뭐 위치나 서열 같은 거 때문에 이곳저곳 눈치도 보게 되니까 쉽사리 나대지 (?) 않게 되는 거 같더라. 실력이 있더라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멍석이 깔리지 않는 거지. 상대적으로 외국에서의 바리스타 생활을 하다 보면 눈치 볼 일이 없어지니까 훨씬 대담해지는 거야. 자유롭게, 본인이 원한다면 시합을 준비하고 주위에서도 경력이나 위치에 상관없이 새로운 도전을 한다고 하면 장려하고 응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니까 아무래도 마음이 편해. 그래서 그런 것 같아. 내 생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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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10년의 호주 생활, 9년의 바리스타 생활 동안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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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많은 이민자들이 그렇듯 나도 비자 문제로 가장 많이 힘들었지. 지금이야 월드 챔피언이라고 여기저기에서 찾지만 나도 처음부터 월드 챔피언급의 스타 바리스타는 아니었잖아.

2010년에 457 고용주 스폰서 비자가 진행될 뻔했는데 자꾸 엇갈리기만 했어. 그래서 학생비자로 바꿔서 학교 다니고 그러다가 2013년이 돼서야 457 비자를 진행할 수 있었어. 정말 몸 바쳐서 열심히 일했지. 새벽부터 일어나서 6백 잔씩 커피 내리고 청소하고 일끝 나면 대회 준비하고 연습하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살았어. 7년째 일하고 있는 그곳에서  많이 성장하기도 했고 오랜 시간 동안 사장과 가게에 정이 들어서 애정도가 컸어.

그런데 계약된 2년 근무기간이 끝나고 약속한 대로 ENS로 영주권을 줘야 할 때가 왔는데 사장이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안 해주겠다는 거야. 풀타임으로 앞으로 2년을 더 일하면 해주겠다는 말을 하더라고. 어이가 없었어. 사장이 말한 이유는 내가 월드 챔피언이 되면서 준비 기간에 연습하느라 풀타임으로 제대로 근무를 안 했다는 거지. 나는 정해진 대로 근무를 다 했는데! 내가 호주 챔피언이 되면서 내가 일했던 카페도 얼마나 큰 주목을 받았는데!

내가 월드 챔피언으로서 계속 세계를 다닌다면 가게에 소홀할 것 같고 그렇다면 사장는 나를 계속 고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비자는 도와줄수가 없다며 이민성에 나를 신고하겠다고 하더라고.

그때의 심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배신감과 좌절감이었어. 7년이라는 세월이잖아.

그렇게 힘들게 월드 챔피언이 됐으면 뭐해,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데.

나의 비자와 꿈꿨던 미래가 송두리 채 흔들리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보다는 결국 우리의 관계가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구나 라는 게 너무 힘들었어. 한배를 탄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몸 바쳐 일하던 7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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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7년! 와, 진짜 오래 일한 곳에서 그렇게 뒤통수 맞으면 진짜 충격이지. 그런 곳인지도 모르고 바보처럼 사람 믿고 한 곳에 머무르느라 놓친 기회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알고 있지만 너의 경험담을 들으니 더 씁쓸하게 느껴진다. 그깟 비자가 뭐라고 여기 휘둘리고 저기 휘둘리고 살아야 하는지 자괴하던 시간들, 나도 겪어봐서 남일 같지가 않아. 그 시간들이 난 지금도 악몽같이 느껴지거든. 그래서 그렇게 7년이라는 시간을 버리고 이민의 꿈은 물 건너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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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아니, 근데 그때 사장이랑 싸우고 망설이다가 박차고 나온 게 내 인생 최고의 일이었어.

그 후로 바로 생각지도 못하게 쉽게 (?)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거든. 가게를 그만두고 3일 후에 호주 국가대표로 국제대회 우승을 하면서 ‘호주 대표 월드 챔피언’ 이력으로 특정 재능을 인정받아서  ‘탤런트 비자’로 나는 이민을 했거든. 그렇게 돈이랑 시간 버리며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됐었던 거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발 동동 굴러도 안될 때는 안되더니.. 사람일이라는 게 진짜 알다가도 모르는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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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와, 진짜 드라마 같은 이야기다! 그때 네가 영주권 욕심에 만약에 세계 대회를 포기하고 사장 말대로 그 카페에 계속 남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영주권도 아마 못 받고 커리어도 제자리걸음이었을 수도 있잖아. 영주권 욕심을 버리고 네 심장이 시킨 대로 했기 때문에 너는 영주권은 물론 원하는 걸 다 이룰 수 있었던 거네. 한순간으로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일들을 가끔 보거든. 그때는 세상이 망한 거 같았던 선택이 전화위복이 되는 마법 같은 일들 말이야. 그 마음고생과 또 그만큼의 환희가 나한테도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 해져. 대단해, 정말.

자, 이제 넘어가서 다음 질문을 해볼게.


세계 공인 라떼아트를 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남자 - 케일럽!

‘라떼아트를 잘하고 싶어요,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말하는 바리스타 혹은 꿈나무 친구들에게 네가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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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진짜 진부한 이야기라 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 진리라서 그냥 말할게.

나도 대단한 노하우나 스킬을 방출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이런 손기술에는 정도뿐이 없는 것 같더라. 꾸준한 노력, 그것뿐이야. 나 사실 처음에는 정말 못했어. 손끝이 야무지지 못하고 덤벙댔거든. 못하는데 잘하고 싶었기 때문에 더 죽어라 했던 거야. 유튜브 같은 영상 보면서 새로운 게 나오면 될 때까지 무조건 반복하며 따라 했어. 일 끝나고 하루에 300잔씩 매일 연습했어. 하루도 쉬지 않고. 그래서 잘하게 된 거야, 내가 특별하게 재능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반복에 또 반복하는 시간 동안 나의 기술에 근력이 생긴 거 같아.

인스타나 유튜브 같은 거 많이 보면서 보는 거로 끝내지 말고 본인의 스타일로 소화를 하고 몸에 익혀야 해. 라떼아트는 머리가 하는 게 아니고 내 손과 몸이 하는 거거든. 내 몸이 이 원리를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소화할 때까지는 연습과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야. 셰프가 화려하게 칼질을 선보이기까지는 수도 없이 손을 베고 피를 흘렸을 거야. 그렇잖아. 이 것도 마찬가지야. 수없이 수도 없이 연습해야 해. 라떼아트 실력은 노력과 정비례하니까!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지겹고 힘들어도 꾹 참고 연습해. 분명히 원하는 실력을 갖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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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커피 셀렙으로 불리는 너의 모습만 익숙했던 나는 네가 그냥 원래 잘 나가는 여유 있는 사람인 줄만 알았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10년의 호주 생활 동안 하나 쉽게 풀리는 일 없이 밑바닥부터 하나하나 힘겹게 이뤄낸 결실이었구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멀게 느껴졌던 네가 더 가까이 느껴지고 안쓰럽고 더 대견하게 느껴진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텐데 언제나 강하고 밝은 모습 보이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

너는 챔피언이 아니라고 해도 참 멋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 최고의 바리스타로, 커피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전 세계를 누비는 대한의 남아로, 앞으로 네가 써나 갈 새로운 이야기들, 팬으로서 기대할게.

끝으로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바리스타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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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 현실적인 상황과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이민과 바리스타라는 직업’을 생각해보면 나는 부정적인 이야기와 긍정적인 이야기를 동시에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아.

일단은 바리스타라는 직업은 이민에 적합한 직업은 아니야.

부족 직업군에 해당이 되지 않기 때문에  냉정하게 말해서, 궁극적으로는 이민하고는 동떨어져 있어. 고용주 스폰서쉽 이 활개 치던 2011년부터 2015년 시절에는 카페 레스토랑 매니저라는 포지션으로 바리스타에 대한 고용이 급증했었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조건이 아주 까다로운 상황이야. 아직 고용주 스폰서 비자가 살아 있지만 2년 제한이고 그 후에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지 않아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해. 그래서 커리어보다 이민의 성공이 우선순위라면 바리스타보다는 조금 더 가능성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아.

하지만 직업에 따른 이민의 문이라는 게 좁아졌다 넓어졌다 하기 때문에 올해가 틀리고 내년이 틀릴 수 있어. 현재는 미국 트럼프 정권 영향으로 많은 영어권 국가에서 이민이 까다로워지고 있는 상황이잖아. 이민의 추세라는 것은 언제나 유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지금 절망적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절망적이지는 않아. 생각지도 못하게 길이 열리고 기회가 오기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섣불리 되고 안되고를 말할 수는 없는 것 같아. 마음 굳게 먹고 와서 계속 도전하고 부딪힌 사람들은 대부분 이민과 커리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더라고. 내가 여태까지 만난 사람들은 다 그랬어.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민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 새로운 환경에서 아주 새로운 분야의 것을 도전하며 나도 몰랐던 나의 재능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고 앞으로도, 나이에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도전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아. 남의 시선에 상관없이 말이야. 직업 성격상 도시 선택도 이보다는 탁월할 수 없었던 것 같아. 아무 생각 없이 워홀로 첫발을 디딘 곳이지만 멜버른은 커피 산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곳이거든. 2015년에는 세계 최고 커피의 도시로 선정됐어. 세계 대회를 참가하고 심시하면서 세계의 많은 도시를 다녀봤지만 바리스타로서 커리어를 쌓고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는 정말 멜버른보다 좋은 곳은 없는 것 같더라.

이민은 생각만큼 만만치 않기 때문에 많은 걸 생각해보고 ‘호주 사회’와 ‘멜버른에서의 바리스타라는 직업’, 그리고 ‘이민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오는 게 좋을 거야. 나도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을 이민을 위해서 보냈고 좌절과 분노도 아주 많이 느꼈어.

하지만 결국에 이 이야기는 나라는 한 개인의 경험이고 생각에 지나지 않잖아. 나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너한테 이민, 그리고 이 바리스타라는 직업이 어떤 의미가 될지 나는 알 수없고 아마 너도 알 수 없겠지. 다만 쓸데없이 과도하게 겁먹지 말되 최대한 신중하려고 노력했으면 좋겠어.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허비해야 할 수 있으니 마음 단단히 먹었으면 해.


끝으로, 이 세 가지가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1. 긍정적이고 유쾌하게 생각하려는 성격 (이민 과정에서 수많은 크고 작은 타격을 웃어넘길 수 있는)

2. 고집을 버리고 자세를 낮추고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마음가짐 (나이와 위치에 상관없이!)

3. 적어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의 언어 실력


이민을 직접 진행하고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수많은 이민자를 만나면서 내가 느낀 ‘이민을 성공하고 만족한 호주 생활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분모 세 가지를 꼽아보았어.

네가 이 세 가지를 갖고 있다면, 그러려고 노력한다면 너도 분명히 성공적으로 원하는 곳에 정착하리라 믿어. 낯선 땅이라 어렵게 느껴지겠지만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결국엔.



긴 이야기 잘 읽어줘서 너무 고마워.

세상 어딘가에서 향긋한 커피와 함께 너를 만나기를, 기대할게.







놀러와! :-)


케일럽 (인스타)   :   CALEBTIGER

앨리스 (인스타)   :   ALICEINMELBOURNE

수다 (인스타) :  SUDA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네모 (인스타): NEMOMELBOURNE (앨리스 팀 두 번째 레스토랑)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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