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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Mar 08. 2018

무일푼 워홀에서 속눈썹의 여왕까지 by 소피아

속눈썹 연장 기술로 호주에서 사는 이야기




외국의 한식당은 크게 두 가지 성격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을 거 같아.

교민을 대상으로 하는 곳과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곳.


교민과 현지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보통은 한쪽으로 약간이나마 치우칠 수밖에 없는 것 같더라. 한쪽에서 호가 강한 부분이 다른 쪽에서 불호가 되기 마련이거든. 코리안 바비큐나 치킨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런 음식은 예외로 둔다 치고 이야기하자면, 해외 사는 한국인이 그리워하는 맛을 내세우는 보통의 한국 음식점(국밥, 분식집, 백반집 등)은 외국인 입장에서 맛도 컨셉도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고 반대로 외국인 입맛과 취향에 맞춘 모던 한식 컨셉인 경우에는 한국인들이 잘 오지 않아. 가격도 비싸고 맛도 좀 맨숭하고 영어메뉴판이나 외국인 스탭들 때문에 소통이 불편한 단점들이 있거든.


나의 레스토랑 SUDA와 NEMO는 후자야. 한국인보다 호주 현지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곳이야.

의도한 것은 아닌데 우리 팀이 거의 다 양식을 전공한 셰프들이다 보니 그렇게 됐어. 호주 손님들은 예약을 습관적으로 하는 문화인데 한국 손님들은 그냥 오시는 경우가 많아서 테이블 잡기도 힘들고, 뭐 그런 이유로 한국인 손님은 약 10% 의 비율뿐이 안돼.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수다를 통해 매일 관계를 형성하는 90퍼센트의 사람은 호주인이라는 거지.


그런데도 말이야. 내가 이상한 건지 이상하게도 호주인들이랑은 친하게 지내는데 어떤 한계가 있더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내가 좋아해서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게 된 단골손님들은 90퍼센트 한국인이야. 단골손님으로 시작해서 어쩌다 보니 친구가 된 사람들. 한참 놀다가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얘를 어디서 만났지, 어떻게 친해졌더라를 생각해보면 시작은 수다인 것이 아직도 신기해.

대부분이 단골손님으로 시작했고, 또 직원으로, 직원의 친구로, 거래처 사람으로 나의 세상에 발을 들인 많은 사람들. 4년 동안 파생되어 나간 SUDA에서 시작된 그 많은 거미줄 같은 관계들.

이 멜버른이라는 차가운 대도시에 외딴섬처럼 떠있던 내가 SUDA라는 기적으로 얼마나 많은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지, 돌아보면 놀라울 따름이야.





바리스타 해리처럼 소피아도 나의 아주 초기 손님이었어.

오픈한 첫 달에 우연히 들어오자마자


멜버른에 이런데도 생겼네! 너무 좋다! 언니 저 여기 매일 올래요!


하던 뽀얗고 예쁜 여자 아이, 그게 소피아였어.


사실 나는 사람을 굉장히 가리는 편이거든.

여자 친구들이랑 길가다가 누군가가 살짝 팔짱을 낀다거나 아직은 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속마음을 마구 털어놓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예기치 않게 다가오면 나는 나도 모르게 주춤해. 괜스레 혼자 어색해져. 동네 친구들끼리 다니는 남녀공학에서는 그럭저럭 잘 지내다가 뚝 떨어져서 여중 여고가 모여있는 동네의 여자 고등학교를 들어가자마자 은따가 된 것도 그런 성격 때문이겠지.

그런데 보통은 내가 조금 거리를 둘 법한 스타일인 소피아가 - 예쁘게 잘 꾸미고 싹싹하고 붙임성 있고 솔직하게 자기의 이야기를 털어 넣고, 좋은 감정을 표정으로 행동으로 즉시즉시 표현하는, 한 마디로 사랑스러운 여우 같은 그녀 - 나는 밉지 않았고 오히려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신기하게도.


왜 그랬을까, 지금 돌아서 생각해보면 그냥 예쁘고 사근사근한 여우 같은 부드러운 모습 중간중간 매콤한 양념처럼 대찬 기운이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아. 저는 워킹 홀리데이 중이에요! 그런데 저 여기서 사업 한번 해보려고요. 언니 나중에 궁금한 거도 물어보고 친해지게 저랑 술 먹어요!라고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깜찍하게 이야기하는 나보다 세 살 어린 늦깎이 워홀러, 소피아 혹은 예지.

얘,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얘랑 이야기해보면 재밌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


당시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수다는 조용한 날이 많았거든.

한가한 날에 소피아가 오면 나도 술을 한잔 냉큼 따라서 옆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우리는 금방 친해졌지. 극과 극인 성격에, 완전 상관없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우리였지만 '호주에서 사업을 이제 막 시작한 - 혹은 하려고 하는 젊은 한국 여자'라는 아주 큰 공통점이 있어서 할 이야기는 언제나 차고 넘쳤어.

불안정한 비자에 영어가 완벽하지도 않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둘 다 기술직으로서 본인의 일에 열정은 넘치지만 세상에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만 같고. 온통 두렵고 혼란스러웠던 우리는 만날 때마다 서로를 격려했고 위로했어. 서로의 분야를 1도 모르면서도, 솔직히 확신도 없으면서도 입버릇처럼 서로에게 해주던 말들. 내가 너에게 하는지 나에게 하는지도 모를, 네가 나에게 하는지 너에게 하는지도 모를 그 말들.



언니 잘하고 있어, 잘될 거예요, 너무 대단해. 수다는 진짜 잘될 거야.

소피아 너무 걱정하지 마, 너 너무 잘하고 있어. 사업 잘할 수 있어.

우리 너무 걱정하지 말자. 방법이 다 있겠지.


잘할 거야, 너. 그리고 나.




내가 일하는 곳에 수도 없이 와준 그녀와 달리

나는 4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일터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 매일 궁금해하기는 했지.

그런데 아침에 세수하는 것도 귀찮아서 깨작깨작하다가 선크림 안 바른다고 맨날 엄마한테 혼나는 내가 속눈썹 연장이 뭐야. 답답해서 시계도 반지도 못하는 나는 여동생이 끌고 가서 처음 한 젤네일도 하자마자 이로 다 물어뜯어서 없애버리고 등짝을 맞을 만큼 몸에 붙은 이물질에 민감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내가 소피아의 고객이 될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요식업과 미용업,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는 그녀가 하는 일이 보이는데.

아무리 다른 분야라도 누군가가 눈에 띄게 성장하고 활약한다면 눈에 띌 수밖에 없잖아. 하물며 여기가 얼마나 좁은 멜버른 바닥인데! 이 곳에서 누군가가 콩나무 마냥 자라나고 있다면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어.

속눈썹 연장, 뷰티션이라는 직업에 대해 까막눈인 내가 봤을 때도 그녀의 성장은 눈이 부실 정도였어.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살아남아 보겠다고 울면서 엄마한테 오십만 원을 겨우 꿔서 이 기술을 배웠다는 그녀, 힘든 날에는 내 가게를 찾아와서 속눈썹 연장이라는 일이 정말 남들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술 한잔에 발개진 얼굴로 울상을 짓던 그녀는 4년 후인 지금, 멜버른 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속눈썹 연장 전문 뷰티샵 - Sophia beauty co를 운영하는 오너 뷰티션이 되었어. 해외에서 성공한 뷰티샵 원장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한국과 호주를 오고 가며 뷰티 관련 세미나에 참석하고 자신이 걸었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들에게 강습을 하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소식을 듣는 일은 언제나 괜히 나를 뿌듯하게 해.


너, 처음 볼 때부터 보통 아니다 싶더니.

잘될 줄은 알았지만, 정말 잘 됐구나. 대단한 X.. 너는 성공할 줄 알았다.


살가운 동생 같은 여자아이에서 어느새 한 아이의 엄마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의 시작은 분명히 미약했어. 하지만 지금은 꽤나 창대하고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라주고 모든 것이 어렵기만 하던 20대를 거쳐 30가 된 그녀는 지금 멜버른 한인 뷰티션들에게 전설적인 존재야. 열심히 노력하고 도전해서 소피아 원장님처럼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어린 소피아들이 지금 얼마나 많은지, 아마 언제나 겸손한 그녀만 모르겠지.







일을 왜 좋아하냐고 묻는 내 질문에 소피아는 이렇게 답했어.


내가 하는 일의 성질이 누군가를 더 예쁘게 만드는 일이잖아. 그러다 보니 일을 마치면 손님들이 웃거든. 더 예뻐졌으니까! 나는 그걸 보는 게 너무 좋아. 힘들다가도 행복해져.


미용업계 종사자는 아니지만, 이보다 더 완벽한 답을 할 수 있는 뷰티션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이런 사람에게 내 속눈썹이고 네일이고 맡기면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자, 이제 멜버른에서 내가 만난 11번째 청년 이민자 소피아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이번에는 뷰티업계에 관심이 있거나 그쪽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이민을 생각하는 친구들이 읽으면 꽤 도움이 될 것 같아.


꽤 긴 인터뷰이지만 지루하지 않을 거야. 재미있게 읽어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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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LICE) : 안녕 소피아! 반가워.

먼저 네 소개부터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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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SOPHIA) : 안녕! 나도 반가워.

나는 소피아라고 해. 한국 이름은 예지야. 멜버른에서 산지는 7년이 되었고 지금은 멜버른 시내에서 Sophia beauty co라는 속눈썹 연장 전문 뷰티샵을 운영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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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내가 그쪽으로 워낙 문외한이라서 그런지 너랑 그렇게 꽤 오래 알고 지냈음에도 네가 무슨 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는 거 같아. 네가 멜버른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조금만 더 설명해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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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2016년 1월에 드디어 멜버른 시티에 오픈해서 이제 3년 차에 접어들고 있는 Sophia beauty co는 속눈썹 연장 전문 뷰티샵으로는 멜버른에서 가장 큰 규모야. 처음에 오픈했을 때는 꽤 특이한 컨셉이였지. 사실 헤어 이외의 뷰티샵으로는 보통 네일이나 왁싱을 많이 선택하지 속눈썹 연장은 잘 안 하거든. 6개의 베드로 한 번에 6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규모의 매장에서는 리셉셔니스트와 테크니션들을 포함해 평균 10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어.


 SOPHIA BEAUTY CO. 공식 홈페이지

  www.sophiabeautyco.com.au


먼저 이 속눈썹 연장 기술이 도대체 뭔가를 좀 설명해볼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모와 비슷한 성질을 낼 수 있는 재질(합성섬유)로 만들어진 다양한 두께, 길이, 컬의 가속눈썹을 사람의 속눈썹에 한 올 한 올마다 1:1로 연장(부착?)을 해서, 눈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기술이야.

저렇게 말하면 되게 간단하게 들리는데 사실 신경 써야 할 점이 많은 섬세한 작업이야. 속눈썹 한올에 가속눈썹 한가닥만을 붙여야 속눈썹 탈모를 막을 수 있고, 피부에서 0.5- 1mm를 떼고 시술해야 화학물질인 글루가 피부에 닿지 않아 안전하거든. 따라서 0.1mm 단위를 연구하고, 보고, 시술할 수 있어야만 해. 또한 미용의 한 분야로써 고객의 눈 모양이나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추천하거나 고객이 원하는 대로 시술할 수 있어야 좋은 속눈썹 연장이라고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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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오, 나는 진짜로 화장할 때 붙이는 인공 속눈썹이랑 비슷한 줄 알았어. 생각보다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기술이구나. 모든 게 그런 거 같아, 잘 모르면 쉬워 보이고 기술적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거니까. 나도 요리하는 사람인데 틈날 때면 연구하고 공부한다고 하니까 '그냥 레시피 따라서 지지고 볶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몸으로 하는 일이 뭐 공부까지 필요한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니까! 얼마나 과학적이고 문화적으로 복잡하고 깊은 기술인데. 아무튼 나도 남의 일이라고 너무 쉽게만 생각했나 봐. 미안, 사과 먼저 할게.

너는 그러면 한국에서부터 배운 기술로 샵을 열게 된 거니?

어떻게 그 일을 시작하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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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아니 나는 한국에서는 이 쪽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고 해본 적도 없었어.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다가 도저히 못하겠어서 그만두고 호주로 도망치듯 워킹홀리데이를 왔어. 2011년, 7년 전이지. 처음 두어달은 영어 학원도 아니면서 즐겁게 지냈어. 학원 다니면서 공부 좀 하다 보면 일 구할 수 있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이었지.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가져온 돈은 다 바닥이 났는데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점점 줄어들기만 하는 거야. 다른 워홀들에 비해서 나이도 많고 영어도 잘 못하고 그렇다고 특별하게 경력이나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그때는 그나마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한국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도 면접 한번 보려면 열댓 명씩 줄 서있고 그랬어. 돈이 바닥 날 수록 초조해지고 자신감은 떨어져만 갔어. 어느 정말 더운 여름날 40도가 되는 날씨에 마트에서 2불도 안 하던 수박을 너무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집에 돌아와서는 혼자 이불에 얼굴 박고 엉엉 울기도 했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마음을 다잡았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호주에서 뭐라도 도전이라도 해보려면 기술이 필요하겠다 생각이 들었어. 주변을 돌아보니까 영주권도 받고 안정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기술이 하나씩 있더라고. 기술이 대우받는 나라니까.

뭐라도 배워보자는 생각에 미용실 무급 스탭에 지원을 해도 아무 경력도 없는 20대 후반인 나에게 딱히 주어지는 기회는 없었어. 그러다가 문득 한국에서 피부관리 스파에서 알바를 할 때 관심이 생겼던 속눈썹 연장이 생각이 난 거야. 운명인지 우연인지 그 생각이 든 날 속눈썹 연장 수강을 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어. 이걸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꽂힌 거지. 수강료가 뭐야, 수박 사 먹을 돈도 없던 나는 진짜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했어. 엄마한테 전화해서 손을 벌리는 일만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전화기를 만지작 거리며 몇 시간 망설이다가 겨우 전화를 했어.


엄마 나 오십만 원만 빌려 줄 수 있어?


하니까 돌아온 말은 아주 단호했어.


안돼.


본인 힘으로 부딪혀보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던 거야. 다급하게 상황 설명을 했어.

내가 돈을 펑펑 쓰거나 한 게 아니고 정말 일을 구해보려고 노력했는데 마땅치가 않다 보니 돈이 하나도 없다고, 그런데 너무 배우고 싶은 기술이 있다고 말했어. 그리고 가만히 듣고 계시던 엄마는 '기술'이라는 단어 한마디에 바로 돈을 보내주셨어. 다른 이유였다면 절대 안 줬을 텐데 뭐라도 배워서 해보려는 생각이라니 도와주겠다, 대신 버릇이 될 수 있으니 앞으로는 절대 이럴 일 없을 거라고 하시면서.

그렇게 속눈썹 연장이라는 기술을 배워보게 되었어. 그때도 뭐 딱히 이 길이 각 이다! 했던 건 아니고 선생님이 네일 아트와 속눈썹 연장을 둘 다 가르치는 선생님이 셨는데 속눈썹 연장을 추천하셨기 때문에 그쪽 길을 가게 된 거야. 그때 선생님이 만약 네일 아트를 더 추천했다면 아마 나는 지금 네일리스트가 되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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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워홀로 시작한 사람들 이야기는 아주 극소수를 제외하고 왜 이렇게 구질하고 슬픈 거니. ㅠㅠ

돈이 없고 절박했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더 올라온 걸까. 2불도 없어서 수박도 못 사 먹을 정도로 힘든 시절도 있었구나. 언제나 완벽한 원장의 모습으로 웃고 있는 예쁜 너만 봐서 나는 생각도 못했어.

호주에 오기 전에는 뷰티 쪽 일을 안 했다고 했는데, 너는 그럼 한국에서는 무슨 일을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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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한국에서 나의 10대와 20대는 사실 전혀 특별한 점이 없었어. 부모님의 기대와 사회의 잣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이 평범한 일상에서 언젠가는 벗어나서 멋있는 삶을 꿈꾸는 그런 평범한 여자 아이였어.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들한테 '난 외국에서 살 거야!'라는 말을 많이 했어. 그게 무슨 뜻인지도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면서 언젠가는 그럴 거 같았고 막연하게 그러고 싶었어. 늘 틀에 박혀서 규칙을 따르고 말 잘 듣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는 어른들을 피해서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아.

처음 가족 여행으로 해외를 나가본 곳이 호주였거든. 9살 정도였었는데, 그때 봤던 파랗고 높은 하늘이 너무 강렬했었어. 지금도 잊히지가 않을 정도로. 시드니의 한 공원이었는데 파아란 하늘 아래, 큰 나무 아래 잔디밭에 사람들이 누워서 쉬고, 먹고, 자고, 웃고 있는 거야. 평일이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나. 여기 사람들은 일도 안 하나 봐. 참 행복해 보인다 그런 생각을 했어. 역시 외국은 좋은 거구나(?) 하는 단순하고 순진한 생각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나.

하지만 경쟁에 치여사는 중, 고등학교 생활을 거치면서 그런 꿈들은 바래져갔어. 딱 하루, 한 번의 시험으로 12년을 평가해서 대학이 정해지는 것이 말이 되냐며,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나라에 살기 싫다는 반항심에 가득 찬 말을 하면서도 궤도를 벗어날 용기는 없으니 공부를 놓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철부지였지. 무엇이 돼야 할까 온통 혼란스러웠던 학창 시절 중에 정말 멋있는 국사 선생님을 만났고 그 선생님의 지식과 포스에 반하면서 나는 역사에 빠졌어.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거지. 그 선생님처럼 멋있는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꿈이 생긴 나는 열심히 공부를 했어. 수능을 마치고 나는 한 사립 대학 사학과에 수석으로 입학을 하게 됐지. 장학금을 받고 대학교에 들어가니 엄청 효녀가 된 거 같더라. 그 효도는 단 한 번으로 끝났지만. 대학생활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어. 매력적인 역사를 깊게 배우고 토론하게 될 줄 알았는데 한자가 반이 넘는 책들을 달달 암기하기만 하는 게 수업의 대부분이더라. 대학교는 집에서 너무 멀었고 대학생활의 낭만은 없었어. 흥미가 떨어진 나는 매력적인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다는 꿈 따위는 언제부터인가 버리게 되었어. 그래도 대학은 졸업해야지 하는 생각에 겨우겨우 학점이나 채워가면서 자기계발서 책들만 주야장천 읽으며 다음 꿈을 꾸었어. 사원증 목에 걸로 또각또각 구두 신고 커피 들고 다니는 멋진 직장인.


빨리 졸업해서 직장인이 되는 것이 나의 다음 목표가 되었지.

외국생활도, 역사 선생님이 되는 것도 현실적이지도 못하고 낭만적인 치기만 가득 찬 멍청한 꿈인 것처럼 느껴졌어. 내 꿈을 대신 이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부러워하기만 했지. 부러워하면서도 속으로는 저 사람들은 부모님이 돈이 많겠지, 하면서 혼자 배배 꼬여있었던 기억이 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참 어두컴컴한 시간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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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역사 선생님이 원래 꿈이었구나! 워낙 말을 재미있게 잘하는 너라서 그 직업도 잘 어울릴 거 같아. 하지만 무언가 너만의 창의성이랄지 그런 끼를 눌러야 하는 직업이라서 지금 너의 직업보다는 너한테 잘 안 맞을 수도 있겠다 싶어. 역사 선생님은 포기했고, 그러면 그다음 꿈이었던 '직장인'은 이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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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응, 운 좋게도 졸업하자마자 어떤 회사에 입사하게 됐어.

한 중견기업의 인사과였지. 알잖아, 나는 사람을 참 좋아하는 성격이야. 그래서 나는 그 일이 나한테 잘 맞을 줄 알았지. 그런데 그 환상이 깨지는 데에는 일주일도 안 걸리더라.

사장님은 툭하면 지 성질 못 이겨서 욕하고 소리 지르고 회식으로 노래방에 가면 여직원들한테 춤추고 노래 부르면 주겠다며 오만원권들을 벽에 붙이는, 진짜 수준 이하의 직장이었어. '인사과'의 업무는 인재를 영입하고 직원들이 더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니고 갑인 회사의 대변인이 돼서 직원들의 임금을 한 푼이라도 낮추고 회사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일이었어. 갑의 대변인이 되어서 (나의 동료인) '을' 들에게 말도 안 되는 노동법과 회사의 관례를 들먹이며 싸우는 게 하루 일과인 거야.


보람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업무에 수당은커녕 고맙다는 소리도 못 듣는 끝도 없는 야근. 매일 같이 일을 하는데도 월급을 받고 적금 넣을 때면 그냥 웃음만 났어. 이걸 언제 모아서 언제 결혼하냐, 집은 언제 사냐...너무 하루하루가 우울해서 기억을 하고 싶지도 않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나, 도망칠 방법은 없을까 고민만 하며 살았지.

그때는 정치적으로도 엄청 뒤숭숭할 때였어. 사학을 전공한 터라 정치에 관심이 많기도 했는데 모든 게 어수선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어. 청년들의 이 힘든 상황이 나라의 책임 같았고 누구에게는 책임을 묻고 싶었어. 마음 맞는 친구들과 촛불집회에도 열심히 참여했지. 끝나고 잘 정리하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집에를 못 가게 길을 막는 거야. 의경들을 피해 길을 돌아가려다가 잡혀서 방패에 갈비뼈를 맞고 엎드려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내 상황도 우울한데 나라까지 희망이 없구나. 나는 여기서 못살겠다, 어떻게던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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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렇게 호주에 왔구나. 우리 광화문 어딘가에서 만났을 수도 있겠다. 나도 광화문에서 일할 때 정말 매일매일 촛불 들고 앉아있었는데 말이야. 이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분노하고 울던 시간들은 나도 암울하게 남아있어. 한국에서의 그 많은 기억 중 컬러인 것도 흑백인 것들도 있는데. 그 시간들은 분명히 잿빛이야.

그렇게 두 번의 실패를 경험한 너에게 세 번째 도전이었던 '뷰티션'이라는 직업은 어땠니? 처음부터 너와 잘 맞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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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아니, 천만에!

속눈썹 연장을 처음 배우던 날부터, 수강이 끝나던 날까지 거짓말 안 하고 매일 눈물 흘리면서 잠이 들었어. 너무 어려워서. 어떤 새로운 공부, 기술이 쉽겠어. 사실. 근데 나도 좀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아.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깟 속눈썹 연장이 어려울게 뭐람 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꽤 많을 거라고 생각해. 내 지인 중에서도 많으니까.

일단은 평생 다루어 본 적 없는 도구(tweezers)를 손에 쥐고 사용하는 것도 힘든데 그걸로 0.15mm 굵기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가속눈썹을 집어서, 그것보다도 얇은 사람의 속눈썹에 말 그대로 연장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졌어.

아.. 내가 길을 잘못 선택해도 한참 잘못 선택했다고 귀한 엄마 돈만 날리겠구나 하고 생각했지.


여자들은 이런 이야기 많이 들어봤을 거야. 속눈썹 연장하면 본인 속눈썹 숱이 빠지거나 상한다는 이야기. 물론 그럴 수 있어. 나쁜 스킬로 대충 연장한다면. 나는 기왕 하는 거 안 하면 안 했지 그런 기술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어. 그래서 매일 종이에 빽빽이 붙이고 인조 속눈썹에 빽빽히 붙이고 또 무료로 모델을 모집해서 사람에게 연습하고 매일매일 연습만 했어. 돈을 못 버니 굶는 날이 많았지만 그때는 매일 나아지는 실력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힘이 나서 버틸 수 있었어.

그러다 보니 무료시술받았던 사람들 중에 다시 나를 찾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분들의 소개가 이어지고 이어져서 진짜로 내 기술로 돈을 버는 날이 오더라. 처음에는 그 돈들이 얼떨떨해서 가짜 돈 같아서 은행에 가서 입금을 하고 잔고확인을 해야 안심이 되고는 했어. 진짜 이게 내 돈이구나 싶어서.


수많은 연습을 거쳐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을 때, 다듬은 이력서로 몇 군데 지원을 하고 나는 멜버른 부촌의 유명한 속눈썹 연장 샵 한 군데에 취업이 되었지. 이 속눈썹 연장술 자체가 한국에서 시작된 기술이거든. 그래서 그런지 한국인인 나에게 유리한 점이 많았어.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도 호감을 보여주더라. 느리고 답답한 영어 대화에도 웃으면서 나를 영입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때 다시 한번 깨달았어. 이 기술의 힘을.

아무리 기를 써도 면접 볼 기회도 안 줬었는데 이제는 샵에서 나를 꼭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거야. 그것도 어엿한 기술자로 대우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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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그렇게 호주에서 '속눈썹 연장'이라는 특수한 기술을 가진 테크니션이 되었구나. 특히 손으로 익혀야 하는 기술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도밖에 없는 것 같아. 연습하기. 또 연습하기. 안 되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꼭 될 거라 믿고 연습하기.

그래서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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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나는 정말 어느 스탭보다도 먼저 출근 그리고 가장 늦게 퇴근해가며 일을 했어. 그러다 보니 기술과 노하우는 저절로 쌓여갔고 나를 찾는 손님들도 점차 눈에 띄게 늘었어. 그러다 보니까 욕심이 생기더라. 멜버른의 어떤 미용실에서 샵인 샵을 내서 작지만 내 공간에서 부업으로 시술을 할 수 있게 되었어.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거기다가 부업까지 하면서 돈을 점차 벌게 되면 될수록 이 일이 좋아졌어. 그 후로 몇 년간은 출장이며 샵이며 닥치는 대로 속눈썹 연장을 했어. 일 년에 10일도 쉬지 않고 매일 같은 일상을 되풀이했지. 돈 때문에 서러웠던 마음 원하는 대로 안돼서 좌절스러웠던 시간들을 다 보상받고 싶었던 거일 지도 몰라. 일에, 솔직히 말하면 돈에 미쳐 살았어.

기술과 땀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대로 돈은 모이더라.


내가 혼자 몸으로 부딪혀서 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사실 내가 기술이 좋은 면도 있겠지만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몸을 바쳤기 때문인 것 같아. 몸이 부서질 것처럼 힘들거나 아파도 절대 내가 먼저 스케줄을 조절하는 일은 없었어. 무조건적으로 손님에게 맞췄어. 시술 전 후로 함께 고민해볼 알레르기는 없는지, 눈의 모양과 원하는 스타일은 어떤 건지 가장 완벽한 시술을 받을 수 있도록 철저한 상담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모든 고객이 속눈썹 연장에 대한 궁금증을 다 풀고 정확하게 원하는 시술을 고를 수 있도록 20페이지가 넘는 메뉴판을 만들었어. 시술이 끝나고는 사후관리에 대해 자세하게 메시지를 보냈고 경조사나 여행 계획, 특별한 이벤트 등을 메모해놓고 그때그때 챙겨가면서 손님을 대했어.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나는 행복한 비명을 지를 만큼 일복이 터질 수밖에 없었지. 집 앞의 밀크 바에서 커피 한잔, 집에서 맥주 한잔 먹는 게 나한테는 숨 돌리는 여유였을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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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왜인지 안쓰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가끔 우리 가게 와서 밥 먹고 술 한잔 하는 게 큰 행복이라고 말하던 그때의 너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거든. 언제나 피곤해 보이지만 밝은 모습을 잃지 않고 속눈썹 연장이 얼마나 재미있고 멋있는 직업인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던 너.

왜 그렇게 해야 했어? 굳이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일은 알아서 점점 잘 풀리고 있었잖아. 하루도 못 쉬고 몸이 아파서 눈물이 나도 울면서 일을 하면서 왜 그렇게 악착같이 일을 하고 돈을 모았던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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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이 일을 처음 할 때는 기술을 배우는 게 그저 너~~~~~무 힘들어서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 무시를 당해도 내가 아직 못하니까 그런가 보다 더 열심히 해야지 하고 생각했지. 세상에 대해서 너무 몰랐던 것 같아.

기술을 배우기만 하고 돈은 못 벌 때라서 나는 언제나 배고팠어. 어느 날은 조용히 시술을 하다가 배가 고파서 꼬르륵 소리가 계속 나는 거야. 계산을 할 때 손님이 10불을 더 주면서 나가서 초밥이라도 사 먹으라고 할 때는 진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싶더라.

하지만 이런 기억들은 오히려 귀엽다고 느껴져서 트라우마로 남지는 않았어. 진짜 사람을 힘들고 악받치게 하는 건 반말은 기본, '미용하는 얘'라며 나를 무조건 무시하며 '미용이나'하는, 거기다가 견습생인 내게 존댓말은커녕 음료수,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등 자존심을 밟는 사람들이었어.

어느 날은 정말 열심히 했는데 소리를 높이며


'야, 너는 그렇게 느린 손으로 무슨 속눈썹 연장을 해? 호주나 되니까 너 같은 얘들도 먹고 사는 거지 한국이었으면 손님 한 명도 못 받겠다. 소질 없으면 어디 가서 서빙이나 해. 속눈썹 받다가 허리 부러질뻔했잖아!'


라고 하며 50불짜리 지폐를 얼굴에 훅 던지는 거야. 아무 말 못 하고 그냥 울었어. 고작 한 시간 반 정도 평균 시간으로 걸린 시술인데 변명 한마디도 못하는 내가 너무 답답해서 더 울었지. 또 내가 하는 일은 그냥 단순한 일이지 기술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전문 지식을 말해줘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 한 손님에게 속눈썹의 성장 주기에 대해 설명을 했거든. 사람의 속눈썹도 다른 모발처럼 자라고 빠지고 몇 주 주기로 반복한다고 진지하게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말을 딱 자르면서

 

'그래서, 지금 내가 털갈이를 한다는 말이에요? 그런 말은 살다 살다 처음 듣네, 참나.'


내 말을 딱 잘라가며 무시하거나 지폐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껴서 얼굴 앞에 흔드는 사람들은 꼭 말끝마다 '미용하는 얘들' 소리를 하더라. 기술을 연마하며 외국인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며 내가 이 직업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 같은 거는 그들한테는 주제넘은 소리일 뿐이었어. 지까짓게 뭘 안다고 하는 생각이 표정에 다 드러나.


나를 힘들게 했던 건 그런 손님들 뿐만은 아니야. 오래간만에 한국에 들어가 만난 가족들, 친구들까지도 멀쩡한 대학까지 나와서 왜 그런 일을 해? 하면서 이해를 못하였고 다들 아닌 듯 하지만 나를 낮추어 보는 게 느껴졌어.

미용일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던 사람들도 분명히 괜찮은 일이지만 가족이나 친구가 할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걸 나는 계속 느꼈고 그럴 때마다 분노했고 좌절했어.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고? 있더라. 분명히. 어떤 사람들에게는.


나는 그저 맨날 방글방글 웃을 줄만 알고 오기 같은 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런 상처들을 계속 받으면서 악에 받치고 오기가 생기더라. 이상한 거야. 이 미용이 그리고 그중에도 속눈썹 연장이 절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쉬운 기술도 직업이 아닌데, 예뻐지려는 욕구는 전 세계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세계적으로 이 쪽 시장은 점점 커져가고 기술자들이 인정받는데 왜 우리나라 일부 사람들은 미용, 그리고 몸으로 하는 직업들에 대해 저렇게도 야박하고 색안경을 끼고 있을까 싶었어.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처음으로 호주에 와서 먹고사는 문제 말고, 제대로 된 꿈을 꾸게 된 거야.

‘누가 봐도 무시하거나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이 분야에서 진짜 전문가가 되고 성공하겠다'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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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나도 공감하고 싶지 않은데 이번에도 공감하게 된다. 내가 요리를 시작하고 들었던 그 '주방일 하는 얘'라는 소리.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주방일인데 그 사람들 입을 거친 순간 왜 그렇게 초라해지는지. 내 학교를 끝끝내 '학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어. 너 그래, 그 요리학원은 잘 다니고 있니.

사람은 누구나 먹기 때문에 가장 오래된, 가장 원초적인 직업이라서 이 일은 경쟁력 있는 직업이라는 내 말에 깔깔 웃으면서 그래서 너처럼 단순 무식한 얘들이 하기 좋지! 단순 노동이니까!라고 말하던 술자리에서의 친구.

나도 그렇게 올라갔어. 내가 호텔 셰프가 되면, 레스토랑 오너가 되면 이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게 달라질까 하는 마음으로. 근데 달라지더라. 그 태세 전환을 보는 것은 통쾌하기보다는 씁쓸했어. 내가 뭐 이렇게 얕은 사람들한테 인정받아서 뭐하겠다고 그렇게 울고 짜고 분노했을까 싶은 마음이랄까. 직업에 귀천은 없어도 사람에 귀천은 있다는 걸 그때 깨달았지. 진짜 천한 것은 직업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하대하는 그들이었어.


우리, 이번에는 조금 밝고 신나는 이야기해볼까.

네가 정말 사랑하는 네 첫 뷰티샵 -  Sophia beauty co 오픈한 이야기 좀 해줘. 고생 많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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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대부분의 셰프들의 최종 목표가 자신만의 작은 레스토랑을 하는 거잖아. 그치? (A : 응!)

미용인들도 마찬가지야. 열심히 내공을 쌓고 돈을 모아서 내 기술을 선보일 수 있는 나만의 작은 샵을 차리는 것이 꿈인 사람들이 많지.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을 뿐이야. 사실 이 속눈썹 연장은 1, 2인 체제로 소규모로 창업하기가 참 좋은 아이템이거든. 샵인 샵 하기도 좋아서 보통 네일이나 헤어가 메인인 뷰티샵의 한 부분을 빌려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한국이던 호주던.

나도 그렇게 시작은 했는데 조금 더 욕심이 커졌어. 네일이나 헤어를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넘어서 속눈썹 연장이 주인공인 매장을 만들고 싶어 진 거야. 내가 너무 사랑하는 일이니까.

주위에서는 그래도 샵 하나를 통째로 속눈썹 연장으로만 쓰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나는 그래도 자신감이 있었어. 왜 여자들은 마음에 드는 샵들은 친구나 가족이 같이 가는 경우가 많잖아. 한두 명이 운영하는 소규모로는 그런 부분을 커버하기가 힘들지. 그리고 샵에 스탭이 많으면 아무래도 서로 정보 공유가 이루어지고, 기술도 발전하게 되니까 좀 규모가 되는 샵을 가지고 싶었어.

그리고 이렇게 샵이 크면, 손님들도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도) 자연스레 이 속눈썹 연장술이 경쟁력 있는 사업 아이템이자, 전문 기술이라고 봐줄 거라고 믿었던 거지.


그렇게 시작한 나의 매장은 올해 3년 차가 되었고 멜버른에서는 속눈썹 연장으로 손꼽히는 살롱으로 성장했어. 연매출은 70만 불 이상을 늘 달성하고 있어. 매출을 떠나서 지금 나는 속눈썹 연장 기술을 가진 채 꿈을 갖고 호주에 온 친구들을 고용해 내가 겪었던 큰 스 트레스 없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 나의 매장이 가장 좋은 환경의 샵이라 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에게 자극을 주며 기술과 지식을 함께 쌓을 수 있는,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은 맞는 것 같거든. 미용인으로서의 본인의 기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열정적인 직원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


사실 내 생각대로 된 부분도 아닌 부분도 많아.  

사업적으로는 성공적인 가도를 달리고 있고 사람들의 인식도 많이 바꿨으니 가장 원하는 두 가지는 이룬 셈이지. 하지만 처음 해보는 나름 큰 사업이다 보니 호주의 물가를 제대로 책정하지 못했어. 살인적인 세금, 인건비, 렌트 등등으로 큰 매출에 비하면 순이익은 생각만큼 엄청 많지는 않아.  

또 내 비즈니스를 가지게 되고 매출이 잘 나오면서 이민이 수월하게 진행될 줄 알았는데 법이 갑자기 바뀌는 바람에 조금 더 기다려야 하게 됐어. 개인적인 꿈은 이뤘지만 서류상으로 완벽한 이민은 조금 더 돌아가야 할 것 같아. 그런 부분은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사람이 첫 번째 사업에 어떻게 원하는 걸 다 얻겠어?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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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우리 말나 온 김에 이민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냉정하게 지금 하고 있는 너의 직업과 이민을 연관하면 어떤 거 같아? 이민을 생각하고 이 일을 한다고 하는 친구가 있다면 해주고 싶은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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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아니. 냉정하고 현실적이게 말하면 정말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이민'만을 놓고 본다면.

사실 이전에도 ‘속눈썹 아티스트’라는 직업 자체로는 스폰서 비자를 받을 수 없었어. 뷰티샵 매장의 매니저로서 받을 수 있었던 거지. 그러려면, 경력뿐만 아니라, 호주에서 헤어를 전공해서 살롱 매니지먼트 디플로마를 받아야만 가능했어. 이미 헤어와 속눈썹 연장이 전혀 다른 분야이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사람이 이 일로 이민을 준비하더 라면 힘든 길을 지나왔어야 했어.

지금은 작년 총리 발표 이후에, 모든 미용 분야에 취업 스폰 비자가 막혔기 때문에, 지금 이 직업만을 통해 이민을 준비한다면 가능성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어. 다만 다른 방법으로 이민을 준비하면서 이 직업으로 호주에서 취업이나 사업을 준비하는 경우라면 괜찮을 것 같아. 아니면 이미 이민을 온 사람이 호주에서 배울만한 직업으로도 괜찮을 거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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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이민을 떠나서, 네가 봤을 때 호주 내의 뷰티션이라는 직업의 전망은 어떤 것 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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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내가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도 원래 하던 사람들이 나한테 말했어. 경쟁이 진짜 심해졌다고. 그리고 5년 여가 지난 지금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쟁 구도가 빡빡해졌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주에서 뷰티션, 미용사업이 아직 비전이 있다고 생각해.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게 가장 우선이고 그것이 충족되면 자신을 꾸미고 싶은 욕구가 따라오게 되어 있잖아. 호주는 기본적인 소득이 높은 선진국이고 경제 규모에 비해 미용산업이 많이 발전하지 않았어. 수요인구에 비해서 공급 사업체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해. 외국의 신기술이 들어오는 것도 더딘 편이고.

거기다가 우리 한국인들의 성실함과 섬세한 손기술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하잖아. 내가 정말 많은 직원들과 일해본 결과 정말 100% 맞는 말이야.

누구나 성공할 만큼 블루오션이라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인내심을 동반한 열정과 정말 제대로 경쟁력 있는 기술이 밑받침이 되는 상황에서 미용을 직업으로 삼는다면, 나는 아직 전망은 좋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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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SOPHIA BEAUTY CO 원장님 소피아에게 '이 일을 정말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좋은 속눈썹 연장 기술을 가지고 싶어요'라고 하는 후배들이 있다면.

네가 해주고 싶은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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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사실 누구나 잘할 수 있어. 이 일은.

공부하고 연습할 마음이 있고, 이 시간을 버티고 결국에는 이뤄낼 거라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속눈썹 연장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커리큘럼이 좋은 수업들이 많이 생겼어.

내 경우에는 나는 그런 강의들을 신청해서 많이 들었어. 직접 찾아가서 배우기도 하고 해외의 관련 유튜브와 블로그 찾아가며 혼자만의 공부를 정말 많이 했어.

공부하다 보면 정말 알아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야. 모발에 관련된 공부부터 화학 약품을 몸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 가까이에서 쓰는 거기 때문에 화학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고, 사람마다 가진 눈 모양에 대한 이해와 미용에 대한 감도 늘려야 해.


많은 세미나와 개인 강습으로 수많은 수강생들을 만나보니 잘하게 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보통 자신감에서 먼저 나뉘더라. 나도 언젠가는 잘하게 될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해내는 거 같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이 일을 시작했고, 쭉 해오던 사람이 내게 이 질문을 한다면 ‘기존의 방식을 노하우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냉정히 말해주고 싶어. 우리가 하는 일이 반복에 반복인 일이다 보니 하다 보면 자기의 방식 만이 맞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안에 갇히게 되기 쉽거든. 발전이 없거나 더디게 될 수밖에 없어. 기존하던 방식만을 고집하지 말고, 끊임없이 배우러 다니고, 나보다 경력이 적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듣고 함께 연구하는 열린 자세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직원들과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나누는 편이야. 세미나나 커뮤니티를 통해 다른 원장님들에게 공유도 많이 해. 이 것은 내가 경쟁에서 자신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함께 커가고 더 발전해서 시장이 더 커지고 우리 입지가 공고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야. 작은 밥그릇으로 우리끼리 등 터지게 싸우는 것보다 함께 노력해서 밥그릇을 키우고 모두 함께 넉넉히 나눠먹는 이상향을 꿈꾸는 거지.

그리고 우리 기술은 공유한다고 해서 모두 따라 할 수 없는 전문기술이니까, 더 공유하고 함께 하려는 원장님과 선배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 그러면 우리 후배들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점점 늘어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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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중소규모 수강은 꾸준히 하는 걸로 알고 있고 그 외에도 대외활동으로 컨퍼런스나 세미나에도 많이 참석하고 있잖아. 거기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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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보통은 관심이 없으니 잘 모르겠지만 사실 매년 속눈썹 연장 관련 컨퍼런스나 행사들이 전 세계적으로 많이 열려. 2016년엔 처음으로 호주 멜버른에서 LASH VISION이라는 컨퍼런스가 열렸는데, 직원들하고 함께 갔다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몰라. 나만큼, 또 나보다 더 속눈썹 연장에 열정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해서 놀라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어. 2017년엔 이 컨퍼런스가 규모가 커져서 뉴질랜드에 이어 한국에까지 진출하게 됐었는데, 너무 좋은 기회가 주어져서 한국에서 열린 래쉬 비전에서 연사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하게 됐어.



LASH VISION 컨퍼런스 공식 홈페이지

www.lashvision.com.au 



그때 나는 ‘속눈썹 연장의 가치 향상’이라는 주제를 택했어.

한국은 이미 미용 업계, 그중에서도 속눈썹 연장은 과열된 경쟁 시대기 때문에, 그에 따른 가격 경쟁도 심한 상태거든. 과도한 가격 경쟁은 필연적으로 속눈썹 연장 아티스트에게 손해로 다가오게 되어 있고 시술의 질을 떨어트리게 되어 있어. 또한 속눈썹 연장 기술은 배우고 접근하기 쉬운 기술로 인식되는 경향 이 있기 때문에, 속눈썹 아티스트들이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기 힘든 경우도 있고.

그래서 해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하며 해외 사례에서의 좋은 점이 한국 시장에 적용될 수 있거나, 또는 한국 시장의 좋은 이점들을 파악해서 해외진출하려는 동료들이 잘 이용할 수 있기를 바라서 이 주제를 선택한 거야.


큰 컨퍼런스를 경험하며 개인적으로도 참 많은 것이 바뀐 것 같아. 물론 이 컨퍼런스 전에도 개인적으로 호주에 서 수강은 많이 했었지만, 큰 규모인 행사의 영향력 덕분에 한국에서도 나라는 사람을 많이 알게 되었어. 덕분에 내 이름을 걸고 속눈썹 연장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론부터 실제 그리고 브랜딩과 마케팅 부분) 다루는 개인 세미나를 열기도 했어. 앞으로도 이렇게 꾸준히 대외활동을 하면서 스스로도 자극을 받고 많은 이들에게 우리 일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지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

A : 해외 활동을 하는 속눈썹 아티스트로서 네가 그동안 여기까지 올라오면서 느낀 것에 대해서 말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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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 생각해보면 참 신기해. 어쩌다 먹고살려고 시작한 일이었고 처음에는 죽을 만큼 힘들고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참고해보다 보니 나에게 꼭 맞는 일이었어. 그런 일을 찾게 된 것은 정말 내 복이라고 생각해. 가끔 만나는 삐뚤어진 시선들로 웅크려졌지만 그 때문에 더 열심히 노력하게 되었고 그게 발판이 되어서 지금 이 곳에 서있어.

내 안에 꼬이고 삐뚤어진 작은 아이도 이제 많이 상처가 치유된 것 같아.

이제는 끊임없이 꿈을 꾸는 사람이 되었어. 호주는 그래서 내게 정말 고마운 곳이야. 직업에 따른 큰 편견 없는 문화가 결국에 나를 멋진 기술자로 키웠으니까.

한국에 서는 남들이 소위 말하는 전망이 없는 전공을 졸업하고, 누군가는 알고 누군가는 모르는 중소기 업에서 한 명의 직장인으로 살다가 도망쳐 나온 늦깎이 워홀러가, 부끄럽지만 누군가에게는 성공한 사업가로 인정받기까지, 사실 나한테 필요한 건 그저 응원과 편견 없는 시선뿐이었던 같아.

그래서 난 내가 받은 응원과 존경을 담은 시선을 그대로 호주와 한국에 계신 많은 분들에게 전하고 싶어.

지금도 한국뿐 아니라 호주에서 시술하는 수많은 속눈썹 아티스트 중에서는 본인의 직업에 큰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동료들이 많을 거야. 다른 직업에 비해, 우리가 하는 시술이라는 게 정말 반복에 반복이자 창의성을 크게 요구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지루함을 호소하는 동료들도 많아.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그런 무기력함이 한번 오면 어떤 열정을 갖기 어렵게 하거든. 그래서 그저 그런 기술을 가진 샵들도 정말 많아. 공장에서 손님을 찍어내듯 해내는 곳들. 그런 곳들이 많아지면 속눈썹 연장술에 대한 인식이 이보다도 안 좋아지고 기술직으로 인정받기는 더 어려워질 거야. 그래서 우리 스스로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자부심을 부러워하는 동료들이 많아. 내가 가지고 있는 기술보다도!

자부심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니 말이 좀 이상하지만 사실이니까 말할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자부심은 절대 누가 대신 심어줄 수 없었고 스스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견고한 거라고 생각하거든. 아이러니하게도, 싫고 어려운 만큼 매도 먼저 맞는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계속하면서 이 일의 전문성에 대해서 알게 되고 자랑스럽게 된 거야. 나는 아직도 유명한 뷰티션의 강의가 있다면 되도록 참석하려고 해. 남는 게 없는 것 같아도 단 한 가지라도 배울 부분은 있더라. 많은 강의를 들었고 경영과 인사에 관한 책을 읽었고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어. 아직도 이 분야에서는 배우고 발전할 부분이 무궁무진하거든.

결국에는 스스로 멈추지 않고 계속 배우고 발전하려는 자세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



-

A : 여태까지 정말 고생 많았어. 그 많은 어둠 속에서도 계속 꿈을 꾸고 앞으로 나아간 네가 친구로서 동료 이민자로서, 또 해외에서 활동하는 여성 자영업자로서 정말 자랑스럽다.

이제 네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것들은 어떤 것들이니?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줘.

-

S : 올해는 나한테 참 뜻깊은 한 해가 될 거 같아.

사실 몇 주 후면 엄마가 되거든. 엄마가 되는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지만 정말 경이로운 일이더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뱃속의 아가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니까! 이제는 슬슬 하고 있는 많은 일에 쉼표를 찍을 때가 온 것 같아. 사실 마음만 그렇지 매장에서 내 손길이 필요한 일은 매일 생길 테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엄마가 되는 준비에 집중해보려고 해.

지금의 소박한 바람은 아기 잘 낳고, 세상에 잘 적응하게 도와주면서 엄마로서 얼른 적응 마치고, 멋진 워킹맘이 되는 거야.




개인적인 바람이 있다면 내가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날에는 그저 돈을 많이 번 사업가로 평가되고 싶지 않고 이 속눈썹 연장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것.

큰 장애물 없이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꿈을 꾸고 펼칠 수 있는 무대가 호주 멜버른이었어서 정말 행복했어.

호주여서 이 모든 일이 가능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사실 내가 한국에서 이만큼 어떤 일에 열정을 가지고 노력해본 적이 있는지 되돌아보면 그렇지 않거든. 지금의 이런 열정이 한국에서 있었다면, 한국에서도 잘할 수 있었을 거야. 내가 정말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 일은 우연치 않은 기회로 찾고 난 후 스스로를 믿고 끊임없이 정진하였기에 지금 나는 이 자리에 서있을 수 있게 된 거 같아.

네가 어느 곳에 있든 간에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본인이 하는 일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한다면 그 분야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어.


모든 미용인들과 해외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는 사람들, 기죽지 말고 스스로 당당해지기를, 어둠 속에서도 꿈을 꾸는 것을 멈추지 않기를

마음으로 깊이 응원할게, 먼 곳에서.


내 호주 생활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돼서 나도 인터뷰하면서 정말 즐거웠어.

긴 글을 읽어줘서 너무 고마워!




놀러와! :-)


소피아 (개인 인스타)   :  SOPHIA_LASHARTIST

SOPHIA BEAUTY CO. (공식 인스타)   :   SOPHIABEAUTYCO


앨리스 (개인 인스타) :  ALICEIN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SUDA (공식 인스타) :  SUDAMELBOURNE  (앨리스 팀 첫 번째 레스토랑)

NEMO (공식 인스타): NEMOMELBOURNE (앨리스 팀 두 번째 레스토랑)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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