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속공예로 이민 와서 사는 이야기
한 번도 만나본적 없는 금속공예가라는 그녀의 직업.
첫 만남에서부터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는 표정.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코트라에서 워홀과 유학생의 취업을 돕기위해 주최한 작은 강연장에서였어. 호주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 멘토들이 초청받았고 영광스럽게도 나는 요식업계의 멘토로 강연을 했어. 그리고 아우디 메카닉인 상헌 오빠와 페스트리 셰프 윤희 언니와 함께 오늘의 주인공인 그녀, 쿠시도 그날의 강연자 중 한명이었지.
'제가 뭐해야 하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재미있을 거 같아서 왔떠염!' 하는 덜 떨어진 표정에 늘어진 티셔츠 쪼가리, 운동화를 꺾어 신고 있던 철딱서니 없는 나와 다르게 쿠시는 아주 단정한 옷차림에 주얼리 디자이너답게 센스 있는 액세서리를 이쁘게 하고 강연도 철저하게 준비해서 왔었어.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조용히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그녀는 참 진지하고 단정해 보였어. 튀지 않는데도 나도 모르게 눈이 자꾸 가더라.
그녀의 순서는 가장 불리한 (?) 마지막이었어.
사실 학생들 입장에서는 가장 관심도가 떨어지는 분야의 멘토여서 더 부담감이 컸을거야. 금속 공예는 호주 내에서 유학생들이 잘 택하지 않는 희귀한 전공이거든. 이민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학비가 비싸니까. 그리고 사실 금속 공예라는 분야가 요식업처럼 많은 사람들이 두루 관심 있는 분야는 아니잖아. 그러다 보니 청중들의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것 같아. 두 시간 넘게 진행된 강연의 끝자락, 저녁 식사 바로 전이기도 해서 모두 집중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 대놓고 딴짓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더라. 진짜 솔직히 말하면 속으로는 다행이다 싶었어. 내가 마지막이 아니라서. 그나마 내가 첫 번째라서 사람들이 잘 들어줘서 다행이다, 내 멘탈에 사람들이 저렇게 딴짓하고 내 이야기 관심 없어하는 것 같으면 아마 바로 주눅 들어서 아마 한마디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이 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 부끄럽지만 이기적인 나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들더라.
오랜 기다림 끝에 그녀의 강연이 시작되었어.
느릿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의 쿠시는 청중의 태도에 흔들림이 없이 아주 차분하게 강연을 진행했어. 준비한 비주얼 자료들을 차근차근 보여줘 가며 금속공예가 뭔지 관심도 없던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어. 거의 모두에게 생소한 그녀의 업계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가며 전문가답게 야무지게 멘토링을 하는가 하면 유학과 워홀, 이민을 거치며 고생했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으며 공감대를 형성했어. 엉망으로 흩어졌던 청중의 집중력은 다시 모아졌고 배고프다고 불평하고 딴짓을 하던 사람들도 어느 순간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더라. 나도 그랬어. 배고프고 지루해서 내가 관심 없는 이야기는 안 들릴 줄 알았는데 정신 차려보니까 내가 고개 끄덕이며 열심히 듣고 있더라고.
강연이 끝나고 쿠시가 만나서 반갑다며 살갑게 인사를 건넸고 그렇게 나는 그녀와 처음 대화를 나눴어.
그 날 강연했던 사람들과 우리를 섭외했던 코트라 담당자까지 한자리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지. 정말 하나도 겹치지 않는 분야에 종사하는 다섯 명의 30대 한인 청년들은 그 강연회를 인연으로 의기투합하여 으쌰 으쌰 모임을 결성했고 지금은 각자 일로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서 정기적으로 만나고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친구가 되어가고 있어. 어른이 돼서 만나면 진짜 친구가 되기 어렵다고, 마음과 달리 흐지부지되기 쉽다고 하는 말들을 떠올리며 그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야.
나는 정말 많은 면에서 달라. 나는 정말 그 어떠한 예체능 쪽에도 소질도 관심도 없거든.
미술 체육 음악 다 평균 아주 아래로 못하고 못하다 보니까 좋아하지도 않고 미술적 감각은 정말 하나도 없어. 그런데 사람 심리라는 게 그렇잖아. 내가 못하는 걸 잘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이기 마련이야.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의 삶이 궁금하고 나랑 다른 사람일수록 무슨 생각하고 살지 궁금하지.
그런 심리의 작용으로 나한테는 요새 쿠시가 가장 궁금한 사람이야. 주얼리는 머리핀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나는 매일 보석을 만지고 다듬는 쿠시의 일상이 궁금해. 매일 예쁘게 차려입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며 말도 예쁜 말만 하는 쿠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궁금해. 세수도 겨우 하고 나와서 하루 종일 뛰어다니며 주방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나랑은 많이 다를 테니까.
그리고 이 인터뷰를 통해서 다는 아니지만 나의 많은 궁금증을 해결하게 되었지. 매순간 즐거운 시간이었어.
인터뷰를 다 편집하고 죽 읽어보니 뭉클하더라. 한편으로는 짠하고 한편으로는 뿌듯하고.
부러울 것 없이 유복한 집에서 자라며 디자이너가 되고 유학을 갈 것을 꿈꾸던 어린 쿠시가 예기치 못한 폭풍우를 맞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다시 세상에 호되게 두드려 맞고 엉엉 울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지금의 멋진 금속 공예가, 주얼리로 세상과 소통하는 작가가 되기까지의 그 찬란하고 처절한 성장기가 인터뷰에 담긴 것 같아서 편집하면서 뿌듯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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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그녀가 걸어야 할 가시밭길도 꽃길도 구만리겠지만 잠시 쉬어가며 그동안의 시간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이제는 조금 천천히 걸어도 괜찮으니까!
네팔 말로 행복과 기쁨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멜버른의 한인 청년, 금속 공예작가인 쿠시가 12년 동안 어떻게 호주에서 뿌리를 내려왔는지 솔직하게 들려줄게. 이 분야와 상관이 없더라도 그녀의 워홀과 유학 이야기는 읽어볼 만할 거야. 네가 유학을 통한 기술이민을 생각한다면. 분야는 달라도 모든 업계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가며 성장하는 방법에는 다 공통점이 있더라. 분명히, 분명히 네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리라 믿어.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정말 정성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열심히 썼으니 재미있게 읽어줬으면 좋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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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앨리스) : 안녕, 쿠시! 반가워.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 좀 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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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쿠시) : 안녕!
내 이름은 쿠시라고 해. 네팔 말로 행복, 기쁨이라는 뜻이야. 한국 이름은 산영이 인데 모든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쿠시라는 이름으로 불리다 보니 이제 이게 더 편해졌어.
나는 30대 중반의 한국 여자고 호주 생활은 올해로 12년 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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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무슨 일을 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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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나는 '반짝이는 것들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야. 금속 공예로 나를 표현하고 내 작품으로 소통하는 주얼리 디자이너, 금속 공예 작가로 멜버른에서 12년째 활동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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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사실 내 친동생도 한국에서 액세서리를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어! 그래서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더 친숙하게 느껴졌나 봐. 하지만 나는 일체 액세서리를 안 하고 또 못하기 때문에 내 동생이 하는 일임에도 그 직업이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 사실 금속공예가도 처음 만나보거든. 네가 하는 일이 해외 이민자들이 흔하게 택하는 직업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 12년 차라면 꽤 어린 나이인 22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한 거잖아. 원래 금속공예가가 되는 게 꿈이었어? 어떻게 이런 직업을 알게 되고 배우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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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아니, 그건 아니야. 사실 내가 정말 되고 싶었던 것은 의상 디자이너였어.
어릴 때부터 나는 그림 그리고 옷을 만드는 걸 너무 좋아했거든. 6살 때부터 스케치북을 일주일에 한 권씩 끝냈대. 중 2 때부터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해서 서양화를 배웠지. 고 1 때 알바를 해서 처음으로 50만 원을 벌었는데 그 돈으로 공업용 미싱을 사서 밤새도록 바느질을 했어. 당연히 의상 디자인과를 진학하고 유학을 가서 멋진 디자이너가 될 거라고 생각했지. 부모님이 보기에는 내가 옷을 좋아하고 센스는 있는데 그렇다고 재능이 엄청 있어 보이지는 않았나 봐. 의상 디자인 분야는 이미 경쟁이 너무 심하니 주얼리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그때 당시에 부모님께서 종로에서 보석상을 하고 계셨어. 어릴 때 보석알로 공기놀이하고 그럴 만큼 주얼리는 나한테 친숙한 존재였어. 주얼리도 패션의 중요한 일부라고 하시는 말에 나도 혹 했어.
사실 종로에서 보석상을 하고 있다는 말에 눈치챘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모자라는 것 없이 유복했어. 아빠는 내가 어떤 꿈을 꾸는지 늘 물어보시며 크고 넓게 살아라, 세상을 다 돌아다니라고 말씀하셨고 나도 당연히 그러는 줄 알았어. 주얼리 쪽으로 진로를 생각하면서 보석 세공으로 유명한 이태리 유학을 거쳐 디자이너가 되는 나으 창창한 미래를 의심도 없이 그렸지. 그런데 피아노 하던 우리 언니가 입시를 앞두고 내가 진로를 결정할 때쯤 IMF가 터지고 부모님 사업이 망했어. 빚만 잔뜩 떠안고 폭삭 망한 거야. 그 시절 안 힘들었던 사람 찾기 힘들겠지만 예민한 시기였던 나에게는 충격이었어. 실패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님과 입시를 코 앞에 두고 꿈을 이루지 못할 상황에 처한 언니, 온실 속의 화초처럼 예쁜 꿈만 꿀 줄 알던 나... 손을 써볼 틈도 없이 가족 모두가 무너졌지.
그래도 기필코 유학을 가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속 준비를 했어. 다니던 학교는 유학 준비한답시고 몇 년째 휴학 중인데 이태리 행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친구들은 캠퍼스 생활에 취업 준비에 바쁘게 사는데 나만 미련을 못 버리고 제자리걸음을 하니까 자존감은 계속 곤두박질치더라. 이태리 유학 학비는 결코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인정할 수가 없었어. 그렇게 몇 년을 흘려보냈지. 마침내 유학이 엎어진 것을 인정하고 나는 네팔로 가서 5개월 동안 살다왔어. 쿠시라는 이름도 그때 지은 거야. 스스로를 행복, 기쁨이라고 불러야 살 수 있을 것 같을 만큼 너무 불행하고 어두웠거든. 네팔에서는 그래도 숨통이 좀 트이더라.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유학을 다시 준비할지,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어디라도 나가야겠다, 기왕 가는 거 영어권으로 가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지. 그러던 어느 날 싸이월드를 통해 어떤 유학원의 스팸메일이 하나 날아온 거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호주라는 나라 (나는 그때 호주가 영어 쓰는지도 처음 알았어.)에 내가 가진 돈으로도 유학을 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어. 유학원에서 내 포트 폴리오를 보내달라고 해서 보냈어. 시드니 멜버른 두 군데에 지원을 했는데 멜버른에서 입학 허가가 떨어졌고 이게 뭔가 싶을 정도로 빠르게 유학 수속을 밟게 되었어. 내가 원하던 나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꿈에 그리던 유학생활을 드디어 시작할 생각에 마음이 제멋대로 부풀더라.
하지만 한참 안 좋았던 집안 사정으로 인해서 내 유학은 다시 보류되었어. 1년이라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지. 이미 마음은 멜버른에 있던 나는 멜버른의 지도와 지하철 노선도들을 다 뽑아서 벽에 붙여놓고 모든 동네 이름을 달달 다 외워버렸어. 매일 멜버른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정말 멜버른에 미친 애처럼 살았지.
길고 지리한 기다림이 끝나고 멜버른에 혼자 뚝 떨어졌는데도 나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더라. 머리 속에서는 이미 익숙한 풍경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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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호주에 오기 전부터 금속 공예를 한 것은 아니었구나. 이미 진로는 정해놨지만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고 일을 하면서 디자이너가 된 것은 호주에서였네. 그래도 꿈에 그리던 금속공예 유학을 결국에는 해냈구나. 이야기를 듣는 내가 다 기쁘다. 그래서 유학 생활은 어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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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나는 영어 어학연수를 거쳐서 박스힐 TAFE이라는 곳에서 2년 과정의 금속 공예과를 들어갈 수 있었어. 낭만적인 캠퍼스 생활은 개뿔. 돈 없는 유학생들이 다 그렇듯 나도 가져온 쥐꼬리만 한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열심히 일을 해야 했지. 낮에는 수업받고 저녁에는 서빙하고 주말에는 쇼핑센터에서 액세서리를 파는 알바를 했어. 영어는 ABC 밖에 모르는 상태였는데 뭐라도 팔아야 돈을 받는다고 생각하니까 저절로 손짓 발짓 온갖 언어가 내 안에서 튀어나오더라.
그렇게 험난한 유학이 끝나갈 때쯤 나는 운이 좋게도 현지 주얼리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업이 됐어. 드디어 뭔가 이루는 것 같고 너무 좋았지. 일도 편했고 회사가 너무 좋았어. 졸업을 하면서 내 비자도 만료가 되었고 나는 이 회사에서 더 일하고 싶은 욕심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아서 다시 호주로 돌아왔어. 그런데 내가 비자를 발급받고 하는데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는지 공석이 너무 길었다는 이유로 오자마자 해고를 당한 거야. 이 회사 하나 믿고 호주로 다시 돌아온 건데!
고되고 힘들던 유학이 끝나면서 이제 제대로 된 일도 구하고 살림 좀 나아질 거라고 기대했었는데 오히려 더 험난한 워킹홀리데이가 기다리고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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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보통은 워킹 홀리데이를 하다가 돈을 모으던지 해서 유학을 하는데 너는 반대였구나! 아무래도 유학생활이라고 하면 비교적 여유 있는 이미지가 있고 워킹 홀리데이는 대부분 짠내 나지. 그래도 호주에서 배운 기술도 있고 영어도 불편하지 않게 할 수 있는 상태였던 너의 워킹 홀리데이는 좀 순탄하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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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천만에! 어중간한 기술의, 어중간한 경력의, 어중간한 영어였던 나에게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어. 회사에서 잘렸다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주얼리 쪽 일은 구해지지 않고 막막하더라. 그때부터 손에 잡히는 대로 일을 했어. 하루에 세 군데 알바는 기본이었지. 김밥 말고 청소하고 접시 닦고. 그러면서도 쉬는 날이면 주얼리 회사 문을 두드리며 이력서를 돌렸고 6개월 만에 하이앤드 주얼리(결혼반지나 다이아몬드 등을 취급하는) 공장에서 연락이 왔어. 비자 기간의 반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나는 내 전공을 살린 일을 구할 수 있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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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좋은 회사에서 편하게 디자이너로 디자인만 하던 일을 하다가 금속 공예를 하는 공장에서 일하는 건 어땠어? 두 번째 직장에서는 뭐를 배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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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이 쪽 일이 그래. 밖에서 볼 때는 화려하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별처럼 반짝이지. 하지만 그걸 만들어 내는 사람은 하루 종일 금속 검은 가루를 뒤집어쓰고 손은 항상 기름때로 시꺼멓고 거칠어. 이 쪽일에 아주 잔뼈가 굵은 알마니안 계열의 사부 밑에서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제대로 세공과 공예에 대한 기술을 배워가기 시작했어. 물론 학교에서 배웠다고 하지만 그건 아주 기본의 기본일 뿐이고 업계에 들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더라. 매일매일 욕을 먹고, 울고 불고. 다른 영어는 잘 알아듣지도 못하겠더니 욕은 다 알아듣겠더라고. 매일 새벽 1시까지 일하고 다시 새벽 6시에 출근했어. 출근해서는 공장 구석 구석를 청소하고 재떨이 씻어놓고 사장 오면 잽싸게 커피랑 담배 갖다 바치고.
그런데 어느 날 우리 사부가 이런 말을 하시는 거야.
시커먼 얼굴로 담배를 한 모금 빨아서 먼 하늘을 향해 뿜더니...
'쿠시야, 나는 호주에 딱 400불 들고 와서 이제 집도 사고 차도 사고 결혼도 하고 너무 사랑하는 아들도 있어. 그런데도 난 아마 이 담배 때문에 죽을 거야. 끊어야 되는 건 알지만 끊을 수가 없어. 이 업계는 정말 너무 빡세.'
이 말을 옆에서 듣는데 너무 슬퍼지는 거야.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아름다운 걸 만드는 우리인데 정작 우리 'MAKER'들과 우리의 삶은 하나도 아름답지 않다는게! 다이아몬드고 금이고 너무 비싸고 귀한 것을 다루다보니 언제나 신경이 날카롭고 매일 줄담배에 고통스럽게 일하는 거지.
정말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 아름다운 걸 직접 만드는 손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아름다울 수 있어야만 진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바로 다음 날부터 나는 내가 가진 제일 예쁜 옷에 구두에 풀메이크업을 하고 출근했어.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쓰고 손톱이 다 부러지면서도 힐을 신고 뛰어다니면서 일하고 담배 심부름을 했지.
그렇게 워킹 홀리데이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어.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중이라 아쉬웠지만 모아 놓은 돈이 많지 않은 상황이라 한국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생각했지. 그런데 공장의 사장이 그러는 거야. 스폰서 비자를 내어줄 능력은 안되니까 일하면서 공부를 더 하면서 호주에 더 머무르는 것은 어떠냐고 하더라. 학비가 싼 비자 연장용 학교도 많으니까. 그런데 알아보니까 나는 이미 전문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전문 학사보다 낮은 학위는 취득할 수 없게 되어있었어. 방법은 4년 제로 편입해서 유학을 제대로 하는 방법밖에 없었지. 내 자금 상황에, 내 머리에 영어로 4년제 수업을 따라가는 건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고 포기를 했어. 그런데 사장이 며칠 동안 고민하는 얼굴이더니 마침내 날 부르더라고.
첫 학기 학비 만 이천 불 (천이백만 원 정도)를 가불 해줄 테니 학교를 가고 비자를 연장해서 계속 같이 일하자.
그래서 나는 얼떨결에 유학생활을 더 제대로 이어가게 되었어. RMIT의 Fine art/gold and silversmithing (금속 공예) 학과로 편입하게 된 거야. 그때가 28살 때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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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유학을 못 가서 그렇게 울고 불고 하더니 유학을 두 번이나 하게 됐네!
참 사람일이라는 게 신기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공장에 들어가서 고생은 많이 했지만 기술적으로 모든 것을 배웠고 거칠지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서 네가 원하는 것을 결국에는 이뤄냈잖아.
두 번째 유학은 어땠니? 처음보다는 수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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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아니, 첫 유학에는 빚이라도 없었지!! 이건 정말 점입가경이 이런거구나 싶더라.
가불 한 돈을 갚느라고 6개월 내내 하루에 4시간 자면서 풀타임으로 일하고 학교 다니고 학교 공강 시간 생기면 달려가서 사장 담배 심부름하고 잔심부름하고 했어. 영어로 그 많은 과제와 학업을 따라가는 것도 벅찼지.
그렇게 열심히 사는데도 나는 계속 쪼들렸어. 계속 학비를 밀렸더니 학교 측에서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린 거야. 채권을 다루는 업체에 까지 내 기록이 넘어갔었어. 영화처럼 뭐 무섭게 쫒아다니거나 하지는 않는데 끊임없이 전화가 계속 와. 노이로제 걸릴 정도로. 그렇다고 안 받을 수도 없는 게 기록에 더 안 좋게 남거든. 꾸역꾸역 돈을 만들어서 조금씩 갚고 하다가 결국에는 정말 바닥까지 치는 순간이 왔어. 모든 힘을 다해 싸우듯이 마지막 학년까지 왔는데 지금 돈을 못 내면 학업은 물론 비자까지 취소돼서 나는 28일 안에 호주를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어. 서럽고 억울했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그때는 우울증이 너무 심하게 와서 몇 시간이고 베란다에 서서 뛰어내릴까 말까 고민하고 그랬어. 학생처에 가서 내가 정말 돈이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하는데 나한테 그러는 거야.
돈도 없는데 어떻게 유학을 왔니?
화도 안나더라. 그 말이 맞는 말이니까. 내 주제에 무슨, 애초부터 무리였어.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포기하고 그만 한국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학교 계단에 앉아서 반나절 동안 계속 울었어. 그런데 그때 마침 친하게 지내던 말레이시아 친구가 지나간 거야. 한국 문화를 좋아해서 언니 언니하고 나를 따라다니던 친구였거든. 울면서 하소연하듯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어. 한참 이야기하던 중에 그 친구가 잠깐만, 하고 나갔다가 돌아오더니 자기가 모아둔 돈이라면서 오천 불을 쥐어주는 거야. 줄 수 있을 때 다시 갚아달라면서 지금 어차피 필요 없는 돈이니 부담 갖지 말라고 하는데 할 말이 없었어.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돌려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울면서 감사히 그 돈을 받았어. 그걸로 몇 과목 신청하고 하루하루 벌어서 학비를 겨우 돌려 막기 해 가면서 마지막 학기를 마쳤어. 그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이 자리에 없었겠지. 가장 힘든 순간에 희망을 놓으려던 내게 손을 내밀어준 소중한 친구야.
지금 생각하면 그걸 다 해낸 게 용하다 싶어. 학교를 다니면서 공장에서 일하는데도 돈이 계속 모자라니까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독학으로 컴퓨터로 반지 그리는 캐드를 배웠어. 매일 공장에서 먼지 뒤집어쓰고 일하다가 가끔 시간이 남을 때는 노트북 하나 들고 주얼리 회사랑 공장들을 돌아다니면서 그 자리에서 일 주면 일하고 반지 그려주고 돈 받고 또 알음알음 디자인 주문 들어오면 만들어서 팔고. 진짜 무슨 팔려온 노예처럼 일만 했어. 죽을 것 같은데도 내가 세운 원칙 ' 나만이라도 아름다운 주얼리 같은 사람이 되겠다'는 지키고 싶어서 언제나 웃고 다녔지만 속으로는 매일매일 울음을 삼키는 날들이었어.
그래도 조금 나아지는 날은 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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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고생 엄청 했구나, 너도. 어릴 때 유복했던 것 이후로는 계속 내리막길에 힘들었던 이야기라서 언제부터 오르막길이 시작될까 궁금했어. 언제부터 나아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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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아무도 웃지 않는 검은 기운이 꽉 찬 이쪽 업계. 말 몇 마디 끝에는 꼭 싸우려 드는 날카로운 사람들. 그 사이에서 물들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웃으면서 인사하고 담배 심부름하면서 뛰어다니고 웃고 얼굴은 먼지에 시커멓고 예쁜 드레스는 매일 찢어지고 버려져고 매일 웃었어. 그러지 않으면 나도 그 검은 기운에 잠식될 것 같았거든. 물건 배달 가고 심부름 다닐 때마다 웃으면서 뛰어다니니까 어느샌가 내가 업계에서 유명해져 있더라.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 쪼끄만 동양 여자 아이. 맨날 웃는 쿠시라고 다 알고 있더라고.
그러다가 정말 멜버른에서 꽤 규모가 큰 회사의 사장에게 직접 연락이 왔어. 본인 회사 일이 많아서 하청을 나에게 주고 싶다는 거야. 컴퓨터로 반지를 만들어서 3D 프린팅 하는 일이 었는데 나한테는 너무 큰 기회였지.
인터뷰를 보러 갔는데 오히려 내가 의아해서 물었어.
하청 일을 나에게 주면 너네 회사는 손해잖아. 이런 일을 맡길 직원도 이미 많기도 하고. 나는 아직 미숙하고 경험도 많이 없는데 왜 기회를 주는 거야?
그랬더니 그 사장님이 딱 이렇게 얘기하더라고.
잠깐 정적이 흐르고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왜냐면 나는 내가 그렇게 웃고 뛰어다니며 일할 때 누구도 관심 있게 볼 거라고 생각 안 했거든. 분명히 힘들 텐데도 늘 웃는 이 특이한 동양 여자 아이를 우리 사장은 계속 눈여겨 본거였어.
그렇게 프리랜서로 일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파트타임 직원으로 입사하게 되었고 마침내 정직원이 되었어. 그리고 회사에서 스폰서십 비자를 제안해준 덕에 절차를 밟아서 영주권까지 받았어. 나 때문에 카톡까지 다운받아서 쓰실 만큼 나를 신뢰하고 예뻐해 주는 고마운 우리 남아프리카 출신 사장 두 분과 나는 아직도 함께 일하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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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와, 진짜 드라마 같다. 그래, 누가 나 같은 애 보고 있을까 할 때도 위에서는 다 지켜보고 있는 경우가 많더라. 남들은 뭐라고 하던 누가 보던 말던 나는 내가 옳다 생각하는 길을 가다 보면 어떤 정답은 나오는 거 같아.
그래서 세 번째 직장은 어땠니? 뭐를 배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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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정식으로 정직원으로 회사에 출근하니까 너무 떨리는 거야. 직원 카드 키도 받고 너무 신기하더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근도 엄청 일찍 해서 쓰레기통도 비우고 쓸고 닦고 청소부터 열심히 했어. 그러면 이 기회를 너무 감사히 생각하는 내 마음이 전해질까 하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내가 아무리 청소를 해대도 다들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소 닭 쳐다 보듯이 하고 말더라고.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지 알아주려나 싶은 마음에 퇴근하고 나서도 남아서 일하고 그랬어. 그랬더니 어느 날 사장이 소리를 뺵 지르더라.
쿠시! 전기세 나와. 집에가!
나는 내가 이렇게 회사에 애정을 보이고 성실하게 하면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았어. 나중에 동료들이랑 이야기해보니 다들 내가 그냥 청소하는 걸 특별히 좋아하는 애인줄 알았대.
업무 내에 일을 마치지 못하고 야근하는 것은 성실함의 상징이 아니고 정해진 시간 안에 업무를 마무리하지 못하는 시간 분배 능력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 내가 생각하는 직장 생활과 이 곳 호주의 문화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지.
가끔씩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이민하고 싶다고 야근과 잔업에 너무 치인다고 나한테 부럽다고 할 때가 있어. 난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해.
이 회사에서 내가 배운 건 정해놓은 시간 안에 시간 분배를 잘하고 집중력을 높여서 최대치의 능력으로 맡은 일을 마무리하고 모든 스트레스와 부담은 회사에 두고 퇴근하는 거야. 점심시간도 딱 30분 칼처럼 지키고 빨리 일 마치고 집에 갈 생각만 하지 남아서 마무리한다는 생각은 안 해.
회사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퇴근 시간 되면 집에 가서 잘 쉬고 잘 먹고 제대로 충전해서 다음 날 아침 완벽한 상태로 출근하기를 바라는 거야. 그래야 회사도 직원도 행복한 공생관계를 롱런으로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걸 이해한 후부터는 8시간 제대로 집중해서 일을 처리했어. 돌아서서 후회나 찝찝함이 남지 않을 만큼 정말 화끈하게 일하고 즐겁게 퇴근할 수 있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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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정말 하나도 모르는 분야 이야기라서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롭다. 그 쪽 일은 또 어떤 어려움이 있어? 이거 진짜 못하겠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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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일단은 이 일이 생각보다 고된 일이야. 금을 녹이고 망치로 때려서 펴는 일을 반복하니까 내 손은 남자 손만큼이나 거칠고 흉터가 많아. 작업하다가 얼굴을 다치거나 실명의 위험을 겪는 일도 많고 요새는 3D 프린터가 디자인의 많은 부분을 돕고 있다고 해도 정교한 작업이다 보니 너무 많은 시간을 집중해야 하니까 정신적 스트레스도 심하지.
이 바닥은 정말 뭐랄까, 작은 실수조차 용납이 안 되는 곳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날카롭고 예민해. 실수 하나로 여럿 잘리기도 하고 욕도 배 터질 때까지 먹는 일이 정말 부지기수야. 내 실수로 손해 본 걸 내 돈으로 막은 적도 많아. 수없이 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하나만 말해줄게.
회사에서 아주 큰 고객이 있었어. 중요한 일을 앞두고 반지를 하나 주문한 거야. 금값만 만 오천 불, 반지 가격은 소매가격으로 육만 불에 달하는 다이아몬드로 둘러싸인 반지였지. 그런 반지 같은 경우에는 가격도 가격인데 무게가 많이 나가면 손가락이 힘들어져서 최대한 가볍게 디자인해야 하거든. 정말 어렵고 정밀한 작업이었어. 그래서 며칠 밤을 새워서 디자인하고 컴퓨터로 캐드 그리고 계산을 여러 번 했는데 작은 실수가 하나 있었던 거야. 무게가 거의 두배 가깝게 나왔어. 착용하기 힘들 정도였지. 손님의 중요한 일정에 당연히 맞추지 못했고 재료값 만 오천 불만 날리고 그 큰 손님을 놓쳐버린 거야.
나는 그 날 내가 들을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을 들었어. 너 당장 저 창문으로 뛰어내려라. 너는 뇌가 없다. 등등.. 그 욕을 듣는데 화도 안 났어. 내가 사장이라도 저렇게 반응했을 테니까.
다음 날 사직서를 들고 찾아갔어. 나를 해고해 달라, 회사에 이렇게 손해를 끼친 나는 이 곳에서 일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지. 키가 이미터가 넘는 장신에 이백 킬로에 달하는 덩치의 사장이 나한테 또 고함을 지를까 봐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그때 사장이 말했어. 네가 진짜 잘못했다고 느끼고 나한테 미안하다면 이렇게 그만두면 안 되는 거라고 발전해서 내 사업이 더 잘되게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더라. 눈물이 정말 수돗물처럼 쏟아졌어. 내가 너무 펑펑 우니까 커피값 4불을 쥐어주면서 나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한 바퀴 돌고 들어오라고 하더라.
일단 너무 비싸고 부피가 작은 것들을 다루는 일이라 이 바닥에는 도난사건이 많아.
그래서 한국도 그렇고 여기도 패밀리 비즈니스가 대부분이야. 금시장은 호주도 유대인들이 잡고 있고 세공은 터키쉬나 알매니안들이 주류. 사실 나처럼 출신성분이 모호한 (?) 외국인이 발을 들이기가 쉽지 않은 게 이 바닥이야. 이유는 이 업계에서는 정말 무엇보다, 세공 기술보다도 신용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인 거 같아.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이 견물생심이라고 하잖아. 정말로 별 일이 다 있거든. 작은 다이아들을 하나하나 훔쳐서 몇십 캐럿짜리를 만들어서 도망간 사람도 있었어. 큰 다이아는 고유 넘버가 있어서 매매하다가 잡히는데 작은 다이아 같은 경우에는 그냥 쓱 하면 찾을 방법이 없거든. 사장이랑 싸우다가 열 받는다고 다이아 반지가 쫙 진열된 쟁반을 창밖으로 날려버린 사람도 있었어. 사장이 그거 잡는다고 창문으로 점프했다고 하더라. 근데 그걸 다 어떻게 찾겠어. 사람들이 집어가면 그만인데.
우리가 다루는 큰 단위가 에이포 용지 두께 정도야. 그만큼 작아서 없어지기 쉽고 정말 비싼 물건을 다루다 보니 사람을 잘 안 믿게 되고 예민해질 수밖에 없지. 처음에는 그런 점들이 많이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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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와, 진짜 재밌다. 우리도 막 비싼 식재료 훔쳐가고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다만 다이아몬드에 댈 게 아니네. 네가 일하는 분야는 단위가 정말 억 소리 나는구나. 믿고 맡겨도 되는 사람인지가 가장 중요한 게 어쩌면 당연하겠다.
그러면 반대로 진짜 이 일을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할 때는 보통 언제야? 가장 보람찬 순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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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음... 내 스페셜티가 결혼반지라 그런지 청혼을 준비하는 남자분들이 고객일 때가 많아. 그러면 나는 여자 친구에 대해서 최대한 많이 질문하거든. 어떤 사람이고 취향이 어떤지 어떤 느낌으로 디자인하기를 원하는지를 함께 상의하는 거야. 대부분의 남자들은 당최 모르고 반지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어. 그냥 무난하게 대충 잘해달라고 하는 게 대부분인데 간혹, 아주 드물게 여자 친구를 자세히 묘사하는 사람이 있어. 내 여자 친구 손가락 사이즈는 K 3/4 예요 살결은 좀 밝고 무슨 색깔을 좋아하고 옷은 어떤 느낌으로 입고... 어쩌고 저쩌고. 여자 친구를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달떠 보이는 그 표정에 정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사랑에 빠진 남자의 눈을 볼 수 있는 시간인 거지.
한 번은 여자 친구가 좋아하는 느티나무를 어떻게든 디자인과 연결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남자를 만나서 호주에서는 잘 나지도 않는 이 느티나무를 찾아서 삽 하나 들고 헤매서 돌아다닌 적도 있어. 고생 끝에 느티나무를 찾아서 반지에 담아주었지. 잎에다가 뜨거운 금물을 부어서 무늬를 찍고 결혼식이 이뤄지는 달의 탄생석을 박아서 새롭게 하나로 태어난다는 의미를 담았어. 안쪽에는 남자의 절절한 사랑고백을 그리스 말로 새겨 넣었고 그 남자는 그 반지로 사랑하는 여자 친구에게 청혼을 했어. 이럴 때는 보람을 넘어서 희열을 느껴. 삽을 들고 산으로 들로 매일 뛰어다닌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이 내가 하는 일이 좋아지는 거야.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어야 하는 엄청난 임무를 맡은 거잖아. 내가 반지를 만들어야 그들이 결혼을 할 수 있다고! 결혼식 아침에 겨우 만들어서 달려가서 전해준 적도 있다니까. 사명감에 불타오를 수밖에 없어.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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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와, 진짜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 더 이상 로맨틱할 수 없을 정도로 로맨틱한 직업이다. 네가 어떤 직업의식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사명감과 보람을 느낄만하네. 멋있어!
자,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게. 쿠시 너는 회사 일 이외에서도 주얼리 디자이너로서 대회에서도 좋은 성적 내면서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어. 요리나 바리스타 대회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쪽 업계의 대회 이야기는 생소해. 어떤 작품으로 어떤 대회에서 수상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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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한 3년 전 이야기야. 이 쪽에서 가장 유명한 캐드 프로그램을 만든 회사가 프랑스에 있거든. 그 회사에서 주최한 주얼리 디자인 대회가 열린다고 이메일이 온 거야. 주제는 '주얼리로 너의 집을 표현하라' 였어.
관심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런 곳에 내 작품을 선보이기에는 너무 애송이 같다는 생각에 그냥 넘겼지. 사장이 나와 내 상사를 부르더니 둘이 한번 나가보면 어떠냐고 제안하더라. 그래서 고민 끝에 신청을 하게 되었어. 떨어지면 뭐 어때. 그것도 경험이니까.
그런데 막상 하려고 보니 주제가 너무 어려운 거야. 주얼리로 나의 집을 표현하라니!
어릴 때도 이사를 하도 많이 다닌 데다가 내가 호주로 올 때쯤 다른 가족들도 다른 나라로 이주를 했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 집도 없고 가족도 없거든. 호주에서 일하면서 세금 내고 살고 있지만 여기 영주권도 없고 언제든 쫓겨날 수 있어. 내 나라도 아니고 집도 아니야.
아니 그러고 보니 내 집은 대체 어디지? 하는 질문만 계속 맴돌았어. 그때 한참 호주에서 난민을 수용하는 문제로 뉴스가 시끄러웠거든. 뉴스를 보면서 나도 저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러다가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어. 집이라는 곳은 너무나도 따뜻한 공간이잖아. 나라는 사람을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사랑이 있는, 내가 돌아가야 할 곳이 바로 집이라는 곳이지. 그리고 나는 역설적으로 `그 집이라는 게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야겠다 싶었어. 얼마나 그리운지, 얼마나 가고 싶은지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진 거야. 낯선 외국에서 떠도는 나와 지구 반대편에서 이민생활 중인 나의 가족들과 내 주변 친구들 - 숱하게 듣는 고달픈 이민자의 이야기들과 따뜻하고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아서 목숨까지 거는 난민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집이 아니라 없어서 더 그리운 그런 곳의 느낌을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
집이 없기 때문에 집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었는데 돌아갈 집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들도 있다는 걸 깨달았지. 그렇게 집을 찾아, 본향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 마음을 담아서 큰 지구본에 세계 지도를 말아 올려서 목걸이를 만들었어. 대륙 가진 느낌들을 담아 색깔이 다른 보석을 박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최대한 주얼리에 담았어. 마감 전까지 정말 근 한 달 동안은 의자에서 아예 생활하면서 작업하다가 자고 작업하다가 자고 했어.
마감을 마치고 회사에 갔는데 나와 같이 출품한 상사가 잘했냐고 물어보면서 서로 작품을 보여주자는 거야. 혼신의 힘을 다하기는 했지만 내 작품은 상사의 작품에 비하니 너무 초라한 것만 같았어. 자신이 없어지더라. 저런 사람들이 상 받겠지 하는 마음에 소심해져서 결과 날도 기다리지 않았어. 한 달 정도 지났을까 주최 측에서 연락을 해오더라. 오세아니아(호주, 뉴질랜드, 피지 등등) 주에서는 유일하게 나만 입상을 한 거야. 첫 대회에서 세계 3위의 성적을 거뒀어. 믿어지지가 않더라. 덕분에 인터뷰도 많이 하고 내 작품도 상품화가 되게 되었어.
그 이후로는 내가 할 수 있는 크고 작은 대회가 있다면 도전해보고 있어. 나 까짓 게 감히 넘볼 수 없는 높은 문턱이라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넘어보고 뛰어내려봐야 깊이를 알 수 있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걸 깨달은 거지. 여전히 주얼리로 할 말이 너무 많은 나는 그래서 일 년에 서너 개의 대회를 계속 준비해서 나가는 중이야. 첫 도전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일단 해봐야 안다는 것을 배웠거든.
내가 얼마나 더 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 한계를 더 보고 싶어,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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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우리가 직업과 이민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이민'이라는 단어를 언급을 안 할 수가 없는 것 같아. 금속 공예사인 네가 생각했을 때 이민과 관련하여 너의 직업의 전망은 어떻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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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일단 결론만 말하면 주얼리 세공은 독립 기술이민 (스스로 학력과 경력을 쌓아서 점수제로 신청하는 방법)이 가능한 이민 특화 직업은 아니야. 일단 의식주에 관련된 필수요소가 아닌 사치품이기 때문에 경제가 좋아지면 가장 먼저 올라가고 경기가 안 좋아지면 제일 먼저 시장 규모가 축소되는 업계거든.
주얼리 세공은 지금은 고용주가 스폰서를 서주지 않으면 이민이 되지 않아. 아니꼽고 치사하지만 이민을 위해서는 나를 스폰서 해줄 고용주의 의사와 의지가 가장 중요하지. 직원 한 명을 스폰서 해준다는 게 보통 복잡하고 돈이 많이 드는 일이 아니거든. 그래서 결국에는 내 경쟁력을 고용주에게 증명받는 수밖에 없어. 호주 내에서도 일하려는 사람은 넘쳤는데 왜 굳이 너를 힘들게 스폰서를 해줘야 하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는 게 중요한 거지.
나는 처음에는 영주권이 뭔지도 몰랐고 그래서 영주권을 목적으로 호주에 있던 적은 12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어. 대신 내가 꼭 이 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면 비자는 따라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이 곳에 필요할 이유들을 만들려고 노력했지. 회사에서 받는 연봉을 일하는 시간과 날짜 수로 나눠서 하루에 내가 최소한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반지수를 계산해서 하루 업무량을 스스로 세웠어. 혹시라도 내가 만족할 만한 작업량을 못 채우면 집에서라도 완성해 오고 사장이 요즘 관심 있어하는 디자인은 뭔지 살피다가 직접 길거리로 나가서 사진 찍고 시장 조사해서 시키지도 않은 보고서를 책상 위에 올려두기도 했어.
내가 사장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고용주 입장에서 주는 봉급만큼 이익을 창출해 내지 못하는 직원은 데리고 있기 어렵다고 생각했거든. 내 시간에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깝지 않다고 느끼게 만들고 싶었어. 내 귀중한 시간을 사장이라는 고객을 상대로 판매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 거야. 함께 잘되야하는 사이, 비즈니스를 같이 하고 함께 성장하는 파트너라는 자세로 일했던 것 같아. 영주권은 누군가가 내가 꼭 필요하다면 (고용주도, 호주라는 사회도) 자연스럽게 주겠거니 하고 생각했어. 아마 그런 자세가 사장한테 어필했던 것 같아. 이민을 반드시 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민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 군더더기가 없이 일에만 더 집중하면서 더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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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이민과 상관이 없이 본다면 금속 공예라는 직업의 전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금속공예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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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내가 전문적으로 하는 주얼리 세공은 금속 공예에서도 작은 영역이야. 그만큼 광범위한 공예분야인 거지. 내가 경험한 것은 아직도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고 배워야 할 것이 산더미인걸.
네가 만약에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진짜로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한번 도전해봄직한 일인 것 같아.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만큼 배신 없이 절대적인 작품이 나올 수가 있거든. 일단 우리가 사용하는 재료들 자체가 영원을 상징할 만큼 오래가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만든 작품을 오래도록 소중하게 다뤄준다는 매력이 있어. 내 노력이 두고두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는 거지. 내가 만든 반지로 사랑이 표현되고 영원을 약속하며 두 남녀가 하나가 된다는 것도 너무 아름답지 않아?
3D 프린팅이라는 혁신이 이 업계를 뒤집었듯이 앞으로도 재료와 기술은 계속 발전할 거야. 우리의 일은 이렇게 급격하게 변해가는 현대 기술과 문명에 절대 변하지 않는 인간의 감정을 담아서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이야. 처음 일을 배울 때는 정말 힘들겠지만 지나면 지날수록 빠져들게 될 거야.
알면 알수록 아름답고 흥미로운 직업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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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진짜 궁금해진다. 쿠시 너에게 주얼리란 어떤 의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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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주얼리는 나에게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 같은 거야.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나를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 예술가는 결국 무언가를 세상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사람이잖아. 본인이 가진 메시지를 다양한 예술이라는 형태로 표현해내는 거지. 나도 내 작품을 통해 세상과 이야기하고 있어.
6년 전에 졸업 전시회를 할 때 나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라는 아름다운 한국말을 모티브로 해서 작품을 만들었어. 내 검은 긴 머리를 자르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부모님의 하얀 머리와 함께 엮어서 반지와 목걸이를 만들어서 전시를 했지. 생소한 재료 때문인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물어보더라. 한국에 있는 그 표현을 들으면 다들 감탄하는 거야. 의미가 너무 아름답다고 하며. 그때 나는 내가 영어로 한국말로 하는 어떤 말보다도 '주얼리'가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매력적인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 그게 나에게는 주얼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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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여태까지 정말 고생 많았어. 지금까지 너의 호주 생활을 돌아보니 어땠어? 짠내 풀풀 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다 이겨내고 이 곳에 오롯이 서있는 너 스스로를 대견스러워 할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너를 안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은 만큼 말이야.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이야. 누구보다 열심히 꿈꾸며 달려온 이 길의 중간에 서서 쿠시 네가 앞으로 네가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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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 회사에서는 자리매김을 하였고 호주 사회에서 이민자로서 내 몫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어엿한 어른이 되지는 못한 것 같아. 나는 아직 실수투성이에 욕 들어먹을 일도 종종 있는 사회 초년생이니까. 앞으로 갈 길은 멀겠지. 내가 앞으로 할 실수도, 먹을 욕도 많이 남았겠지만 아무리 잘못해도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걸 보여주면 다시 기회를 주는 사회기 때문에 호주에서 일하면서 살만한 것 같아.
회사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여유가 좀 생겼어. 틈이 날 때마다 어린 날 의상 디자이너를 꿈꾸며 드레스들을 스케치한 그림들을 모아서 주얼리를 더하는 작업들도 하였고 내친김에 개인 브랜드 KUSI도 론칭해서 나만의 제품을 제작하기도 했어. 작년에는 그렇게 소망하던 나만의 작은 공방도 열었지! 작지만 나에게는 원더랜드 같은 멋진 곳이야. 원하는 것은 다 만들 수도 있고 꼭 잘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 지칠 때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곳.
개인 적으로 의뢰가 들어오는 청혼이나 고백을 위한 반지 , 자신만의 특별한 주얼리 등은 다 이 곳에서 만들어. 주변 사람들이 지칠 때는 와서 그림도 그리고 공예놀이도 하며 쉬어가기도 하지. 내가 너무 사랑하는 곳이야.
지금 돌아보니까 포기할 수도 있었던 순간들이 여러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주위에서 손을 잡아서 조금이라도 나를 일으켜줬기 때문에 이 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 나를 믿고 도와준 그 인연들에게도 감사해.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던 웃고 아름다워지려는 노력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어. 이제부터 시작이지만 여태까지 잘 싸우고 이겨왔으니 그렇게만 한다면 앞으로도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어.
앞으로의 꿈이라는 질문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벅차고 두근거린다. 지금껏 그랬듯이 나는 앞으로도 계속 주얼리로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작가로 살고 싶어. 지금처럼 내가 만든 작품으로, 그리고 전시회로, 책으로, 대회로, 사업으로, 강의로...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나의 목소리를 높여서 아름다움과 사랑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나의 꿈이야.
거친 사막같은 업계에서 홀로 이방인으로, 아무도 봐주지 않는 작은 동양 여자 아이로 살던 나는 지금은 어엿한 주얼리 공예 작가로 멜버른에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중이야. 하루가 다르게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걸 느끼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느껴. 그걸 동력삼아서 앞으로도 나는 꿈꾸는 걸 멈추지 않을거고 매일 조금씩 발전할 거야.
기름때와 금속 먼지로 언제나 더럽고 거친 손으로 조물조물, 내가 만들어내는 반짝이는 아름다운 것들로 어떤 이야기를 도란도란 이어 나갈지 앞으로도 기대 많이 해줘!
긴 이야기 잘 읽어주어서 너무 고마워!
만나서 너무 반가웠어.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